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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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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265
추천수 :
3,417
글자수 :
1,991,958

작성
22.11.2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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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9
글자
20쪽

올드 아일랜드(6) - 전달꾼

DUMMY

#1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당연히 해야지!”


철통같은 경호.. 라기엔 지나친 압박 경호에 숨이 턱 막힌다.


칼리프라는 마법사를 만나고 돌아온 숲에서 난 떨어졌던 일행과 다시 합류했다. 그리고 헤이카는 그날 이후 내 옆에 딱 들러붙어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시리아에서 납치됐을 때의 과잉보호가 떠올랐지만, 상황만 보면 그때가 훨씬 나았다. 거기선 단순히 헤이카 곁에 붙어있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


식사를 위해 잠시 휴식에 들어선 우리였지만 나와 헤이카 주변엔 공업의 특수팀 ‘크롬벨’ 의 대원들이 빈틈없이 벽을 치고 있었다.

심지어 이들은 1차 방어선에 불과했다. 2차 방어선으로 남은 크롬벨 대원들이 산개해있고, 마지막 3차 방어선은 자리만과 콥스 바탈리온, 그리고 노페이스의 나머지 팀원들이 주변 경계를 맡았다.


이 갑갑한 압박 경호 속에서도 헤이카는 익숙하다는 듯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있었다.

그때, 모닥불 위에 놓아둔 군용 반합에서 연기가 푹푹 새어나왔다. 헤이카가 눈을 반짝였다.


“다 됐나 보다!”


헤이카는 재빨리 반합 뚜껑을 열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안쪽으로 새빨간 양념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가져온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워도 될 텐데, 헤이카는 굳이 요리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래 봤자 이런 야외에서 할 수 있는 요리는 한정적이었고, 자연스레 메뉴는 스튜가 되었다.


“이게 무슨.. 뭐죠?”

“헤이카 특식.”


헤이카는 작은 수저로 양념 안에 든 거무튀튀한 덩어리를 퍼올렸다. 그러더니 그걸 자기 입으로 후후 불고는 내 입으로 직행했다.

먹는 걸 가리지 않는 나였지만 이건 당최 무슨 음식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회장님이 직접 떠먹여 주는 음식을 마다할 수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그 덩어리를 입에 넣었다. 맵고, 짜고, 쓰고,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향에 당장에라도 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헤이카가 보고 있었다. 내 입에서 ‘맛있다.’ 라는 소리를 기대하는 얼굴로 말이다.


“맛있네요.. 네..”

“다행이다. 흐흥.”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헤이카는 그 ‘특식’ 을 잘도 먹었다. 자기가 만든 음식이 이상하다는 걸 느끼질 못하는 건지, 원래부터 이런 별난 맛을 즐기던 건지.


“그래서? 정말 숲에서 길을 잃기만 한 거야?”

“예.”


난 숲에서 마법사를 만났단 얘기를 아직 헤이카에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당분간은 숨길 생각이다.


일단 그 마법사를 만난 얘기를 하려면 내 백사병 증세가 심해졌다는 것도 설명해야 하는데, 그런 일로 헤이카에게 부담을 주고 싶진 않았다.

만약 헤이카가 내 병세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녀의 성격상 당장 이 섬에서 날 내보낼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 과잉 경호만 봐도 그렇다.


따지고보면 목숨이 걸린 일이니 결코 사소한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이번 올드 아일랜드에서의 일정은 추후 공업의 미래를 크게 바꿀지도 모른다.

이미 크루아틀의 침공으로 황제 기사를 만나러 간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이 이상의 변수를 만드는 건 위험했다.


“다행이네. 보통 이 숲에서 길을 잃으면 열에 아홉은 빠져나오지 못하는데.”

“운이 좋았죠. 그보다 머스칼은 어떡하죠?”

“아, 맞아. 크루아틀한테 잡혀갔댔지.”


잡혀갔다기 보단 꼬챙이처럼 꿰여서 끌려갔으니, 상식적으론 죽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하지만 역시 머스칼은 머스칼이었다. 헤이카는 머스칼이 당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도 딱히 당황하진 않았다.


“크루아틀이 머스칼의 천적이긴 해도 머스칼을 죽이는 건 불가능해. 한동안 무력화에 집중할 거야.”

“크루아틀은 첫 번째가 머스칼. 두 번째가 황제. 그리고 제가 세 번째랬어요. 자기 전쟁에 가장 성가신 상대를 먼저 처리하려는 것 같습니다.”

“짐승치고는 상당히 이성적이네. 자기 힘을 과신하지도 않고. 제대로 된 판단이야.”


헤이카는 입에 작은 숟가락을 물고 말했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 ‘걱정’ 이라는 두 글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어떻게 하시게요? 황제 기사랑 동맹을 맺기도 전에 크루아틀이 난입해버렸으니 황제까지 당해버리면..”

“황제가 당했으면 진작에 널 잡으러 오지 않았을까?”

“..그러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숲을 빠져나와 올드 아일랜드의 왕도(王都)라 불리는 ‘론델카니움’ 의 외곽 평원이다.

황제 기사는 론델카니움에 있는 거대한 왕성에 머무르고 있으니, 사실상 목적지는 코앞에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왔는데도 크루아틀은커녕 놈의 수인병조차 코빼기도 안 보였다.


“클레멘타인. 주변 상황은?”


헤이카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대원 중 한 사람에게 물었다. 그러자 검은 마스크를 쓴 여자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현재까지 크루아틀의 병력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렇지? 그게 뜻하는 게 뭘까?”

“크루아틀이 황제 기사를 잡지 못했다?”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헤이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거야. 크루아틀이 예상외로 황제 기사에게 고전했다는 뜻이지. 우리 여기까지 오면서 크루아틀의 수인병은 한 번도 못 봤잖아?”


설마 퇴각했나?

성가신 황제 기사를 잡으려고 올드 아일랜드를 자신만만하게 침공했다가 역으로 격퇴당해 냅다 도망쳤다고 본다면 지금 상황이 얼추 들어맞는다.


아무리 상성이라고 해도 머스칼이 힘도 못 쓰고 당한 크루아틀인데, 칼 든 미치광이 기사들이 정말로 이길 줄은 몰랐다.

역시 올드 아일랜드를 아군으로 두고자 한 내 생각은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왕도 내부로 들어가면서 피해 상황을 살펴보자. 아무리 황제 기사가 크루아틀의 침공을 견뎌냈다곤 해도 피해가 아예 없진 않을 테니까. 경우에 따라선 교섭 카드가 될 수도 있어.”


어느새 싹 비운 반합 뚜껑을 닫은 헤이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그에 맞춰 크롬벨 대원들도 재빠르게 무전을 치며 이동 준비를 시작했다.



...



헤이카의 말대로 왕도의 안쪽으로 갈수록 거주지역은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중세 배경의 마을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만 같은 허름한 마을들.

이런 마을에 강철 도시 수준의 내구성을 기대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고, 애당초 그 짐승들은 강철 도시조차 쓸어버리는 놈들이다.

이깟 마을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왕성이 가까워질수록 피해 규모 또한 커졌다.

처음엔 단순히 마을 건물들이 무너졌을 정도라면, 안쪽은 지면에 거대한 크레이터(crater)가 생기거나 흉흉한 발톱 자국, 흩뿌려진 피가 선명했다.

그 위로 기사와 짐승들의 시체는 서로 뒤엉켜 무질서하게 흩어져있었다. 얼마나 큰 격전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민간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없었는데, 그놈의 약자 수호에 목숨을 기사들이니 주민의 피난을 가장 우선시한 덕분일 거다.


하지만 올드 아일랜드는 추운 지역이다. 이런 곳에서 보금자리를 잃는다는 건 생명으로 직결되는 문제다.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올드 아일랜드의 피해는 심각한 수준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올드 아일랜드의 피해가 클수록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도 커진다.


아무리 외부의 것들을 거부하는 올드 아일랜드라도 당장 주민들이 얼어 죽게 생겼는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거다.

여기서 우리 공업의 기술과 자원을 지원해준다면 그 황제라도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약자수호야말로 바로 기사들의 덕목이니까.


그렇게 망가진 마을 몇 개를 지나 우린 왕성 입구에 도착했다.

왕성을 둘러싼 높은 성벽 일부는 형편없이 무너져 내부로 향하는 길이 훤히 뚫려 있었다. 그 앞을 갑옷 차림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박살 난 성문 앞에도 기사들이 쭉 깔린 상태였다.


기사들은 우릴 보자마자 가장 먼저 검을 뽑으며 위협했다. 뒤숭숭한 무장 집단이 쑥대밭이 된 왕도에 갑자기 나타났으니 그들이 경계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클립스 공업에서 나왔어요. 황제 폐하를..”

“지나갈 수 없습니다.”


헤이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얀 갑옷을 입은 기사가 앞서나오며 말을 끊었다.

투구에 달린 붉은 깃을 길게 늘어뜨린 그는 날이 넓적한 롱소드를 쥐고, 반대편 손에는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은빛 방패를 가진 기사였다.


“돌아가십시오.”

“저흰 황제 폐하와 만나기로 했어요.”

“누구의 허락을 맡으셨습니까?”

“그건..”


헤이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내게 눈을 마주쳤다.


“그 애는? 헤카테였던가.”

“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헤카테를 그 마법사의 집에다 두고 나왔었다.


우리를 데리러 온 건 헤카테였다.

그러니 헤카테가 없는 지금, 우리가 황제를 만나러 왔다는 걸 증명해줄 사람이 없다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그 페이라는 친구는요..?”

“크루아틀이 나타나자마자 훌쩍 가버렸어. 그리고 페이는 올드 나이트가 아니라 만약 여기 있었어도 우릴 들여보내 줄 순 없을 거야.”

“...”


결국 헤카테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녀석을 되찾으러 그 숲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며, 녀석이 아직 그 마법사와 함께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기사는 길을 비켜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돈을 쥐여준다고 넘어올 놈도 아니고.


그렇게 고민하는 동안, 성문 안쪽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남자가 보였다.

새까만 옷에 중절모 같은 걸 푹 눌러쓴 남자는 까맣게 칠한 입술과 창백한 피부가 돋보이는 특이한 인상이었다.


기사들 뒤에서 말을 멈춘 그는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게임에서나 보던 두루마리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전달꾼..?”


우릴 막아서고 있던 하얀 기사가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전달꾼이라 불린 검은 옷 남자는 기사들의 시선을 받자 우뚝 멈춰 스크롤을 쫙 펼쳤다.


“황제께서 말씀하신다!”


그의 한 마디에 갑자기 기사들이 우르르 몸을 낮췄다.

한쪽 무릎을 꿇고, 반대편 무릎은 세운 채 뽑은 검을 지면에 내리꽂은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헤이카 미켈런과 그 일행을 왕성까지 극진히 모셔라.”

“그리고 다시 한 번 강조하신다. ‘극진히’ 라고.”


전달꾼은 한 손으로 손목을 튕기듯 휘두르며 스크롤을 단번에 접었다. 그리곤 품 속에 집어넣고 고개를 숙인 기사들을 지나쳐 우리 앞에 도달했다.


그가 모자의 앞쪽을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손은 바깥으로 우아하게 뻗으면서.


“헤이카 미켈런. 전달꾼 페드로라고 합니다. 폐하의 어전까지 모시겠습니다.”


헤이카와 난 서로 눈을 마주치고 끄덕였다.

기껏 저쪽에서 먼저 만나주겠다고 하는데, 사양할 이유는 없었다.



#2


전달꾼은 자신이 탄 말을 제외하고도 다섯 마리의 말을 끌고 왔다. 황제가 손님들을 태우라고 함께 보낸 말이었다.


갈기에서부터 윤기가 줄줄 흐르는 다섯 마리의 명마(名馬). 올드 아일랜드의 명마는 이름난 대부호들조차 구하지 못해 안달인 것들인데, 그런 명마가 다섯이나 나타난 것이다.


헤이카는 기세 좋게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익숙하다는 듯 고삐를 쥐고 말을 몰았다.

정작 난 그 옆을 두 다리로 걷기만 했다. 표정은 무덤덤하게 연기하고 있지만 저런 명마를 타볼 수 없다는 게 속이 쓰렸다.


내 인생에 승마는 멀고도 먼, 정말 무관계한 스포츠다.

바로 앞에 엄청난 명마가 있어도 타고 다닐 기술이 없다. 별다른 수가 없었다.


“같이 탈래?”


실망한 내게 넌지시 말해보는 헤이카였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타고 싶다. 그래도 헤이카랑 같은 말을 타는 건 겉보기도 그렇고,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새로운 버킷 리스트를 썼다. 크루아틀과의 전쟁만 끝난다면 곧바로 승마부터 배울 거다.


“제 쪽에 타셔도 됩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헤이카의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사무엘이 말했다.

난 인상을 팍 쓰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랑 같이 타는 건 더 최악이다.


“됐어요. 그런데 에이전트가 승마도 배웁니까?”

“아뇨. 취미로 잠깐 탔습니다.”

“그러시구만..”


헤이카와 사무엘. 두 사람을 제외하면 일행 중 말을 탈 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남은 명마들은 등 위를 휑하니 비워두고 전달꾼의 옆을 걷고 있었다.

난 그 전달꾼이라는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다 헤이카에게 슬쩍 물었다.


“근데 전달꾼이 뭡니까?”

“황제의 메신저 같은 거야. 전달꾼의 말이 곧 황제의 말처럼 취급되니까 누구도 거역할 수 없지.”


그래서 아까 기사들이 그랬구만.

칼을 뽑고 길을 막아서던 놈들이 전달꾼의 말에 찍소리도 못하고 우리가 떠날 때까지 고개를 숙였다. 저놈의 말이 곧 황제의 말이나 마찬가지니까.


결국, 바깥이나 여기나 똑같다는 뜻이다. 문명이 역행해도 결국은 계급 사회다.

돈이 최고고 권력이 최고다. 씁쓸하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저 사람도 올드 나이트인가..”

“전 기사가 아닙니다. 모르스 웅골라.”


전달꾼은 내 작은 목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딱 잘라 말했다. 심지어 시라비아 시절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난 그게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다. 기사에게 있어 시라비아 마피아는 절대 용서치 못할 악의 대명사다.

괜히 서늘해지는 목덜미의 감각에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그쪽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나 보네요?”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당신을 알고 계십니다.”

“음. 황제가 내 목을 치진 않겠죠?”

“그건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군요.”


모자를 고쳐 쓴 전달꾼은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내 눈을 물끄러미 마주 보았다.


“하지만 올드 아일랜드는 당신들의 만행을 하루도 잊지 않았습니다.”

“...”


마피아든, 기사든, 뒤끝 하난 끔찍하게 길다.

두 세력의 전쟁은 꽤 오래전 일이다. 하지만 그 전쟁에서 서로 간의 앙금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마피아는 기사라 하면 총을 뽑고, 기사들은 마피아 소리만 들어도 칼부터 뽑는다. 앙숙도 이런 앙숙이 없다.


“무고한 백성을 인질 삼아 진군해오던 당신들의 모습이 제 눈에는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거였나.’


처형인이 무시무시한 존재라곤 해도 기본적으로 소수 정예다. 즉, 머릿수로는 기사를 이기지 못한다. 그런 전력차이로 기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때문에 당시 보스인 바르바로사는 꽤 잔인하면서도 과감한 판단을 내렸다.

바로 이 올드 아일랜드의 주민들을 납치해 방패로 쓴다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악당의 방식이었다


미치광이 기사들이라곤 하나 정의를 부르짖는 그놈들이 백성을 베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검은 둔해졌고, 처형인들은 그런 기사들의 목을 잘라냈다.


나도 그게 비겁하고 지저분한 수법임은 인정한다.

다만 승리를 위해 적의 가장 약한 부분을 찌르는 건 전쟁에 있어 지극히 당연한 전략이다. 특히 상대가 괴물 같은 강자라면 더더욱 약점을 노리는 게 효율적이다.

만일 그때로 되돌아가더라도 바르바로사는 같은 명령을 내릴 것이며, 나도 똑같은 일을 반복할 거다. 이제 와서 후회는 없었다.


“뭐, 난 이제 마피아도 아닌데요.”

“그건 확신할 수 없군요. 당신은 지난번 시라비아에 나타나 최고 간부인 롬 스토커와 거래를 했습니다. 또 다른 최고 간부인 플뤼테를 몰래 시라비아 바깥으로 빼돌리기도 했었죠.”

“글쎄요. 무슨 근거로 그렇게 확신하는 겁니까? 잘못된 정보일 수도 있잖아요? 고작 그런 걸로 마피아와 다시 결탁했다고 보는 건 성급하지 않습니까?”


섬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고 얕봤다. 내가 플뤼테를 빼돌린 건 정말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사실일 텐데, 놈들은 알고 있었다.

전달꾼은 대답 대신 입술을 비틀며 미소 지었다. 비웃는 듯한 저 웃음이 기분 나쁘다.


“지난밤 올드 아일랜드에 침공해온 것은 크루아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

“당신은 알고 있지 않았나요? 지난밤 크루아틀의 침공에는 짐승뿐만이 아니라 마피아들이 섞여 있었다는 걸.”


대답하지 않았다.

전달꾼도 더 캐물을 필요가 없다는 듯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그날 밤 오코넬을 본 건 환각이 아니었다. 시라비아는 크루아틀에게 굴복한 것이다.

그 자존심 강한 시라비아의 지배자들이 짐승의 밑에서 굽실거리는 건 무슨 꿍꿍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르바로사 자리는 공석.’


최고 간부 중 하나인 플뤼테도 공식적으론 사망. 그러니 당장 시라비아 마피아를 이끄는 건 세 명의 최고 간부다.

그래봤자 에콰가 실세를 맡고 있을 테니, 크루아틀에게 고개를 숙이고자 결정한 건 에콰일테고 내가 아는 에콰라는 여자는 강자라 할지언정 머리부터 숙이는 인간이 아니다.


만약 숙인다면 찌를 틈을 노리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시라비아에 대한 건 일단 고민에서 빼기로 했다. 탐탁지 않은 녀석들이지만 결코 적이 되진 않을 테니까.


“도착했습니다.”


갑자기 앞서 걷던 전달꾼이 훌쩍 뛰어내리더니 몸을 낮췄다.


“산아. 황제야.”


어느새 말에서 내린 헤이카가 작게 소리쳤다. 사무엘도 진작 말에서 내려 내 쪽을 향해 눈빛을 보냈다.


‘황제?’


앞에 있는 거라곤 잔해 더미 위를 덮은 커다란 천막뿐이다. 주변을 가득 메운 기사들은 있다만, 그들조차 전원 몸을 낮추고 있었다.

눈 씻고 찾아봐도 황제 기사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인간이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조금 뒤, 난 기사들이 모두 저 천막 안쪽을 향해 자신의 충의를 보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저건 고작 잔해 더미를 덮어놓은 천막이 아니었다.


“폐하.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 안으로 들여라. }


“...!!”


등골이 오싹해지는 음성이 커다란 천막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인간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인간의 언어를 흉내 냈다.

마치 크루아틀의 짐승과도 같이.


“따라오십시오.”


전달꾼이 앞서 걷고 우리가 그 뒤를 따랐다. 전달꾼은 천막 아래의 새까만 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안쪽은 정말 어둠뿐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공간.

그러한 공간을 가득 메운 건 지독한 탄내였다.


헤이카는 어둠 속에서 내 손을 잡았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녀의 옆모습으론 표정을 알 수 없었으나 헤이카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음은 분명했다. 헤이카는 긴장하고 있었다.


“멈추십시오.”


어둠 속에서 전달꾼의 목소리가 들렸다.

등 뒤로도 콥스 바탈리온과 크롬벨 팀의 발소리가 일제히 멈췄다. 우리도 목소리에 맞춰 걸음을 멈췄다.


어둠 속, 새빨간 두 개의 불꽃이 둥둥 떠있었다.


‘불꽃이 아니다.’


저건 눈이다. 괴물의 눈동자.

불처럼 이글거리는 거대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우릴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맞잡은 헤이카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화륵!

갑자기 이곳저곳 세워진 기다란 횃불에 불이 붙었다.


“.....”


모두가 숨을 삼켰다. 누군가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기도 했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황제의 모습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다소.. 아니, 정말 많이 달랐다.


길쭉한 주둥이. 거대한 몸집. 이글거리는 뱀의 눈동자. 강철같은 비늘 피부.

식인 도시의 알산나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순도로 따지면 이쪽이 훨씬 우위겠지만.


올드 아일랜드의 지배자.

황제 기사는 전설 속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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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굴착기 22.11.09 210 11 16쪽
139 잠입 작전 22.11.08 203 11 17쪽
138 환상통 22.11.07 211 9 20쪽
137 터닝 포인트(14) - 혼란의 시대 +1 22.11.04 237 11 24쪽
136 터닝 포인트(13) - Last Man Standing +2 22.11.03 216 10 21쪽
135 터닝 포인트(12) - 계산 밖의 칼날 +1 22.11.02 217 11 19쪽
134 터닝 포인트(11) - 이클립스(Eclipse) 22.11.01 229 9 19쪽
133 터닝 포인트(10) - 죄악감 +1 22.10.31 199 11 20쪽
132 터닝 포인트(9) - 땅의 창끝 22.10.28 228 10 20쪽
131 터닝 포인트(8) - 족쇄 22.10.27 215 9 15쪽
130 터닝 포인트(7) - 아우터 +2 22.10.26 224 10 17쪽
129 터닝 포인트(6) - 아디마 케티르 22.10.25 208 11 17쪽
128 터닝 포인트(5) - 어셔 스콧 22.10.24 220 9 16쪽
127 터닝 포인트(4) - 전장의 불청객들 +1 22.10.21 229 11 15쪽
126 터닝 포인트(3) - 아시리아의 재해 22.10.20 233 10 17쪽
125 터닝 포인트(2) - 증오 속 호의 +1 22.10.19 217 10 15쪽
124 터닝 포인트(1) - 병문안 22.10.18 230 9 18쪽
123 괴수(怪獸) +1 22.10.17 233 10 19쪽
122 속는 자, 속이는 자 22.10.14 228 12 19쪽
121 갈림길 +1 22.10.13 219 11 13쪽
120 그의 욕망 +1 22.10.12 252 11 17쪽
119 협상 +1 22.10.11 233 11 18쪽
118 잿빛의 고향(8) - 중재자(Peacemaker) 22.10.10 232 12 16쪽
117 잿빛의 고향(7) - 두 여인 +1 22.10.07 259 13 19쪽
116 잿빛의 고향(6) - 희미한 그리움 속에서 +1 22.10.06 227 1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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