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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조회수 :
84,686
추천수 :
3,418
글자수 :
1,991,958

작성
22.10.17 14:10
조회
236
추천
10
글자
19쪽

괴수(怪獸)

DUMMY

#1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아가레스의 이야기는 대부분 비슷하다.


하늘을 전부 덮을 정도로 거대한 몸집.

아가레스가 우는 소리는 천지를 뒤흔들고, 흉측한 이빨과 주둥이는 먹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야말로 하늘의 재앙.


긍정적인 평가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가레스인만큼 오코넬에게 있어서도 아가레스는 썩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시라비아의 잿빛 바다에서 어렵지 않게 아가레스를 볼 수 있었던 탓에 그 흉측한 생김새는 좀 익숙해졌지만, 과거 성난 아가레스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는 광경을 ‘두 눈’ 으로 봤던 오코넬은 아가레스의 재해를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가레스를 머리 위에 두는 바보는 없다.. 라고 하던가.”


그 재해를 떠올리며 담배를 태우던 오코넬이 수송기 창 밖 아가레스를 향해 중얼거렸다. 잠시 뒤, 그의 입가가 피식 웃었다.


“지금은 비슷한 높이에 있으니 별 상관없겠군.”


{ 정확히는 우리가 더 낮다. }


오코넬의 헤드셋 너머로 들려온 자리만 콥스의 퉁명스러운 대꾸였다. 수송기의 엄청난 소음에 쓴 헤드셋이 영 익숙하지 않은지 오코넬은 헤드셋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쓰곤 했다.


한 번에 많은 인수를 태울 수 있는 이 수송기는 꽤나 넓었지만 지금 이 안에 있는 건 조종사를 제외하곤 오코넬과 자리만 뿐이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분위기는 딱히 어색하지 않았다. 물론, 친근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협력 관계의 일시적 동맹이자 언제 배신할지 모를 적. 두 사람의 거리감은 그 정도였다.


“저 괴물들 때문에 인류는 하늘을 빼앗겼다고들 말하던데, 이 수송기는 어떻게 날아다니는 거지?”


{ 그건 나도 모른다. 기술자들은 죽음과는 거리가 머니까. }


“참, 그쪽은 그런 부류였지.”


자리만은 슬쩍 열린 바이저의 틈새로 젤리를 던져넣었다. 바이저 안쪽으로 우물거리며 젤리를 씹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 안쪽엔 뭐가 있지?”


{ 응? 내 얼굴이 궁금한 건가? }


“안 궁금한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콥스 바탈리온은 항상 얼굴을 숨기고 다니니까.”


{ 죽음의 신도가 있을 뿐이다. }


자리만이 얼굴을 보여줄 생각은 없을 것 같았다. 오코넬은 아쉽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혹시 하나 더 물어도 되나?”


{ 상관없다. }


“왜 너희쯤 되는 놈들이 공업에 붙어 있는 거지?”


자리만의 바이저가 기우뚱했다.


{ 우린 고용됐을 뿐이다. 용병이니까. }


“용병? 너희는 용병이 아니라 광신도잖아.”


오코넬의 지적에 화를 낼 법도 했지만 자리만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오히려 오코넬의 지적은 반박의 여지도 없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용병은 돈으로 움직인다. 유명한 놈들은 특히나 그래. 파스트라스의 퍼렌도 벡, 크로커다일의 스칼라 헤이즈, 나이트 오브 레기온의 벨리카고. 전부 그런 놈들이지.”


{ ... }


“그런데 자리만 콥스는 달라.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너희가 믿는 신념과 맞지 않으면 곧바로 뒤통수를 치니까. 그건 용병도 뭣도 아니야. 단순한 광신도다.”


부스럭거리며 젤리를 꺼낸 자리만이 또다시 바이저 틈새로 털어 넣었다. 그는 대꾸 없이 젤리를 씹기만 했다.

오코넬은 그런 자리만의 반응에도 별 상관없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그런 자리만 콥스가 지금까지 공업에 붙어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더군. 공업의 회장이 죽음의 교리라도 읊던가?”


{ 주군의 명이 있었다. 그러니 우린 감시자들이다. }


오코넬의 하나뿐인 눈이 꿈틀거렸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주군? 그쪽이 대장이 아니었단 소린가? 역시 그냥 돈으로 고용된 건 아니었군. 감시자는 무슨 뜻이지?”


{ 헤이카 미켈런은 문을 열어버리고 말 테니까. }


“문?”


{ ... }


“..쩝. 말하기 싫으면 별수 없고.”


애초에 대답은 기대도 않던 오코넬이었다. 그는 금세 흥미가 식었는지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가레스 무리는 이전보다 더 가까워져 있었다.


“..그보다 속도 좀 더 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러다 저놈들한테 수송기째로 잡아먹히는 건.. 혹시 이거 함정인가?”


{ 함정? 그런 얘긴 못 들었는데. }


자리만이 말했다. 가만 생각하던 오코넬도 굳이 함정이라면 자리만 콥스를 이 수송기에 같이 태웠을 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오코넬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아가레스 무리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아가레스가 무리를 짓는 건 처음 봤는데, 혹시 저것도 너희 공업이 부른 건 아니겠지?”


{ 공기 중에 아가레스의 피 냄새가 퍼지고 있다. }


오코넬이 눈살을 찌푸렸다. 피 냄새에 민감한 오코넬이었지만 그는 최근에도 아가레스의 피 냄새 같은 독특한 냄새를 맡아본 기억은 없었다.


{ 아가레스의 피는 오로지 동족만 느낄 수 있다. 피의 양에 따라 다르지만 한 마리를 통째로 쥐어짜면 전 세계의 아가레스가 맡을 수 있겠지. }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지?”


{ 아가레스가 여기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아가레스는 ‘군체’ 가 다양하다. 어떤 군체는 동족의 죽음에 전혀 반응하지 않지만, 이쪽의 아가레스는 민감하더군. 아마 모체가 달라서 그런 것 같다. }


주절주절 늘어놓는 자리만의 이야기였지만 오코넬은 그의 말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다만, 당장 중요한 건 아가레스라는 괴물들이 떼거지로 시라비아 상공을 가로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가레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저놈들이 시라비아에 추락할 가능성도 있나?”


{ 없진 않지.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니까. }


오코넬이 아가레스의 충돌에 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수송기의 소음에 섞여 조금씩 들려오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오코넬은 다시 창 밖을 보았다.


어느새 수송기는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아래는 라가토니아의 항구 도시였다.

순식간에 베르몬드에서 라가토니아까지 도착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도 있지만, 오코넬은 이 사이렌 소리가 도시 전역에 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토커가 피난 경보를 지시한 건가?’


라가토니아의 관리자는 스토커다. 물론, 외부적으로 라가토니아를 관리하는 건 이쪽의 정치인들이지만 가장 배후에 있는 건 시라비아 마피아다.

결국, 도시 규모의 피난령을 내리기 위해선 스토커의 지시가 있어야만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피난 경보가 울리는 건 그다지 이상한 건 아니었다.

유례 없는 ‘무리를 지은 아가레스’ 가 시라비아 상공을 관통하고 있으니,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주민들을 피난시키는 건 그 지역의 관리자로서 마땅한 의무였다.


‘이미 피난은 끝난 것 같은데.’


다만 오코넬은 사람 하나 없이 텅 빈 도시를 바라보며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북쪽부터 내려왔을 아가레스 무리를 식별하고 다른 도시까지 그 소식이 전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벌써 이 큰 도시의 피난을 전부 끝냈다는 건 다소 부자연스러웠다.


마치 아가레스가 올 것을 진작에 알았다는 것처럼, 혼란에 빠진 기세도 없이 도시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고 항구에 정박해있을 배들도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없었다.


{ 찾았다. }


오코넬은 헤드셋으로 들려온 자리만의 목소리에 서둘러 자리만이 가리킨 방향의 창 밖을 보았다.


도시에서 남쪽. 흑해로 나가는 바다에 홀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고속정 한 척이 보였다. 위가 뻥 뚫린 그 고속정에 탄 인물의 인상착의에 오코넬이 끄덕였다.


“플뤼테로군. 정말 혼자 도망치고 있을 줄이야.”


{ 본체가 맞을 거다. 아베스타 어디에도 다른 플뤼테는 잡히지 않는다. }


“역시 공업의 기술이군. 접근할 수 있나?”


{ 접근하겠습니다. }


이번엔 자리만이 아닌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헤드셋으로 들려왔다. 수송기의 조종석에 앉은 공업의 파일럿이었다.


수송기는 빠른 속도로 고속정을 향해 접근했다.

아무리 고속정이 빠르다고 해도 공업의 수송기에는 못 미쳤다. 낮게 비행하는 수송기의 그림자가 이내 고속정을 삼켰다.


“문 열어.”


오코넬의 말에 수송기의 문이 열렸다. 거친 바람이 들이닥쳐 그의 머플러와 코트가 나부꼈다.

고속정에 있던 플뤼테도 낌새를 눈치챘는지 창백한 얼굴로 수송기를 올려다보았다.


오코넬과 플뤼테의 시선이 교차했다. 한쪽은 차가운 살기를, 한쪽은 분노를 머금었다.


플뤼테가 수송기를 향해 기관단총의 총구를 치켜들었다. 참수검을 뽑은 오코넬이 뛰어내릴 각을 살폈다.


{ 어어?! }


그 순간, 오코넬은 헤드셋 너머로 들리는 파일럿의 목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당혹감으로 가득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 아, 아가레스가 접근합니다! 엄청난 속도로... }


“아가레스?”


오코넬은 수송기 문을 붙잡고 고개를 쭉 내밀어 하늘을 보았다.

정말로 무리에서 빠져나온 아가레스 한 마리가 수송기와 고속정을 향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길쭉한 몸의 커다란 가시가 삐죽 튀어나오고 아가레스의 둥그런 주둥이가 쩍 벌어지며 안에 들어찬 이빨들이 드러났다.


─ !!!!!!!


“큭!?”


오코넬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아가레스의 포효였다.

그리고 이런 울음소리를 오코넬은 이미 들어본 경험이 있었다.


과거에 있던 시라비아와 올드 아일랜드의 전쟁.


마피아와 기사들의 전쟁으로도 잘 알려진 그 질척한 싸움에서 전쟁의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 있었다.

올드 아일랜드의 격전지 중 하나였던 강철 도시 무쿠타. 그곳에 성난 아가레스가 갑자기 내리꽂혔던 일이었다.


그 전쟁을 직접 겪은 오코넬이었다.

그는 간발의 차로 전장을 벗어나 무쿠타의 재해를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도저히 잊을 수 없었고, 그때의 감각도 생생하게 그의 뇌리에 남아있었다.


“빠져! 당장 여기서 벗어나!”


오코넬이 헤드셋 마이크를 통해 소리를 질렀다. 파일럿의 숨넘어가는 목소리와 함께 수송기가 급하게 상승했다.


동시에 오코넬은 고속정에서 두 귀를 막은 채 절망스러운 얼굴을 한 플뤼테를 보았다.

그녀는 마지막 발악이라도 할 셈인지 기관단총을 하늘로 겨누고 마구 갈기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저항은 아가레스의 화만 돋울 뿐이었다.


성난 하늘의 괴수가 또다시 포효했다.



#2


아시리아로 이동하기 위해 북쪽에서 내려온 아가레스 무리. 그리고 그 중 한 마리는 라가토니아 앞바다로 돌진.


전부 사무엘의 이야기대로였다.

무리에서 벗어난 아가레스 한 마리가 라가토니아 앞바다로 곤두박질칠 기세였다.


원래대로라면 이후의 일은 사무엘에게 맡기고 베르몬드의 술집에서 시간이나 때울 예정이었지만, 난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아가레스라는 놈이 충돌하는 모습을 말이다.


과거에 있던 마피아와 기사들의 전쟁에서 올드 아일랜드의 한 도시에 아가레스가 떨어졌다는 얘긴 들었지만, 난 그때 다른 전선에 있던 탓에 아가레스의 충돌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성난 아가레스가 지상으로 곤두박질치는 걸 보게 될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 산 팀장님. 더 이상 접근은 어렵습니다. 자칫 휘말릴 가능성이.. }


“예.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헤드셋 너머로 조종사가 안도하는 한숨이 작게 들렸다. 수송기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정지 비행을 시작했다.


바다와는 꽤 거리가 있었지만 아가레스의 거대한 몸집 탓인지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거리감이 조금 어긋나는 기분이었다.

아가레스의 포효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말로만 듣던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진짜 성난 아가레스의 울음소리였다.


‘빠져나왔네.’


아가레스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수송기 한 대가 바다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오코넬을 태운 수송기일 것이다.


분신으로 만든 플뤼테가 고속정으로 도망치듯 연기를 하고, 공업의 수송기로 오코넬과 함께 그 플뤼테를 뒤쫓는다.

그러다 갑자기 달려드는 아가레스에 수송기는 현장 이탈. 분신 플뤼테는 고속정째로 아가레스의 재해에 휘말리는 것이다.


이 정도면 오코넬이라도 플뤼테를 쫓는 건 이제 멈출 거다. 본체가 고속정에 있는 플뤼테라고 계속 강조했고, 그 플뤼테가 아가레스에게 휘말렸으니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울부짖던 아가레스가 몸을 구부렸다.

쩍 벌어진 커다란 주둥이는 이제 완전히 바다를 향해 전속력으로 내리꽂히는 중이었다.


“오..”


아가레스와 해수면의 충돌에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높이 치솟는 시커먼 바닷물. 점점 가려지는 아가레스의 거체. 포효에 뒤섞여 마치 폭탄이 터지듯 무지막지한 굉음이 세상을 뒤집을 듯 흔들었다.


전에 필라드 앞바다에서 열차포가 연방의 함대를 날려버렸던 것처럼 비상식적인 광경이다. 머리가 이걸 현실이라고 인지하는 게 다소 늦어질 정도. 꿈이 아닌가 싶다.


{ 충격파 옵니다! }


헤드셋으로 들린 목소리에 잠시 감상에 빠져 있던 난 수송기 내부에 손잡이가 될 만한 걸 붙잡았다.


“으억!?”


몸이 붕 뜨는 느낌. 이미 하늘을 날고 있으니 붕 떠있는 건 맞지만, 제어를 잃고 바람에 마구 나부끼는 것처럼 수송기가 흔들렸다.

이러다 수송기가 뒤집히거나 어딘가로 추락하지 않을까 싶은 걱정이 들 때쯤, 다행히 충격파가 멎었다.


굉음. 충격파. 이어서 다음으로 올 건 뻔했다.


{ 고도를 더 높이겠습니다! }


수송기의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가 더 커졌다. 아마 이다음에 밀려들건 해일이다.


바다에 떨어졌으니 이 도시는 사실상 끝장이라고 봐도 무관하다.

다행인 점은 사무엘의 이야기를 듣고 며칠 전부터 미리 피난 준비를 하던 스토커였기에 인명 피해는 없다는 점이다.


창 밖을 내다보니 무슨 성벽처럼 치솟은 파도가 도시를 덮치고 있었다.

파도는 건물을 삼키고, 부수고, 짓이기며 도시를 수장시켰다. 시커먼 바닷물이 안 그래도 칙칙한 시라비아의 땅을 완전히 까맣게 물들였다.


‘재해..’


조악한 인류의 문명이 존재했던 땅은 거친 재해의 몸집 아래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이 도시가 쌓아온 수많은 세월이나 기억은 한순간에 무의미해졌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세상의 멸망이 딱 이런 분위기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올라오는 건가?’


밀려온 해일 너머 곤두박질쳤던 아가레스가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하긴 들이받고 터지는 미사일 같은 놈들은 아니니 당연한 얘기다. 저런 식으로 바다뿐만이 아니라 지상도 박살을 내놓고 멀쩡하게 떠오르는 놈들이다.


“!”


그때, 헤드셋 너머로 날카로운 ‘삐-’ 소리가 이어졌다. 귀가 아플 정도였지만 금방 소리는 잦아들었다.


조종석에 있던 파일럿도 마찬가지였는지 헤드셋을 만지작거리며 당황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종석 정면의 탁 트인 풍경에서 아가레스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뭐야?’


떠오르던 아가레스가 크게 몸을 떨더니 다시 아래로 추락했다.

첫 번째에 이은 두 번째 충돌? 아니었다. 이번엔 주둥이부터가 아니라 꼬리부터 바다로 내려가고 있었다. 난 재빨리 조종석으로 달려갔다.


“저게 뭐죠?”


{ 다시 충돌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어.. 아니, 뭔가에 끌려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


파일럿까지 이렇게 말하니 내가 잘못 보는 게 아니었다.


아가레스의 거체가 바다에서 튀어나온 무언가에 붙잡혀 시커먼 바다로 끌려가고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무리를 지어 아시리아로 이동하던 아가레스 중 굳이 한 마리가 튀어나왔고, 놈은 아무것도 없는 바다에 곤두박질쳤다.


애초에 아가레스는 자극하지만 않으면 어지간해선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고, 그렇게 성난 울음소리를 내뱉지도 않는다.


아무런 이유 없이 바다로 충돌했을 리가 없다는 얘기다.


{ - }


또다시 헤드셋으로 ‘삐’ 하는 소리가 났다. 파일럿도 얼굴을 찌푸렸다.


“귀 아파 죽겠네.. 통신이 안 좋은 것 같은데..”


{ 헤르카. }


난 파일럿을 바라보았다. 정작 파일럿은 자기가 한 말이 아니라는 듯 나랑 똑같은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 투라. }


헤드셋 너머로 들려오는 괴상한 목소리는 ‘삐’ 하는 소리에 섞여 있었다.

이건 잡음에서 나오는 통신 장애 같은 게 아니라 언어였고, 목소리였다. 난 아가레스가 끌려가는 바다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가레스의 포효가 다시 울려 퍼졌다.

이번엔 성난 포효가 아니라 절규나 비명에 가까웠다. 단순히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지만, 아까와는 확연히 달랐다.


아가레스가 마구 몸부림치자 시커먼 바다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은 형체가 아가레스의 거체를 휘감았다.


{ 뱀... }


나랑 같은 광경을 보고 있던 파일럿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아가레스의 몸을 빙글빙글 돌며 휘감은 것은 뱀처럼 길쭉했다.


그러나 뱀이라기엔 너무 컸다. 주둥이도 뱀이 아니라 악어와 엇비슷했고 몸은 마치 갑옷 같은 비늘로 뒤덮여있었다.


{ 헤르카. 투라. }


다시 헤드셋 너머로 들려온 소름 끼치는 음성에 몸이 떨렸다.


“이거 저놈이..”


어떤 근거도 없지만, 파일럿은 나와 같은 의견이라는 듯 식은땀을 흘리며 끄덕였다.

우리의 통신에 끼어들어 소름 끼치는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건 바로 저 뱀이라고.


마침내 뱀은 아가레스를 모두 휘감고 주둥이까지 올라왔다. 아가레스의 쩍 벌어진 주둥이와 뱀의 주둥이가 마주 보았다.


뱀도 입을 벌렸다. 흉측하게 솟아난 이빨들 사이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뱀의 눈깔이 녹색으로 마구 발광했다.


마침내 헤드셋의 ‘삐’ 소리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정도라 나와 파일럿은 거의 동시에 헤드셋을 벗어던졌다.

직후, 뱀의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던 새빨간 불줄기가 아가레스의 쩍 벌어진 주둥이로 쏟아졌다.


아가레스의 거체가 붉게 달아오르다 지글지글 타들어 갔다. 마지막엔 마구 부풀어 오르다 못해 큰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싸늘한 시라비아의 공기가 뜨겁게 달궈졌다. 수송기 내부 공기도 뜨거워지는 걸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아가레스를 산산조각낸 뱀은 시퍼런 눈을 번들거리며 매끄럽게 바다로 되돌아갔다.


“...”

“....”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파일럿은 나와 서로 멍청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다엔 다시 텁텁한 적막감이 흘렀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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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52 K.S
    작성일
    22.10.18 08:21
    No. 1

    하늘을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발 아래도 보지 못하고 있었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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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터닝 포인트(12) - 계산 밖의 칼날 +1 22.11.02 221 11 19쪽
134 터닝 포인트(11) - 이클립스(Eclipse) 22.11.01 233 9 19쪽
133 터닝 포인트(10) - 죄악감 +1 22.10.31 206 11 20쪽
132 터닝 포인트(9) - 땅의 창끝 22.10.28 231 10 20쪽
131 터닝 포인트(8) - 족쇄 22.10.27 219 9 15쪽
130 터닝 포인트(7) - 아우터 +2 22.10.26 228 10 17쪽
129 터닝 포인트(6) - 아디마 케티르 22.10.25 213 11 17쪽
128 터닝 포인트(5) - 어셔 스콧 22.10.24 227 9 16쪽
127 터닝 포인트(4) - 전장의 불청객들 +1 22.10.21 232 11 15쪽
126 터닝 포인트(3) - 아시리아의 재해 22.10.20 238 10 17쪽
125 터닝 포인트(2) - 증오 속 호의 +1 22.10.19 221 10 15쪽
124 터닝 포인트(1) - 병문안 22.10.18 233 9 18쪽
» 괴수(怪獸) +1 22.10.17 237 10 19쪽
122 속는 자, 속이는 자 22.10.14 233 12 19쪽
121 갈림길 +1 22.10.13 224 11 13쪽
120 그의 욕망 +1 22.10.12 255 11 17쪽
119 협상 +1 22.10.11 237 11 18쪽
118 잿빛의 고향(8) - 중재자(Peacemaker) 22.10.10 235 12 16쪽
117 잿빛의 고향(7) - 두 여인 +1 22.10.07 265 13 19쪽
116 잿빛의 고향(6) - 희미한 그리움 속에서 +1 22.10.06 231 1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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