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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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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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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689
추천수 :
3,418
글자수 :
1,991,958

작성
22.11.2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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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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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
18쪽

올드 아일랜드(2) - 미운털 손님

DUMMY

#1


올드 아일랜드는 꽤나 폐쇄적인 나라다.


자신들의 것을 외부로 보내지도 않고,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올드 아일랜드만의 그 특이한 문명이 아일랜드 섬에 국한되어 자리 잡을 수 있던 것도 그런 폐쇄적인 정치성 덕분이었다.


가끔씩 밖에서 보이는 올드 아일랜드 출신의 기사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애초에 반 황제파인 경우가 대다수이며 그게 아닌 경우엔 ‘원정’ 이란 이름으로 나오는 경우뿐이다.


예전에 자할 회담에서 헤이카를 잡으려고 올드 아일랜드에서 기사가 날아온 적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대표적인 경우다.

자기들의 판단하에 기사로서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들은 어김없이 닫힌 성문을 열고 원정에 나선다.


‘원정을 나설 정도로 헤이카를 싫어한다는 뜻이지.’


잿빛 바다의 안개 너머,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아일랜드 섬의 실루엣에 괜한 갈증이 느껴졌다.


아무리 태연한 척 굴어도 올드 아일랜드는 내게 있어 썩 발을 들이고 싶은 곳은 아니다.

마피아와 기사들의 전쟁에서 난 저 섬에 들어갔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목을 뎅겅뎅겅 따고 다녔으니, 놈들의 입장에서 난 원수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항구에 발을 들이자마자 목을 노리고 칼이 들어올 게 뻔하다.

외부의 높으신 분? 공업의 팀장? 저 섬의 기사들이 그런 걸 신경 쓰는 놈들이었다면 미치광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을 거다.


“산. 준비는 끝났나?”


언제 왔는지 등 뒤의 머스칼이 내게 물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데다 얼굴까지 없으니 머스칼의 모습은 평소보다 유난히 더 섬뜩했다.


“끝났어요. 애초에 준비할 것도 없어요. 칼만 있으면 되니까.”

“마음의 준비 쪽을 물어본 거였는데.”

“마음의 준비?”

“네 얼굴에 쓰여 있거든. ‘더럽게 쫄리네.’ 라고.”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긴장이 좀 풀렸다.


“솔직히 좀 불안하죠. 시라비아에 돌아갈 때도 이 정돈 아니었는데.”

“이해해. 나도 저 섬의 기사들은 좀 껄끄럽거든. 조심해야겠지.”

“...전에 자할 회담에 헤이카 잡으려고 기사 온 거 기억나요?”


턱을 만지작거리던 머스칼의 후드가 끄덕였다.


“올드 나이트의 그라칼 벡스. 기억하고 있다.”

“기사가 원정까지 와서 헤이카를 잡으려 했다는 건,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단 뜻일 텐데. 예전에 뭐 있었어요?”

“헤이카 지시로 내가 저 섬나라에서 칼을 뽑은 적이 있거든.”


머스칼은 어깨너머의 은빛 검자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게 어때서?’ 정도로 생각했겠지만, 머스칼이 검을 뽑는다는 게 얼마나 큰 사건인지 이젠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이었던 아디마 케티르가 저 검 하나에 갈라졌다.

아시리아의 대균열도 그랬고, 말도 안 되는 몸집의 초대형 아가레스를 잡을 수 있던 것도 모두 저 검 덕분이었다.


“뭐 하다가?”

“네가 입사하기 한참 전 일이야. 헤이카가 날 암레드에서 데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어. 올드 아일랜드에 일이 있어서 헤이카랑 몰래 들어갔...”

“그때도 밀입국이네.”

“...그렇게 되는군.”


공업의 회장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밀입국은 기본 옵션인 모양이다.


“어쨌든 거기서 기사들과 마찰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검을 뽑았다.”

“머스칼의 능력으로도 안 됐나 보네요.”

“음. 상황이 안 좋았지. 검을 뽑고도 겨우 도망쳤어. 사실상 헤이카랑 나는 올드 아일랜드에선 너랑 마찬가지로 블랙리스트야. 보자마자 목을 벨지도.”


약자인 척 기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작전이 이번 동맹의 핵심이었다.

저 고리타분한 기사들이 가진 뒤틀린 정의감을 이용하는 것이다. 기사란 무릇 약자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나 뭐라나.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약자로 인식되기 전에 이미 악당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면 충돌은 피할 수 없다. 어떻게든 우리에 대한 인식을 ‘도와야 할 대상’ 으로 인식시켜야 한다.


하지만 고민하는 사이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미 올드 아일랜드가 코앞에 있었다.



#2


항구에 정박한 배에서 내리자마자 예상대로의 상황이 펼쳐졌다.


“훔!”


쿵 - !

지면을 무겁게 울리는 발소리. 무시무시한 덩치의 갑옷 떡대가 배에서 내린 우리를 가로막았다.

그의 뒤로도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항구 전체에 깔린 위압적인 기세가 가시가 돋친 듯 따갑게 느껴졌다.


“역시 소문이 사실이었군. 정말로 마녀와 그 사역마들이 이 성지에 발을 들이려 하다니. 이 그라칼 벡스가 용서치 않겠다.”


그라칼 벡스.

이전에 자할 회담에서 헤이카의 목을 뜯어내야 한다느니 하면서 원정을 왔던 기사였다.


‘하필 저놈이라니..’


머스칼의 압력에 짓눌려 전신에서 피를 철철 뿜으면서도 끝까지 우릴 추격하던 괴물 자식.

설마 오자마자 다시 마주친 게 저 떡대라는 건 예상외였다. 지난번에 당한 만큼 쉽게 길을 터주진 않을 텐데.


“어머, 기사님! 또 뵙네요!”


그와중에 헤이카가 밝게 웃으며 그라칼 벡스를 향해 인사했다. 그라칼 벡스는 투구 사이의 작은 틈으로 눈알을 희번덕이며 헤이카를 내려다보았다.


난 헤이카의 뒤에 딱 붙어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주머니 안쪽으로는 카르마 나이프를 쥐고 언제든지 뽑을 준비를 마쳤다.


투구에 달린 뿔도 그렇고, 역시 다시 봐도 사람보단 눈앞에 성난 코뿔소를 둔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머리털이 쭈뼛쭈뼛 곤두서는 기분이다.

그라칼 벡스는 주먹을 삐걱거리며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네 목을 뜯어내겠다. 마녀. 어차피 또 저 악마를 이용해 이 성지를 헤집으려 왔을 테지.”


그라칼 벡스의 손이 머스칼을 가리키자 머스칼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이번엔...”

“마녀의 말은 들을 가치도 없다.”


녀석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노페이스 팀과 공업의 특수팀이 함께 왔으니 호락호락 당하진 않겠지만 여기서 싸웠다간 협상이고 뭐고 물 건너간다.


난 재빠르게 헤이카와 그라칼 벡스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천천히 주먹을 들던 그라칼 벡스의 투구 속에서 심기 불편한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감염자까지 있다니...”

“도움을 청하러 왔습니다. 기사님. 온 세상이 기사님들의 정의를 보고 싶어합니다.”


움찔, 하며 녀석의 주먹이 멈췄다.


“우리는 그런 세상 사람들을 대표해 여기 왔습니다. 절대 소란을 피우려고 온 게 아닙니다! 황제 폐하와 올드 나이트의 위광을 세상 모두가 보고 싶어합니다.”

“...흠.”


주먹이 내려갔다. 정말 이렇게 이런 아부가 먹힐 줄은 몰랐는데.

물론, 아직 방심할 땐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적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약자로 완전히 인식되어야만 한다.


‘시카!’


두리번거리다 뒷무리에 낀 시카를 발견하곤 재빨리 끌고 와 속삭였다.


“혀 깨물어요. 빨리.”

“네?”

“혀!”


시카는 기사들의 눈치를 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이내 시카의 입술 사이로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어차피 초재생 때문에 금방 회복되겠지만, 연출로는 썩 나쁘지 않다.


“보십시오. 기사님. 바깥에서 이런 몹쓸 병이 돌고 있습니다! 사람을 망가뜨리고, 짐승 같은 괴물로 만들고, 다른 무고한 이들을 다치게 합니다!”

“바깥에서 크루아틀의 돌림병이 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확실히 얼굴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

“...”


이 수면 부족의 퀭한 얼굴과는 별 상관없는데.. 저쪽에선 그래도 나름 심각하게 받아들여 주고 있으니 조용히 있기로 했다.


“흠...”


그라칼 벡스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력으로는 성가신 놈들이 확실하지만 역시 기사란 놈들은 일단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막말로 좀 멍청하다.


만약 이 나라가 폐쇄적이지 않았다면 진작에 사기꾼들이 이곳 기사들을 죄다 등쳐먹었겠지. 지금은 그 사기꾼 역할이 나일 뿐이다.


“하지만 마녀와 그 무리는 악당이다.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과거 이 성지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냈지. 그냥 넘어갈 순 없다.”

“황제 폐하의 앞에서 사과할게요. 물론, 말뿐이 아니라 보상도 하겠어요.”


마침 헤이카가 타이밍 맞춰 나섰다. 그라칼 벡스의 투구가 하늘을 향해 삐그덕거리며 올라갔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녀석이 기합인지, 숨소리인지 모를 것을 흘리며 팔짱을 풀었다.


“훔!”

“..기사님?”

“약자를 돕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지. 그러니 기사된 자로서 못 본 척할 순 없으니 도와주겠다.”

“다행..”

“하지만 조건이 있다.”


그라칼 벡스가 머스칼을 노려보았다.


“정의를 위해 저 악마의 목을 내놔라. 그게 최소한의 조건이다.”

“어...”


어차피 얼굴도 없는데 머리쯤 없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머스칼을 돌아보았는데, 정작 머스칼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 조건은 수락할 수 없다. 난 계약을 끝마치기 전까지 죽을 수 없어.”

“마녀와의 계약인가.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 마녀의 목을 내놔라. 그 대가로 우리 올드 나이트가 세상을 돕겠다. 한 사람의 목숨으로 세상 모든 약자를 구원한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희생이겠지.”


헤이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목을 매만졌다.


‘썅..’


거의 다 와서 저런 조건을 내걸다니. 아마 헤이카 다음엔 내 모가지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냥 칼 뽑고 협박할까? 그랬다간 크루아틀이 아니라 올드 아일랜드랑 전쟁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차라리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도 방법이다. 반 황제파 중에 기사로 이루어진 용병 부대가 있다고 들은 적도 있으니까. 차라리 그쪽에..


“비켜~ 비켜요~ 왜 길을 막고 있담?”

“흠?”


뒤쪽의 소란에 그라칼 벡스가 몸을 돌렸다. 쭉 늘어선 기사들을 비집고 들어선 건 웬 여자애였다.


잘 쳐줘 봐야 10대 중후반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소녀. 유난히 하얀 머리칼과 달리 새빨갛게 물든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여러모로 사람과는 동떨어졌다는 인상이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이 히죽 웃었다.


“찾았다. 역시 여기 있었네.”


기사들을 비집고 들어온 걸로도 모자라 통통 튀는 발걸음으로 녀석이 다가왔다.

당연하게도 그라칼 벡스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악의 포로여. 누구의 허락을 받고 이곳에 왔지?”

“뭐야? 비켜요. 늙은이는 관심 없거든요.”

“난 올드 나이트의 십인장 그라칼 벡스다. 황제 폐하를 섬기는 기사로서 악의 포로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걸 보고도 못 본 척할 순 없다.”

“그 황제 폐하가 허락하신 건데요?”


그라칼 벡스의 몸이 움찔했다. 악의 포로인지 뭔지 하던 녀석이 그라칼 벡스의 갑옷을 주먹으로 톡톡 쳤다.


“그러니까 비켜요. 폐하께서 손님들을 접대하라고 했거든요.”

“황제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난 전해 들은 게 없다. 거짓을 고하는 거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처형하겠다.”

“아, 그래요? 거짓말이야! 해보던지!”


그 말이 방아쇠가 되었다.

그라칼 벡스의 몸이 튕겨 나가듯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더니 소녀를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지면에 쩍, 하며 금이 갈 정도의 괴력. 아마 거대한 주먹 아래 깔린 머리는 으스러졌을 것이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참사에 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헤이카도 인상을 찌푸렸다.


‘저게 정의야..?’


정의로운 기사라는 놈의 만행에 다시 한 번 이 섬의 기사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체감했다.


“훔! 입은 함부로 놀리는 것이 아니다. 악의 포로여. 이 그라칼 벡스는 정의를 위해서라면 설령 갓난아기라도..”

“에잇, 이래서 기사들은..”

‘!?’


주먹을 맞고 머리가 으깨진 녀석이 멀쩡하게 일어났다.

심지어 녀석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 털더니 흐트러진 머리칼까지 손가락으로 빗질하는 여유를 보였다.


처음부터 데미지가 없었나? 그렇다기엔 그녀의 목과 어깨 쪽엔 피가 흥건했다. 그런데 얼굴은 멀쩡했다. 저건 마치..


“초재생..”


바로 곁에서 시카의 중얼거림. 시카는 멀쩡하게 일어난 녀석을 창백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악의 포로여. 황제 폐하께서 아직 널 살려두는 이유를 알 것 같군.”

“살려둬? 아냐. 못 죽이는 거거든! 그걸 알면서도 황제는 날 계속 죽이려고 해. 변태 같은 놈! 그러면서 난 죽이지 말래. 그런 게 어딨어? 불공평하잖아. 쓰레기 황제!”

“내 앞에서 폐하를 모욕하는가!”

“또 죽이게? 해봐! 어차피 너희는 정의만 내세우면 여자애든 노인이든 갓난아기든 모조리 베어 죽여도 무죄잖아? 마음껏 죽일 수 있어서 좋겠네! 부러워라! 자, 죽여보라고!”


위험한 살기를 뿜어내는 그라칼 벡스를 코앞에 두고서도 녀석은 겁도 없이 빨간 눈동자를 빛내며 소리쳤다.

그러자 또다시 그라칼 벡스의 갑옷이 삐그덕거리며 거대한 주먹이 하늘로 올라갔다.


“감히 그런 망발을.. 기사의 법도에 따라 죽여달라 애원할 때까지 죽여주마.”

“그만.”


그때, 새까만 궤적이 그라칼 벡스의 발 앞에 꽂혔다. 뒤이어 하늘에서 흑기사가 내려와 창을 움켜쥐었다.

늘씬한 갑옷의 형태는 여성. 그라칼 벡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체격이지만 오히려 그라칼 벡스가 흑기사의 등장에 당황한 듯 뒷걸음질쳤다.


“투아르?”

“황제의 말씀. ‘손님들을 성으로 모셔오도록.’ 전부 비켜.”


흑기사의 손짓 한 번에 그라칼 벡스를 따르던 기사들이 재빨리 길을 텄다.

멀뚱멀뚱 있던 내 어깨를 헤이카가 쿡 찔렀다. 어째선지 헤이카는 저 흑기사를 가리키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멋있지? 내 친구야. 이제 들어갈 수 있겠다.”

“친구요..? 저게? 올드 아일랜드에 친구가 있었어요?”

“뭐라고 했어?”


귀도 좋다. 흑기사가 이쪽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와 투구를 벗었다.

검은 묶은 머리, 반짝거리는 자줏빛 눈동자를 가진 젊은 여자는 날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여기선 일단 굽실거려야지.


“아뇨.. 아닙니다.. 기사님..”

“안녕. 헤이카. 이 감염자는 누구?”

“안녕. 페이. 얜 우리 직원이야. 이름은 산.”

“눈이 마음에 안 들어. 눈알을 파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눈매 더럽다는 얘긴 많이 들었지만, 파내라는 소리까지 들은 건 처음이었다. 빌어먹을. 파낼 것까진 없다고 생각하는데.


“안 돼요. 페이. 손님이잖아요.”


하얀 머리의 소녀가 재빨리 달려와 나와 흑기사 사이를 가로막았다.

진짜로 파낼 생각이었는지 단검까지 뽑아들던 흑기사는 아쉽다는 얼굴로 홱 돌아섰다. 그런 흑기사의 앞에서 그라칼 벡스가 발을 굴렀다.


“훔! 페이 투아르! 황제 폐하의 말씀이란 증거를 대시오. 난 폐하께 이 ‘손님들’ 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소!”

“내 말을 못 믿어?”

“증거를 대기 전엔...”


말을 끝내기도 전에 흑기사의 창이 새까만 궤적을 남기며 움직였다.

똬리를 틀던 뱀이 한순간에 먹잇감을 덮치듯 그 폭발적인 속도는 그라칼 벡스의 갑옷에 순식간에 창날을 걸었다.


흑기사가 창을 잡아당기자 그라칼 벡스는 갈고리에 걸린 고기처럼 창에 끌려왔다.

훙, 하며 그 거대한 덩치의 기사가 위로 번쩍 들렸다. 심지어 흑기사는 그 상태로 창을 휘둘러 그라칼 벡스를 바다로 내동댕이쳤다.


“자, 잠깐! 바다는..”


마지막까지 무어라 소리치던 그라칼 벡스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보글보글 올라오는 공기 방울을 물끄러미 보던 흑기사는 그라칼 벡스가 데려온 기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른 건져. 무거워서 계속 가라앉으니까.”

“!!”


기사들이 허겁지겁 갑옷을 벗어 던지고 바다로 첨벙첨벙 들어갔다. 이제 그들의 주의는 우리가 아니라 온통 바다에 빠진 그라칼 벡스에게 집중됐다.


흑기사는 우리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빛을 보내고 앞장서 걸었다.


‘..일단은 된 건가?’


조금 당황스러운 상황이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올드 아일랜드라고 해도 결국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기사도 사람이고, 사람과 사람이 뭉친 곳엔 늘 다툼이 끊이질 않는 법이다.


우릴 미운털 박힌 외부인으로 보는 쪽이 있다면, 반대로 환영하는 쪽도 있다는 얘기다. 사실 후자는 기대도 안 하고 있었기에 이 상황이 더더욱 의외인 거였지만.


“얼른 가요! 용사님들!”


어느새 하얀 머리의 소녀가 우리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묘하게 꺼림칙한 새빨간 눈동자. 목에 걸려 흔들리는 펜던트는 이제 보니 분명 월교의 문양이었다.


‘월교가 왜 여기 있어?’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설마 이미 올드 아일랜드가 크루아틀에게 먹힌 게 아닐까 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떠올랐다.

먼 나라로 기사를 원정까지 보내 헤이카를 잡으라고 했던 황제 기사가 갑자기 우리를 환영한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런 내 어깨에 어느새 다가온 사무엘이 손을 얹었다. 그의 얼굴이 내 귓가에 가까워졌다.


“산 팀장님. 이건 아마 함정입니다.”

“..역시 그렇겠죠.”

“헤이카 회장 정도는 머스칼 혼자서 지킬 수 있겠지만, 황제 기사나 올드 나이트를 상대로 나머지 인원까지 지켜낼 순 없을 겁니다. 돌아가려면 지금뿐입니다.”


옆에 있던 머스칼도 나를 향해 후드를 끄덕여 보였다. 사무엘에 머스칼까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무시할 순 없었다.


난 고개를 돌려 잠시 바다를 보았다.

시라비아에서도 볼 수 있는 생명이 없는 잿빛 바다. 그 수평선 너머에 있을 짐승을 생각한다.

아시리아에서 들었던 짐승 대제의 노호, 늑대 짐승의 절절한 울음소리가 저 수평선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머스칼. 우리 전력이랑 연합 전력, 비싼 용병 죄다 긁어모으면 이길 수 있을까요?”

“크루아틀? 못 이기겠지.”

“황제 기사가 끼면?”

“거기서부턴 나라도 모르겠군. 황제 기사도 어지간하니까.”


역시 그 짐승한테 굴복하면서 살고 싶진 않다.

쓸 수 있는 수가 아직 남아있을 때 최대한 그 수를 긁어모아야만 한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고.


“가봅시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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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올드 아일랜드(4) - 마법사의 숲 +1 22.11.24 228 1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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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터닝 포인트(11) - 이클립스(Eclipse) 22.11.01 233 9 19쪽
133 터닝 포인트(10) - 죄악감 +1 22.10.31 206 11 20쪽
132 터닝 포인트(9) - 땅의 창끝 22.10.28 231 10 20쪽
131 터닝 포인트(8) - 족쇄 22.10.27 219 9 15쪽
130 터닝 포인트(7) - 아우터 +2 22.10.26 228 10 17쪽
129 터닝 포인트(6) - 아디마 케티르 22.10.25 213 11 17쪽
128 터닝 포인트(5) - 어셔 스콧 22.10.24 227 9 16쪽
127 터닝 포인트(4) - 전장의 불청객들 +1 22.10.21 232 11 15쪽
126 터닝 포인트(3) - 아시리아의 재해 22.10.20 238 10 17쪽
125 터닝 포인트(2) - 증오 속 호의 +1 22.10.19 221 10 15쪽
124 터닝 포인트(1) - 병문안 22.10.18 233 9 18쪽
123 괴수(怪獸) +1 22.10.17 237 10 19쪽
122 속는 자, 속이는 자 22.10.14 233 12 19쪽
121 갈림길 +1 22.10.13 224 11 13쪽
120 그의 욕망 +1 22.10.12 255 11 17쪽
119 협상 +1 22.10.11 237 11 18쪽
118 잿빛의 고향(8) - 중재자(Peacemaker) 22.10.10 235 12 16쪽
117 잿빛의 고향(7) - 두 여인 +1 22.10.07 265 13 19쪽
116 잿빛의 고향(6) - 희미한 그리움 속에서 +1 22.10.06 231 1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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