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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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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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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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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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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Clue. 또 다른 오디션

DUMMY

11월 4일에는 <C-POP Artist season 5> 본선 1라운드가 처음으로 방송되었고, 엔딩을 장식한 여우비의 노래들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두 번째 방송에 나온 인터뷰에서 서희는 외모 때문에 예선을 통과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번 방송의 노래로 그 말을 증명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특히 이번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여우비가 외적인 아름다움이 우선인 팀은 아니라는 의견에 공감하며 두 사람이 예쁘지 않았어도 충분히 엔딩을 장식할 만했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두 사람이 본선에 들어서며 향상된 실력으로 감성 보컬의 역량을 보였기 때문이다.


<화살>에 대해 시청자들은 원곡과 여우비 노래를 번갈아 들어도 분위기가 매우 달랐다고 말했고, 샤이니 팬들 사이에서는 오디션에서 들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노래를 슬프면서도 멋있게 불러서 좋았다는 의견이 많았다.

특히 서희가 故 종현을 향한 팬심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고 밝히며 자작랩 가사에 ‘And My friends, SHINee World Forever.’까지 넣었던 점에 대해, 서희가 그의 팬이어서 감사하다는 의견도 많은 공감을 얻었다.


물론 <화살>보다는 <나의 아리랑>에 대한 글이 훨씬 많았고, <나의 아리랑>에 대해서는 시청자 게시판이나 여우비 팬카페뿐 아니라 순정남녀 및 여러 인디밴드의 팬카페에도 다양한 글이 올라왔다.

시청자들은 <나의 아리랑> 듣다가 <화살>을 잊어버렸고 보컬이고 뭐고 생각도 안 났다는 수휘의 심사평에 대해 대부분 공감했다. 피아노만으로 국악의 느낌을 재현해낸 점이 그랬고, 처음 듣는 분위기의 곡에 어색한 부분이 한 군데도 없으며 자꾸 듣고 싶다는 점이 충격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한 사람을 그리워하며 다음 생까지 기다리겠다는 신파 이야기를 듣는 사람까지 가슴 아릴 정도로 불러냈다는 점에 있어 현역 발라드 가수 수준의 감성과 표현력을 보여주었다는 의견도 있었다.


순정남녀 팬카페에서는 서희와 은별이 이 카페의 정회원인 데다가 우진과 아리의 결혼식에서 부부와 함께 있었던 점, 아리와 친구가 되었다는 점까지 거론되며 두 사람을 ‘성덕’으로 칭하기도 했다.

서희와 은별이 옛날에 팬카페에 남긴 글을 찾아 ‘성지순례’와 같은 댓글을 단 회원도 있었다.

어떤 시청자들은 엔딩을 장식한 참가자들이 무조건 4라운드까지 갔고 감성이 남다른 팀은 여원이 채갔다는 과거 사례를 들어 여우비가 지금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서 트레이닝 중일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한편 많은 시청자들이 여우비 자작곡의 작곡가 ‘HAP’를 궁금해 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C-POP Artist>뿐 아니라 미투리 밴드, 심지어 휘민락 팬들까지 가세하여 여러 의견을 이야기했다.

<나의 아리랑>은 다른 노래와 전혀 달랐고, 심지어 <비 오는 아침>과도 화성과 리듬, 분위기 등에서 공통점이 없었다.

그래서 HAP가 한 사람이 아니라 작곡이나 프로듀싱을 전문으로 하는 프로젝트 팀이지 않을까, 심지어 HAP가 유명한 기성작곡가의 또 다른 활동명이 아닐까하는 의견까지 나왔다.


서희와 은별이 SS와 함께 있었다는 목격담 때문에 HAP가 SS일 거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미투리 밴드 팬들은 오히려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전형적인 로커이자 기타리스트였던 SS가 제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민요조 발라드를, 더구나 피아노 외의 악기로는 표현이 불가능할 것 같은 곡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동일 인물이었다면 SS와 같은 지역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수휘가 모를 리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HAP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지만 속 시원히 밝혀진 것은 없었다.

다만 HAP가 한 사람이라면 그는 서우진 정도의 재능과 실력을 가진 작곡가라는 점만큼은 대다수 시청자들이 공감하고 있었다.


한편 두 사람의 외모에 대한 언급은 두 번째 방송의 인터뷰 이후로 많이 줄어들었다가 이번 방송에서 또 늘어났다.

다만 그 양상이 2차 예선 때와는 달랐다.


이번 방송 후 <C-POP Artist> 시청자게시판에서 가장 뜨거웠던 글은 ‘수휘는 그 입 다물라’였다.

여우비를 보며 입을 헤벌린 수휘의 표정에 시즌 3에서 그가 말한 ‘미인 편중 심사 혐오’라는 자막이 덧붙여진 사진이 시청자게시판을 뒤집어놓음과 동시에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로 퍼져서 언행불일치나 표리부동 관련된 글에 댓글로 붙었다.

한편으로 ‘담여원 심사위원님. 수휘 심사위원님 말씀 잘 끊으신 덕분에 좋은 노래 들었습니다. 그리고 수휘 심사위원님. 처음 말씀은 좀 그랬지만 품격 있게 사과하셨습니다.’라는 글 역시 공감을 얻었다.


서희가 배우 이유리와 닮았다는 수휘의 말에 대해 시청자들은 몇 년 전 이유리 같다고 인정했지만, 은별을 가수 이지연에 빗댄 말에 대해서는 ‘이지연을 닮긴 했지만 더 닮은 사람이 다른 데도 아니고 CBC에 있다’라고 지적했고, ‘정단비 아나운서가 노래하는 줄 알았다’, ‘씨팝 종료 10분 후에 민은별의 10년 후 등장’ 같은 글에 더 많이 공감했다.

두 사람에 대해 예쁘다, 아름답다는 표현보다 멋있다는 표현이 훨씬 더 많이 나온 점, 그리고 ‘봐도 좋고 들어도 좋고 둘 다 되면 더 좋다. 흥해라’는 응원의 글 역시 눈에 띄었다.


포털 사이트의 검색 순위에는 여우비나 두 곡의 제목뿐 아니라 ‘샤이니’와 ‘종현’까지 등장했고, <나의 아리랑>은 방송 다음 날인 11월 5일 새벽까지 음원 순위 1위를 지켰다. 음원으로 발매되지 않은 <화살>은 동영상 사이트에서 조회수 20만을 넘겼다.

뿐만 아니라 샤이니의 원곡 <화살>과 故 종현이 부른 노래 몇 곡이 차트에 진입했고, 수휘가 언급했던 싱어송라이터 안예은의 노래 <홍연>과 <상사화> 등의 동영상 조회수도 대폭 늘어났다.


“지금은 3위네요.”

“그래?”


11월 5일 아침, 서희와 은별은 아침식사를 마치고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의 휴게실에 마주앉았다.

은별은 시청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보고 있었고 서희는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손가락이 근질근질해요.”

“왜?”

“PD님이 SS고 HAP라는 걸 얘기할까.”

“하지 마.”

“알아요. 말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거.”


서희의 단호한 답에 은별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도 그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PD님 진짜 철저하시네.”

“뭐가요?”

“노래에서도 자기 존재를 감춰 버렸잖아. 미투리 밴드 팬들이 SS가 아닐 거라고 얘기할 줄은 몰랐어.”

“밴드 할 때 그랬어요. 하정완은 은퇴한 피아니스트고 SS는 기타리스트라고.”

“그러니까. 방송 화면에는 PD님이 안 보여서 다행이다.”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투리 밴드에 몸담았던 2년 동안 정완은 단 한 번도 피아노에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밴드 멤버들조차 그가 피아노를 연주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한편 정완은 은별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학가에서는 그녀와 마주하는 일을 최대한 피했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밴드 멤버의 여자친구라면 광팬들에게 고통스런 일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정완은 밴드에서는 늘 색안경을 썼고 은별을 만날 때는 벗었다.


하지만 당시 두 사람은 그런 불편함마저도 즐겼다.

이를테면 어느 날 미투리 밴드 공연에서 한 팬이 정완에게 여자친구 있냐고 질문했는데, 정완은 좋아하는 여자는 있다고 답했다.

그때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은별이 ‘그년 데리고 와요. 작살을 내 버리게.’라고 외쳐서 좌중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서희는 이따금 은별이 이야기하곤 했던 그 남자가 지금 제 마음속에 자리했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씁쓸하게 웃었다.


“PD님은 지금 뭐하실까···.”

“언니 그 사람 보고 싶죠?”

“어? ···응.”


이제 서희는 은별 앞에서도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관계나 상황이 복잡하지만 은별은 제 마음을 잘 알고 응원해주고 있다. 사실 그것보다는 지금 제 마음이 은별 앞에서도 감추려야 감출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 그런지도 모른다.


“근데 언니 괜찮아요?”

“뭐가?”

“어제 잡채를 그렇게 맛있게 해놓고 별로 먹지도 않고 고기도 안 먹고. 아침도 세 숟갈이나 떴어요?”

“···.”

“힘 하나도 없어가지고 노래나 하겠어요?”

“여원쌤이 오늘까지는 노래하지 말라고 하셨잖아.”


서희는 빙긋 웃었다.

은별의 말에서 따듯함이 깊게 느껴졌다.


“우리 오늘 할 거 없으니까 잠이나 자요. 유찬이 진짜 무겁더라고요. 저 지금도 뻐근해요.”

“내가 같이 갈 걸. 나도 석 잔밖에 안 마셨는데.”

“아니에요. 언니도 방 치우느라 고생했잖아요.”

“아유! 애들은 다 뻗었는데 우리만 이게 뭐니.”


어제 저녁 은별이 주관한 회식에 도진을 제외하고 모두 모였고, 팀원들은 약속하지도 않았는데 족발과 삼겹살 등 음식을 챙겨 왔다.

그런데 마지막에 등장한 예린의 손에 들린 소주를 보자마자 회식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안 그래도 트레이닝과 4라운드 곡 선정, 사전대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던 차에 팀원들은 너나없이 잔을 기울였고, <C-POP Artist season 5> 방송에 여우비가 등장할 때쯤 소주가 동이 나버렸다.

미란이 편의점에 다녀왔고, 트레이닝에 대한 이야기나 각자의 힘든 일, 트레이너와 멘토들에 대한 뒷담화까지 오갔다.


술을 못 마시는 은별은 식은 음식을 데웠고, 자리가 파한 후에는 뻗어버린 팀원들을 방에 쑤셔 넣었다. 특히 그녀는 유찬 때문에 팔자에도 없던 남자 숙소까지 들어가야 했다.

은별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서희는 난장판이 된 숙소를 전부 치웠다.


“저 지금 졸린데, 갈래요?”

“응. 가자.”


두 사람은 회사 건물을 나섰다.

이들은 여자 숙소 입구에서 지혜와 유찬을 만났다.


“너희들 괜찮아?”

“모르겠어요. 어지럽고 정신 하나도 없어요.”

“누나. 아침 뭐예요?”


지혜와 유찬 모두 헝클어진 머리에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별은 튀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너희들 먹으라고 북엇국 나왔나? 먹을 만 할 거야.”

“네. 아침 먹고 자야겠어요.”

“잠 많이 못 잤어?”

“네. 새벽까지 얘랑 작업했어요.”

“뭐어?”


어젯밤 서희와 은별을 제외한 팀원들은 모두 과음을 했지만, 그 중에도 가장 많이 마셨던 사람이 바로 이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취해서 은별이 이들을 데려다주느라 진땀을 뺐는데, 언제 일어나서 만나 작업까지 했다는 말인가.


“여원쌤이 노래는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

“너희 어제 되게 취했었지 않았어? 근데 작업을 했다고?”

“미쳤었죠.”

“그 시간에 악기도 못 했을 텐데 어떻게 했어?”


은별의 물음에 지혜와 유찬이 머뭇거렸는데 서희가 손을 앞뒤로 휘저으며 말했다.


“얼른 가. 좀 있으면 식당 닫아.”

“네.”

“쉬어. 오후에 보자.”

“네, 언니.”


서희와 은별은 지혜와 유찬의 어기적거리는 뒷모습을 보다 몸을 돌렸다.


“쟤들 대단하네요. 그렇게 퍼마셔놓고 작업을 다 하고.”

“내 말이. 그래도 다행이다.”

“뭐가요?”

“혼자 있었음 술 퍼마셨어도 누가 북엇국을 줘. 난 혼자 있으면 술은 쳐다도 안 봐.”

“네.”

“어쨌든 여긴 때 되면 공짜 밥 주고, 트레이닝 없음 놀아도 되고 자도 되고 좋잖아.”


서희는 무심코 이렇게 말하다 멈칫했다.


‘제일 하고 싶은 건, 한 일주일쯤 조용하고 깨끗하고 햇빛 잘 들어오는 방에서 아무 걱정 없이 쉬는 거야. 끼니때 되면 어디서 밥이 뚝 떨어지고, 책을 읽든 잠을 자든 누가 뭐라고 안 하는 데서.’


이렇게 말한 사람이 또 떠올랐다.

그는 지금도 밥이 뚝 떨어지는 곳에서 아무 걱정 없이 쉬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을 그런 곳으로 데려다주고 그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서희가 가장 답답한 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연락이라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이러진 않았으리라.


은별은 서희의 일그러진 얼굴을 빤히 보다 말했다.


“언니.”

“어?”

“정 힘들면 PD님 찾아요.”


계단을 오르던 서희의 걸음이 멈추었다.

은별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해도 될 일이면 제가 하겠지만 그럴 수가 없잖아요. 옆에서 보고 있자니 제 마음이 아파서 그래요.”

“···.”

“저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래서는 아니야.”


은별은 서희에게 ‘그 사람도 언니 좋아해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면 서희가 기뻐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은별의 강한 직감일 뿐 정완에게 확인한 사실이 아니고,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정완이 말한 적 없는 것을 서희보다 은별이 먼저 알아냈다는 점 때문에 서희의 마음이 더 아파질 수도 있다.

은별에게는 옆에 있는 서희도 소중하지만 정완은 평생의 은인이다. 언행에 신중한 사람이 끝내 진심을 말하지 않은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니 존중해야 한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말을 했다.


“만나서 끝장을 봐요. 그 사람도 그랬잖아요. 끝장을 봤으면 좋겠다고.”

“그거야 오디션에서 그러라는 거지···.”


서희는 이 말을 하다 눈을 번쩍 떴다.

트레이닝을 부탁하기 위해 정완에게 연락하던 날 자신이 은별에게 했던 말이 기억났다.


어차피 인생이란 건 오디션의 연속이라고.


그래서 서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일 수 있었다.

게다가 정완은 자신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스스로 과제를 찾아서 하라고 말했다.


서희는 또 다른 오디션을 위한 과제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했다.



***



다음 날 오후.

팀원들이 사흘간 못했던 연습에 매진하는 사이에 서희와 은별은 여원에게 불려 갔다.

여원의 사무실에 아리가 함께 있다가 이들을 맞이했다.


여원이 밉지 않은 눈으로 서희와 은별을 흘겨보다 말했다.


“어제 애들이 술떡 된 게 너희들이 그런 거라며?”

“풉!”


아리가 입을 막고 웃은 반면 은별은 여원의 말을 듣자마자 억울한 마음이 앞섰다.

서희 역시 그랬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싶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죄송하지 않아. 잘했어.”


여원의 따듯한 말에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너희들 지금 재충전하고 싶어도 할 게 없잖아. 밖에 나돌다 사고치는 것보단 훨씬 나아.”

“네.”

“경리 팀에 얘기해 놨으니까 그날 얼마 썼는지 알려주고 정산 받아.”

“네?”

“원래 내가 할 일인데 너희들이 했으니까 나야 고맙지. 그리고 너희들이 먹는 비용은 CBC에서 전액 지원하는 거 알지? 영수증 있음 좋은데, 없으면 어디서 뭘 얼마치나 샀는지만 알려줘. 나머진 거기서 알아서 할 거야.”

“감사합니다.”


여원은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아는 라이브 카페 사장들 중에 씨팝만 시작하면 전화하는 사람들이 있어.”

“네.”

“이 사람들이 요새 또 전화하네? 여우비가 자기네 가게에서 노래했음 좋겠다고.”

“네.”

“예선 방송 후에도 너희들 건으로 몇 번 연락 받았는데, 좀 아니다 싶은 데라 내가 안 된다고 잘랐거든. 이번에 연락 온 데는 괜찮고 내가 도와주고 싶은 곳이야.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도와줄 방법이 뭐 있겠어. 좋은 사람 보내서 도와줘야지. 거기들은 페이도 다른 데보단 넉넉해.”

“어딘데요?”

“<수선화>랑 <베아트리체>야. 아리는 <수선화>에서 공연한 적 있지?”

“네.”

“거기 사장들이 여우비 보고 몸이 달았더라고. 두 타임 연속으로 하면 하루 페이를 개인당 40 주겠대.”

“네?”

“그래서 내가 그랬어. 50 주면 내가 여우비한테 직접 얘기하겠다고. 거기 두 군데는 내 얼굴 봐서 해줬으면 하는데, 괜찮겠어?”


여원의 말에 서희와 은별의 눈이 커졌다.

아리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마추어로는 최상이네요.”

“거긴 그렇게 받아도 돼. 내가 꽂은 애들 때문에 많이 득봤으니까.”


특히 은별은 여원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5년 전 미투리 밴드가 대학가 클럽에서 받은 공연비는 한 타임 기준 30만 원 내외였는데, 그것도 그 지역에서는 많은 축에 속했다. 밴드 멤버가 다섯이었고 리더가 조금 더 가져갔기 때문에 정완이 한 번의 공연으로 버는 액수는 5만 원 정도였다.

당시 은별은 최저임금의 몇 배를 받으니 많은 것 아닌가 생각했지만, 대학가에는 인디밴드가 넘쳐났고 이런 공연은 일주일에 두 타임뿐인데다 클럽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공연비를 깎으려고 하여 공연만으로는 생계유지가 어려웠던 것이다.


여원의 말대로라면 결성한 지 네 달밖에 되지 않은 여우비의 공연비가 정규앨범을 네 장이나 냈던 미투리 밴드보다 높으며, 은별의 가치가 정완의 네 배라는 뜻이었다.

방송의 위력이 새삼 실감되었다.


그런데 은별에게는 걸리는 게 있었다.


“근데 저희는 레퍼토리가 모자라요.”

“왜?”

“자작곡이 적어서요. 한 타임에 부를 노래가 적어도 여덟 개는 돼야 할 텐데, 저희 자작곡이 많지가 않아서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긴 하겠네.”


서희가 말을 덧붙였다.


“저희가 하정완 PD한테 받은 노래가 일곱 개인데 그 중에 경연에서 쓰라고 한 건 네 개고, 그 외에 듀엣곡 하나랑 각자 솔로곡 하나씩 있는데 그건 나중에 앨범에 넣으라고 했어요.”

“그럼 당장 부를 수 있는 건 <비 오는 아침>이랑 <나의 아리랑> 밖에 없는 거야?”

“네. 은별이 솔로곡 빼고 다른 노래는 아직 가사도 다 안 됐어요.”

“으음.”


여원은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순정남녀는 자작곡을 열 개 이상 가진 상황에서 카페 공연을 시작했고, 우진은 기타와 키보드로 즉석 연주까지 가능했기 때문에 레퍼토리로 고민할 일이 없었다.

반면 여우비는 싱어송라이터이긴 하지만 더 이상의 자작곡은 없고 연주는 불가능하다.


그때 아리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

“응.”

“만약에 한다고 하면 당장 이번 주부터 해야 하나요?”

“미룰 수 있지만 당장 하는 게 좋긴 하지. <수선화>에서는 꼭 금요일에 하길 원하더라고.”

“그럼 제가 우진이랑 상의하고 이따 말씀드릴게요.”

“걔는 지금 이 일에 신경 못 쓸 텐데? 네가 와이프니까 더 잘 알잖아.”

“우진이한테는 허락만 받으면 돼요.”

“뭘?”

“아주버님이 우진이한테 두 곡을 주셨어요. 그걸 얘들한테 주라고 하겠습니다.”


아리의 말에 서희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건 우진 씨가 너희 앨범에 자기 솔로곡으로 넣겠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허락을 받아야지.”


여원은 입술을 모으고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나한테는 내일 알려줘도 되니까 상의는 밤에 침대에서 해. 그래야 허락받기 쉬울 거야.”

“네.”

“나가 봐.”

“감사합니다.”


서희와 은별은 갑작스레 벌게진 얼굴을 푹 숙인 채 사무실을 나왔다.

아리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서희의 팔을 잡았다.


“커피 마시자.”

“근데 넌 어떻게 그런 얘길 듣고 눈 하나 깜짝 안 해?”

“어떤 얘기? 침대?”

“응.”

“나 처녀 아니거든?”

“헐.”

“그리고 아무리 침대에서라도 아무 때나 상의하면 안 돼. 타이밍이 엄청 중요하거든. 그 인간이 나한테 슬금슬금···.”

“야, 그만해.”

“풉!”

“와아. 헐. 찐헐! ···앉아 있어. 커피 내가 할게.”


서희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젓고 커피머신의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너 이제 순정남녀 아니야. 너 이러는 거 팬들이 알까?”

“좀 오글거린다고는 하는데, 뭐 어때? 내가 내 신랑이랑 침대에서 상의하겠다는데···. 아! 그렇지.”


아리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손뼉을 짝 쳤다.


“왜?”

“상의를 꼭 말로 할 필요가 없겠다. 몸으로도···.”

“야!”

“왜!”

“너 진짜 리틀 여원쌤이야. 뜬금없이 19금 날리는 것까지 똑같니?”

“고마워.”


아리는 빙글빙글 웃으며 휴게실 소파에 앉았다.

서희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가 어이없음에 고개를 저었지만 은별은 내내 굳어 있었다.


“아리 언니.”

“응.”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괜히 저 때문에.”

“너 때문 아니거든?”


아리는 이렇게 받아쳤지만, 그녀가 여원에게 여우비의 카페 공연을 부탁했던 이유에는 은별의 형편도 있었다.

은별은 집에서 도움 받지 못하며 아르바이트로 자기 생계를 꾸리다가 일을 그만두었기에 쪼들릴 게 뻔하다. 아리 자신이 2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서희가 아리와 은별에게 커피를 쥐여 주며 말했다.


“나 때문이야.”

“왜요?”

“내가 유경이랑 얘기하다 나온 말 때문에. 우리가 공연 경험이 없어서 막막할 때가 있다고 했더니 유경이가 얘한테 얘기한 거니까.”

“그래요?”

“난 연습실에서 노래할 때랑 무대에 관객들 세워놓고 노래할 때 마인드가 전혀 다르더라고. 너도 그러지 않았어?”

“네.”


서희는 무대보다 연습실에서 더 긴장할 때도 있었는데, 그것은 연습실에 있던 유일한 관객 때문이었다.

은별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러니까 방법 찾아보자. 이게 경연에 엄청 도움이 돼. 돈 받고 하는 일이라 철저하게 준비하게 되거든.”

“알겠어요.”

“다들 여기 있었어요?”


우진은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은 채 휴게실에 들어오다 아리를 보고 굳었던 얼굴을 폈다.

은별이 얼른 자리를 내주었고 서희는 커피를 하나 더 뽑아서 우진에게 주었다.

아리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우진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괜찮아? 잠도 조금밖에 못 잤는데?”

“응. 오늘 중으로 끝날 것 같아. 그래서 부탁이 있는데.”

“뭔데?”

“빈조 이 자식, 내일부터 내 눈에 안 띄게 해줘.”

“알았어! 잘 됐네. 안 그래도 나한테 ‘제가 형님을 좀 괴롭히죠?’ 이러면서 실실 웃는 게 재수 없었는데, 내가 아주 죽여 놓을게.”

“서희 씨. 커피 고마워요.”

“뭘요.”


우진이 커피를 두어 모금 마시자 아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데 나도 너한테 부탁이 있어.”

“응. 얘기해.”


아리는 아까 여원의 사무실에서 오간 이야기를 우진에게 전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우진은 고개를 선선히 끄덕이며 서희와 은별에게 말했다.


“그거 정말 많이 도움 됩니다. 특히 저는 거기서 말발이 엄청 늘었어요.”

“말발은 무슨. 진행병이지.”

“후후후.”


우진은 아리의 말에 잠시 웃다가 그녀를 보았다.


“안 그래도 나도 그것 때문에 고민이 있었어.”

“무슨 고민?”

“두 노래 작곡가를 SS로 해야 할지 HAP로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순정남녀 앨범에 다른 작곡가 노래가 들어가면 일이 커질 것 같은데, 형은 자기가 드러나는 걸 싫어하잖아.”

“수길 씨는 어떻게 했대?”

“걔가 받은 노래에는 작곡가가 SS라고 돼 있었대. 록이라서 그랬나봐.”


아리가 고개를 끄덕였고 우진은 서희에게 말했다.


“아리 말대로 하는 게 제일 좋겠어요. 지금은 제가 작곡할 여유도 없는 상황이라.”

“그렇죠. 다들 우진 씨 노래 받고 싶어 하는데 저희만 받을 수도 없어요.”

“형한테 제가 잘 얘기할게요.”

“고마워요.”


서희가 고마운 것은 이 일 때문이 아니라 우진이 정완과 만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자작곡 세 개만 있어도 됩니다. 조만간 2라운드 방송되면 하나 더 생길 테니까요. 거기다 <어땠을까>랑 <화살>도 부르시고.”

“네.”

“저희 노래도 마음대로 부르세요. 그리고 저희가 카페 공연할 때 불렀던 노래 중에 앨범에 안 올라간 소품이 몇 개 있는데 그것도 드릴게요.”

“아!”


아리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잠든 너>나 <길>, <길고양이에게 묻다> 같은 거?”

“응. 시나브로 애들도 레퍼토리 없으면 그거 불렀잖아.”


서희는 처음 듣는 제목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손님들이 모르는 노래를 불러도 돼?”

“한두 곡 정도는 이해해 주셔. 얘 노래 중에 <고등어>도 카페에서 처음 불렀거든.”

“두 분 다 노래를 잘하시고 분야가 다르니까, 각자 솔로곡 하나씩 기성곡으로 부르면서 다른 분은 잠깐 쉬시는 것도 좋겠네요. 그리고 <비 오는 아침>이랑 <나의 아리랑>은 앞뒤 타임에 편곡을 달리해서 부르세요. 제가 틈틈이 편곡하겠습니다.”

“아니요. PD님이 경연 때랑 다르게 편곡한 게 있어요. 그리고 기성곡도 저희한테 맞춰 만든 MR 많이 있고요.”

“그래요? 잘됐습니다.”


우진은 한참 고개를 끄덕이다 말을 이었다.


“노래 사이에 관련된 이야기 하다보면 한 타임 충분히 될 겁니다. 손님들이 앙코르 요청할 수도 있으니까 총 열다섯 곡 준비하시면 되겠어요. 그 정도면 성의껏 부르기만 해도 카페에서 좋아할 겁니다.”

“고마워요, 우진 씨.”


우진은 말을 맺으며 자신의 정리가 뿌듯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아리는 우진의 어깨와 볼을 쓰다듬었다.


“서희 씨가 바쁘겠네요. 형이 준 노래에 가사 쓰셔야 하니까요.”

“아니에요. 저야 우진 씨한테 고맙죠.”

“두 곡 다 기타랑 피아노면 충분해요. 연주는 제이미랑 유경이한테 부탁해 둘게요.”

“그건 내가 할게. 넌 일 끝내고 쉬어.”

“그래. 고마워.”


우진은 소파에 머리를 대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형은 이런 일까지 내다본 게 아닐까요?”

“네?”

“그게 저한테 주는 선물이라기보다, 형이 저로 하여금 자기를 대신해서 여러 사람들이 서로 돕고 고마워하게끔 만들라는 뜻처럼 느껴져서요.”


우진의 말에 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게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초록빛 산 능선 사이로 내비치는 새파란 하늘이 퍽 좋았다.


작가의말

이번까지는 예약연재로 올립니다.

일요일부터는 정상적으로 연재하겠습니다.

잘 정리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응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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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99 욱일302
    작성일
    20.06.04 06:21
    No. 1

    정완은 언제 나오나요 이젠 유령 같아요 건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0 진사로
    작성일
    20.06.07 00:59
    No. 2

    욱일302님! 감사합니다.
    정완이 많이 좋아하시나보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유령은 당연히 아니고, 분명히 나옵니다. 다만 앞으로 몇 회는 안 나와요..
    죄송합니다. 열심히 쓸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 or***
    작성일
    20.07.02 17:32
    No. 3

    항상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0 진사로
    작성일
    20.07.05 03:59
    No. 4

    oroi9님 감사합니다.
    기운 받고 열심히 쓸게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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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Wedding. 순정남녀가 순정부부로 20.04.23 225 9 29쪽
11 Goodness. 이럴 줄 알았으면 +2 20.04.21 223 8 23쪽
10 Round 2. 치열하게 따분한 날 +2 20.04.12 200 8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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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Preliminary 2. 비 오는 아침 +2 20.03.24 265 11 29쪽
3 Preliminary 1. 저 사람들 또 +2 20.03.22 267 10 30쪽
2 Making. 만들어야 할 게 노래만은 아닌 팀 +4 20.03.15 353 13 28쪽
1 Prologue. 오래 전 약속 +4 20.03.15 713 16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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