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일반소설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연재수 :
54 회
조회수 :
13,515
추천수 :
623
글자수 :
659,060

작성
20.04.21 09:25
조회
222
추천
8
글자
23쪽

Goodness. 이럴 줄 알았으면

DUMMY

지노에 이어 인길의 차례였다.


“여우비한테는 노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확실히 있어요. 지난 라운드에서 <나의 아리랑> 들었고, 제가 <비 오는 아침>도 들어봤는데, 그 에너지들이 다 다르면서도 세요. <망한 하루> 역시 마찬가지예요. 근데 이 노래는 기운 빠지게 만드는 에너지가 세서 시장에 내놓았을 때 반응이 어떨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재미는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확실히 따분함이란 감정의 해석에 있어 훌륭했어요. 한편으로 저는 퍼포먼스 쪽이다 보니 두 사람의 행동을 자세히 봤는데, 은별 양은 의자에 앉을 때도 정자세가 아니라 삐딱하게 앉았고, 노래할 때도 몸을 대충대충 흔들었죠. 아까 하품했던 거, 오디션 참가자라고 보기 힘든 행동이었는데 이것도 의도한 거죠?”

“네.”

“저 친구들 자세히 보면 얼굴 색조화장도 자연스럽지 않아요. 이것도 노래에 맞게 대충 찍어 바르고 나온 거죠. 따분한 노래 부르려고 그렇게 한 게 이해는 가는데, 다음부터 멀쩡한 얼굴들 그렇게 쓰지 말죠?”

“명심하겠습니다.”

“까르르!”


여원의 말에 서희가 냉큼 답하자 객석에서 또 한 번 웃었다.


“곡 자체는 나른했지만, 거기에 기승전결 포인트가 다 있으니 따분한 분위기에서도 듣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지점이 있었죠. 이번에도 역시 제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잘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인길에 이어 여원이 마이크를 들었다.


“생각해 보니 제가 여기서 참가자 화장 갖고 얘기한 게 처음이네요. 앞으로 저 친구들 심사하려면 가수나 보컬트레이너뿐 아니라 여자의 관점으로도 봐야겠어요. 저 친구들이 저랑 다른 참가자들에게 하나의 지침을 준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저도 즐겁게 들었습니다. 여우비는 밋밋한 노래마저도 귀를 끌어당길 능력을 보여줬으니 어떤 감성도 해석이 가능할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지노 심사위원이 얘기할 줄 알았는데 안 한 게 있어서 첨언하자면, 저는 <어느 따분한 날>에서 서희 양의 랩 중에 ‘우리 취준생은 전부 죄수다’ 여기 듣고 씁쓸했어요. 취준생이라서 따분해 하는 것조차도 스스로 눈치를 보는 현실이 느껴져서였죠. 순정남녀의 <편의점 별곡>도 그렇고, 요새 이런 노래가 많이 나오는 건 그만큼 세상이 고단해서겠죠.”


여원의 말에 서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 양은 지난번에 제가 고음을 때려서 내라고 했는데 계속 랩만 하길래 오늘은 확인 못하나 했다가, 맨 마지막에 이런 날은 지웠으‘면’에서 탁 때려서 놀랐어요. 딱 한 부분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제가 지적했던 부분을 고치느라 연습 많이 한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은별 양은 지난 라운드에서 몸에 힘을 완전히 빼고 잘 불렀는데 오늘은 불안했고, 특히 벤딩(bending)이 깔끔하지 않았어요. 따분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다보니 자세가 흔들흔들해서 그랬는데, 퍼포먼스 물론 중요하지만 보컬의 안정성까지 해쳐 가면서 하면 안 돼요. 지난번에 잘했던 부분이니까 이건 실력이 아니라 실수라고 볼게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임팩트로 보자면 오늘도 서희 양 쪽으로 무게가 쏠렸는데, 오늘 같은 경우엔 어쩔 수 없겠어요. 각자의 포지션이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 무대기 때문이죠. 서희 양의 랩이 상당히 세서 가려진 면은 있지만, 은별 양이 가진 보컬의 힘도 뒤지지 않았어요. 말하듯이 해야 할 곳에서 말하듯이 하고, 힘을 줘야 할 부분에서 힘주고, 메인보컬로서 보여줄 수 있는 건 모두 보여준 무대였다 봅니다. 여기까지예요.”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수휘가 고개를 저으며 마이크를 들었다.


“제 디스든 뭐든 좋습니다. 저는 오늘 두 사람한테 졌어요.”

“아닙니다.”


서희가 냉큼 답했지만 수휘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는 <어느 따분한 날>을 작곡할 때 그냥 이런 노래도 있었으면 해서 만들었는데, 이상한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아주 치열하게 따분했어요. 따분함을 보이려는 연기가 아니라 무대 올라올 때부터 노래가 끝날 때까지 전부 따분 그 자체였습니다. 따분한 걸 싫어하는 제 성향까지 파악해서 아주 멋지게 노래를 만들었고 목소리도 맥 빠지게 나왔고, 특히 저는 편곡이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망한 하루>는 드럼에 피아노 소리만으로 노래를 잘 살렸어요. 처음에는 그냥 따분하다가 나중엔 보컬과 연주가 모두 좀 다른 분위기로 갔는데, 그것마저 감성의 흐름에 일치되어서 잘 들렸죠. 따분한 노래를 듣고 감동받았다고 하면 이상하지만 어쨌든 감동했습니다.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제 심사는 이게 다예요. 근데 여우비를 보니 걱정되는 점이 있어서 그 얘길 할게요.”


수휘는 표정을 굳히고 말을 이었다.


“여우비 두 사람은 순정남녀의 팬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두 팀은 음악적으로 닮은 부분이 없어요. 근데 저 친구들 노래를 들으면 자꾸 순정남녀가 생각난단 말이에요. 공통점이라고는 주 장르가 미디엄 템포 위주의 발라드라는 것뿐인데.”

“그러고 보니까 그러네요.”


순정남녀 소속사의 여원도 이 말에 동의했다.

그러자 지노가 말했다.


“생활 밀착형 가사를 쓴다는 공통점은 있는데, 그건 여우비도 나를 위해 노래하는 친구 아닙니까?”

“그 생각도 해봤는데 여우비 노래는 그렇게 안 들리더라고요. 친구는 친구인데 조금 덜 친하고 거리가 느껴지는 친구랄까···. 근데 <망한 하루>를 듣다 어렴풋이 알게 됐어요. 순정남녀랑 여우비는 듣는 이들의 공감을 유도하는 건 같은데 그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는 거.”

“어떻게요?”

“순정남녀는 이렇다고 말하면 다른 사람이 듣고 ‘그래! 나도 그렇다고.’라고 하는 거고, 여우비는 ‘난 이랬는데 넌 어때? 공감하지?’라고 하면 ‘응’이라고 나오는 차이라고 보입니다.”

“아.”

“저는 여우비가 장기적으로 활동한다면 전자가 더 나은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서희의 답변에 수휘는 고개를 한참 끄덕이다 말을 이었다.


“또 한편으로 저 둘을 떼어놓으면 어떨까 합니다. 순정남녀는 앨범에 솔로곡을 넣지만 자선 콘서트 외에는 그 곡을 부르지 않죠. 우진 군과 아리 양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라 솔로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근데 저 두 사람은 그런 관계가 아니라서 한계도 안 보여요.”

“하긴. 저는 서희 양만 데려가서 트레이닝 시켜볼까, 그런 생각은 해봤습니다. 랩이랑 노래 둘 다 향상될 여지가 있어요.”

“저도 은별 양만 캐스팅하면 어떨까 했죠.”


지노와 여원이 차례로 답했고 몇몇 참가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희와 은별은 서로를 마주보았다가 다시 앞을 보았다.


“좋게 말하자면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거고, 반대로는 두 사람 다 이도 저도 안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두 사람은 앞으로 이 둘 중 어느 쪽인지를 보여줘야 해요.”

“명심하겠습니다.”

“무대가 아쉬워서 이런 말하는 건 아닙니다. 오늘 정말 훌륭했어요. 수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두 팀 순위 정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언클리셰 멤버들도 무대로 나왔고 심사위원들은 인길 주변에 모여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 인길이 마이크를 잡았다.


“심사 결과 발표하겠습니다. 여우비는 9조 1위로 다음 라운드 진출을 확정했습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언클리셰 팀은 최종 결과 기다려 주세요.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서희와 은별은 무대 뒤로 나오자마자 언클리셰의 주연을 안아주었고 선호와 효길과는 악수를 나누었다.


“고생했어. 노래 잘했는데 아쉽다.”

“아니요. 언니들이 더 잘했죠.”

“정말 잘 들었습니다. 누나들 멋있었어요.”

“고마워. 좋은 결과 있을 거야.”


두 팀이 인사를 마치자 제작진이 말했다.


“두 팀 바로 인터뷰 갈게요.”

“대기실 잠깐만 들렀다가 가겠습니다.”

“네.”


서희와 은별은 곧바로 정완을 찾았다.

정완은 휴게실에서 빵을 먹다 이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도시락 없어요?”

“다 떨어졌대.”

“하루 종일 굶었는데 제대로 드시지.”

“이것도 맛있어.”


서희는 정완의 더없이 환한 미소에도 평소와 다르게 마음이 아팠다.


“축하한다. 근데 당연한 거야. 잘했으니까.”

“감사합니다.”

“뭘.”


정완은 서희의 말에 짧게 답한 후 시선을 내리깔고 빵을 먹었다.

은별이 말했다.


“심사위원님들 하시는 얘기 전부 PD님이 전에 했던 거였어요.”

“맞아요.”


은별의 말에 서희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정완은 담담하게 물을 마시고 말했다.


“저분들이 얘기하시는 건 격이 다르지.”

“PD님 혼자서 네 분이랑 싸워서 이긴 것 같아요.”

“3대 4야. 이건 심사위원들 뜻에 비슷하게만 따라가도 우리가 이기는 게임이고···. 인터뷰하러 가야지?”

“네.”

“근처에 있을 테니까 끝나면 톡 해.”


서희와 은별은 정완이 나가는 모습을 보다 인터뷰실로 갔다.


“3라운드에 진출한 소감 말씀해주세요.”

“저희를 올려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아직 실감은 안 나요.”

“지난번과는 또 다르네요. 그때는 최선을 다했고 후회가 없었는데 이번엔 아쉬운 게 있었어요.”

“담여원 심사위원님께 보컬 지적받아서 그런가요?”


작가의 물음에 은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 부분은 연습할 때도 실수한 적이 있어요. 아무리 따분해도 노래는 제대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연습했는데, 무대에서 긴장해서 그런지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언니는 완벽하게 했는데.”

“저는 지난번에 지적받은 부분을 고치려고 고음 때리는 것 많이 신경 썼어요. 은별이도 다음 라운드에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예요. 따분하지만 않았음 잘했을 테니까요.”

“언클리셰와의 대결은 어땠어요?”

“언클리셰 노래 정말 좋았어요. 둘 다 자작곡처럼 느껴졌어요. 넋 놓고 들었는데 결과가 이래서 아쉬워요.”

“선호랑 효길이도 잘했지만, 같은 여자다보니 주연이한테 배워야 할 게 많다고 느꼈어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볼 계기가 됐습니다.”

“3라운드는 캐스팅 오디션인데, 가고 싶은 회사가 있나요?”

“저는 뮤컬트 엔터에 가고 싶어요. 저희가 좋아하는 순정남녀도 거기 있고, 뮤지컬 배우 분들도 보고 싶어요.”

“저도요.”


서희와 은별은 인터뷰를 마치고 합격자 대기실로 왔다.

그 사이에 10조의 경연이 끝났고 3라운드에 진출할 팀도 모두 가려졌는데, 언클리셰는 안타깝게도 최종 탈락하고 말았다.

잠시 후 메인 작가인 방혜아가 들어왔다.


“오늘은 인터뷰 한 번 더 있어요. 심사위원님들께서 3라운드에서 각 팀이 수행할 미션을 협의 중인데 금방 끝날 거예요.”

“네.”

“호명하는 팀은 인터뷰실로 오세요. 그 자리에서 미션 확인하고 소감 말하고 퇴근하면 돼요. 오늘 고생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어?”

“안녕하세요!”


혜아가 나가기도 전에 수휘가 대기실에 들어와 서희와 은별에게 왔다.


“SS 또 갔냐?”

“네.”

“내 얘기 전했어?”

“네. 수휘 심사위원님 말씀 듣고 저희한테 한 마디만 전하라고 했어요.”

“뭔데?”

“지금은 선배님이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어휴!”


수휘는 한숨을 내리쉬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표방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면 안 된다는 뜻일 테고, ‘지금은’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은 전에는 자유로운 영혼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정완은 홍태로 인해 마음속에 화(火)가 가득했던 시절에 자신의 휘민락 영입 제안을 거절했다. 두뇌회전이 비상하고 행동의 앞뒤가 치밀한 정완이니만큼 그때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증거로 남겼을 수도 있다.

따라서 정완의 말은 수휘를 향한 경고였다.


수휘는 정완이 음악에 뜻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는 정완이 음악에 뜻 없는 것 치고 너무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여 서희와 은별을 키워내는 게 안타까웠다.


“그놈 너희 말 안 듣지?”

“···.”

“알았다. 마음대로 하라고 해.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수휘가 나가자 합격자들이 차례로 호명되기 시작했고, 인터뷰를 마친 합격자들은 곧바로 퇴근했다.

머지않아 여우비도 다시 인터뷰실에 들어갔다.


“미션 확인하세요.”

“네. ···아!”

“이게···.”


두 사람은 미션지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C-POP Artist season 5>

여우비 3라운드 캐스팅 오디션


1. 연도별 지정곡 : 2009~2010년에 발표된 신곡(리메이크가 아닌 곡)

2. 심사위원 미션곡 : 은별의 비중이 더 높은 기성곡


* 둘 다 기성곡이어야 합니다. 자작곡은 안 됩니다.

* 3라운드 녹화는 10월 13일에 있습니다. 오전 8시 30분까지 스튜디오로 오세요.





“자작곡 부르지 말라고요?”

“심사위원님들은 우리가 자작곡에 강하다고 생각하셨나 보네.”


서희는 고개를 주억거리다 제작진에게 물었다.


“가사도 못 바꾸나요?”

“아니요. 일부 개사랑 편곡은 가능합니다.”

“네.”

“미션 확인한 심정이 어때요?”


작가의 말에 은별이 서희를 힐끔 본 후 먼저 말했다.


“씨팝 제작진 분들은 좋아할 시간도 안 주시네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근데 저희 거부권 있죠?”

“네. 오늘 조 1위였으니까 있어요. 쓰려고요?”

“은별이랑 상의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작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예정에 없던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는 은별 양이 중심이 되는 노래를 불러야지요.”

“네.”

“혹시 지금 떠오르는 노래 있나요?”


은별이 뭔가를 말하려다 머뭇거렸다.

둘의 눈이 마주쳤고, 서희가 고개를 끄덕이고서야 은별이 말했다.


“있긴 있는데···.”

“뭔데요?”

“<내면의 전쟁>이라는 노래예요. 자아성찰에 대한 노래인데 중 1때 그 노래 듣자마자 울었거든요. 제 이야기 같아서.”

“누가 부른 노래예요?”

“스토니 스컹크요.”


서희는 제목과 가수 이름을 듣고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가 인터뷰가 끝난 후 관련 내용을 검색하고 <내면의 전쟁>을 들은 후 사태가 심각함을 직감했다.

스토니 스컹크는 한국 레게의 1인자로 꼽히는 스컬과 힙합 신에서 유명한 프로듀서인 쿠시로 구성된 남성 듀엣이고, 특히 <내면의 전쟁>을 비롯한 3집의 모든 곡은 레게였다.


정완 역시 미션지를 보다가 은별이 말한 제목을 듣고 바람 빠진 웃음을 쏟았다.


“와우. 힙합도 답 없는데 레게라니. 푸후후후.”

“전 레게는 <칵테일 사랑>(마로니에) 말고는 불러본 적도 없어요.”

“꼭 이거 안 해도 돼요.”


은별의 말에 정완이 고개를 저었다.


“딴 거 해요.”

“아니. 난 <내면의 전쟁> 좋아. 하자.”

“그럼 다른 장르로 편곡해요.”

“싫어.”


정완이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수휘 선배 진짜 감 떨어지셨다니까.”

“네?”

“우리 팀이 발라드만 한다고? 프로듀서도 모르는 한계를 누가 마음대로 긋는데?”

“풋!”


서희는 입을 막고 웃으며 정완을 힐끔거렸다. 정완이 유독 수휘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묘하게 발끈하는 모습이 굉장히 귀여웠다.

그래서 서희 역시 시원하게 결론을 낼 수 있었다.


“해요. 미션지 보자마자 생각난 노래니까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어차피 얘 위주로 노래해야 하니까요.”

“그래. <내면의 전쟁> 하면 은별이 비중은 저절로 높아질 거다. 딱 맞아.”

“너 노래 잘 골랐어.”


정완과 서희가 흔쾌히 동의했지만 오히려 은별이 불안해하며 말했다.


“언니 이런 노래 불러본 적 없다면서요.”

“그러니까 이참에 한 번 제대로 불러보지 뭐.”

“하아.”

“이 노래 좋아. 어차피 많이 연습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우리 노래가 될 거야.”

“알겠어요.”


정완이 재차 채근하자 은별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희들 지금 시간 있어?”

“지금요?”

“할 얘기가 있어서 커피나 마실까 하는데.”

“죄송한데 저, 일찍 들어가고 싶어요.”


서희의 말에 정완이 차의 시동을 걸려다 말고 뒤돌아보았다.


“왜?”

“조금 힘들어서요.”

“그래. 바로 너희 집으로 갈게. 이거 받아.”


정완은 서희에게 USB 메모리와 봉투 두 개를 건넨 후 차를 출발했다.


“휴가는 수요일까지야. 목요일 저녁에 학원으로 와.”

“너무 길지 않아요? 3주도 안 남았는데.”

“수요일에 순정남녀 결혼하잖아. 너희들 거기 가서 하객들이랑 신부까지 오징어 만들고 와.”


서희와 은별은 정완의 농담에도 웃을 수 없었다.


“PD님은요?”

“난 못 가.”

“왜요?”

“알 거 없어.”

“하아.”


서희는 한숨을 쉬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우비가 만들어지던 날과 다름없는 정완의 말을 듣고 나니 문득 3년 전과 다름없어진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열린 봉투는 기부금이니까 너희들 낼 때 같이 내. 밀봉된 봉투는 편지니까 서우진한테 주고, 공연 다 끝나고 조용한 곳에서 부부가 같이 읽어달라고 전해. 못 가서 미안하다고 얘기해 주면 더 좋고.”

“어떻게 그래요. PD님 덕분에 저희가 초대받은 건데.”

“너희들은 거기 가고 싶잖아.”

“가고야 싶죠. 근데···.”

“서희야. 부탁할게.”

“···.”

“거기서 너희들이 내 몫까지 축하해주고 와.”

“네.”


정완은 서희의 힘 빠진 답을 듣고 화제를 바꾸었다.


“그리고 이번 휴가에는 과제가 있어.”

“뭔데요?”

“USB엔 예선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작업했던 파일 다 들어 있어.”

“기성곡도요?”

“응. 연습곡까지 다 있어. 음원이랑 MR, 보컬 파일이랑 악보까지 전부. 그리고 너희들 신곡도 세 개 있어.”

“신곡이요?”

“듀엣곡 하나랑 각자 솔로곡.”

“네?”

“경연곡 넷 중에 셋은 이미 썼지. 나머지 하나는 3라운드 자작곡으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이번 미션이 기성곡뿐이니 듀엣곡은 그냥 자유롭게 쓸게. 최대한 빨리.”


서희와 은별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셋이 함께 하는 시간의 끝이 눈앞에 다가와 버렸다.


“신곡은 음원만 빼고 다 있어. MR이랑 가이드 노래도 있으니까 가사 쓸 때 참고해. 각자 솔로곡에 가사 쓰는 게 과제야. 경연이랑 상관없는 거라서 휴가 때 했으면 하는 거고.”

“네.”

“가사 써 오면 녹음해서 음원까지 만들어주겠지만, 안 써도 뭐라고는 안 할 거야. 계약상 녹음까지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 캐스팅 오디션 날 계약 끝이에요?”

“응.”


은별의 물음과 정완의 답변이 나오기가 무섭게 차가 멈추었다.

서희의 집 앞에 도착하자 정완이 차문을 열며 말했다.


“은별이 차에 있을래?”

“아니요. 같이 가요.”


정완은 서희의 집 현관문까지 걸으면서도 곡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희들이 휴가 기간에 나머지 기성곡도 정해줬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내면의 전쟁>이랑 관련되는 걸로 해. 미리 결정되면 톡 하고.”

“네.”

“너 아프다는데 일시켜서 미안하다.”


서희는 정완과 눈이 마주쳤다가 고개를 푹 숙이며 저었다.


“안 해도 되니까 무리하지 마.”

“알았어요. 조심해서 가세요. 너도.”

“네, 언니. 쉬세요.”


서희는 정완을 향해 인사한 후 현관문을 닫았다.

조금 전 그가 미안하다고 말했을 때부터 가슴이 따끔거렸다.


“하아아.”


서희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창문에 붙어 섰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로 정완과 은별이 나란히 걷다가 사라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커피 마실 걸.”


서희는 정완이 밥을 먹었으면 해서 은별에게 부탁했지만 정완은 경연이 끝나자마자 빵을 먹었다. 그는 아마 은별이 밥 먹자고 해도 고개를 저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두 사람을 보내고 나니 마음 한쪽에서부터 싸한 기운이 느껴졌다.


“또 사흘을 어떻게 보내지···.”


학원 건물에 들어서면 늘 정완이 연주하는 쇼팽의 피아노곡이 들리곤 했고, 서희는 그 곡을 들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계단을 오르곤 했다.

앞으로 사흘은 정완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곡도 들을 수 없으리라.


서희는 기운이 쭉 빠진 모양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았다.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몸과 마음이 뒤늦게 아프기 시작했다.


“오빠.”

“···.”

“배 안 고파요?”

“안 고파.”

“어디서 뭐라도 먹고 갈래요?”

“생각 없어. 피곤하고.”

“커피 마시고 싶다면서요.”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랬던 거야. 얘기 다했고.”


사거리에 멈추었던 차가 출발하자 정완이 말했다.


“은별아.”

“네.”

“서희 아픈 거 아니지?”

“네?”

“서희야, 너야?”

“어···.”


예상치 못했던 데다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은별이 답을 못하고 우물거렸다.


“네가 이러겠다고 했어?”

“아, 아니. 언니가 그랬어요. 나보고 오빠 밥 좀 먹이라고.”

“다행이네.”

“뭐가요?”

“걔 안 아프니까.”


은별이 굳은 얼굴로 정완을 빤히 보았다. 운전 중이어서 눈을 마주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애써 밝게 말했다.


“와아. 오빠 너무하네.”

“뭐가?”

“아무리 전여친이래도 어떻게 내 앞에서 다른 여자 안 아프다고 다행이래?”

“전남친한테 다른 여자 떠밀어주는 넌?”


은별은 또 대꾸하지 못했고 대화가 끊겼다.

차가 은별의 집 근처에 멈추고서야 은별의 입이 열렸다.


“오빠.”

“···.”

“서희 언니, 어떻게 생각해요?”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지.”


은별은 정완의 막힘없는 답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자존심이‘었’다고요? 지금은 아니에요?”

“부질없어.”


정완은 짧게 답하고 차에서 바로 내렸다. 두 사람은 짧은 길을 걸었다.

은별은 정완과 단둘이 있을 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오빠.”

“···.”

“서희 언니, 오빠 좋아해요.”

“그 말은 안 들은 걸로 할게.”

“왜요?”

“너한테 실망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아.”


은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 이야기가 제 입에서 나오면 안 될 말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은별이 아는 서희는 앞으로도 제 마음을 다른 누구에게 다 이야기해도 정완에게만은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은별이 있든 없든.


“시간이 많이 지나긴 지났나보네요.”

“응.”

“옛날 같았음 오빠랑 이런 말하는 거 상상도 못했을 텐데.”


올려다본 하늘에는 잿빛 구름만 어렴풋이 보였다.

별이라도 박혀 있음 얼마나 좋을까.


“변했네요. 오빠나 나나.”

“···.”

“내가 이거 해달라고 안 했음 우린 그냥 좋은 추억이었겠죠?”

“이 약속까지 지키면 더 좋은 추억이 되겠지. 너나 나나 서로 말고 추억도 없으니까.”


현관문 앞에 마주섰다.

은별이 말했다.


“난 꿈 충분히 이뤘어요. 무대에도 서봤고 박수도 받았으니 됐어요.”

“넌 더 올라가고 싶잖아.”

“그래도 내가 원하면 이 계약 끝낼 수 있죠?”

“이거 그만하고 싶어?”


은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완은 텅 빈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해. 내일 내가 단톡에 올릴게.”

“···.”

“고생했다. 들어가 쉬어.”

“잘 가요.”


정완은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몸을 돌렸다.

현관문에 기대어 선 은별의 입술이 뒤늦게 일그러졌다.


아무리 억지로 하는 일이라도 어떻게 생각해 보란 얘기도 안 해요?

내가 그 얘기해주길 기다렸던 거예요? 그렇게 내가 싫어요? 네?

됐어요. 미안한데 그냥 해야겠어요. 나 그만두면 서희 언니도 더 못할 테니까.

나 때문에 죄 없는 언니가 아프면 안 되니까!


때늦은 한숨이 길게 떨어졌다.


작가의말

[오디션] 1편을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계시지요..

그 작품 주인공이었던 우진과 아리, 결혼합니다.

이 둘은 슬슬 비중이 커질 겁니다. 지켜봐 주시면 감사하지요.


한 편 더 올리면 종이책 기준 1권이 끝납니다.

그 후에 다음 연재분 검토를 위하여 1주일만 쉬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릴게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99 욱일302
    작성일
    20.04.21 11:56
    No. 1

    갈수록 정완의 정체가 궁금해지네요 어떻거 모르는 사람이 없네요 건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0 진사로
    작성일
    20.04.23 02:17
    No. 2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정완의 역할이 상당히 많은데...
    (귓속말) 다음 편에 나옵니다.
    이따 올릴게요.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오디션(Audition) 2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5 Aphrodite. 풀밭, 꽃, 그리고 꿀 20.06.16 168 10 21쪽
24 Round 4. 너를 잊지 않았듯 +2 20.06.14 153 9 24쪽
23 Burden. 그대에게 옮은 감기 20.06.09 164 9 27쪽
22 Clue. 또 다른 오디션 +4 20.06.04 165 10 25쪽
21 Slough. 그녀의 취미 20.05.31 161 6 31쪽
20 Tears. 한계가 아닌 줄 알았는데 +6 20.05.28 181 11 23쪽
19 Abyss. 눈물조차 사치라고 느껴질 때 +6 20.05.24 176 9 22쪽
18 Restart. 욕심이 되어버린 밤 +2 20.05.21 193 9 27쪽
17 Separation. 신데렐라처럼 +4 20.05.17 184 11 24쪽
16 Friendship. 내일 일어날 일 +4 20.05.14 192 8 23쪽
15 Limitation. 임무를 마친 자의 여유 +2 20.05.10 190 11 21쪽
14 Round 3. 자신과의 싸움 +4 20.05.07 198 11 23쪽
13 Preparation. 조금 덜 치열해도 괜찮은 곳 20.04.30 209 10 29쪽
12 Wedding. 순정남녀가 순정부부로 20.04.23 225 9 29쪽
» Goodness. 이럴 줄 알았으면 +2 20.04.21 223 8 23쪽
10 Round 2. 치열하게 따분한 날 +2 20.04.12 200 8 23쪽
9 Deeper. 녹음이 잘 되지 않는 이유 +8 20.04.09 237 11 22쪽
8 Fangs. 그녀의 실수 +8 20.04.07 233 12 28쪽
7 Round 1. 화살은 누가 쏜 걸까 +4 20.04.02 225 11 29쪽
6 Reoccurrence. 묻고 싶었던 말 +4 20.03.31 242 11 31쪽
5 Suggest. 좋은 제안이지만 +2 20.03.29 239 13 29쪽
4 Preliminary 2. 비 오는 아침 +2 20.03.24 265 11 29쪽
3 Preliminary 1. 저 사람들 또 +2 20.03.22 267 10 30쪽
2 Making. 만들어야 할 게 노래만은 아닌 팀 +4 20.03.15 353 13 28쪽
1 Prologue. 오래 전 약속 +4 20.03.15 713 16 2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