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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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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680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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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991,958

작성
22.11.2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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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글자
23쪽

올드 아일랜드(5) - 무한(無限)의 눈을 가진 마법사

DUMMY

#1


“월교잖아?”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중얼거린 나였다. 머릿속이 갑자기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자 헤카테 녀석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치를 줬다. 눈치 볼 게 뭐 있다고?


“어서 인사해요. 대주교님 앞이잖아요.”

“대주교??”

“멜리더스 구신교의 대주교님이신 칼리프 님이에요.”

“우리 분명 마법사를 만난다고 했잖아? 왜 광신도가 나와?”


끼익, 나무바닥을 밟는 소리에 움찔했다. 이쪽을 향해 한 걸음 나선 금발의 남자였다.

난 그의 목에서 흔들리는 월교의 상징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잘못 본 게 아님을 확신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저 남자는 확실하게 월교였다.

빌어먹을 광신도란 뜻이다.


“내가 바로 그 마법사이자 광신도다. 그대의 이름을 묻겠노라.”


남자가 말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살짝 장난기가 섞인 말투. 난 침을 꿀꺽 삼키며 왼손을 안주머니에 집어넣어 칼자루를 잡았다.


‘거리 좋고.’


여차하면 한 호흡이 끝나기도 전에 저놈의 목을 떨굴 수 있었다.

크루아틀에게 된통 당하고 도망치는 길인데, 월교 꼬맹이한테 도움받아서 만난 게 또 월교라는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내가 택할 수 있는 수단은 이것뿐이었다.


“말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네 이름은 ‘구정물’ 이다.”

“뭐?”

“왜 그러지? 구정물? 이름이 마음에 안 드나? 구정물?”


명백한 도발. 넘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안다.


“내 이름은 산이다.”


이런 썅. 왜 말하는 거야?

몸과 머리가 따로 논다는 건 이런 뜻이었다. 머리로는 이름을 말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내 주둥이는 이미 입을 말해버린 것이다.


백사병의 끔찍한 병세를 절절하게 깨달은 난 그냥 나이프를 뽑아 내밀었다.

새까만 칼날이 서슬 퍼런 빛을 머금고 번들거렸다. 강철도 종잇장처럼 찢는 카르마 나이프다. 월교고 뭐고 크루아틀 같은 괴물 새끼만 아니라면 해볼 만 하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날 보며 비웃었다. 카르마 나이프를 향하는 남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하하. 장난은 여기까지 하자.”


남자는 빈손을 내보이더니 털털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무방비하게 드러난 등에 뒤를 잡을 수 있었지만 난 움직이지 못했다.


‘움직여라! 좀!’


이 빌어먹을 몸뚱이가 제멋대로였다. 나이프까진 제대로 뽑아놓고, 달려들자니 다리가 굳어버렸다.

그래놓고 헤카테 녀석이 내 코트를 잡아당기자 다리가 술술 움직였다. 내 의사랑 상관없이 걸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꽤 그럴듯한 방에 도착해있었다.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소파 몇 개와 감성 넘치는 벽난로에 창문. 바깥의 추위를 녹여주는 따뜻한 공기가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자, 여기 앉아요~ 옳지!”


무슨 아이 다루듯 하는 헤카테였지만 내 몸은 착하게도 소파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러는 사이 금발의 남자는 어디선가 가져온 옷을 헤카테에게 내밀었다.


“헤카테. 옷이 엉망이네. 이걸로 갈아입고 와.”

“네. 금방 올게요. 용사님!”


녀석은 실실 웃으며 받은 옷을 가지고 뛰어갔다. 발소리로 보아 2층으로 올라간 것 같았다.

그렇게 이곳엔 나와 저 마법사만 남게 되었다.


“...”


맞은편에 앉은 그는 파란 눈으로 날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마치 사람을 관찰하는 듯한 눈초리가 영 불편했다.

심지어 난 여전히 카르마 나이프를 쥐고 있는 상황. 눈앞에 칼 든 남자가 앉아있는데, 저쪽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이름이 ‘산’ 이라고 했던가?”

“...”


이미 이름도 떠벌린 마당에 아니라고 하는 것도 웃겼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기묘한 미소를 지은 남자가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고 비스듬히 턱을 괴었다.

빌어먹을. 잘 생겼네. 잘 생겨서 좋겠다.


“정말?”

“..뭐?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진짜로 모르는 건가 싶어서. 내 눈엔 네 이름이 다르게 보이거든.”


남자가 말하는 ‘보인다.’ 라는 말에 문득 떠올랐다.

대주교니 뭐니 하는 것 이전에 이 남자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 있었다는 걸.


“그쪽이 무한(無限)의 눈을 가진 마법사?”


남자는 피식 웃었다.


“사람들은 경외심을 담아 날 그렇게 부르곤 하지. 근데 그 이름 좀 웃긴 것 같아.”

“잘 아네.”

“일단 너무 길잖아. 부르기가 번거로워. 최소한의 단어만 조합해 부른다고 해도 무한, 눈, 마법사가 전부 들어가야 하니까 실패한 별명이지. 어디 가서 ‘난 무한의 눈을 가진 마법사다.’ 라고 말해야 한다면 소름이 끼칠 것 같아.”

“...”

“무엇보다 난 이름으로 불리는 걸 좋아해.”


남자의 이름. 아까 현관에서 헤카테 녀석이 말했던 이름을 떠올렸다.


“칼리프?”

“맞아. 그게 내 이름이야. 그리고 이 이름을 네게 알려준 이상, 너는 나와 인연이 닿은 거야. 앞으로 영영 나에 대해 잊지 못하겠지.”

“뭐라는 거야.. 사내새끼 이름 기억해서 어따 써먹는다고.”

“마법사한테 이름은 꽤나 큰 가치가 있어. 헤이카가 모르는 마법사에게 함부로 이름을 알려줘선 안 된다고 말하지 않던?”


그런 거 들은 기억도 없다. 어쩌면 한 귀로 흘려서 기억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고.


“없어. 내가 헤이카랑 아는 사이라는 건 어떻게 알아? 그것도 그 잘난 눈으로 본 거냐?”

“그렇지. 눈이란 무언가를 보는 기관이고. 너에 대한 건 전부 볼 수 있어. 이름, 나이,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있고, 어떤 성적 취향을 가졌는지도..”

“그, 그만..”

“그래. 그래도 항상 보이는 건 아니야. 난 사람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시하거든. 허락도 없이 보는 건 실례니까.”


그렇게 말하며 칼리프는 창문을 눈짓했다.

푸른 잔디와 맑은 하늘, 따스한 햇빛이 내리쬐는 평화로운 아침 풍경은 그야말로 한폯의 그림처럼 보였다.


로망 속의 집이란 게 이런 집이 아닐까. 작은 밭, 연못이 딸린 초원 위의 아담한 집.

그래도 난 이런 집보단 고층 빌딩 꼭대기에서 와인잔을 손에 들고 도시를 내려다보는 게 더 취향이다.


“이렇게 맑은 날에 온 손님은 오래간만이야. 최근 손님이 오는 날은 늘 비가 왔는데.”

“...”

“들어봤어? 비는 좋지 않은 것이 흘리는 눈물이라고 해. 그래서 비가 오는 날 찾아온 손님은 대체로 불행을 몰고 오거나 안 좋은 소식을 들고 온다고 환영받지 못해.”

“난 환영받는 손님이란 거야?”

“환영하고말고. 헤이카가 선택한 반려(伴侶)니까.”


반려? 그 말의 의미를 가만히 생각하던 난 무심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내 반응이 재밌다는 듯 칼리프가 능글맞게 웃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쥐고 있던 나이프를 몸쪽으로 살짝 당겨 잡았다.


“그럼 슬슬 진료를 시작할까.”

“뭔 진료?”

“갑작스럽겠지만 잘 들어. 지금 넌 시한부야. 백사병이 심각하게 진행됐어.”


백사병에 걸렸다는 걸 알았다는 시점에서 그런 건 역시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오히려 지금까지 백사병 증세를 느끼지 못했기에 체감되지 않았을 뿐, 병세를 절절하게 체험한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난 백사병 감염자다. 중증이고, 당연히 불치의 백사병 감염자는 모두 시한부를 선고받는다.

얼마나 사느냐가 문제겠지.


“얼마나 사는데? 일 년? 삼 년?”

“오늘 밤.”

“뭔...”


칼리프는 웃음기를 싹 지우며 말했다.


“넌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거야.”



#2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 당연히 있다.


그야 난 어릴 때부터 처형인으로 살며 누군가의 죽음을 항상 접하고 있었다.

어느 날엔 적대 조직원의 목을 자르며 생각했다. ‘목을 자르면 바로 죽는 걸까?’ , ‘죽으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호기심이었다.


어디서 들은 얘기론 목이 잘려도 잠깐은 살아있다고 한다. 그래서 눈으로 모든 걸 볼 수 있고,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생각도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따지면 내가 처형해온 사람들은 늘 자기 몸이 머리를 잃고 기울어지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보아왔던 것이다. 그 기분을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역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타인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건 내게 있어 가벼운 일이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죽임당한다는 건 너무나 멀고도 무서운 일이었다.


그리고 처형인으로 일하며 그런 죽음의 공포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면 거짓말이다.

오코넬과의 혹독한 훈련에서 난 죽음의 문턱을 밟았다고 생각한다. 자기 몸에 폭탄을 달고 튀던 적대 조직의 수장이 내 앞에서 핀을 뽑았을 때도 난 죽을 뻔했다.


마피아와 기사들의 전쟁에 동원되어 올드 아일랜드에서 칼질을 할 때도 그랬다.

미치광이 기사들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어떤 놈들보다도 강했다. 목에 칼이 들어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몇 번을 겪어도 내게 닥쳐오는 죽음은 두려운 것이었다.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렇듯, 나 또한 내 죽음이 너무나 무서워 살기 위해 아득바득 발버둥쳤다.


그렇게 살아오던 나날이다.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떵떵거리는 미래를 꿈꾸며 살아왔단 말이다.

그런 내가..


“나 오늘 밤에 뒤진다고?”


벽난로를 멍하니 쳐다보던 난 결국 머리를 부여잡고 혼자 중얼거렸다.

칼리프는 준비를 해야 한다며 어디론가 훌쩍 가버렸고, 옷을 갈아입고 온다던 헤카테 녀석은 한 시간이 다 돼가는데도 내려오질 않았다.


결국, 홀로 남아 온갖 번뇌에 사로잡힌 난 죽음의 공포를 실감 나게 느끼고 있었다.

불안감에 다리를 떨었지만, 그 소리가 더 불안감을 더했다. 기분이 엿 같았다.


“돌팔이 의사.. 아니, 돌팔이 마법사일 수도 있지.”


그렇게 믿기로 했다. 괜히 겁주려고 그딴 소릴 한 거겠지.

내 주치의인 그 디안 켄트라는 의사도 백사병인데 잘만 살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나도 백사병에 걸린 채로 오래오래 잘 살게 될지도 모른다.


기적이란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기에 기적이라 불리는 것이다.

내게도 당연하게 그 기적이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칼리프가 돌아온 것 같았다.


“늦어서 미안. 이제 시작하자.”

“..나, 나 오늘 밤에 진짜 죽어?”

“내버려두면.”

“내버려두면.. 그럼 치료하면 얼마나 사는데?”

“일주일?”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하루도 안 되는 시한부가 치료한다고 일주일이 된다? 치료하는 의미가 있나?


일주일 동안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했다. 조금 늦은 것 같지만 버킷 리스트라도 짜야겠다.

세계 일주하면서 맛있는 걸 먹고.. 일주일로 세계 일주가 가능한가?


“팔 줘봐.”


슬쩍 왼팔을 내밀자 칼리프는 내 손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마치 맥을 짚는 것처럼.


“켄트 선생이 준 약은 제때 먹고 있어?”

“아, 그런 게 있었지.”

“그럼 안 되지. 하지만 이미 약으로 억제할 수준을 넘어섰으니 이제 와서 먹어봤자 의미 없겠어.”


칼리프는 탁자 위 유리병을 가져왔다. 안에는 새하얀 비늘 같은 게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 비늘을 하나 꺼내 내 입에 물렸다. 딱딱한 유리조각을 깨무는 것 같았다.


“물고만 있어. 깨물어도 안 돼.”

“으읍...”

“올드 아일랜드는 환경이 좀 특수해. 구시대랑 흡사한 환경이라 백사병이 더 활발하게 움직이지. 갑자기 네 병이 활성화된 것도 올드 아일랜드에 들어왔기 때문일 거야.”


칼리프는 내 입에 물려 있던 하얀 비늘을 빼갔다. 비늘은 이전보다 훨씬 하얗게 되어있었다. 마치 빛이 날 정도였다.


“지금 네 상태로 올드 아일랜드에 들어오는 건 자살 행위였어. 헤이카는 아마 그걸 몰라서 널 막지 않은 거겠지.”

“..그런가?”

“이거 쓰고 가만히 있어.”


기어이 이젠 내 머리에 왕관 같은 걸 씌운 칼리프였다. 이게 치료가 맞나?

돌팔이라는 걸 넘어서 사이비 주술사들의 영적 치료처럼 느껴졌다. 믿으면 병이 낫는다는 개소리 말이다.


정작 칼리프는 내 왕관을 보곤 만족스러운 얼굴로 끄덕였다. 그러더니 다시 맞은편 소파로 돌아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 앉았다.


“치료는..?”

“지금 하는 중이야. 그 왕관이 네 백사병을 조금 진정시켜줄 거야. 그동안 나랑 얘기나 하면 돼.”

“..나 진짜 일주일이면 뒤져?”

“그걸 믿다니.”


녀석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번졌다.


“치료하면 일주일이란 건 거짓말이야. 위기감을 좀 느끼라고 말해둔 것뿐이지.”

“썅..”

“하지만 치료하지 않았으면 정말 오늘 밤이 끝이었을 거야. 백사병은 그래. 갑자기 목숨을 앗아가지.”

“치료하면 얼마나 사는데..?”

“그건 아무도 몰라. 정해진 규칙이 없는 병이니까. 엄청 오래 살 수도 있고, 일주일도 못 살 수도 있고. 걱정하진 마. 최대한 억눌러 놓을 테니까.”


칼리프는 태연하게 말했다. 정작 난 저놈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기분이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어쨌거나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역시 죽는 건 싫다. 어찌 보면 여기로 올 수 있게 해준 크루아틀의 갑작스러운 침공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휴..”

“물어볼 게 많지 않아?”

“물어볼 거..? 아. 너 월교 맞지?”


칼리프가 배시시 웃으며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엄연히 따지면 조금 달라. 월교는 블라다카가 세운 거야. 난 멜리더스 구신교의 대주교거든. 월교는 구신교에서 뻗어나온 새로운 종파지.”

“뿌리는 같단 소리잖아. 그럼 다 똑같은 광신도지.”

“맞는 말이야. 사정이 있어서 대주교를 하고 있어.”


무슨 사정이든 간에 사이비 광신도들의 대주교라면 엄청 높으신 분이겠지. 역시 믿을 놈이 못 된다.

하지만 그러면 또 하나의 의문이 생긴다. 내게 있어선 무엇보다 중요한 의문.


“헤이카한테 세상을 구하라느니 바람 불어넣은 것도 너지?”


칼리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몇 초간 그렇게 날 바라보던 그는 입맛을 쩝 다셨다.


“의도치 않았지만 그런 것 같아.”

“헤이카는 네가 그 대주교라는 걸 알고 있는 거냐?”

“알고 있어.”

“알면서도 헤이카가 광신도의 말을 믿고 세상을 구하려 한다고? 제정신으로 광신도를 동경할 리가 없잖아. 너 헤이카한테 세뇌라도 건 거냐?”


마법사니까 세뇌쯤은 손쉬운 일이 아닐까 싶었다. 내 추궁에 칼리프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겐 좀 복잡한 사정이 있어. 헤이카도 그런 내 사정을 이해해주고 있고. 난 헤이카를 세뇌하지 않았어.”

“어떻게 믿어?”

“내 이름을 걸고 말하는 거야. 헤이카에게 영향을 준 건 맞지만, 그 아이를 세뇌한 적은 없어. 오히려 헤이카가 내게 영향을 받은 건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 솔직히 말하면 헤이카가 조금 별난 아이라서.”


헤이카가 특이하다는 거엔 나도 동의한다. 세상에 헤이카처럼 별난 여자는 본 적 없다.


“근데 진짜 이루어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아가레스로부터 하늘을 되찾을 줄이야. 그럼 아마 다음 단계로 넘어가겠지.”

“..헤이카는 세상을 바꾼다고 했어.”

“그래. 헤이카의 눈에 이 세상은 황혼일 거야. 해가 지면 모든 게 사라지는 세상. 헤이카는 이 세상을 지키려고 무슨 짓이든 할 테니..”

“정작 인류는 싫어하면서 말이야.”


내 맞장구에 칼리프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맞아. 사람을 싫어하는 헤이카가 사람이 사는 별을 구하려고 해. 동화 속 세상을 구하는 마법사를 동경하면서 따라 하려고. 참 귀엽지 않아?”


그렇게 듣고보니 어린아이 같은 꿈이다. 귀엽다면 귀엽지만, 그 과정을 바로 곁에서 실시간으로 봐왔던 나다.


그건 절대 귀여운 게 아니다.

아가레스와의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가 생겼다. 심지어 아시리아의 죄화를 보았을 때는 마을 주민들을 죄다 불태워 죽이려고까지 했던 헤이카였다.

어린아이에게서 느낄 수 있는 순수한 악함?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내가 헤이카에게서 받는 악함이란 건 필요악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악을 자처하며 해내는 것. 그렇게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마치 일그러진 영웅처럼.


“그런데 인류를 그토록 혐오하는 헤이카가 왜 너는 예외로 둘까?”

“..내가 사람처럼 안 보이나 보지.”

“이유 없는 예외는 없어. 넌 그걸 알아내야 해. 헤이카가 왜 널 필요로 하는지.”

“알아서 뭐해? 솔직히 모르는 게 약일 것 같은데.”


소파의 팔걸이를 손톱으로 두드리던 칼리프가 코웃음 쳤다. 그의 눈이 초점 없이 멍하니 허공을 주시했다. 마치 무언가를 회상하듯이.


“이유 없는 예외는 없듯, 이유 없는 사랑도 없어. 네게 씐 건 사랑이 아니라 저주고 너는 그 저주를 벗어던져야만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거야.”

“허, 참. 동화 속 마법사라더니 하는 말도 마법사 같네. 그냥 수염이나 기른 할아버지로 변신해서 고깔모자나 쓰고 다니는 게 어때?”

“그건 안 되지. 모처럼 잘생긴 얼굴인데.”


자기가 잘생긴 건 아는 모양이다. 재수 없는 놈.


“조만간 선택할 시기가 올 거야. 네가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길 바라며, 내가 해주고 싶은 조언은 이게 끝이야.”


물이 담긴 유리병 안에 왕관을 담가놓은 칼리프는 가볍게 손을 털었다.


“마지막으로 용기의 마법을 걸어줄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마치 악수라도 하자는 듯이.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난 꽤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처음 헤이카가 날 공업으로 끌어들인 그날, 그녀는 똑같이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손을 잡으면 많은 게 바뀌리란 것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난 그 손을 잡았고 실제로 내 생활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마법사의 손을 잡으면 무언가 바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설마 겁먹었어?”

“안 쫄았어.”


난 칼리프의 손을 덥석 쥐었다.

그렇게 그의 얼굴을 쳐다본 순간, 그의 푸르렀던 눈동자가 형형색색의 다른 눈으로 바뀌는 걸 보았다.


무한(無限)의 눈을 가진 마법사.

그 거추장스러운 이명이 왜 이 남자에게 붙어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내 손을 맞잡은 마법사는 말했다.


“삶이란 불같이 살고 정열로 나아가며, 재처럼 사그라드는 죽음이다.”

“이 길이 네 꿈(욕망)을 위한 걸음이라면 그 각오를 보여라.”


마치 왕과 같은 위엄 있는 목소리에 고양감이 치솟았다. 벅차오르는 가슴의 열기에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용기를 주는 마법? 확실히 용기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기분은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다.

머릿속의 거지 같은 환청도 이젠 없었고 몸도 이전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산. 욕망이란 원래 끝이 없는 법이야.”


맞잡았던 손을 놓으며 칼리프가 말했다.

난 악수하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제 보니 그의 손을 맞잡았던 건 움직이지 않던 내 오른쪽 의수였다. 의수에 감각이 있었다. 손가락도 자유롭게 움직였다.


“그리고 그게 늘 나쁘다고만 할 순 없지.”

“그런가..?”

“이제 가봐. 검은 현관을 나서서 검은 숲으로 돌아가면 헤이카가 널 애타게 찾고 있을 거야.”


어느새 푸른 눈으로 돌아온 칼리프였다. 난 그를 향해 끄덕이곤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새까만 문고리를 잡고 열자 검은 숲이 코앞에 있었다. 빽빽한 숲의 고목들이 날 잡아먹으려는 듯 시커먼 주둥이를 벌렸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다.


뒤를 돌아보자 이미 마법사의 집은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드넓은 잔디밭이나 작은 연못, 아담한 밭도 없었다.

모든 게 꿈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휑하니 메마른 풀만 남은 공터가 어서 가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진짜 마법사 맞네.”


피식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검은 숲의 주둥이로 들어서자 헤이카의 목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 목소리를 따라 걸음을 내디뎠다.



#3


“나 왔어요! 용사님! ..용사님?”


후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온 헤카테는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산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산은 어디에도 없었다.


“산은 돌아갔어.”


부엌에서 찻주전자를 들고 돌아온 칼리프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헤카테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칼리프를 바라보며 물었다.


“벌써요?”

“꽤 오래 있었는걸?”

“저 위에서 옷만 갈아입고 왔는데요?”

“아, 맞다. 어젯밤 소리야한테 새 마법을 가르쳤는데.. 2층 뒷정리를 깜빡했네. 미안해.”


헤카테가 눈살을 찌푸렸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노려보던 그녀가 중얼거렸다.


“시간의 마법..”

“대단하지? 가르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한 공간에서 시간의 경계를 나눴어. 소리야는 역시 재능 있는 제자야.”

“..여기선 얼마나 지났어요?”

“한 시간 조금 넘게?”


헤카테가 한숨을 푹 쉬었다. 풀이 죽은 그녀는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으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2층에선 2분 정도밖에 안 지났어요. 대주교님. 일부러 그랬죠?”

“내가? 아니. 그럴 리가.”

“용사님이랑 절 떨어뜨려 놓으려고 그러신 거잖아요. 다 알아요.”

“하하하.”


칼리프는 대답 대신 능글맞은 미소로 헤카테의 앞에 홍차를 내주었다. 뚱한 얼굴로 홍차를 째려보기만 하던 그녀였다.

화창하던 창 밖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조금 뒤엔 창문에 빗방울이 부딪쳤다.


“또 비가 오네.”


턱을 괴고 창문을 물끄러미 보던 칼리프가 중얼거렸다. 바닥에도 안 닿는 다리를 동동 구르던 헤카테는 홍차를 홀짝거리기 시작했다.

맛이 좋았는지, 토라졌던 그녀의 얼굴에도 살짝 미소가 걸쳤다. 칼리프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감상하며 그녀를 불렀다.


“헤카테.”


헤카테는 칼리프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빨간 눈동자와 칼리프의 푸른 눈동자가 서로 섞여들어 갔다.


“산은 네 장난감이 아니야.”


장난끼가 섞인 한 마디에 헤카테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목소리와 달리 그에겐 이미 웃음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서 보이지 않는 노기가 내리깔렸다.

고요한 서릿발 같은 분노에 헤카테는 등에 식은땀이 고이는 것 같았다. 위압적인 시선을 견디지 못한 헤카테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겁에 질린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죄, 죄송.. 합니다..”


헤카테의 떠는 목소리에 칼리프의 얼굴에 능글맞은 미소가 되돌아왔다.


“착하구나. 우리 헤카테.”

“...”

“오히려 산은 정말 네 용사님이 될 수도 있는 사람이야.”


칼리프의 말에 헤카테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커다랗게 뜬 눈에 의문이 가득했다.


“그 사람이요..?”

“욕망엔 끝이 없는 법이거든. 산은 결국 모든 걸 취하려 할 테고, 끝에선 타인의 욕망까지 빼앗을 거야. 세상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영웅이 탄생하겠지.”

“...”

“그러니 때가 되면 산을 도우러 가도록 해.”

“네. 대주교님.”


칼리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쪽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가자 어느새 바깥 창틀에 붉은 새가 앉아있었다.

그는 창문을 살짝 열어 새의 다리에 쪽지를 묶었다. 붉은 새가 부리를 부딪쳤다.


새를 떠나보낸 뒤, 칼리프가 자리로 돌아왔다. 헤카테는 그를 향해 물었다.


“누구한테 보내신 거예요?”

“시바인.”


헤카테의 얼굴에 당혹감이 피어올랐다.

‘시바인’ 이라는 황제의 이름을 이 섬에서 모르는 이는 없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주말 편히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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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사냥은 끝으로 +2 22.12.12 247 8 17쪽
162 사냥꾼들(4) - 녹슨 칼 +3 22.12.09 238 10 15쪽
161 사냥꾼들(3) - 축복의 아이들 +1 22.12.08 223 10 14쪽
160 사냥꾼들(2) - 칼부림 22.12.07 231 10 17쪽
159 사냥꾼들(1) - 역공(逆攻) +1 22.12.06 232 10 16쪽
158 저울질 22.12.05 217 10 17쪽
157 정복자의 유예 22.12.02 235 7 14쪽
156 방황(彷徨) +1 22.12.01 269 9 18쪽
155 올드 아일랜드(8) - 바라는 세상 +1 22.11.30 236 8 16쪽
154 올드 아일랜드(7) - 황제 기사 +1 22.11.29 232 10 13쪽
153 올드 아일랜드(6) - 전달꾼 22.11.28 226 9 20쪽
» 올드 아일랜드(5) - 무한(無限)의 눈을 가진 마법사 22.11.25 221 10 23쪽
151 올드 아일랜드(4) - 마법사의 숲 +1 22.11.24 228 11 13쪽
150 올드 아일랜드(3) - 헤카테 22.11.23 217 10 21쪽
149 올드 아일랜드(2) - 미운털 손님 22.11.22 209 8 18쪽
148 올드 아일랜드(1) - 망향(望鄕)의 나라 +1 22.11.21 217 10 16쪽
147 의수(義手) +1 22.11.18 216 10 16쪽
146 식사 접대 22.11.17 225 10 19쪽
145 추앙받는 자, 추앙받던 자 +1 22.11.16 219 10 15쪽
144 권유 22.11.15 200 10 17쪽
143 선전포고 22.11.14 231 12 13쪽
142 포석(布石) 22.11.11 207 9 16쪽
141 환락주(歡樂主) 키란 샤토 22.11.10 218 9 16쪽
140 굴착기 22.11.09 216 11 16쪽
139 잠입 작전 22.11.08 207 11 17쪽
138 환상통 22.11.07 216 9 20쪽
137 터닝 포인트(14) - 혼란의 시대 +1 22.11.04 241 11 24쪽
136 터닝 포인트(13) - Last Man Standing +2 22.11.03 219 10 21쪽
135 터닝 포인트(12) - 계산 밖의 칼날 +1 22.11.02 221 11 19쪽
134 터닝 포인트(11) - 이클립스(Eclipse) 22.11.01 233 9 19쪽
133 터닝 포인트(10) - 죄악감 +1 22.10.31 206 11 20쪽
132 터닝 포인트(9) - 땅의 창끝 22.10.28 231 10 20쪽
131 터닝 포인트(8) - 족쇄 22.10.27 219 9 15쪽
130 터닝 포인트(7) - 아우터 +2 22.10.26 228 1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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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터닝 포인트(5) - 어셔 스콧 22.10.24 227 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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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속는 자, 속이는 자 22.10.14 232 12 19쪽
121 갈림길 +1 22.10.13 224 11 13쪽
120 그의 욕망 +1 22.10.12 255 11 17쪽
119 협상 +1 22.10.11 237 11 18쪽
118 잿빛의 고향(8) - 중재자(Peacemaker) 22.10.10 235 12 16쪽
117 잿빛의 고향(7) - 두 여인 +1 22.10.07 265 13 19쪽
116 잿빛의 고향(6) - 희미한 그리움 속에서 +1 22.10.06 230 1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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