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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일반소설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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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13
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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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59,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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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7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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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Separation. 신데렐라처럼

DUMMY

서희는 정완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누가 옆에서 놀래기라도 한 듯 심장이 쿵 떨어졌다.


“서희야.”

“네?”

“은별아.”

“네.”

“너희들 생방송 가고 싶어?”


예상치 못한 질문에 서희와 은별이 대답을 머뭇거렸다.


“너희들도 이제 이게 엄청난 기회인 걸 잘 알 거야.”

“네.”

“그래서 가수가 꿈이든 아니든 난 너희들이 여기서 끝장을 봤으면 좋겠어. 이런 기회는 다시없을 테고, 다른 생각은 떨어지고 나서 해도 늦지 않으니까.”

“네.”

“너희들은 전쟁터 한가운데에 있어. 적장을 잡기 위해 이미 수천 대군을 쓰러뜨린 군인 같은 상황이지. 여원님이 말씀하셨듯이 너희들은 내일부터 정신없을 거야. 그런 상황에서도 멘탈 잡고 더 올라가야 하고.”


서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완이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프로그램 포맷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제 회사 대표끼리의 대결이 있겠지. 거기서 우승한 회사의 심사위원에게는 한 팀을 생방송에 올릴 권한을 줄 거고.”

“네.”

“가능하면 너희들이 거기 나가.”

“네?”


은별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서희는 말을 듣고서도 놀라지 않았다.

물론 정완의 말은 할 수만 있다면 생방송에 진출하기 위한 가장 좋은 전략이었다.


“대표로 나가서 우승하면 무조건 생방송 가서 5위 안에 들었죠? 우승 못 해도 대부분 생방송에 갔고요.”

“우승팀이 4라운드에서 노래를 망쳐도 심사위원이 지목했고요.”

“맞아.”

“근데 뮤컬트에서는 항상 여원 선생님이 대표를 찍어주셨어요. 저희가 찍힌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것도 맞고.”

“그렇다고 저희가 따로 부탁을 드릴 수도 없어요. 여원 선생님은 그런 게 통할 분이 아니랬어요.”

“그렇겠지. 정정당당하게 살아남은 분이니까. 그래서 하는 얘기야.”


서희가 멀뚱해 하자 정완이 말했다.


“혹시 오늘도 과제 했어?”

“네.”

“잘했다. 수첩 펴 봐. 너희 회사에 캐스팅된 애들에 대한 부분 보자.”


서희와 은별은 각자의 수첩을 꺼내 뮤컬트 팀원들에 대해 남긴 심사위원 및 각자의 의견을 보여주었다.

하트헤르는 자작곡을 지적받았고 남성 보컬인 황유찬의 가창력이 떨어진다. 소울 보컬리스트인 선우예린은 감성의 깊이가 얕으며, 양미란은 가창력이 뛰어난 반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부분에서 음정 실수를 여러 번 저질렀다. 윤도진은 기타와 보컬 양면 모두 부족하지 않았지만 독보적이지도 않았다.


“지난 시즌부터 기성가수들은 대표로 못 나갔지?”

“네.”

“그럼 윤도진은 안 될 거고, 어쨌든 팀별로 단점이 다 있네.”

“그렇긴 하죠.”

“내가 여원님이라면 너희들을 적어도 후보까지는 생각했을 거야. 안 될 이유가 없어. 아니, 오히려 유리해.”

“여원 선생님은 이런 것 정도는 다 고칠 수 있으니까 캐스팅하신 거 아닐까요?”

“단기간에 고치기는 어려울 거야. 선우예린이랑 너희들 빼고.”

“예린이요?”


서희는 정완이 제 예상과 다른 사람을 거론하자 이유를 물었다.


“왜요? 저는 미란이가 제일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잘하는 게 다가 아니야. 양미란이 가창력이 떨어진다면 모르겠지만, 뛰어난데도 실수하는 거면 라이브 무대에선 잘할지 못할지 예상할 수가 없어. 그렇다면 차라리 감성 부족이 나아. 그건 사전에 대처할 수 있으니까.”


정완은 유창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전 시즌까지는 녹화 날짜상 3라운드랑 4라운드 사이에 5주쯤 텀이 있었어. 이번엔 방송이 연장됐고 생방송 일정은 한 주 늦어졌어. 심사위원들은 4라운드 녹화를 작년보다 늦게 하자고 할 거야.”

“제대로 준비시키고 싶으니까 그러시겠죠?”

“맞아. 특히 4라운드는 회사 자존심이 걸려 있지. 그 기간에 충분히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애들만 캐스팅하셨을 거야.”

“네.”

“근데 대표 대결은 그 텀의 딱 중간쯤에 해. 따라서 3주 정도로 보완이 가능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애가 너희 말고는 선우예린밖에 없어. 소울 보컬인데 감성 표현이 문제면, 노래 잘 고르고 이미지 트레이닝만 잘해도 커버가 되니까.”

“선곡을 어떻게요?”

“목소리에 무게가 있으면 인순이나 BMK, 빅마마···.”

“걔 그렇게 묵직하진 않아요.”

“그럼 <Do Me>(샛별) 정도 부르면 되겠지만, 나 같음 서우진보고 걔 보컬에 맞춰서 <마법 소녀>(전현수) 같은 노래 하나 만들라고 하겠다.”

“예린이가 잘하는 건 아는데, 그래도 저는 미란이가 더 잘 할 거라고 생각해요. 예린이도 그런 살벌한 장소에서 어마어마한 분들 노래를 잘 할 수 있을지는 검증되지 않았고, 미란이가 실수만 안하면 결과는 예린이보다 좋을 거예요.”

“서희 다시 초심 찾고 있구나.”


정완의 말에 서희가 놀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 정완의 말에 따박따박 대꾸하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근데 처음보다 많이 좋아졌어. 경험이 쌓이니까 논리적으로 의견도 제시하고.”

“···.”

“앞으로도 쭉 그렇게 해. 여원님 앞에서도 기죽지 말고. 알았니?”

“풉!”


정완이 여원 특유의 말투를 따라하자 은별이 웃었다.


“서희야. 시즌 1 때 뮤컬트 대표가 누구였지?”

“주새롬이요.”

“그렇지. 근데 여원님이 왜 주새롬을 뽑았을까? 당시에 라든솔도 있었는데.”


라든솔은 첫 시즌의 첫 방송부터 참가자 중 최고의 감성과 가창력을 가졌다고 심사위원과 시청자들에게 인정받았고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데뷔 후 ‘든솔’로 활동하다 작년에 군에 입대했다.


“넌 ‘실수만 안하면’이랬지만 그게 장담이 안 돼서야. 지금은 안 그렇지만 당시에 라든솔은 잔실수가 많았어. 주새롬은 그 친구만큼은 아니었지만 뛰어난 건 부인할 수 없고 실수를 전혀 안 했으니까.”

“네.”

“회사 대표쯤 하려면 살벌한 장소에서 어마어마한 가수의 노래를 하더라도 평소랑 다름없어야 한다. 근데 그걸 실전도 하기 전에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래도 지금까지 실전에서 제일 안정적이었던 사람이 다음에도 안정적일 가능성이 제일 높지 않아?”

“저희는요?”

“냉정히 말하면 너희들은 지금 프로 레벨에 닿을락 말락? 그 세상 기준으로 보면 전체적인 기량이 특출한 건 아닌데, 그게 어디 하나가 처지는 것도 아니라서 좀 애매해. 윤도진이랑은 또 다르게 애매한 거지.”

“네.”

“근데 너희는 선곡만 잘해도 단점을 없앨 수 있어. 먹먹한 쪽을 몇 번 했으니까 슬픈 노래보단 센 노래가 낫겠지. 센 노래에서 단점 끄집어내는 분은 담여원님 뿐인데, 그분은 대표 대결에서 너희들 채점을 안 하실 테니까 유리할 거고.”

“센 노래 어떤 거요?”

“으음.”


정완은 잠시 생각하다 정말 센 노래를 말했다.


“제일 좋은 건 마미손의 <소년점프>.”

“네에?”

“록밴드 세우고 라이브 반주에 맞춰서 하면 좋을 거야. 곡은 그대로 두고 멜로디 파트 늘리고, 가사는 ‘오케이, 계획대로 되고 있어.’ 이거 하나 빼고 싹 다 바꾸고, ‘한국 힙합 망해라!’보단 ‘씨팝 힙합 살려라!’가 좋겠네.”


예상치 못한 말이었지만 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C-POP Artist season 5>에는 힙합 참가자가 없고, 댄스 참가자나 싱어송라이터 중 일부만이 랩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강렬한 록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힙합 곡을 부르면 감성보다는 임팩트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다.


그런데 <소년점프>는 발표한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신곡인데다, 이 곡의 가수 마미손은 지금도 방영 중인 다른 채널의 힙합 오디션 프로에서 탈락한 참가자다.

특히 그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래퍼 아닌가.

셋이 뭉친 첫날 서희가 자신과 플로우가 전혀 다르다고 했던 그, 그그···.


“근데 다른 방송사 오디션 참가자 노래를 불러도 돼요?”

“완전히 자유곡이니 안 될 이유는 없겠지만, 누가 뭐라고 하면 다른 거 부르면 되고.”

“난 좋아요.”


정완과 서희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은별이 말했다.


“내 보컬은 배기성님이랑 정반대예요. 그래서 내 색깔로 도전해보고 싶어요.”

“이건 도전이 아니라 완성이야. 여기서도 여우비만의 방법을 찾아내면 게임 끝이야.”

“그럼 내 비중이 너무 높은데···.”

“그래서 멜로디 파트를 늘리라는 거고.”


정완의 막힘없는 답변에 은별이 덧붙였다.


“그게 우리 팀의 필승 전략이에요. 언니 비중이 높았을 때 지적을 덜 받았으니까요.”

“···.”

“오늘은 저만 실수했잖아요.”


서희는 은별의 말에 답하지 않고 자신의 수첩에 집중하는 정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나마나한 얘기일 수도 있어. 여원님 생각에 달린 거니까.”

“네.”

“혹시 대표로 찍혔는데 겸손 떨면서 머뭇거리지 말란 얘기야. 여원님이 너희들 얘기 꺼내시면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하라고. 안 그럼 일생일대의 기회가 날아가니까.”

“알았어요.”


정완은 수첩을 보다 특이한 부분을 발견했다.


“근데 전민재라는 친구는 싱어송라이터인데 KP 갔어?”

“걔 EDM 작곡가고 춤도 잘 춰요.”

“그래? 내가 하인길님이면 전민재보고 춤 잘 추는 팀한테 곡 만들어주라고 하겠네.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왜요?”

“재작년 대표 대결에서 그런 일이 있었어. 그때 신나지오가 우승했지만 지금 사람들이 기억하는 노래는 <마법 소녀>뿐이야. 서우진이 작곡해서 이슈가 됐고 차트에도 올랐으니까.”

“그걸 KP에서 따라하려고 할까요?”

“거긴 싱어송라이터를 캐스팅할 일이 없어서 더 그럴 수 있지. 명분도 좋고 방송에 나올 스토리도 완벽하니까.”


정완은 눅지근하게 뇌까리며 서희에게 수첩을 돌려주고 화제를 바꾸었다.


“4라운드 통과하면 뮤컬트 엔터랑 정식 계약할 거야. 그때 세 가지는 꼭 관철시켜.”

“뭔데요?”

“계약기간은 가급적 3년 이내로 해. 대부분 4년이었는데 그게 회사 방침이면 어쩔 수 없겠지. 그리고 싱글이든 정규든 반기 단위로 앨범 내달라고 하고, 방송출연 횟수도 반기당 몇 회 이상으로 넣어.”

“3년이면 너무 짧은 거 아니에요?”

“상관없어. 뮤컬트에서 너희들 데뷔 때까지 투자한 금액이 거의 없으니까. 거기서 너희들을 놀려둘 리가 없으니 연예활동 실적은 분명히 나올 거고, 결과가 어느 정도만 돼도 재계약할 때 계약금이 올라갈 거야. 그러니까 첫 계약기간이 너무 길면 회사만 좋은 일이야.”

“네.”

“그리고 은별이는 뮤지컬 배우 생각 있어?”


은별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계약할 때 뮤지컬에 대한 조건을 넣어. 트레이닝 기간 얼마, 앙상블 몇 편 출연, 조연 이상 몇 편 출연, 이렇게.”

“아예 뮤지컬 배우로 계약하는 건 어때요?”

“뮤지컬 배우는 어느 정도 경력이 돼야 계약서를 쓸 거고 조건도 가수들보다 안 좋아. 가수로 활동하다 뮤지컬에 나서는 게 나아. 인지도부터 다르니까.”

“저는요?”

“너?”


서희의 말에 정완은 그녀를 빤히 보다 말했다.


“음악계에선 절실해지는 순간 약자더라고.”

“네?”

“넌 그렇게 살 필요가 없으니까 하나만 기억해.”

“뭔데요?”

“계약기간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네 요청이 있으면 이유를 불문하고 즉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조항 넣어.”

“네?”

“어차피 계약금은 상각 처리해야 하니까 월급처럼 지급할 거야. 회사가 손해날 일은 없으니 상호간 협의로 위약금 지급 없이 해지할 수 있겠지. 싸이처럼 계약금 없이 계약하는 게 더 좋을 테고.”


서희는 깜짝 놀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다시 가슴이 싸해져 왔다.

정완이 자신의 생각을 보게 된 동안 자신은 그에 대해 무엇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다 됐나···.”

“다음에 떨어지면 어떻게 해요?”


은별의 물음에 정완은 잠시 생각하다 천천히 대답했다.


“뮤컬트 엔터에서는 단기 계약도 많이 하더라. 싱글 앨범 정도는 내달라고 하면 내줄 거야. 그건 나중에 너희들끼리 상의해.”

“우리 남은 노래로요?”

“그래. 듀엣곡 중에 하나는 앨범을 위해서 남겨 둬. 솔로곡이야 당연한 거고···. 혹시 그런 상황이면 무조건 서우진한테 앨범 프로듀싱 해달라고 해.”

“네.”

“여기까지 하자. 녹음파일 보낼 테니까 지금 저장해.”


정완은 녹음을 마친 후 녹음파일을 단체 채팅방에 올렸다.

메시지 알림과 함께 밝아진 스마트폰의 액정에는 11시 20분이 찍혀 있었다.


“미안하다. 피곤할 텐데 너무 오래 잡아놨네.”

“아니에요.”

“가자.”


서희와 은별은 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손을 잡고 반대편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신없었던 하루가 눈앞의 풍경처럼 휙휙 지나갔다.


서희와 은별에게 있어 오늘은 인생을 통틀어 첫손에 꼽을 만큼 중요한 날이었다.

두 사람은 복잡한 감정으로 잠을 설치다시피 했고, 평소 같으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각에 방송국에 도착했다. 긴장 속에서 노래하여 호평과 혹평을 모두 들으며 원하던 회사에 캐스팅되었고, 아리와 통화하고 팀원들과 한데 섞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한 적조차 없었던 세상을 향해 성큼 다가섰음을 느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이 세상으로 안내해준 사람은 자기 역할을 모두 마쳤다.


정완은 반대쪽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룸미러로 힐끗거리며 조용히 운전했다.

은별의 집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말이 없었다.


“서희 잠깐 차에 있어. 은별이 바래다주고 올게.”

“네. ···은별아. 내일 보자.”

“10시쯤에 전화할게요.”

“응.”


서희는 자신을 두고 멀어지는 정완과 은별의 뒷모습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보았다.

저 자리에 은별이 아닌 자신이 섰다면 은별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오빠.”

“어.”


무심한 정완의 대답에 은별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다시 만난 후 정완이 오빠라는 말에 대답한 게 처음이었다.


“와아. 오빠라고 불렀는데 오빠한테 대답을 다 듣네?”

“마지막이니까.”


집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은별은 정완에게 서희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그만두었다.


“이제 우리는 만나기 힘들겠죠?”

“어.”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근사하게 끝내는 거 맞죠?”

“그래. 그러니까 너 이제 미안해하지 마.”

“네. 오빠도요.”


은별은 짐짓 미소까지 지으며 현관문 앞에 섰다.

정완이 말했다.


“덕분에 행복했어.”

“나도 오빠 덕분에 행복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좋은 사람 만나. 능력 있고 상처 없는 사람.”

“알겠어요. 그러니까 오빠도 정말 좋은 여자 만나요. 오빠 많이 좋아하고 정말 잘해줄 수 있는 예쁜 여자, 분명히 만날 거예요.”

“푸후후.”

“난 오빠가 정말 그러길 바라요. 나 신경 쓰지 말고 그렇게 해요. 진심이에요.”


은별의 말은 한 여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가 악수의 의미로 손을 내밀자 정완은 그 손을 마주잡았다.


“내 꿈 이뤄줘서 고마워요.”

“나도 고마웠어.”

“다시는 오빠라고 안 부를게요. 괴롭히지도 않을게요. 그 동안 정말 미안했어요.”

“응.”

“서희 언니 잘 데려다줘요.”

“그래. 갈게. 쉬어.”


정완은 은별을 들여보내고 걸음을 떼었고, 은별은 현관문 벽에 붙어 섰다가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 후 침대에 주저앉아 벽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서희는 조수석에 옮겨 앉아 있었다.


“추운데 시동 왜 껐어.”

“괜찮아서요.”

“갈게.”


차가 움직이는 동안 서희는 그의 옆모습과 반대편 창밖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늘 들렀던 편의점 근처의 횡단보도에 정차했을 때 정완이 말했다.


“저기 세울까?”

“아니요.”

“그래.”


서희는 백미러 속 멀어지는 편의점과 커피숍 간판 불빛이 사라진 후에야 앞을 보며 물었다.


“PD님은 저 데려다주고 또 학원으로 가세요?”

“응. 작업했던 파일 다 정리하고 내 짐도 빼고, 장비도 점검하고 청소도 해야지.”

“끝까지 열정적이시네요.”

“열정이 아니라 의무야. 다 빌린 거니까.”


사실 정완이 학원으로 가려는 것은 노래를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서희는 그것을 몰랐고, 정완은 물어도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말하지 않더라도 며칠 후면 다 알게 될 테니까.


“PD님은 내일부터 쉬어요?”

“바닷가 가보려고. 부모님 두 분 다 고향이 바닷가거든.”

“네. 푹 쉬세요. 저희 가르치시면서 너무 힘들어 보였어요.”

“그러게. 너희들 능력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푸후후.”


서희는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스마트폰에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지만 그녀는 폰을 꺼내지 않았다.

이윽고 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음악 더 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전혀.”


서희의 집 건물 앞에서 정완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드문드문 보이는 하늘은 참 오랜만이었다.


“그럼 일자리 구하세요?”

“바닷가부터 가 보고.”


원룸 건물이 눈앞에 보였다. 여기서부터 집 현관까지는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서희는 문득 조급함을 느꼈다. 그래서 뭔가 말하려는데 정완이 집과 빗긴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갈까?”

“네?”


정완은 서희의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히 집 옆쪽 길로 걸었다.

잠깐 걷다가 길을 꺾은 후에야 그의 입이 열렸다.


“부탁이 있어. 명령일 수도 있고.”

“뭔데요?”

“넌 당분간 혼란스러울 거야.”


정완의 묘한 말에 서희가 그를 빤히 보았다.


“난 아직도 네가 정말로 이 길을 원하는지 어떤지 모르겠어.”

“네.”

“아무리 누가 옆에서 가르쳐주고 네가 그걸 익혀서 성장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얻은 무기를 쓰는 사람은 오롯이 너야.”

“최종 결정은 제 몫이란 얘기죠?”

“그래. 그러니까 네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그땐 스스로 과제를 찾아내서 해.”


정완은 하늘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넌 이미 무기가 많아. 그리고 강해.”

“그래요?”

“그래. 네가 아직 다 모를 뿐이지.”


서희는 정완의 이 말이 왠지 음악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닌 것처럼 들렸다.


“이 얘기, 은별이한테도 하셨어요?”

“아니. 걔는 자기 능력을 알아. 너만 네 능력을 모르는 거지. 아니, 애써 과소평가하는 거지.”

“···.”

“그러니까 넌 이제 그만 겸손해라.”

“네?”

“너 자신을 더 믿고 사랑하고, 때로는 이기적으로 행동하라는 말이야. 여우비 전에도 넌 멋있고 빛나는 사람이었으니까.”


서희가 눈을 크게 뜨고 정완을 쳐다보았다.

한 바퀴 돌아서 건물의 입구에 들어섰다.


“그 동안 미안했어.”

“네?”

“리더라고 더 많이 혼내고, 대놓고 차별하고, 하기 싫단 노래도 막 시키고.”

“아니에요.”

“나 때문에 기분 나빴던 일도 많았을 텐데,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

“아니요. 저한테 항상 잘해주셨잖아요.”

“트레이너 그만둘 때부터 너한테 늘 미안했어.”

“왜요?”

“내가 아는 걸 다 알려주지 못했으니까.”


현관문 앞이었다.

정완은 눅지근하게 말을 뇌까리며 시선을 복도 창밖으로 던졌다.


“근데 이제 그건 아니야. 다했어. 네가 잘 따라줘서 이번엔 내가 끝까지 몰아붙일 수 있었어. 넌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가르친 것 이상으로 해냈으니까.”

“···.”

“네 덕분에 완주했다. 정말 고마워.”


서희의 눈이 커지며 심장이 떨어졌다.

정완의 말과 행동의 의미가 이제야 느껴졌다. 이 남자가 오늘처럼 말을 많이 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 순간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뒤늦게 들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전보다도 더 따듯한 ‘고마워’를 눈앞에서 듣는 바람에 입을 열지 못하고 말았다.


“10시쯤에 일어난다고 했지?”


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할 텐데 쉬어. 새로운 데서 적응하려면 컨디션 좋아야지.”

“···.”

“쌀쌀한데 들어가. 나중에 전화할게.”

“저기, PD님.”

“어?”


서희가 정완의 옷깃을 잡았다.

눈이 마주쳤다.


정말 모르는 걸까.

지금이라도 알려주면 자신을 대하는 이 남자의 행동에 조그만 변화라도 생길까.

그런데 자신에게 말할 자격이 있을까.

아니, 말할 용기는 있는 걸까···.


서희의 입에서 또 한 번 마음과 다른 말이 나오고 있었다.


“고생 많았어요.”

“응. 너도.”

“저 들어갈게요. 조심해서 가요.”

“피곤할 텐데 들어가 얼른 쉬어.”

“네.”


서희가 들어가고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정완은 몸을 돌렸다.

건물을 빠져나온 후 그는 차를 향해 걷다가 멈추었다.


“아프네.”


정완은 뒤돌아 서희의 방 창문을 바라보았다.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아까 받은 USB 메모리가 만져졌다.

어쩌면 서희는 지금 자신을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그래도 다행이야. 이제 생각이라도 맘껏 할 수 있을 테니까···. 이게 마지막은 아니겠지. 다음은 언제일까? 쌩하니 도망가는 건 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정완은 서희의 눈에 한동안 담겨 있을 제 이미지가 지금 보일 쓸쓸한 뒷모습이라는 사실이 못내 미안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기에 더 안타까웠다.


‘서희야. 미안해. 너한테는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내 생각이 틀렸으면 좋겠다. 진심이야.’


알람이 울렸다.

정완은 뒤로 돌았다.


서희와 은별과 맺었던 계약이 길었던 하루와 함께 모두 끝났다.

정완은 새로운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걸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어쨌든 끝났구나. 이제 가야지.”


정완에게는 어쩌면 방금 바뀐 오늘이 더 의미 있는 날일지 모른다.

계약을 마치며 삶의 터전과 직업이 모두 바뀌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평범한 삶이 그에게는 크나큰 도전이었다.

늘 벗어나고 싶었던 서울 하늘의 별빛이 앞날을 비추는 가로등처럼 느껴졌다.


차에 탄 정완은 메신저 앱을 실행하여 미리 적어놓았던 글을 복사하여 세 사람의 단체 채팅방에 올린 후 스마트폰의 전원을 껐다. 그리고 한결 형제에게 선물 받은 새 스마트폰을 켜며 시동을 걸었다.

그의 새로운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은 한결 형제와 길호를 비롯한 으뜸상사 직원 몇뿐이다.


이제 학원으로 돌아가 녹음작업과 뒷정리를 마치면 정완의 음악 관련된 일은 모두 끝난다. 그 후 그는 당분간 음악을 듣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 다음에는 고시원에 들러 꾸려놓은 짐을 싣고 속초로 이동할 것이다. 영금정 등대에서 해돋이를 보려면 3시쯤에는 출발해야 한다.


“엄마. 아빠. 저 지쳤습니다. 당분간 마음 좀 정리할게요. 열심히 안 살아도 이해해 주세요.”


정완은 한숨을 내쉬며 차를 출발했다.


한편 서희는 정완이 시선에서 사라진 후에도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침대에 앉아 스마트폰을 켰다.

그녀는 차 안에 있을 때 은별이 보낸 메시지 ‘언니가 그 사람 한 번만 꼭 안아주세요. 부탁할게요.’를 뒤늦게 보고 길게 한숨을 쉬며 조금 전 받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름다운 여우비

서희와 은별이에게 전하는 마지막 편지



고생 많았어. 그리고 잘했어.

이날이 오면 속 시원할 줄 알았는데, 막상 끝나고 나니 그냥 찹찹하네.

결론을 얻었기에 미련 없이 돌아선다.


그 동안 미안했어.

트레이닝이 빡빡했던 것도, 중요한 사안을 내 독단으로 밀어붙였던 것도,

그리고 모든 게 끝난 지금 내 마음에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도.

다 너희들을 위해서였는데, 이렇게 쓰고 보니 너희들한테 나는 이기적인 꼰대였구나.

많이 부족했지만, 밤새워가며 했던 내 나름의 고민과 노력은 이해해 주길 바라.


한동안 미안할 거야.

앞으로 나랑 연락되지 않더라도 날 너무 미워하지 않았음 한다.

너희들에게 최선을 다했던 만큼 내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해.


서희와 은별이, 여우비 덕분에 즐거웠어.

노래를 즐겼던 너희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하며 늘 응원할게.


여우비의 첫 팬, 정완





“아아!”


눈물이 고여 왔다.

조금 전 들었던 안 좋은 예감이 여지없이 들어맞아 버렸다.


시간은 많았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 더 함께했던 시간에 말할 수도 있었다. 아까 집 앞에서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조금 전 그가 이 방을 바라보았을 때 창문을 열고 소리칠 수도 있었다.


그 많은 시간 동안 그는 자신에게 말한 게 아니었을까.

나에게 들려달라고, 들려주기 힘들면 잡아달라고···.


서희는 정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원이 꺼져 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이동한다는 여자 목소리와 함께 스마트폰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가 남긴 빈자리 위로 합격의 기쁨이 지워지며 눈물이 남았다.


자정이 되자 그는 그렇게 떠나버렸다.

신데렐라처럼.


작가의말

일요일이 되어 올립니다.

공모전에 응모한 <마지막 선물>을 올리고 왔습니다.


첫 작품이었던 퓨전판타지 <히든 메이지>를 올리다 연참대전에서 글자수 1위를 먹었습니다. 덕분에 문피아 본사도 가보고, 금강 문주님도 만나뵈었더랬죠.

그때 다른 작가님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연참대전용 작품’에 대한 말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다음 연참대전에서 첫 로판 <봄꽃마리>를 써서 완주했죠..

3년 전 쓰다 만 <마지막 선물>을 다시 꺼내어 검토하자니 옛날 생각이 나네요..


<마지막 선물>의 남녀 주인공은 30대 후반으로, 제가 썼던 작품의 주인공들 중 가장 나이가 많습니다. 그래서 노는(?) 방식도 상당히 다르죠..

시간 되시면 들러서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홍보)


주말 잘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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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Audition) 2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5 Aphrodite. 풀밭, 꽃, 그리고 꿀 20.06.16 168 10 21쪽
24 Round 4. 너를 잊지 않았듯 +2 20.06.14 152 9 24쪽
23 Burden. 그대에게 옮은 감기 20.06.09 164 9 27쪽
22 Clue. 또 다른 오디션 +4 20.06.04 165 10 25쪽
21 Slough. 그녀의 취미 20.05.31 161 6 31쪽
20 Tears. 한계가 아닌 줄 알았는데 +6 20.05.28 181 11 23쪽
19 Abyss. 눈물조차 사치라고 느껴질 때 +6 20.05.24 176 9 22쪽
18 Restart. 욕심이 되어버린 밤 +2 20.05.21 193 9 27쪽
» Separation. 신데렐라처럼 +4 20.05.17 184 11 24쪽
16 Friendship. 내일 일어날 일 +4 20.05.14 192 8 23쪽
15 Limitation. 임무를 마친 자의 여유 +2 20.05.10 190 11 21쪽
14 Round 3. 자신과의 싸움 +4 20.05.07 198 11 23쪽
13 Preparation. 조금 덜 치열해도 괜찮은 곳 20.04.30 209 10 29쪽
12 Wedding. 순정남녀가 순정부부로 20.04.23 225 9 29쪽
11 Goodness. 이럴 줄 알았으면 +2 20.04.21 222 8 23쪽
10 Round 2. 치열하게 따분한 날 +2 20.04.12 200 8 23쪽
9 Deeper. 녹음이 잘 되지 않는 이유 +8 20.04.09 237 11 22쪽
8 Fangs. 그녀의 실수 +8 20.04.07 233 12 28쪽
7 Round 1. 화살은 누가 쏜 걸까 +4 20.04.02 225 11 29쪽
6 Reoccurrence. 묻고 싶었던 말 +4 20.03.31 242 11 31쪽
5 Suggest. 좋은 제안이지만 +2 20.03.29 239 13 29쪽
4 Preliminary 2. 비 오는 아침 +2 20.03.24 265 11 29쪽
3 Preliminary 1. 저 사람들 또 +2 20.03.22 267 10 30쪽
2 Making. 만들어야 할 게 노래만은 아닌 팀 +4 20.03.15 353 13 28쪽
1 Prologue. 오래 전 약속 +4 20.03.15 713 16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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