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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일반소설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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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9,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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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31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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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쪽

Slough. 그녀의 취미

DUMMY

10월 27일 토요일 오후,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서는 <C-POP Artist season 5> 팀원들의 두 번째 미팅이 있었다.

서희와 은별은 프로듀서와 트레이너, 멘토, 다른 참가자들 앞에서 4라운드 참가곡 <Someday>와 이번 주 과제곡인 <#첫사랑>(볼빨간 사춘기)을 연이어 불렀다.

노래가 모두 끝나자 여원이 말했다.


“와아. 많이 좋아졌네. 파트도 잘 나눴고 각자 역할도 잘했어.”

“감사합니다.”

“은별이는 자세가 아주 좋아졌는데? 움직임이 뻣뻣하지 않으니까 노래도 부드럽고 안정적이고, 고음도 정확하게 탁탁 나왔어.”

“감사합니다.”

“서희는 요 며칠 힘들어 보이던데. 괜찮아?”

“네.”

“넌 3라운드 때랑 거의 똑같네. 나아진 게 없어.”

“죄송합니다.”


서희가 고개를 숙이자 여원이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이때쯤 되면 기량이 좋아지는 게 엄청 힘들어. 서희는 원래 자기 파트 똑부러지게 하잖아? 그건 그대로였는데 전보다 나아진 게 없다는 것뿐이야.”

“네.”

“서희는 지금도 서브보컬로 밸런스는 괜찮습니다. 어느 것 하나를 건드리면 다른 부분도 다 건드려야 하고···.”

“그렇다고 저대로 가면 경쟁력이 크지가 않아. 다른 회사 애들은 노니? 다음 라운드는 실수 없고 감성이 좋아도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


여원은 주성락 트레이너의 말에 대꾸한 후 서희를 향해 말을 이었다.


“<#첫사랑>에서는 설레는 감성이 잘 보였는데, 그걸 듣는 사람들이 공감까지 할 수 있도록 극대화시켜서 표현해 봐. <Someday>에서는 묘한 분위기가 잘 안 살아났는데 그건 둘이 합을 맞춰보고.”

“네.”

“원곡자들 따라하지 않아서 좋았어. 너희들은 여기까지 하자.”

“감사합니다.”


서희와 은별은 미팅을 마치고 식당에 앉았지만 곧바로 식기를 들지 못했다.

두 사람은 얼마 전부터 똑같은 고민을 갖고 있었다.


“언니 아까 예린이랑 무슨 얘기했어요?”

“자유곡 아직 못 정했대. 아무거나 하면 떨어질 것 같아서 진짜 좋은 노래를 찾아야겠는데 모르겠다고.”

“딴 애들도 그래요. 도진이는 못 만들겠다고 그냥 있고, 하트헤르는 지혜가 곡을 계속 엎어버린대요. 그것 때문에 유찬이도 힘들다고.”

“하트헤르는 기성곡 해도 되잖아.”

“유찬이는 그러자고 하는데 지혜가 싫대요.”


4라운드에서는 모든 팀이 심사위원 미션곡과 자유곡 하나씩을 불러야 한다.

그런데 뮤컬트의 다섯 팀 중 자유곡을 정한 이는 아직 없다. 싱어송라이터가 아닌 예린과 자작곡을 부를 필요가 없는 하트헤르마저도 그랬다.


“우리는 어떡하죠?”

“다른 방법은 없겠지?”

“거부권 쓰고 기성곡 할 수는 있겠죠.”

“그것보단 PD님이 주신 노래 쓰는 게 더 좋을 거야.”

“네.”


서희가 또 정완을 언급하고서야 은별의 말문이 트였다.

은별은 정완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기가 왠지 어려웠다.


“여기만 오면 다 될 것같이 얘기했는데.”

“다들 바쁜 걸 어떡해. PD님도 여기 내부 사정이야 모르셨겠지.”

“그렇죠.”

“그러니까 그 중에 하나만 쓰자. 어차피 PD님도 둘 중 하나는 경연 때 쓸 생각이셨잖아.”


서희의 말에 은별도 고개를 끄덕였다.


팀원들은 우진의 곡을 받는 일이 적어도 이번 라운드에서는 불가능함을 알았다.

사내 프로듀서가 셋이었다가 둘만 남은 터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우진은 빈조(Vinzo)의 정규앨범을 프로듀싱하며 평소의 배에 달하는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팀 대표인 예린은 헌규와 우진이 공동 작곡한 노래를 받았지만, 곡에 대한 피드백을 헌규하고만 주고받을 정도였다.


작사가인 미란은 자신이 다녔던 학원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곡을 찾고 있다.

도진은 싱어송라이터의 자존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곡을 받을지를 고민하는 한편, 소속밴드에 도움을 요청해둔 상태다.


서희와 은별은 정완이 만들어 준 듀엣곡이 아직 두 개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다.

두 곡 모두 가사는 없지만 가제는 붙어 있었다.


“난 <여우비> 썼으면 좋겠는데.”

“저는 <내 삶의 찬란했던 시간>이요.”

“왜?”

“둘 다 좋은데, 저는 <내 삶의>가 조금 더 좋아요. 잔잔하고 먹먹하고.”

“나도 <내 삶의>가 더 좋아.”

“근데 왜 <여우비>를···.”

“더 좋은 노래가 앨범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아! 네. 알겠어요. 이번엔 <여우비> 써요.”


둘의 의견이 갈라지나 싶었지만, 은별은 서희의 말을 듣고 생긋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트레이닝이 없는 날이지만 서희는 뮤컬트 엔터테인먼트로 출근하고 있었다. 연습할 것도 많았지만 쉬어도 딱히 할 일이 없는 게 그녀의 현실이었다.

정완과의 추억이 담긴 편의점 앞을 일부러 지나쳐 가며 한숨을 쉬던 그녀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차를 돌렸다.

이윽고 그녀는 인디펜던트 실용음악학원 앞에 차를 세웠다.


“어서 오세요. 인디펜···. 앗!”


서희가 학원에 들어서자 그녀를 쳐다본 여남은 명의 눈이 일제히 커졌고, 그것은 원장 승철과 태호를 비롯한 보컬트레이너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더없이 아름답지만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지간한 사람들은 말조차 걸 수 없을만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단 한 번의 방송으로 음원 1위에 오르며 학원 수강생들의 꿈을 이루어내었고,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여신으로 추앙받기 시작한 여자.


“혹시 씨팝에···.”

“안녕하세요. 여우비 강서희입니다.”

“아, 예.”


서희는 원장 승철에게 인사한 후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학원의 내부를 둘러보았다.

은별과 나란히 앉았던 의자에는 악보 뭉치가 어지럽게 놓였고, 정완이 앉았던 쪽에는 앳된 학생 둘이 있었다.

서희는 정완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기 수강생이에요?”

“네? 아뇨. 트레이닝 받을까 해서 상담 중이었어요.”

“그렇구나. 나 여기서 3주 전까지 트레이닝 받았어요.”

“네? 아! 네.”


학생들은 눈을 빛내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서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시선을 거두고 사무실과 연습실, 녹음실 부스를 살폈다.


서희가 여기 온 것은 4라운드에서 부르려는 자작곡 <여우비>의 가사를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팀 이름과 같은 제목은 은별이 말했던 ‘여기서 우리의 비밀을 만들어요’의 약어를 뜻하는데, 세 사람의 비밀은 대부분 여기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두 번 다시 올 수 없기에 서희는 이 공간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한 곳을 볼 때마다 정완과의 추억이 되살아남과 동시에,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승철은 서희가 시선을 거둘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방송 잘 봤습니다. 여우비 정말 멋있더라고요. 노래도 좋았고요.”

“감사합니다.”

“차라도 한 잔 하겠어요?”

“아니요. 가볼게요. 지나던 길에 잠깐 들렀어요. 폐가 많았습니다.”


서희는 승철의 말에 간단히 대꾸하고 인디펜던트 학원을 나섰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를 한 남자가 부리나케 쫓아왔다.


“저어. 서희 씨. 저는 이태호라고 합니다. 정완이랑 같이 미투리에 있었어요.”

“네.”

“정완이 지금 연락 안 되던데. 혹시 서희 씨는 연락되시나요?”


서희는 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춘 후 태호를 텅 빈 눈빛으로 바라보다 말했다.


“하정완 프로듀서님께 하실 말씀이 있나요?”

“우리 학원에 기타 트레이너가 필요해서요. 연락되면 전해 주셨으면 해서.”

“포기하세요.”

“예?”

“그럼.”


서희는 태호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준 후 부리나케 차로 돌아왔다.

가슴이 또 뜨거워져 있었다.


정완은 자신과 은별 때문에 저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했을 것이다.

저들의 머릿속에서 정완의 이미지가 ‘아쉬운 소리만 하고 다니는 사람’ 따위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자신은 무엇도 해줄 수 없다.


서희는 여우비로 인해 학원의 매출이 늘어나면 정완이 짊어졌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여기서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학생들에게 밝힌 것이다.

물론 정완은 그런 짐마저 모두 털어버렸기에 떠났겠지만.


함께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완은 서희와 은별의 성장을 위해 헌신했고, 서희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것도 다 갚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헌신은 보이지 않는 곳에도 촘촘히 박혀 있었다. 대체 무엇을, 얼마나, 어디까지 한 걸까.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물을 수도 없음에 가슴이 또다시 메어왔다.


“일단 하자. 맨날 운다고 달라질 건 없어. 할 거 다 하고 울든지 말든지 해.”


서희는 이를 앙다물고 눈에 힘을 주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



화요일의 늦은 밤. 트레이닝이 끝난 후 은별은 피곤하다며 숙소로 들어갔다.

텅 빈 휴게실에 망연히 앉아 있던 서희 앞에 우진이 마주앉았다.


“노래랑 사진 정말 감사했어요.”

“뭘요.”


서희는 어제 아리의 부탁을 받고 정완이 불렀던 노래와 그의 얼굴이 나온 사진을 우진에게 보내주었다.

우진은 미투리 밴드의 공연이나 원주 예선 때 어둠속에 있던 모습을 본 것 말고는 정완과 대면한 적이 없었다.


“어젯밤에 아리가 <Ode To My Family> 듣고 많이 울었어요. 이게 그렇게 슬픈 노래인지 몰랐다고. 저도 <화양연화> 듣고 하마터면 울 뻔했습니다. 가슴이 콱 막혔어요.”

“우진 씨야 이승환님 팬이니까 그랬을 거고 아리는···. 하아.”


아리의 어머니는 두 사람이 미니앨범을 내고 한창 활동했던 5월의 어느 날 갑작스레 돌아가셨다.

치매로 요양원에 계시던 아리 어머니는 외동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동생 이름으로 불렀지만,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갔던 면회 때 우진을 가리키며 저런 남자 없으니 빨리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내년에 하기로 약속했던 결혼을 올해로 당긴 이유가 이것이다.


“제가 공장장님 팬이어서보다 <화양연화>가 완전히 형 이야기여서 그랬어요. 단어 하나만 바꿨는데.”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완은 원곡의 2절 중 ‘울고 웃고 뒹굴던’을 ‘울고 웃고 뛰놀던’으로 바꾸어 불렀다. 그는 은별과의 과거에 대해 조금의 오해조차도 원하지 않았으리라.


“PD님 노래가 여러 사람 울렸네요.”

“근데 형은 곡을 여우비한테도 주고 수길이한테도 주고 저한테도 줬는데, 정작 본인한테 준 게 없더라고요.”

“네. 저도 그분한테 받기만 했지 준 게 없어요.”


서희는 씁쓸히 웃었다.

우진은 본론 같은 서론을 마치고 진짜 본론으로 들어갔다.


“형이 저한테 준 노래가 둘인데, 저희가 내년쯤 내려는 앨범에 제 솔로로 넣을까 해요.”

“네.”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가 오로지 우진이 만든 곡에만 가사를 붙이고 노래한다는 것은 순정남녀의 팬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따라서 정완이 만든 노래는 순정남녀의 듀엣곡이 될 수 없다.

우진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서희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그 가사를 서희 씨가 써주세요.”

“네?”


서희의 눈이 매우 커졌다.


“우진 씨 솔로니까 우진 씨가 가사를 쓰는 게···.”

“아리가 그랬어요. 형이 만든 곡에는 서희 씨가 가사를 쓰는 게 제일 좋겠다고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서희는 초점 잃은 눈으로 생각에 잠겼다.

우진과 아리는 정완과 서희의 관계가 자신들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서희 씨도 지금 형 찾고 싶으실 텐데 저도 그래요.”

“네.”

“근데 형을 찾아도 저는 음악 쪽으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희 씨한테도 이런 부탁은 마지막이겠지요.”


서희는 우진의 말을 한참 곱씹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할게요. 근데 당분간은 좀.”

“예. 저도 지금은 많이 바빠서 내년에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진은 후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다시 작업하러 갈게요.”

“퇴근 안 하세요?”

“빈조 이놈 요구사항이 많아서 아무래도 밤 새워야 할 것 같습니다.”

“네. 몸조심하세요.”


우진은 휴게실을 나가려다 문득 든 생각에 문손잡이를 잡은 채 뒤돌았다.


“서희 씨.”

“네?”

“우리 형, 음악 안 해도 괜찮아요?”


서희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여 보였다.



***



11월 3일 토요일. <C-POP Artist season 5> 4라운드 사전대결, 즉 기획사 대표들의 경연이 있는 날이다.

서희를 제외한 뮤컬트 팀원들은 오전에 출근하여 점심식사를 함께한 후 밴 차량에 올라탔다.


“서희 언니 무슨 일 있어요?”

“어제 본가 갔다가 스튜디오로 바로 올 거야.”


은별은 지혜의 말에 답한 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씁쓸한 미소가 비어졌다.

서희는 지금 많이 아프다. 은별 역시 한때 같은 병을 앓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겉보기는 멀쩡하지만 입맛도 의욕도 없어지며,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단 한 명뿐인 병.

생각이 자연스레 그 한 명으로 옮겨지려는데 유찬이 그에 대해 물었다.


“근데 은별이 누나, SS가 누구예요?”

“어?”

“SNS에서 씨밥바 검색하다 봤는데, 여우비 팬카페에 글이 하나 올라왔더라고요.”


그런데 유찬의 말에 은별보다 도진이 더 놀랐다.


“SS? 미투리 밴드 기타리스트 말하는 거야?”

“네. 글 쓴 사람이 미투리 밴드의 팬이래요.”


첫 방송이 나간 후 한 포털 사이트에 여우비의 팬카페가 개설되었다는 사실은 서희와 은별도 알고 있었다.


미투리 밴드의 팬이 여우비 팬카페에 남긴 ‘여우비 때문에 세 번 깜놀’이라는 글에 의하면, 자기 집 근처에서 SS를 보고 놀랐고, 그와 함께 있던 여자들이 너무 예뻐서 또 한 번 놀랐으며, <C-POP Artist season 5> 방송에 그 두 여자가 여우비라는 듀엣으로 나와 멋진 모습을 보여줘서 놀랐다는 것이다.

자신은 SS에게 사인을 받고 싶었지만 월등한 비주얼의 남녀 셋이 함께 있는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도저히 끼어들 수 없었다는 말도 있었다.


“맞아.”


은별의 말에 팀원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녀는 팀원들에게 지난번에 복도에서 그 사람 보지 않았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다른 팀원들은 순번이 뒤였기에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완을 위한 면에서는 다행이었다.


“서희 언니랑 나랑 여기 캐스팅될 때까지 SS님한테 음악 배웠어.”

“그래요?”

“서희 언니는 예전에 그분한테 트레이닝 받았었고 나는 미투리 밴드 팬이었어. 그래서 우리가 팀 결성할 때 트레이닝 부탁했어. 끝나면 그분이 집까지 태워다주셨는데 그때 봤나보네.”

“아아.”

“누나, 저 SS님 만나고 싶어요.”


도진의 말에 은별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분 연주 정말 독특하면서도 멋져요. 정확하면서도 자기만의 그루브가 있거든요.”

“그분 본 적 있어?”

“아니요. 4집 앨범 듣고 반해서 팬카페 들어갔고 영상으로 많이 봤어요. 그래서 밴드 하려고 서울 올라오자마자 찾아가봤는데 그분은 탈퇴했더라고요. 뒤에 들어온 기타리스트는 좀 허접했고요.”


은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한테 뭐라도 배워보고 싶어서 그런데, 저랑 연결해 주실 수 있으신지.”

“미안한데 나도 이제 연락 못해.”

“예?”

“3라운드 녹화 끝나는 날 우리하고 계약 끝났거든. 그분은 그날 이후 전화 해지하고 연락 끊으셨어. 알고 지내던 다른 뮤지션들까지 전부 다.”

“아니 왜···.”

“음악계를 완전히 떠나셨거든.”

“예?”

“그래서 나도 이제 연락할 방법이 없어. 나중에라도 연락되면 네 뜻은 말씀드릴게.”


은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마 자신은 씁쓸함만으로 넘길 수 있게 되었지만 서희는 그 사람이 아픔의 이유이지 않은가.





오후 3시.

영기가 무대에 등장하고 심사위원들이 자리에 앉자 스튜디오에 긴장이 감돌았다.


“연일 열기를 더해 가는 <C-POP Artist season 5>! 반갑습니다. 홍영기입니다.”

“와아!”

“4라운드 사전대결, 즉 KP와 뮤컬트, TYK, 인디밴드연합 등 네 기획사 대표들의 경연을 앞두고 3라운드 합격자 스무 팀이 모였습니다. 다들 잘 지내셨나요?”

“네.”

“오늘은 네 팀만 긴장하면 됩니다. 다른 참가자들은 긴장 푸시고 멋진 공연을 기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시겠죠?”

“네!”


영기는 무대에서 객석 쪽으로 걸으며 말을 이었다.


“저는 캐스팅 오디션이 끝난 후 각 회사 다 가보고 참가자들 뭐하는지 확인하거든요. 근데 올해 참가자들은 유난히 얌전해 보입니다.”

“까르르!”

“작년까지는 제가 회사에 가면 거기 심사위원이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얘기해주고 그랬는데 올해는 그것도 없었어요. 담여원 심사위원님. 어떤가요?”


영기의 말에 여원이 팀원들을 둘러보며 마이크를 들었다.


“영기 씨 말씀이 맞는데 저는 이게 더 좋아요. 전 시즌에는 한두 명이 꼭 사고를 쳐서 골치 아팠는데, 올해 친구들은 굉장히 모범적으로 열심히 트레이닝하고 있죠.”

“그래도 뮤지션은 너무 모범적인 것보다는 가끔 일탈도 하고 그래야지 않나요? 뮤컬트 엔터테인먼트가 그 예 아닙니까. <그날 밤 우리는>(한미연사) 같은 명곡도 나오고 말이죠.”

“작년에 나온 노래까지 얘기하는 걸 보니, 영기 씨 오늘 할 얘기가 어지간히 없나보네요?”

“까르르!”


카메라가 영기의 능글거리는 표정과 여원의 도끼눈을 함께 잡았고, 참가자들은 동갑내기 남녀의 대화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최근 일부 시청자들 사이에서 나온 ‘이번 시즌은 노래는 좋은데 그 외엔 재미가 없다’는 평가 때문이었다.

물론 기존에 방송하지 않았던 2차 예선만 나갔기에 음악 위주로 가서 그런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다.


특히 혼성팀 참가자들끼리의 조화, 속칭 묘한 러브라인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를테면 현재 TYK 팀의 일원인 혼성 듀엣 ‘슬립리스’는 첫 방송에서 화제가 되었고, 멤버끼리의 팀워크뿐 아니라 외적인 모습도 잘 어울린다는 네티즌 의견이 많았기에 영기가 인터뷰 때 이들에게 ‘두 분 사귀는 건 어때요?’라고 물었는데, 팀 멤버인 권선하와 한운기가 동시에 연인이 있다고 정색하며 말했던 일 같은 것이다.


영기가 모든 걸 내려놓은 듯 크게 외쳤다.


“예! 솔직히 그렇습니다. 할 얘기가 어지간히 없네요.”

“까르르르!”

“이번 시즌 참가자들한테는 그냥 노래나 많이 시켜야겠어요.”


영기의 말에 지노와 인길이 한 마디씩 보탰다.


“그러시죠. 우리 프로가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가 음악 아닙니까.”

“대신 저희 심사위원들이 시청자 분들께 약속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참가자들과 합심해서 정말 멋진 무대 보여드릴 수 있도록 많이 노력하겠다고요.”

“와아아!”

“좋습니다.”


두 사람의 말에 객석에서 박수가 터졌고, 영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무대로 내려갔다.

그의 자리 앞에 추첨 상자가 준비되었다.


“<C-POP Artist season 5> 4라운드 사전대결은 제가 추첨하여 나온 회사의 대표가 곧바로 한 곡을 부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상자에는 네 회사의 이름이 적힌 공이 준비되어 있는데요, 첫 대결에 나설 회사부터 뽑아보겠습니다.”


영기가 상자에 손을 넣자 네 심사위원들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제일 처음으로 노래할 회사는 KP! KP 엔터테인먼트입니다. KP 대표 앞으로 나와 주세요.”

“앗!”

“보시다시피 KP의 대표는 ‘ADHT’입니다.”


앳된 남자아이 셋이 무대로 뛰어 올라오자 다른 참가자들의 입이 벌어졌다.

03년생 남자 셋으로 이루어진 그룹 ADHT의 이름은 ‘Always Dance, High Tension’의 약자로, 이들은 단 한 번 방송에 등장한 것만으로 10대의 열렬한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심사위원들의 태블릿 PC와 무대 위 모니터에 ADHT가 부를 노래가 나타났다.


“ADHT가 부를 노래가 <우리는 모두 친구>라는데, 이게 전민재 군이 작곡한 노래라고요?”

“와아!”


높아진 함성 속에서 서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완은 KP에 싱어송라이터가 캐스팅되었다는 말만 듣고 이 일을 예상했다. 따라서 이제는 얘기가 달라질 일만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DM 작곡가로 <C-POP Artist season 5>에 싱어송라이터로 참가한 전민재는 지난 라운드까지 직접 만든 안무로 자작곡을 소화해서 KP에 캐스팅되었다.

그는 이 능력만으로 벌써부터 KP의 전속계약 1순위로 꼽히고 있었다.


이때 민재는 은별의 옆 빈자리에 앉았다가 그녀의 시선을 받자 유난히 겸연쩍어했다.


“노래 만드느라 힘들었겠어요. 민재 씨도 다음 라운드 준비해야 할 텐데.”

“아, 아니요. ADHT 애들이 대표가 되더니 꼭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요. 부탁받고 애들한테 고마웠습니다. 저도 제 노래를 다른 사람들이 부르면 어떨지 궁금했거든요.”


인길이 민재 쪽을 힐끗 본 후 영기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번 시즌엔 저희 회사에서도 무려 싱어송라이터를 캐스팅했습니다. 사내 다른 프로듀서들의 노래가 자기복제다, 식상하다, 그런 내부 평가가 나오던 참이라 이번엔 아예 뉴 페이스에게 곡을 맡겨봤죠.”

“민재 군은 지난번에도 창작의 고통에 시달렸는데, KP에서 벌써부터 민재 군을 너무 부려먹는 거 아닌가요?”


여원의 이 말에 작곡가인 수휘와 인길이 차례로 답했다.


“그게 싱어송라이터의 숙명입니다. 진정한 싱어송라이터라면 시간이 급박할 때도 곡을 뽑아내야죠.”

“이건 거기 서우진 군 주특기 아닙니까. 뮤컬트에서 밥 먹듯 하는 일을 저희 KP에서는 이번에 딱 한 번 한 겁니다.”

“끄응.”


할 말을 잃은 여원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참가자들은 입을 틀어막았다.

영기가 상황을 정리했다.


“이게 <C-POP Artist> 사전대결의 묘미죠. 노래 들어보시죠. ADHT, 준비됐나요?”

“예!”

“좋습니다. 그럼 바로 <우리는 모두 친구> 들어보겠습니다.”


영기가 물러나자 ADHT 멤버들이 자리를 잡았고, 리더인 민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전자음악 반주와 함께 셋의 춤이 시작되었다.





ADHT는 자신들이 만든 안무를 창작곡 <우리는 모두 친구>에 얹어 실수 없이 펼쳤다.

폭력과 따돌림이 없는 학교를 만들자는 메시지가 담긴 이 노래에 대해 지노는 자기 세대의 문제를 다룬 노래는 힙합이고 댄스고 발라드고 구분 없이 많이 나와야 한다며 극찬을 남겼고, 수휘는 준비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곡과 안무의 완성도가 꽤 높다고 말했다. 여원은 <우리는 모두 친구>가 ADHT 멤버들이 평소에 부르던 노래보다 느린 템포의 곡이고 안무 역시 이전보다 격렬하지 않아서 오히려 노래의 메시지와 안무가 잘 연결되었고 보컬이 안정되었다고 평했다.


이어서 나온 인디밴드연합의 대표는 5인조 록그룹 ‘블루스톰’으로, 이들은 자작곡 <내일도 모르는 나의 오늘>을 불렀다.

인길은 블루스톰 멤버들이 20대 초반임을 거론한 후 그 세대의 고민을 잘 반영했다고 평했고, 지노는 가사 중 몇 군데를 들어가며 경험 없이 나오기 어려운 이야기라고 칭찬했다. 여원은 메인보컬인 송남수가 기타를 함께 치는 바람에 음정이 엇나간 부분이 있었다고 지적하면서도 곡이 좋았고 록그룹 특유의 강렬함을 잘 보여주었다고 평했다.


세 번째로 나온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선우예린은 헌규와 우진이 만든 창작곡 <가을꽃>을 불렀다.

인길은 곡의 완성도가 높고 가사의 분위기와 잘 조화되었다고 평했고, 수휘는 연주하는 악기가 단 하나뿐이었다면 예린의 목소리와 감성이 더 잘 느껴졌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지노는 지난번 예린이 감성 부족을 지적받은 후 많이 연습한 것이 확연히 보였다고 칭찬하면서도, 이번에는 감성이 부족하지 않았지만 곡과 가사가 그렇게 만들어져서 그런 것 같다고도 말했다.


마지막으로 대결에 나선 TYK의 대표인 혼성 듀엣 솔베이지의 노래는 자작곡 <안녕하고 돌아서는>이었다.

여원은 무덤덤하게 보내고 돌아서 우는 가사 내용과 남성 멤버 김성윤이 노래로 표현한 감성이 일치하지 않았다고 말했으며, 여성 멤버인 소희아에 대해서는 저음부 보컬이 짧게 끊어져 불안하게 들렸다고 지적했다. 인길은 기승전결 중 ‘전’, 즉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는 것 같다고 했고, 수휘는 두 사람의 호흡이 좋았다고 이야기했다.


경연이 끝난 후 심사위원들은 대기실로 들어갔고 20분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예린이 객석으로 올라와 서희의 옆자리에 앉자 팀원들이 하이파이브를 했다.


“고생했어, 예린아. 정말 잘했어.”

“아쉬워요. 저 1등 못하겠죠?”

“아니야. 너 1등 할 거야.”

“노래하다가 박자가 엇나간 데가 있었어요. 거기만 잘했어도···.”

“난 못 들었는데? 선생님들도 아무 말씀 안 하셨고.”

“괜찮아.”

“커피 마실래?”

“제가 갔다 올게요.”


팀원 중 예린 다음으로 어린 유찬이 곧바로 객석을 뛰어나갔다.

예린은 미처 아쉬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죄송해요.”

“아니야. 그런 얘기 하지 마.”


서희와 은별은 커피가 식어가도록 예린을 위로해 주었다.

휴식 후 영기와 대표 네 팀이 무대에 섰다.


“자. 심사위원들께서는 1위를 정하셨나요?”

“예.”

“발표해 주시죠.”

“이번엔 제가 발표하겠습니다.”


지노가 마이크를 잡자 객석의 참가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길이 발표하면 KP가 아닌 회사의 팀이 우승이고, 그렇지 않다면···.


“<C-POP Artist season 5> 4라운드 사전대결의 우승팀은, KP 대표 ADHT입니다.”

“와아아!”

“자. ADHT 팀 축하합니다. 정말 잘했죠? 우승 소감 들어보겠습니다.”


영기는 ADHT뿐 아니라 다른 대표들도 모두 인터뷰했다.





4라운드 사전대결이 끝난 후 여원은 팀원들을 대기실에 모았다.

그녀의 얼굴은 ADHT의 노래가 시작된 후부터 내내 굳어 있었다.


“예린이 잘했어.”

“죄송합니다.”

“아니야. 넌 오늘 지금까지 했던 것 중에 최고였어.”


여원은 팀원들과 일일이 눈을 맞춘 후 말했다.


“너희들도 잘 봤겠지만 예린이는 내 예상대로 자기 실력을 확실하게 보여줬어. 헌규랑 우진이가 만든 곡도 좋았고.”

“네.”

“근데 또 KP한테 졌네. 내 능력이 여기까지인 건가.”

“아닙니다!”

“그럼 뭐지? 대결은 공정했어. ADHT 애들이 못했는데 1등한 게 아니잖아.”


팀원들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가 이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C-POP Artist>의 네 시즌 동안 최종 우승팀은 늘 KP에서 나왔다. 특히 시즌 3부터는 4라운드 사전대결에서 KP의 대표가 우승했고 그 팀이 최종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그래서 이번 시즌이 시작되기 전부터 ‘씨팝폐인’을 자처하는 많은 네티즌들 사이에서 나왔던 가장 중요한 화두는 ‘과연 KP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였다.


Top 10의 경연부터는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인터넷 투표나 문자 투표가 점수에 반영되므로 댄스 팀이나 아이돌 그룹을 캐스팅하는 KP가 유리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심사위원 의견만으로 우승자가 가려지는 4라운드 사전대결조차 KP가 싹쓸이하는 건 그만큼 인길이 참가자들의 잠재력을 알아보는 안목이 좋을 뿐 아니라 캐스팅한 팀원들을 잘 성장시킨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이점은 딱 하나뿐이야. 닝기리 오빠랑 내 차이. 닝기리 오빠는 씨팝 기간엔 다른 거 다 때려치우고 팀원들만 훈련시키던데 나도 그래야 하나? 아님 우리도 댄스 아이돌을 캐스팅해야 하나···.”


여원은 자조 섞인 혼잣말을 뇌까리다 고개를 들어 팀원들을 보았다.


“전에 말했듯이 이번 대결에서 예린이가 1등을 못한 건 내 잘못이야. 바쁘다는 핑계로 선곡이나 보컬, 감성 등에 대해서 내가 생각을 많이 못했어.”

“···.”

“너희들이나 나나 이번에 예방주사 세게 맞았다고 생각하고 다음 경연 준비하자. 예린이는 너무 낙심하지 말고.”

“네, 선생님.”

“모레까진 연습 금지야. 오늘은 회사 들어오면 저녁 먹고 바로 쫓아낼 거야. 숙소 사는 애들도 모레까지는 회사 나와도 그냥 먹고 놀아. 노래에 대한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쉰다고 술만 붓지 말고 집에서 푹 쉬었다가 내일 방송이나 봐. 알았지?”

“네.”

“난 10분 후에 출발할 테니까, 회사 갈 사람들은 주차장으로 오고 다른 애들은 여기서 헤어지자. 고생했어.”

“감사합니다!”


여원이 대기실을 나가자 은별이 서희에게 말했다.


“언니는 집으로 가죠?”

“응. 내일 숙소 갈게. 너 해물찜 한다고 했지?”

“네. 저녁 먹지 말고 와요. 같이 먹게.”


며칠 전부터 은별은 숙소 생활을 하는 하트헤르와 미란에게 해물찜을 만들어 주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럼 나도 잡채 할게. 내가 해물찜 재료까지 싹 장봐서 오후에 갈게.”

“그럼 언니가 너무 힘들잖아요.”

“난 차 있으니까 괜찮아. 거기서 마트까지 가기도 힘들고, 같이 다니면 사람들 알아볼까봐 좀 그래. 내가 사올게.”

“고마워요. 들어가서 톡 할게요.”

“응.”


서희는 다른 팀원들을 모두 보낸 후 자가용에 올랐다.

그런데 그녀는 시동을 켜놓고도 한참을 출발하지 않은 채 멍하니 있었다.


“이제 뭐하지?”


서희는 정말로 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어제 대전에 있는 본가에 내려가 하룻밤 잔 후 늦은 아침을 먹고 나왔는데, 가족들에게는 한 달 이상 못 볼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들에게는 오디션 때문에 당분간 못 만난다고 말했지만, 지금은 시간이 있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공무원 시험공부는 놓은 지 오래됐고, 고즈넉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까봐 꺼려졌다.


날이 저무는 건지 구름이 끼는 건지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안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정작 하고 싶은 걸 모르겠어. 이게 어느 따분한 날인 거지···.”


사실 하고 싶은 일은 분명히 있었다.

서희는 어젯밤 본가의 방에서 잠자려고 누웠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일어나 책상을 뒤져 워터브러시와 엽서를 찾아냈다.

어머니 어깨 너머로 배운 캘리그라피 실력에 나름 자신 있었던 그녀는 그러나 책상에 두 시간 동안 망연히 앉아만 있었다.


한때 즐겨 썼던 향가 형식의 압축적인 문장으로 글을 쓰다 ‘보고 싶어요’나 ‘사랑해요’로 맺고 싶었지만, 서희는 엽서에 그의 이름의 첫 자음도 쓸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의 이름조차 쓰기 힘들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서희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사진첩을 열었다.

여기에는 정완과 은별, 자신까지 셋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고, 서희가 몰래 정완을 찍은 사진도 몇 장 있었다. 심하게 흔들려서 흐릿한 사진마저도 그녀는 지우지 못했다.

한 달 전 은별은 정완과 자신을 나란히 세우고 웃으라고 재촉하여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의 정완은 더없이 예뻤지만 서희는 그 사진을 메신저 프로필에 넣지 못했다.


“강서희, 나이 스물일곱, 취미 그리워하기.”


서희는 씁쓸한 미소 끝에 짧은 말을 길게 뇌까리다 차를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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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Aphrodite. 풀밭, 꽃, 그리고 꿀 20.06.16 167 10 21쪽
24 Round 4. 너를 잊지 않았듯 +2 20.06.14 152 9 24쪽
23 Burden. 그대에게 옮은 감기 20.06.09 161 9 27쪽
22 Clue. 또 다른 오디션 +4 20.06.04 165 10 25쪽
» Slough. 그녀의 취미 20.05.31 160 6 31쪽
20 Tears. 한계가 아닌 줄 알았는데 +6 20.05.28 180 11 23쪽
19 Abyss. 눈물조차 사치라고 느껴질 때 +6 20.05.24 175 9 22쪽
18 Restart. 욕심이 되어버린 밤 +2 20.05.21 193 9 27쪽
17 Separation. 신데렐라처럼 +4 20.05.17 181 11 24쪽
16 Friendship. 내일 일어날 일 +4 20.05.14 192 8 23쪽
15 Limitation. 임무를 마친 자의 여유 +2 20.05.10 189 11 21쪽
14 Round 3. 자신과의 싸움 +4 20.05.07 198 11 23쪽
13 Preparation. 조금 덜 치열해도 괜찮은 곳 20.04.30 209 10 29쪽
12 Wedding. 순정남녀가 순정부부로 20.04.23 223 9 29쪽
11 Goodness. 이럴 줄 알았으면 +2 20.04.21 222 8 23쪽
10 Round 2. 치열하게 따분한 날 +2 20.04.12 200 8 23쪽
9 Deeper. 녹음이 잘 되지 않는 이유 +8 20.04.09 235 11 22쪽
8 Fangs. 그녀의 실수 +8 20.04.07 233 12 28쪽
7 Round 1. 화살은 누가 쏜 걸까 +4 20.04.02 225 11 29쪽
6 Reoccurrence. 묻고 싶었던 말 +4 20.03.31 242 11 31쪽
5 Suggest. 좋은 제안이지만 +2 20.03.29 239 13 29쪽
4 Preliminary 2. 비 오는 아침 +2 20.03.24 265 11 29쪽
3 Preliminary 1. 저 사람들 또 +2 20.03.22 265 10 30쪽
2 Making. 만들어야 할 게 노래만은 아닌 팀 +4 20.03.15 352 13 28쪽
1 Prologue. 오래 전 약속 +4 20.03.15 710 16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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