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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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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26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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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터닝 포인트(7) - 아우터

DUMMY

#1


사찰은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적어도 발 뻗고 누울만한 장소는 있었다.

그리고 라하단이라는 사찰의 주인이자 늙은 승려는 우리에게 음식도 내어주었다. 그건 사찰의 승려들이 먹는 마르고 딱딱한 보존식으로 ‘나판’ 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그냥 먹기엔 돌덩이 수준이었지만 물에 불리자 먹을만한 정도로 풀어졌다. 듣자하니 물에 불릴수록 부드러워져 나중엔 죽처럼 풀어진다고 한다.


허기진 마음에 대충 말랑말랑한 느낌이 들자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질긴 스펀지 같은 식감이 입안에 꽉 찼다.

빵과 비슷하면서도 딱딱한 떡을 억지로 불린 듯했다. 별로 맛은 없었다.


“입에 맞으십니까?”


나판을 질겅질겅 씹으며 늙은 승려의 옆으로 다가가자 그는 날 향해 물었다.

승려는 사찰 중앙에 피운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입에 든 걸 겨우 삼키고 끄덕였다.


“예. 먹을만하네요.”

“다행이군요.”

“그런데 이렇게 많이 나눠주셔도 되는 겁니까? 여기도 사람 많아 보이는데..”


자리만의 대원들을 포함해 노페이스 팀은 대략 마흔 명 남짓. 아무리 나라도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식량을 축내는 건 역시 양심이 찔렸다.

하지만 늙은 승려는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가득 쌓여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더 챙겨가셔도 좋습니다.”

“..그럼 떠날 때 조금 가져가겠습니다. 돈은..”

“그건 됐습니다. 여기서 돈은 평범한 종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음. 그렇겠네요.”


늙은 승려는 주름이 가득한 얼굴로 활활 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불그스름하게 비치는 그의 눈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여전히 바깥에선 괴물의 울음소리와 그들과 대치하는 승려들의 기합 소리가 함께였다. 승려들은 서로 교대해가며 밤새도록 이 사찰을 지키는 듯했다.


그러다 이따금 심하게 다친 승려가 들어오기도 했다. 치료를 받고 무사하다면 상관없지만, 목숨을 잃은 승려는 어김없이 이 장작더미 안으로 옮겨졌다.


이미 몇 명을 잡아먹었는지도 알 수 없는 불꽃이 이글거렸다. 그 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 늙은 승려가 날 향해 물었다.


“코란이 남긴 말이 있었습니까?”


코란은 내가 들쳐메고 왔던 그 승려의 이름이다. 난 기억을 더듬었다.


“산을 내려가라고.. 했던 것 같네요. 이 위에 뭔가 있다고. 믿기 어렵다면 이 사찰을 찾아와 라하단 스님을 찾으라고 했었죠.”

“그렇군요.”


그러고보니 이 승려는 자신을 라하단이라고 소개했었다. 찾아왔다면 제대로 찾아온 셈이다.


늙은 승려는 잠시 손가락을 꼬물거리다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궁금한 게 있다면 답해 드리겠습니다.”

“승려들도 살생을 할 수 있었나 보네요.”


물어볼 건 많았지만, 역시 가장 궁금한 건 바로 이 상황 자체였다.

아시리아의 도승은 기본적으로 살생이 금지되어 있다. 아무리 종교에 대해 잘 모르는 나라도 알 정도로 그건 널리 알려져 있는 상식의 범주다.


뭐, 사찰이 갑자기 괴물들에게 습격받았으니 저항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느낀 의문은 단순히 그런 게 아니었다.


“신기할 정도로 창을 잘 쓰는 것 같아서요.”


이곳의 승려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창을 쥐고 있었다. 이런 평범한 사찰에 저 정도로 다듬어진 창이 있다는 건 역시 이상했다.


더군다나 창을 다루는 솜씨도 심상치 않았다. 물론, 난 창 같은 무기는 써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자세에서 느껴지는 내공이란 건 있는 법이다.

그들은 능숙한 창술로 괴물을 죽였다. 목을 베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저희가 살생을 금하고 있는 건..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늙은 승려는 말했다. 그리곤 굳은살이 잔뜩 배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산에 뿌리를 내린 모두가 살육의 기술을 몸에 익히게 됩니다.”

“싸우는 승려라.. 뭐랑 싸웁니까? 산에 산다는 호랑이?”


늙은 승려가 껄껄 웃었다.


“허허. 호랑이도 물론 위험하죠. 하지만 그들은 산을 지켜주는 신성한 영물입니다. 저희 또한 마찬가지로 산을 지키는 존재들이죠.”

“뭐로부터요? 밀렵꾼을 상대로 아시리아의 승려들이 창을 휘둘렀단 뉴스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조금 굳은 얼굴.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눈동자에 담은 듯한 늙은 승려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바깥의 것들을 막고 있었습니다.”


‘바깥의 것’ 이라면 지금 사찰 밖의 괴물들을 말하는 것이다. 죽은 승려가 그렇게 말했던 게 기억났다. 뒤처진 자, 바깥의 것, 옛것. 그런 식으로 부른다고 했었다.


“혹시 저것들이 평소에도 나타나던 겁니까?”

“아니요. 적어도 최근 100년간 저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00년 전엔 있었다는 얘기처럼 들리네요.”

“..있었지요.”


자세한 역사는 모르지만, 황성의 시작 이후 인류가 보르단을 떠나 세계 곳곳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건 대략 황성이 시작되고 3~40년 후의 일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이를 ‘개척기’ 라고 부르기도 한다. 재앙으로 망가진 땅을 다시 일구고 인류의 문명을 세우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 늙은 승려가 말하는 건 아마 그 당시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 시절엔 아디마 케티르에 저런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얘기다.


‘좀 이상한데.’


그렇다치더라도 의문은 남는다. 아무리 옛날에 사라졌던 괴물이라 할지언정 저런 괴상한 놈들이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이유가 없었다.


“잠시 와주시겠습니까?”


내가 끄덕이자 늙은 승려는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그의 등을 바라보던 난 남은 나판을 입에 욱여넣곤 뒤를 따라갔다.


늙은 승려와 도착한 곳은 사찰 내부에서도 가장 큰 건물이었다.

전체적으로 나무로 된 곳이 많았는데, 한쪽 지붕이 완전히 주저앉아 있었고 그나마 무사한 중앙엔 커다란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조각상은 꽤 특이했다.

가장 눈에 띄는 거라면 팔이 무서울 정도로 많다는 거였다. 팔에서 팔이 돋아나고, 그 팔에서 또 팔이 돋아났다.

마치 나뭇가지가 뻗어 나가듯 무수하게 뻗은 팔과 손. 그 중 가장 커다란 두 손은 조각상의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나머지 손은 모두 특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어떤 손은 검지를 삐죽 내밀고 있기도 했고, 어떤 손은 검지와 중지를 붙여 세우고, 어떤 손은 쫙 펴거나, 주먹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조각상엔 다리가 없었다. 정확히는 다리 대신 나무의 밑동같이 둥그런 몸체가 하반신 전부였다.


그 기괴한 조각상을 한참 관찰하고 있었더니 늙은 승려가 두 손을 ‘짝’ 소리나게 부딪치며 조각상을 향해 절을 했다.


잠시 나도 따라서 절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 관두기로 했다.

난 승려도 아니고, 이들이 믿는 인(人)의 신이라는 놈도 안 믿으니까.


‘아마 이게 발라문드겠지.’


코르스카.

그건 아시리아의 승려들이 속한 종교의 이름이다. 그리고 코르스카에서 승려들이 섬기는 신이 바로 ‘발라문드’ 다.


지난번 아시리아에 왔을 때, 발라문드가 내려온다며 성대하게 축제가 열리기도 했던 게 떠올랐다.


나도 발라문드라는 신에 대해선 그때 처음 조사해보며 알았다.

생각보다 꽤 널리 알려진 신이었는데, 굳이 승려가 아니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신자가 꽤나 많았다.


물론, 그 신이 이렇게 괴상망측하게 생겼을 줄은 몰랐다. 인간에서 신이 된 존재라더니 도저히 인간처럼은 안 보인다.


“황성의 초창기엔 이 아디마 케티르에 지금과 같은 ‘바깥의 것’ 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발라문드께서 내려와 그들을 모두 안식에 들게 하셨지요.”


발라문드의 조각상 앞에서 두 무릎을 딱 붙이고 앉은 늙은 승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그의 옆에 대충 앉아 조각상에 시선을 두었다.


“그 뒤, 발라문드께선 예언을 남기셨습니다. 바깥의 것은 언제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이 아디마 케티르에 ‘문’ 이 존재하는 이상, 이곳은 그들의 영역이라고.”

“문이 뭡니까?”

“아디마 케티르 산의 정상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습니다. 아주 깊고, 깊은 곳까지 통하는 구멍입니다. 그 구멍을 발라문드께선 ‘문’ 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바깥의 것들이 넘나드는 문 말입니다.”


늙은 승려는 자신의 두 손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굳은살과 흉터가 자잘하게 남은 손. 이제 보니 팔뚝이나 몸도 마냥 뼈와 가죽만 남은 늙은이의 몸은 아니었다.


“그 예언 이후, 저희는 늘 준비해왔습니다. 자주 아디마 케티르 산을 드나들었고 아시리아의 종교 내전이 끝난 이후엔 아예 이 산에 사찰을 세워 산을 감시했습니다.”

“하지만 100년간 저 괴물들이 안 나오다가 갑자기 나타났다는 거네요. 결국 공업 탓인가..

“저들은 괴물이 아닙니다.”


굳은 얼굴을 한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목을 가다듬으며 짧은 기침을 한 늙은 승려가 허리를 세웠다.

그의 입에서 경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세상을 잊지 않고자 했으나

세상은 그들을 잊었노라.


차디찬 바다에 몸이 잠겨 불어터질 때까지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았노라.


그들의 울음은 물속의 먹먹한 메아리로 흩어졌으니

비로소 사람의 길을 벗어나게 되었노라.


시대를 따라오지 못한 자들.

남기를 선택한 자들.

뒤늦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자들.

그렇게 잊히고 버려진 자들.

그 모두가 가려진 역사와 함께 세상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도다.


하지만 뒤틀린 역사는 언젠가 역류하게 되어있으니

버리고 나아가는 시대를 그들은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을..”


끼익, 하며 마른 나무 바닥을 밟는 소리가 났다.


“그들을 ‘아우터’ 라 칭하며, 그들만의 영원한 감시자가 되길 맹세하노라.”


늙은 승려의 마지막 구절을 빼앗은 건 뒤에서 나타난 자리만이었다.

멍하니 자리만과 늙은 승려를 번갈아 보던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자리만의 바이저에 반짝거리던 불빛이 꺼졌다.


늙은 승려는 자리만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조금 일그러졌다.


“당신은..”


자리만이 바이저 헬멧을 두 손으로 잡더니 헬멧의 목 부분이 덜커덕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놀라기도 잠시, 자리만은 그대로 바이저 헬멧을 시원하게 벗었다.


“미친..”


자리만의 헬멧 안에 있던 건 새하얀 백골이었다.



#2


요 몇 달간 자리만과 함께 일하는 동안 난 단 한 번도 그의 헬멧 안쪽을 본 적이 없었다.


자리만 뿐만이 아니라 콥스 바탈리온의 대원들은 모두 헬멧을 절대 벗지 않았다.

잠을 잘 때도, 물이나 음식물을 섭취할 때조차 바이저 헬멧을 슬쩍 들춰 안으로 쑤셔 넣을 뿐, 얼굴을 드러내진 않았다.


처음엔 궁금한 것도 있어서 몇 번 얼굴을 보려고 시도했지만 노련한 용병 자식들이 작정하고 숨기는 얼굴을 보는 건 역시 힘들었다.

게다가 저놈의 슈트는 바깥에서 잡아당긴다고 벗겨지는 헬멧도 아니었다.


그래서 자리만과 그 대원들의 헬멧 안쪽에 대한 건 소문만 무성한 흥밋거리였다. 이따금 야차나 시카와 그 안에 든 게 어떤 얼굴일지를 두고 내기를 한 적도 있었다.


‘다 졌네.’


헬멧 안에 있는 게 엄청난 미인일지도 모른다던 야차.

흉측하게 망가진 얼굴이라던 시카.

그리고 혹시 머스칼처럼 얼굴이 없지 않을까 하던 나까지.


그 내기에서 이긴 건 결국 아무도 없었다.

설마 헬멧 안에 있는 게 살점 하나 없는 인간의 두개골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문득, 월교의 사도 중에 저렇게 뼈대가리인 놈이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이름이 바렉이었던가.

미나의 손가락질에 박살 나서 하수구로 흘러갔던 걸 마지막으로 못 봤다.

혹시 그놈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


“형제. 그 얼굴은 뭐지? 난 바렉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아. 그래..”

“그리고 난 월교를 싫어한다.”

“그건.. 전에 봐서 알아.”


자리만의 얼굴.. 아니, 두개골이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텅 비어 속이 시커멓게 뚫린 눈구멍에서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은 늙은 승려에게로 옮겨갔다. 승려는 조금 흠칫하더니 옅은 숨을 내쉬었다.


“죽음의 사도들이 있다는 얘긴 들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보게 될 줄은..”


늙은 승려는 몸을 일으켜 손바닥을 맞대고 자리만에게 고개를 숙였다. 자리만의 두개골이 다시 끄덕거렸다.


“아디마 케티르에 나타난 아우터들을 누가 사냥하나 싶었는데, 설마 아시리아의 도승들이 아우터 사냥꾼일 줄이야. 이건 상당히 흥미롭군.”

“네 얼굴이 더 흥미로운데..”

“형제. 닭 뼈나 생선뼈를 본 적 있지 않나? 내 얼굴은 그것들과 딱히 다를 게 없다. 그냥 뼈다.”


설마 자기 머리통이 뼈밖에 없는 걸 닭 뼈나 생선뼈에 빗대어 설명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런 어이없는 표정이 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자리만은 텅 빈 두개골로 콧방귀를 뀌었다.


“하긴, 그런 뼈들은 보통 움직이지 않지. 이건 아직 나약한 형제에겐 충격적이었을지도 모르겠군.”

“나약한은 왜 붙어? 그리고 그 얼굴은 누가 봐도 놀랄 것 같은데?”

“흠. 여기선 확실히 그렇겠어.”


자리만은 어깨를 털더니 뚜벅뚜벅 다가와 발라문드의 조각상 앞에 앉았다. 그다지 정중한 자세는 아니었다.


“역시 못 생겼군. 우리의 신이 훨씬 아름답다.”


바로 옆에 그 못 생긴 신의 신도가 있다는 건 안중에도 없는지 자리만은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

늙은 승려는 멀뚱멀뚱 자리만을 바라보다 옅은 미소를 띠었다.


“형제. 이 늙은이의 말대로다. 아디마 케티르 산의 정상엔 커다란 구멍이 있다. 그리고 우린 그걸 ‘문’ 이라고 부른다. 아우터들이 넘나들 수 있는 문이지.”

“지금 밖에 날뛰는 것들을 아우터라 부르는 거야?”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 여기선 바깥의 것이니, 옛것이니 부르는 것 같지만 다 비슷한 의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지.”


자리만의 두개골의 공허한 시선이 날 향했다.


“저들은 괴물이 아니다.”


표정도 없고,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감정도 없다. 하지만 자리만의 목소리까지 감정을 숨길 순 없었다.

그건 아까 전 승려의 반응과 똑같았다. 지금 바깥에서 날뛰는 놈들이 괴물이 아니라는 확고한 부정이었다.


“발라문드의 신도여. 지금 아디마 케티르의 문이 열렸나?”

“아마도 그렇습니다.”

“역시 헤이카 미켈런이 저질렀군.”

“예.”


늙은 승려의 대답에 자리만이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사찰 마당에는 콥스 바탈리온이 우르르 모여있었다.


“그렇다면 곧 큰 놈이 온다. 어쩌면 이미 왔을지도..”


자리만의 말을 끊으며 사찰 바깥에서 커다란 폭음이 터졌다. 반사적으로 나이프를 뽑고 벌떡 일어났다.


사찰의 담벼락 너머로 시커먼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삐죽한 가시가 손가락을 대신하고, 길쭉한 주둥이에 다리는 나무뿌리처럼 가느다란 놈이었다.


승려들이 고함을 지르며 창을 휘두르는 듯했지만, 그림자가 몸에서 검은 가시를 뿜을 때마다 승려들이 푹푹 꿰뚫렸다. 늙은 승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모두 안으로 들어오너라! 놈은 그림자다!”


늙은 승려의 외침에 승려들이 사찰 안쪽으로 급히 피신했다.

그림자는 사찰의 담벼락을 가볍게 넘었지만 마당 안쪽에서 크게 피어오른 장작더미 위 불꽃에 움찔거리며 다가오는 걸 멈췄다.


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건 승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림자의 몸집은 너무나 컸다. 당연히 그 머리도 높이 있어 창으로는 닿을 수도 없었다.


“우리가 맡겠다.”


자리만은 다시 헬멧을 쓰며 말했다. 빛을 잃었던 그의 바이저에 다시 ‘삑’ 하며 붉은빛이 들어왔다.


그렇게 마당으로 나선 자리만이 두 자루의 권총을 꺼냈다. 그의 발걸음에 맞춰 콥스 바탈리온이 재빠르게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 뒤는 순식간이었다. 자리만과 그의 대원들은 쏜살같이 움직이며 그림자를 포위했다.

어둠 속 붉게 빛나는 콥스 바탈리온의 바이저 불빛을 제외하면 그들은 마치 그림자에 섞여든 것처럼 모습을 감췄다.


그림자 괴물의 비명. 콥스 바탈리온의 총성과 칼부림 소리가 뒤섞인 채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림자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윽고 바이저의 불빛을 번쩍거리며 그림자의 머리를 밟고 선 자리만이 마체테로 그림자의 목을 쳤다.

가루같은 피가 흘러나오며 그림자의 몸뚱이가 축 늘어졌다. 자리만은 잘린 머리를 향해 권총을 들이밀곤 탄창이 빌 때까지 방아쇠를 당겼다.


재빠르고 깔끔한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저건 전투가 아니라 ‘사냥’ 에 가까웠다.


“형제. 미리 사과하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난 자리만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불빛이 사라진 그의 어두컴컴한 바이저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젠 저 안에 뼈가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뭘 사과하는데?”

“우리의 감시가 끝났다.”


칼을 집어넣은 자리만이 다시 두 권총을 쥐었다.

그에 맞춰 콥스 바탈리온의 전원이 바이저에 불을 켜고 자리만의 뒤로 늘어섰다.


“사냥을 시작한다. 형제들.”


마지막으로 자리만의 바이저에 붉은빛이 돌아왔다.

직감적인 불길함에 난 카르마 나이프를 비틀었다.


“헤이카 미켈런을 잡는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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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속는 자, 속이는 자 22.10.14 228 12 19쪽
121 갈림길 +1 22.10.13 219 11 13쪽
120 그의 욕망 +1 22.10.12 252 11 17쪽
119 협상 +1 22.10.11 233 11 18쪽
118 잿빛의 고향(8) - 중재자(Peacemaker) 22.10.10 232 12 16쪽
117 잿빛의 고향(7) - 두 여인 +1 22.10.07 259 13 19쪽
116 잿빛의 고향(6) - 희미한 그리움 속에서 +1 22.10.06 227 1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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