< #6. 검귀(劍鬼) 11-1 >
"성문에도 병사가 없는 건 당황스럽군. 대놓고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게 아닌가?"
류는 혀를 차며 조용히 말을 뱉었다. 곁에는 뱀눈이 상인인 척 말에 타고 거들먹거리고 있었고 말고삐를 잡은 류는 천상 그 하인이었다.
허름한 천을 두건 삼아 가려 얼굴을 숨겼다. 게다가 머리 위에는 대나무를 엮은 작은 삿갓을 썼다. 구부정한 등에 낮은 자세. 남이 보기엔 천생 남의 밑에 빌어먹는 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게요. 들어오자마자 한바탕 할 줄 알았는데, 대장님 말대로 조용하군요."
"예상은 했지만, 너무 대놓고 이러니 맥이 빠지는군."
잔뜩 긴장한 마음을 풀고 주변을 낮은 눈매로 훑어보니 병사들은 멀찍이 몇 명만 보일 뿐이었다.
"아저씨, 이거 받으세요."
어느 꼬마가 와 류의 손에 살며시 하얀 두건을 쥐여주려 했다. 류는 두건을 살짝 내려 하얀 이빨을 보이며 웃으며 대꾸해줬다.
"난 필요 없는데······. 이것 보렴."
"아, 백련산 사람이구나. 알았어요."
품 안에서 하얀 두건을 슬며시 보여주자, 그제야 꼬맹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사람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류는 재빨리 꼬마의 손목을 잡고는 궁금한 걸 물었다.
"사람들이 많이 받아가니? 좀 걱정돼서 말이야."
"무슨 걱정을 하세요. 거절하는 사람 못 봤어요. 지금 광장에 모이는 사람은 모두 한편이에요. 그리고······."
꼬마는 조용히 류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백련님이 고람을 해치운다는 소문이 있던데. 진짜죠? 그렇죠?"
꼬마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렇다'라고 대답하라고 강요했다. 류는 한껏 기분이 오른 꼬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주머니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 손에 쥐여줬다.
"기대하렴. 어쨌든 고람 녀석은 오늘 보는 해가 마지막일 거야."
류가 하늘을 쳐다보자, 꼬마는 따라 고개를 들었다. 반짝이는 해를 잠시 노려보듯 보던 꼬마는 이마에 깊은 주름을 만들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면 수고하세요. 전 바빠서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꼬마는 골목을 누비러 달려갔다. 멀찌감치 녀석이 건네는 두건을 받아드는 사람이 보였다. 병사 중 하나가 그걸 보고서도 짐짓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시킨 대로 일 처리는 잘됐군요."
"그럼요. 저놈 말고도 한 열댓 명이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게다가 좀 있으면 광장에 술 동이가 날라질 거고요. 그런데 술이 돌면 예상 못 한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까요?"
류는 별말 없이 그냥 웃었다. 키득거리며 한참을 웃다가 조용히 말했다.
"예상 못 한 일들이 벌어져야죠. 준비를 많이 했지만, 아직 우리가 지고 있는 싸움입니다."
정색한 류의 말에 뱀눈은 착잡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
"저게 뭐냐?"
삼삼오오로 모이던 사람들이 이제 군중이라 부를 만큼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장막이 처진 곳에 자리한 고람이 주변을 바라보다 경비대장에게 넌지시 물었다.
"누군가 술을 가져다 놨습니다. 동이에 가득 든 술에다가 바가지 하나를 띄워놓고 말입니다. 어떻게 치우라고 할까요?"
경비 대장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고람이 가리킨 곳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고람은 한숨 한번을 쉬고는 놔두라 말했다.
'좀 장엄하게 치러야 하는데. 그래야 사람들 기억에 남을 텐데 말이야. 이건 장이 열린 저잣거리 같구나.'
고람은 백련이 준비한 줄 알고는 못마땅했지만, 그냥 놔두라 한 것이다. 아니 잠시 후 좀 더 술과 먹을 것을 풍족히 풀라고 지시했다.
'이왕 벌어진 것이니 흡족하게 치러야지. 그래야 민심도 좋게 볼 것이다.'
"자, 그러면 시작하지."
이리저리 술과 음식이 돌기 시작하자, 고람은 경비 대장을 재촉했다. 하늘을 쳐다보니 멀리 구름이 끼기 시작하는 것이 좀 있으면 비가 올 듯했다. 아들의 대관식을 비 때문에 망치는 기는 싫었다.
'자, 그러면 악역을 완성해볼까?'
경비 대장이 병사들과 함께 오늘 처형할 죄인들을 데리러 가자, 고람은 일어서 단위로 올랐다. 즐겁게 달아오르던 광장에 침묵이 서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도 고람은 별 상관없이 입을 열었다.
"하주의 백성들이여. 오늘 이리 많이 모였으니, 죄인들의 처형에 앞서 알릴 것이 있다. 모두 알고 있을 테니 길게 미사여구를 붙일 생각은 없다. 바로 세금 문제다. 조정에서 송과의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세금을 배로 올리라 하였다. 그러니 다음 주부터는 그렇게 걷을 것이다."
사람들은 조용히 '우우' 거리며 반항하기 시작했다. 소리는 조금씩 커져만 갔다. 죄인들을 끌고 오던 경비 대장은 군중의 반응에 소스라치게 놀라 병사들을 단 주변으로 급히 세웠다. 그리고는 야유를 즐기듯 비웃으며 주변을 내려다보는 고람에게 달려가 조용히 귓속말을 건넸다.
"뭐 하시는 겁니까?"
"뭘? 백성들에게 얘기한 것이지."
"성문도 막지 않아서 백련산 놈들이 숨어들었을 테고. 백성들도 술을 들이켜 잔뜩 흥분했는데. 그렇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성문 쪽 병사들 데리고 올 테니 어서 장막 쪽으로 내려가십시오."
경비대장은 고람과 백련의 일을 모른다. 오늘 고람이 죽기로 작정한 것도 모르고, 자신도 백련의 칼에 죽어야 할 운명이란 걸 모른다. 병사들도 반절은 죽어 나갈 것이다. 잔치에는 환호성과 피가 필요하다. 이 의식의 마무리에는 고람의 피가 필요했다. 그러니 자극하는 것이다. 분노가 더 커질수록 백련에 대한 환호가 더 커질 것이다.
경비 대장은 주변의 반응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쳐다보며 가늠해봤다. 고람이 허락한 스무 명의 병사와 주변을 둘러싼 오백 명이 넘는 성난 군중들. 아직은 해볼 만하다.
"병사 부르겠습니다."
"안되네."
고람은 단호히 말을 끊고 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경비 대장은 땅을 거세게 차고는 병사들에게 죄인을 올리라 했다. 어서 피를 터트리고 사라지는 게 그나마 최선이라 생각된 것이다.
단을 내려가는 고람이 잠시 멈춰섰다. 끌려 올라가는 야율모의 얼굴을 한참을 보았다. 복잡미묘한 얼굴의 변화가 우스웠다. 그는 야율모를 올리라 하고는 장 씨의 곁에 다가가 귓속말을 던졌다.
"어디, 류가 구하러 온 것 같습니까?"
"아니 날 구하지는 않을 것이니 꿈은 깨라. 하지만 네놈 목은 가져갈 것이니 목을 깨끗이 닦고 매일 밤 기다리도록 해라. 매일 겁에 질려서 말이야."
고람은 침을 튀겨가며 성난 말을 뱉는 장 씨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이 한참을 낄낄대며 웃었다. 곁의 병사를 시켜 장 씨의 입에 재갈을 물리라 명하더니 얼굴에 튄 침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어디 주변에 선 병사들의 얼굴을 훑어보고 있나?"
고람의 말에 장 씨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왜? 자넬 도울 고려인 병사들이 어디 있나 보는 게 아닌가?"
장 씨의 눈이 한껏 커졌고 입에서는 무어라 고함을 외치려 했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메아리일 뿐이다.
"이곳에 고려인 병사는 원래부터 없었네. 내가 고려말에 능숙한 놈을 시켜서 미끼를 던진 거지. 너무 세력이 기울면 포기할지도 모르니까 희망을 준 거야. 그래야 용기를 낼 테니 말이야."
장 씨는 몸부림치며 달려들려 용을 써봤지만, 병사 둘이 어깨를 짓누르자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잠시 그 꼴을 내려다본 고람이 차갑게 말을 내뱉고는 단을 마저 내려갔다.
"물론 자네 목을 칠 때 고려인인 척하는 병사들이 달려는 들 거야. 다만 자넬 구하는 게 아니라, 달려든 류를 감싸겠지만 말이야.“
- 작가의말
바깥이라 퇴고를 못했습니다. 저녁에 한번 손보겠습니다. 그럼 꾸벅~~
덧) 퇴고해서 올렸습니다. 바뀐 내용은 없습니다. 다시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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