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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일반소설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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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77
추천수 :
623
글자수 :
659,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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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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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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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7쪽

Burden. 그대에게 옮은 감기

DUMMY

서울을 벗어난 한강변 호젓한 곳에 위치한 라이브 카페 <수선화>에 여우비의 첫 공연을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렸다.


<C-POP Artist>에서 주목받았던 싱어송라이터 팀은 으레 이 카페에서 공연하곤 했다.

순정남녀와 히아신스, 시나브로 등의 밴드가 여기를 거쳐 갔고, 이번 시즌에는 뮤컬트의 여우비와 TYK의 솔베이지가 여기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수선화>의 사장은 가장 손님이 많은 금요일 저녁 9시와 10시 타임에 여우비를 세우고 싶어 했다.

그래서 여원은 간단한 말 몇 마디로 이들의 시급을 5만 원이나 인상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우리가 뭐라고 일주일에 네 시간 공연하고 월 오백이나 벌어요?”

“내 말이.”


8시 55분.

서희와 은별은 공연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무대 밑 공간에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좀 떨려요.”

“그래도 넌 이런 데 많이 와봤다면서.”

“그땐 손님으로 왔었지 무대는 저도 처음이에요.”

“근데 넌 꼭 여기서 이걸 먹어야 돼?”


서희가 은별의 반대쪽을 보며 통박을 주었다. 그곳에는 아리와 그녀의 매니저인 나영이 나란히 앉아 치킨을 뜯고 있었다.

아리는 첫 타임 동안 두 사람의 공연을 지켜보며 조언해준 후 9시쯤 돌아갈 예정이다.


“그럼 어디서 먹어? 손님 테이블 가?”

“···.”

“여기 치킨 안주 되게 맛있어. 사실 나 이거 먹고 싶어서 온 거거든.”

“헐.”

“너도 하나 먹을래?”

“됐거든? 왜? 아예 맥주도 먹지?”

“맥주는 집에 가서 우진이랑 먹으려고. 걔가 지난달부터 일 끝나면 같이 술 한 잔 하자고 졸랐거든. 다음 주부터 현수 앨범 들어가야 해서 오늘 아님 안 돼.”

“아유.”


서희는 한숨을 쉬었다.

아리는 이러다가도 무대에만 올라가면 눈빛이 달라지고 감정에 몰입한다. 그런 프로다운 모습은 서희도 존경하고 있었다.


“여우비 분들 이제 준비해주세요.”


카페 직원의 말에 서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갈게.”

“편하게 해. 쫄지 말고. 알았니?”

“리틀 여원쌤? 나 안 쫄았거든?”

“풉!”


서희는 아리에게 또 통박을 주고 대기실을 나갔다.

은별은 장막이 내려진 무대 위 의자에 앉았고, 서희는 손님 테이블 맨 뒤에서 <어땠을까>를 시작하기로 했다.


“잠시 후 공연이 시작됩니다. 모두 정숙해 주세요.”


좌중의 소리가 모두 사라지자 테이블 한쪽에서 잔잔한 랩이 육성으로 튀어나왔다.


“무심한 문자 답장 못한 나. 수많은 생각 끝에 포기했던 나.”

“앗!”

“누르지 못한 버튼 눌렀다면 어땠을까.”

“와아!”


함성이 일어나자 서희가 마이크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여우비입니다.”

“와아아!”


서희는 도입부의 랩을 읊조리며 천천히 무대를 향해 걸었다.

동선 주변의 손님들과 하이파이브까지 하며.


“와아. 쟤 잘하네.”

“언니는 무대 체질인가 봐요.”

“나 내려간다.”

“네.”


손님 테이블과 무대를 단절해놓은 장막은 은별의 노래가 시작되며 올라가기로 되어 있었다.

아리는 서희의 등장 장면을 모니터로 지켜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은별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대기실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때 일이 터졌다.


“뮤직 스톱!”


서희가 랩을 하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반주를 멈춰 버렸다.

함성이 갑작스레 사라졌고, 테이블의 손님들은 멀뚱한 모습으로 그녀를 보았다.


서희는 장막 앞까지 천천히 걸어간 후 뒤를 돌아 조용해진 손님 테이블을 에둘러 바라보았다.


“저보고 연민정이라고 한 테이블 어디예요?”

“큭!”


손님 테이블에서 웃음이 터졌다.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저 무서운 여자 아니에요.”

“리틀 여원쌤은 내가 아니라 쟤네.”


아리는 뭔 일인가 싶어서 다시 무대로 올라왔다가 서희의 말을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희 오늘 첫 공연이라 많이 준비했어요. 근데 지금 손들어주시면 한 곡 더 부르겠습니다.”

“여기요!”


창가 테이블에서 한 여자가 손을 들자 서희가 그녀를 향해 가볍게 인사한 후 말했다.


“저한테 이유리님 닮았다고 많이들 말씀해주시는데, 그 말 들으면 감사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유리님한테 죄송한 마음이 먼저 들어요. 그분은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멋진 배우니까요.”

“네.”

“근데 연민정이라고 하시면 저는 솔직히 싫습니다. 그래서 친구들 사이에서 제 별명이 연민정이에요. 지독한 것들.”

“하하!”

“그래서 첫 곡을 바꾸겠습니다. 장막 올려주세요.”


장막이 걷히며 무대가 드러났다.


“와아!”

“민은별이다!”

“정단비 동생!”


손님들의 함성이 높아지자 은별이 마이크에 대고 정단비 아나운서의 멘트를 흉내 내어 말했다.


“안녕하세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하여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CBC 여덟 시 뉴스입니다.”

“하하!”

“저한테도 정단비 아나운서 닮았다고 많이 말씀해주시는데, 그래도 저희는 여우비입니다. 여우비의 강서희와 민은별로 기억해 주셨으면 해요.”

“예!”


서희가 은별에게 조용히 뭔가를 이야기했다.

은별이 무대 뒤에서 서희가 주문한 음악을 준비하는 동안 서희의 말이 이어졌다.


“손님께서 하필 연민정 말씀하시는 바람에 노래가 하나 떠올라 버렸어요. 그거 먼저 하고 <어땠을까>는 이따 부를게요. 괜찮죠?”

“예!”

“준비됐으면 바로 시작해 주세요.”


서희의 말과 함께 새로운 미디엄 템포의 곡이 재생되었다.

테이블의 손님들은 이 노래를 듣자마자 크게 웃었다. 이 노래는 배우 이유리가 연민정으로 열연했던 드라마의 메인 타이틀곡이다.

하지만 손님들은 금세 웃음을 지우고 서희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사랑했는데 우린 사랑했잖아> 원곡 : 란 / ‘왔다! 장보리’ OST


사랑했는데 우린 사랑했잖아

어떻게 그래 미칠 듯 아파와

울고 싶어 그대 품에 안겨.


둘이 걷던 이 길에 혼자 남겨져 걸어요.

둘이 함께한 아름다웠던 기억들

이 길을 걷다 보면 혹시 그댈 만날까봐

이렇게라도 보고 싶은 그대인 걸요.


사랑했는데 우린 사랑했잖아

어떻게 그래 미칠 듯 아파와

울고 싶어 그대 품에 안겨.


그대만 보게 하고 혼자가 되고 난 후에

내겐 너무나 소중하다는 걸 알았죠.


사랑했는데 우린 사랑했잖아

어떻게 그래 미칠 듯 아파와

울고 싶어 그대 품에 안겨.


길어진 하루의 뭘 해야 할지도 아무것도 몰라요.

바보처럼 그냥 울고 있죠. 그대 그리워 정말 그리워


잊지 말아요. 나를 잊지 말아요.

가슴엔 아직 남아있는 그대

보낼 수가 없는 나의 사랑.


사랑했는데 우린 사랑했잖아

어떻게 그래 미칠 듯 아파와

울고 싶어 그대 품에 안겨.





서희는 인트로 이후부터 일그러진 얼굴로 노래를 불렀고, 손님들은 그녀의 표정을 주시하며 조용히 노래를 들었다.

은별은 서희의 고음을 듣고 크게 놀랐다. 정완과 여원이 강조했던 대로 모든 고음을 때려서 냈을 뿐 아니라, 성락이 트레이닝하며 중점을 두었던 길고 일정한 음 처리까지 개선되었기 때문이다.


여우비로서 트레이닝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서희는 이 노래를 연습하라는 정완의 말에 왜 하필 연민정 드라마 OST냐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르는 지금, 깊은 밤 그와 함께 들르곤 했던 편의점 앞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 노래는 그때 정완의 말처럼 드라마와 관계없이 정말 아픈 노래였다.


“감사합니다.”

“와아아!”


서희는 함성을 받으며 은별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네가 솔로 먼저 해줘.”

“네.”


은별이 간단히 대답하고 마이크를 들었다.


“이 노래는 여러분과 만나기 위해 준비한 게 아니고, 고음이 많아서 언니가 부르기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우리 서희 언니, 박수로 격려해 주세요.”

“와아아!”

“언니 잠깐 쉬라는 뜻으로 제가 먼저 한 곡 부르겠습니다. 백아연 양의 노래 <이럴 거면 그러지 말지>예요.”


손님들은 은별이 부르는 <이럴 거면 그러지 말지>를 듣기 시작했다.

대기실의 아리는 눈을 크게 뜨고 서희의 노래를 감상한 후 나영에게 말했다.


“서희가 우진이보다 낫네.”

“뭐가요?”

“그 인간이 서희보고 뭐랬는지 알아? 누가 연민정 소리하면 휴지 씌우고 소맥 말아서 창문에 휴지 붙이는 퍼포먼스 하랬어.”

“나쁘지 않네? 반숙에 소맥.”

“그래. 그거.”

“그건 그 드라마 아니잖아요.”

“연민정 싫다니까 변혜영 하라는 거지. 하여튼 센스 구리다니까?”

“그거 했어도 손님들은 좋아했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저게 훨 낫지. 가수면 가수답게 노래로 말하는 게 맞거든.”


아리는 안 먹으려던 마지막 날개를 집어 들었다.

이것은 날개를 둘 다 먹으면 날아갈지 모르니까 하나만 먹으라던 우진에 대한 복수··· 는 핑계고, 그저 먹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서희와 은별은 각자의 솔로곡을 시작으로 <비 오는 아침>과 <어땠을까>로 이었고, 순정남녀의 노래 <누구나 뭐 하나는 잘한다던데>와 <낡은 수첩>을 불렀다.

관객이 백여 명이나 자리한 무대에서 연속으로 노래하는 게 처음이었던 두 사람은 다소 힘들어했다.

은별이 물을 마시며 숨을 돌리자 앞 테이블의 손님들이 서희에게 질문을 던졌다.


“첫 공연인데 안 힘드세요?”

“생각보다 힘드네요. 근데 여러분이 좋아해주시니까 괜찮아요.”

“여우비 팬카페는 안 들어오세요?”

“팬카페 회원이신가요?”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저는 팬카페가 있다는 건 아는데 들어가 본 적이 없어요. 저희가 하루 종일 노래랑 트레이닝을 하다보니까 체력도 달리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인터넷을 거의 못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랑 친구들한테도 연락 안 된다고 욕먹어요.”

“하하!”

“양해 부탁드려요. 조만간 팬카페 들어가서 글도 읽고 댓글도 남기고 하겠습니다. 팬 분들께 정말 감사드리고 죄송해요. 여기 계신 분들께서 제 얘기를 카페에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

“HAP는 누굽니까?”


서희는 이 질문을 듣자마자 미소를 띠었다.


“요새는 다들 그걸 제일 궁금해 하시더라고요. 제 지인들도 그렇고.”

“예!”

“사실 저희도 HAP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요. 그분의 곡은 늘 SS님한테 받았어요.”

“SS는 미투리 밴드의 기타리스트 맞죠?”

“네. SS님은 밴드 그만두시고 보컬트레이너가 되셔서 저를 가르치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여우비를 만들 때 그분한테 트레이닝을 부탁드렸죠. 트레이닝 끝나면 밤늦은 때라서 그분이 저희를 데려다주셨는데, 팬카페에 글 올리셨다는 분도 그때 보셨을 겁니다.”

“HAP가 SS인가요?”

“모르겠어요. 저희는 그거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없고 SS님과는 더 이상 연락이 안 됩니다. 전화를 아예 해지하셔서 다른 뮤지션 분들도 연락 못하고 있어요. 물론 더 이상 곡도 못 받겠죠.”

“아아.”

“노래가 참 좋죠. 그래서 저희도 아쉽습니다.”


이미 예상했던 질문이었기에 서희는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 이 질문을 받아넘겼다.

SS라는 이름은 세상에 알려져 있지만 HAP는 그렇지 않다. 정완은 자기 얼굴이 드러나는 것을 싫어했기에 서희는 이렇게라도 그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런데 또 동일인물과 관련된 질문이 나왔다.


“두 분, 남자친구는 있으세요?”

“없습니다, 없어요. 손님은 짝 있으시니 행복하시죠?”

“와하하하!”


서희의 너스레에 손님들의 웃음이 터졌다.

웃음이 잦아들자 은별이 말했다.


“언니나 저나 남자친구는 없는데, 누구 소개시켜 주겠다든지 이런 말씀은 삼가주세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가 눈이 굉장히 높아요.”

“와하하!”

“좋은 상대 찾으면 꼭 말씀드릴게요. 그때까지 저는 서희 언니가 애인이겠거니 생각하려고요.”

“예!”

“이제 마지막 곡입니다.”


서희의 말에 손님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 노래에 대한 에피소드가 생각나네요. 순정남녀의 매아리 씨가 고맙게도 저희와 친구가 되어 주었고 결혼식장에 초대해 주었습니다. 식장에서 제가 우진 씨한테 그랬어요. 오늘부터 ‘나의 아리랑’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아! 큭!”

“여러분께서 많이 좋아해주셔서 부를 때마다 진심으로 감사하는 노래예요. 며칠 전 방송된 저희의 1라운드 참가곡, <나의 아리랑> 부를게요.”

“와아!”


서희와 은별은 <나의 아리랑>을 불렀고, 테이블의 손님들은 눈을 빛내며 노래를 듣다가 박수로 화답한 후 앙코르를 외쳤다.

그러자 서희가 자기 솔로곡으로 준비했던 제시의 <Down>을 불렀다.


아리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두 사람을 격려한 후 돌아갔고, 10시 타임에도 테이블이 꽉 찼다. 어떤 손님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음식을 추가 주문하기도 했다.

서희와 은별은 자작곡 두 곡을 제외한 모든 노래를 바꾸어 두 번째 타임을 채웠고, 일곱 곡으로 구성된 레퍼토리의 마지막 곡은 앞과 같았다.


<나의 아리랑>이 끝난 후 앙코르가 아주 길게 외쳐졌다.


“네. 감사합니다.”


서희의 말에 테이블의 외침이 사그라졌다.

10시 50분이 되어가고 있으니 시간에 대한 걱정은 해결된 셈이다.


“제가 여기서 공연한다고 하니까 아리 씨가 그러더라고요. 첫 공연부터 앙코르 안 받으면 안 된다고.”

“와아아!”

“한 곡 더 부르겠습니다. 이건 저희 여우비 노래지만 아무도 모르실 거고 경연에서 부를 일도 없을 거예요.”

“아!”

“<수선화>를 찾아주신 손님들께 처음으로 공개합니다. 제목은 <그대에게 옮은 감기>예요.”

“와아아!”

“조용한 노래라 정숙을 부탁드립니다. 천천히 시작할게요.”


손님 테이블이 완전히 조용해진 후에도 서희는 초점 잃은 눈으로 한참 뭔가를 생각하며 감정을 잡았다.

서희와 은별이 차례로 고개를 끄덕이자 피아노와 기타 반주가 고요한 카페에 울리기 시작했고, 서희가 먼저 마이크를 들었다.





<그대에게 옮은 감기> 작사 : 강서희 / 작곡 : HAP


(서희's song)

사흘을 기다렸어요.

아름다운 친구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공간에서

난 그대를 생각하며 더 행복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웃어주는 그대가 난 왜 이리

귀엽게만 보이는지 더 모르겠어요.


내 눈이 떨려 와요.

다른 날과 다름없이 말하는데 활기차려 애쓰는

듯해 보여 내 어딘가 또 뜨거워져요.

놓칠 수 없는 그대 조심스런 기침소리에 떨어지는

작은 아픔 내 어딘가에 고여 오네요.


(은별's song)

내 마음 느껴지나요.

땀방울 맺힌 그대 이마를 짚어 훔쳐보고픈 아픔.

그대 코와 손끝에 걸린 작은 감기조차도

놓치고 싶지 않은 내 눈과 손에 담아내고픈 바람.

아마 나 그대에게 감기 옮았나 봐요.


(간주)


(은별's song)

외치고 싶어져요.

그대 때문에 내 마음에 감기 걸려 하루 종일 열난다고.

그대가 보이지 않았다면 아마 몰랐을 텐데.

보고 싶어지면 내 앞에 나타나 날 더 뜨겁게 한다고.

그대가 멋지지 않았다면 이러지 않을 텐데.


(서희's song)

하지만 나는 외칠 수가 없네요.

날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에도 아무 말 못해요.

그댄 내 얘기 듣고 싶어 하는데

뜨거워진 내 마음이 입을 막고 기침 삼키네요.


돌아선 그대의 뒷모습이 안타까운 밤.

그대 빈자리에 그리움이 채워지는 밤.

내 안의 감기가(감기가 더) 아파지는 밤.





이 곡은 정완이 우진에게 준 두 곡 중 하나다.


서희는 제이미와 유경이 연주한 가이드 곡을 듣자마자 제 수첩을 펼쳤다.

순정남녀의 결혼식 다음 날 정완이 감기에 걸렸을 때 눈물을 흘리며 적었던 메모를 보고 이 노래의 가사를 썼고 그날 바로 녹음을 마쳤다.

이후 사흘간 연습하여 이 공연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여원은 이 노래를 듣자마자 사내 프로듀서와 아티스트들에게 들려주었다.

여원을 비롯하여 노래를 들은 이들 모두가 카페에서 공연하는 데만 쓰기에는 아까운 노래라고 했지만, 서희가 공연에서 쓰겠다고 고집하여 여기에서 부르게 된 것이다.


<수선화>의 손님들은 노래를 들은 후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가 서희와 은별이 일어서고서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여우비였습니다.”

“안전하게 댁으로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앞으로도 늘 행복하세요.”

“와아아!”

“여우비 고생하셨어요!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노래 불러주세요!”

“감사합니다.”


서희와 은별은 손님들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인 후 무대 아래로 퇴장했다.

박수소리가 사라진 무대마저 감기에 걸린 듯 기나긴 여운을 남겼다.



***



11월 10일에서 11일로 넘어가는 자정.

CBC 별관 라디오 스튜디오에 ‘On Air’ 등이 켜졌고 우진이 작곡한 로고송이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내일은, 아니 오늘은 일요일입니다.”

“다들 즐거운 하루 보내셨나요?”

“모든 일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이 방송을 듣기를 바랍니다.”

“늘 청취자들의 숙면을 추구하는 방송.”

“여기는 <순정남녀의 편안한 밤>입니다.”

“저는 순밤지기 매아리.”

“순밤지기의 지기 서우진입니다.”


우진과 아리가 진행하는 CBC 주말 라디오프로 <순정남녀의 편안한 밤>이 시작되었다.

오프닝 멘트가 진행되면서 청취자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이 늘어났고, 두 사람은 앞에 놓인 태블릿 PC를 보며 글의 제목을 훑었다.


“오늘도 여우비에 대해 올라오는 글이 많습니다.”

“여우비에 대해 궁금한 걸 왜 저희한테 물어보시는 거죠?”

“아리 씨가 강서희 씨랑 친구니까 그렇죠. 여우비 분들을 지금 여기 부를 수는 없잖아요.”

“씨팝 지난주 방송에서 여우비가 부른 <나의 아리랑>이 공개된 후에 저희도 오프닝 곡으로 내보냈죠. 근데 오늘은 씨팝이 방송된 날도 아닌데 글이 많아요.”

“저희가 재작년에 공연했던 카페에서 여우비가 어제 첫 공연을 했는데, 거기서 나온 노래 때문이죠?”

“네. 거기 계셨던 손님 한 분이 그 공연을 녹화해서 동영상 사이트랑 여우비 팬카페에 올렸어요. 그게 하루 만에 조회수 10만을 넘었다고 해요.”

“저는 좀 놀랐습니다. 방송을 탄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SNS랑 동영상 사이트의 파급력이 그만큼 크단 얘기겠죠.”

“물론 노래가 그만큼 좋아서이기도 하고요.”

“저희 카페지기인 고명한 씨한테도 전화를 받았어요. 저희 팬카페 분들도 그 노래 듣고 싶어 한다고.”


아리가 마주 앉은 PD와 눈을 맞추고 시간을 잠깐 둔 후 말을 이었다.


“사실 저도 이 노래 방송에 내보내고 싶었거든요.”

“저도 그랬습니다.”

“근데 이게 발매된 노래가 아니라 방송에 내보내도 되나 해서 제가 따로 제작진한테 문의해서 승인을 받았어요. 서희 씨한테도 허락받고 음원을 입수했습니다.”

“아리 씨가 서희 씨랑 친구라서 좋네요.”

“저도요. 어쨌든 그래서 오늘 <순밤>의 첫 곡은 여우비의 노래 <그대에게 옮은 감기>입니다.”

“방송으로 나가는 건 저희 <순밤>이 처음이지요.”

“네.”

“노래 들으시고 전하는 말씀 듣겠습니다. 그리고 역시 <C-POP Artist season 5>의 참가자죠. 전민재 군이 부른 <Dramatic Love>로 이어드리겠습니다.”

“잠시 후에 올게요.”


서희와 은별은 회사 숙소에 누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자신들의 노래를 들었다.

서희는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왜요, 언니?”

“난 좀 그래. 이렇게 될 건 예상 못했는데.”

“좋은 거 아니에요?”

“다른 참가자들 노래도 많은데 우리 노래만 너무 많이 방송을 타고 있잖아.”

“그야 우리 노래가 반응이 좋으니까요.”

“시청자 분들도 마냥 좋게 보시지만은 않을 거야. 넌 부담스럽지 않아?”


서희의 말에 은별은 입술을 모으고 생각에 잠겼다.

자작곡을 인정받고 여러 프로에서 방송되면 인기는 자연스레 높아질 것이다. 은별은 그게 좋았지만, 서희는 스포트라이트가 자신들에게 쏠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며 역효과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이에 대해 아리는 ‘나도 너 같아서 TV 나가기 싫거든.’이라며 서희를 다독였다.


동생 서준으로부터 ‘엄마 아빠도 노래 좋다고 하고 친구들도 좋단다. 나도 인정.’이라는 문자가 도착했다.

하지만 서희는 답장하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한숨을 쉬는 것마저도 누군가에게 미안한 밤이었다.



***



서희는 <그대에게 옮은 감기>에 대한 음원 출시 요청을 거절했다.

뮤컬트 팀원들은 서희가 <C-POP Artist season 5> 외적인 곳에서 과하게 주목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팀원들 역시 트레이닝이 없는 날 대학가나 카페, 클럽 등에서 공연하기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이들의 멘토인 아리가 회사에 하루 종일 머물고 있지만 친구사이인 서희가 그녀와 대화하는 일은 드물었고, 이에 대해 서희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팀원들은 이것을 아리와 자신들을 위한 서희의 배려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문에 부담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저는 소울이잖아요. 그러니까 언니 보컬은 저보다 아리 언니나 예미한테 확인하시는 게 좀.”

“너도 듀엣 할 때는 소울로 안 부르잖아. 트레이너님 말씀대로 되는지 아닌지만 봐 주면 돼.”


한미연사의 리더인 명유경이 멘토 역할을 위해 회사에 출근하면 서희는 그녀에게 달라붙곤 했다.

제이미와 유경은 4라운드 탈락자이기 때문에 다른 팀원들은 어지간하면 두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 이에 관해 은별도 서희에게 이야기했지만, 서희는 ‘서울대 떨어졌던 선생님은 서울대 가고 싶은 학생 못 가르쳐?’라고 일축했다.


“그제보다 좀 좋아졌어요.”

“그래?”

“언니는 확실히 싱어송라이터가 맞아요.”

“왜?”

“기성곡보다 자작곡에서 장점이 보여요. 특히 <그대에게 옮은 감기>는 제가 언니 파트를 불러도 언니보다 못할 것 같아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니지.”

“아니에요. 노래가 완전히 언니 얘기라서 그런 것 같아요. 이걸 경연에서 이대로만 부르면 좀 잘됐을 텐데.”

“경연에서 부르기엔 <여우비>가 더 낫지 않아?”


유경은 서희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바닥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들었다.


“언니.”

“어?”

“은별이 언니 지금 어디 있어요?”


서희와 유경은 쉬고 있던 은별을 만나러 숙소로 갔다.


“혹시 <여우비> 가사 좀 바꿀 수 있어요?”

“어떻게?”

“이번엔 은별이 언니도 가사를 좀 써보는 게 어떨까 해서요.”

“내가?”

“노래 속에서 서희 언니는 서희 언니 얘기를 하고, 은별이 언니는 은별이 언니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으응.”

“두 분이 한 장소에서 같이 음악을 배우고 꿈꿨는데 서희 언니 얘기만 나오는 건 좀 이상해요. 은별이 언니도 생각이 있지 않았어요?”

“그렇긴 한데, 나는 내 솔로곡 말고는 가사를 써본 적이 없어. 그것도 언니가 다 다듬어줬고.”

“은별이 언니는 서희 언니한테 자기 얘기를 많이 해요. 그럼 서희 언니가 알아서 정리해줄 거예요. 두 분이 같은 생각이었던 걸 찾아서 그걸 합창으로 하고, 생각이 달랐던 부분은 각자 독창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두 분 다 감성이 잘 나올 거예요.”

“그렇겠지.”


은별은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지만 서희는 눈을 빛내며 유경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희 듀엣 노래가 다 그래요. 데이트하다 식당에 가서 뭘 먹으면 분위기나 음식 맛, 데코, 종업원들 얘기하고, 영화 보고 나서는 여주랑 남주 입장으로 싸움도 좀 해요. 그러다 우리는 이렇게 하자고 그런 얘기도 좀 많이 하고요.”

“아아.”

“뭐든 자꾸 얘기해야 생각 차이도 알게 되고 가사 쓸 거리도 좀 나와요. 아무것도 안하고 종이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단 뭐라도 자꾸 해보고 백 줄을 써서 한 줄이라도 건지는 게 낫죠.”


유경은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후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람들은 저희 팀 가사를 전부 제가 쓰는 거라고 좀 오해하더라고요.”

“그럼 아니야?”

“제임 오빠도 작사에 참여해요. 곡 하나에 들어간 지분은 7대 3 정도겠네요.”

“그럼 공동 작사로 넣어야 하지 않아?”

“오빠가 저작권은 꼭 반씩 나눠야 한다고 고집했어요. 혹시라도 나중에 헤어질 때를 대비해서요.”

“그렇구나.”


은별은 유경의 말에 수긍했지만 서희는 떨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의 아리랑>을 작업할 때 정완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서희는 정완이 만들었던 가사의 초안을 일부 수정하여 가사를 완성한 후 공동 작사로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정완은 ‘네 힘 반, 내 힘 반이야.’라며 두 번 다시 그 얘기는 꺼내지 말라고 했다.


“오빠 파트는 오빠가 얘기한 걸 제가 단어랑 문장만 좀 다듬는 거예요. 저는 오빠 말의 의미가 와 닿지 않으면 영어로 말해보라고도 해요. 그거 제대로 알아내려고 저도 영어공부 좀 하고 있어요.”

“그렇게까지 하는 거였어?”

“겨우 그걸로 되니까 다행인 거죠. 연인끼리 한 팀인 걸 세상이 다 아는데, 그 정도 소통도 안 되면 팀 그만해야죠.”


유경은 제가 말해놓고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제이미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많이 말한 적이 있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 가장 많이 말을 건 사람이 서희여서일 것이다.


“알겠어. 이번엔 나도 가사 써볼게.”

“네. 저도 여기 온 김에 좀 쉬었다가 가야겠어요. 오빠는 다섯 시간은 더 있어야 올 테니까.”

“그래. 조언 정말 고마워. 이따 같이 저녁 먹자.”

“네, 언니.”

“앞으로도 잘 부탁해.”

“뭘요. 저 들어갈게요.”


유경이 나가고 숙소에는 서희와 은별이 남았다.


“뭐하고 있었어?”

“노래 듣고 있었어요. 내일 카페에서 솔로곡 뭐 부를지 아직 안 정해서.”

“아. 나도 그거 정해야 하는데.”

“한숨 자고 일어나서 정해요. 언니 요새 너무 피곤해 보여요.”

“아무래도 나도 당분간 여기서 살까봐.”

“그래요. 저는 <여우비> 가사 생각해볼게요. 언니는 얼른 자요.”

“응.”

“밥 많이 먹고요.”


기실 따지고 보면 서희가 요새 물리적으로 힘들 일은 없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트레이닝과 카페 공연을 번갈아 가며 매일 하지만 하루에 두세 시간이고, 그 외에는 회사에서 자율적으로 연습하는 게 전부다. 연습도 노래하는 것보다는 노래를 듣는 비중이 더 크다.


그런데도 그녀는 매일 여섯 시간 이상 트레이닝할 때보다 요즘이 더 피곤했다.

큰 시험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정서적 압박이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고, 지난 라운드까지는 버팀목이 있어 자신도 기댈 수 있었지만 이번부터는 아니다.

즉, 그녀가 다른 누군가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일을 결정해야 하는 입장에 선 게 처음이었다.


‘배부른 소리겠지? 버팀목 없이 몇 년을 살아온 사람도 있는데. 그것도 자기 선택이 아니라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강제로.’


그 사람마저도 이 세상에서는 자기 자신 하나도 겨우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서희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으며 이어폰을 꽂았다. 그 사람이 연주했던 쇼팽의 <녹턴> 1번이 재생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작가의말

늘 들러주시는 분들께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 주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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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Aphrodite. 풀밭, 꽃, 그리고 꿀 20.06.16 167 10 21쪽
24 Round 4. 너를 잊지 않았듯 +2 20.06.14 152 9 24쪽
» Burden. 그대에게 옮은 감기 20.06.09 162 9 27쪽
22 Clue. 또 다른 오디션 +4 20.06.04 165 10 25쪽
21 Slough. 그녀의 취미 20.05.31 160 6 31쪽
20 Tears. 한계가 아닌 줄 알았는데 +6 20.05.28 180 11 23쪽
19 Abyss. 눈물조차 사치라고 느껴질 때 +6 20.05.24 175 9 22쪽
18 Restart. 욕심이 되어버린 밤 +2 20.05.21 193 9 27쪽
17 Separation. 신데렐라처럼 +4 20.05.17 181 11 24쪽
16 Friendship. 내일 일어날 일 +4 20.05.14 192 8 23쪽
15 Limitation. 임무를 마친 자의 여유 +2 20.05.10 189 11 21쪽
14 Round 3. 자신과의 싸움 +4 20.05.07 198 11 23쪽
13 Preparation. 조금 덜 치열해도 괜찮은 곳 20.04.30 209 10 29쪽
12 Wedding. 순정남녀가 순정부부로 20.04.23 223 9 29쪽
11 Goodness. 이럴 줄 알았으면 +2 20.04.21 222 8 23쪽
10 Round 2. 치열하게 따분한 날 +2 20.04.12 200 8 23쪽
9 Deeper. 녹음이 잘 되지 않는 이유 +8 20.04.09 235 11 22쪽
8 Fangs. 그녀의 실수 +8 20.04.07 233 12 28쪽
7 Round 1. 화살은 누가 쏜 걸까 +4 20.04.02 225 11 29쪽
6 Reoccurrence. 묻고 싶었던 말 +4 20.03.31 242 11 31쪽
5 Suggest. 좋은 제안이지만 +2 20.03.29 239 13 29쪽
4 Preliminary 2. 비 오는 아침 +2 20.03.24 265 11 29쪽
3 Preliminary 1. 저 사람들 또 +2 20.03.22 265 10 30쪽
2 Making. 만들어야 할 게 노래만은 아닌 팀 +4 20.03.15 352 13 28쪽
1 Prologue. 오래 전 약속 +4 20.03.15 710 16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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