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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일반소설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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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09
추천수 :
623
글자수 :
659,060

작성
20.04.09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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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6
추천
11
글자
22쪽

Deeper. 녹음이 잘 되지 않는 이유

DUMMY

9월 3일 오후 2시.

정완은 은평 뉴타운에 위치한 상가에서 스마트폰을 고치다 외부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한울을 맞이했다.


“야. 미안하다. 늦었네.”

“아닙니다. 일은 다 보셨어요?”

“다 했어. 점심 아직 안 먹었지? 내가 살게.”

“짜장면 곱빼기 먹고 싶습니다.”

“다른 거 먹어. 비싼 걸로.”

“그럼 간짜장에 공깃밥 추가요.”

“어휴.”

“짜장면 안 먹은 지 10년은 된 것 같습니다.”

“에라, 이 소박한 놈아.”


한울이 중국집에 전화하여 음식을 주문하는 동안 정완은 자신이 수리한 스마트폰을 점검했다.


“몇 건이나 들어왔어?”

“스마트폰은 이것까지 세 건인데 제가 다 했고, 외장하드 하나 들어왔는데 아예 인식이 안 된대요. 손님은 데이터 복구를 원하더라고요. 1기가도 안 된답니다.”

“시간 좀 걸리겠는데. 증상은?”

“딱딱 소리가 났다고 하길래 물리적 손상 같아서 최소 이틀은 생각하시라고 했어요. 저녁 전까지 연락드리겠다고 했고요.”

“알았다. 고생했어. 점심 먹고 들어가.”

“제가 고친 건 블로그에 올리고 가야죠. 일지에 관련 내용 전부 적어놨고, 외장하드에도 손님 전화번호랑 증상 써서 붙여놨어요. 카드 영수증은 자리에 뒀고요.”

“그래?”


정완의 말에 한울이 고개를 끄덕이다 눈을 빛냈다.


“야. 내가 어제 수리한 걸 블로그에 아직 안 올렸는데, 그거 네가 좀 해주면 안 되냐?”

“초과근무는 그런데···.”

“하루치 줄게. 9만원, 아니 10 채워준다.”

“예! 알겠습니다.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


한울의 말에 정완이 씩 웃으며 일어섰다.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연달아 왔다.


“서희면 저번에 그 아가씨네. 뭔 사진을 이렇게 많이 보내? 어디서 셀카라도 찍었나?”


한울은 사진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을 꾹 누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잠금화면에 뜬 마지막 메시지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PD님. 점심은 맛있게 드셨어요? 원래 주무실 시간인데 형님 일 돕느라 피곤하···.]

“어휴. 나 아무래도 이 아가씨 피해 다녀야겠는데? 밥 늦게 먹이고 초과근무까지 시키는 거 알면 한 대 맞겠어.”


한울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서희와 은별은 예정대로 9월 6일 저녁에 인디펜던트 실용음악학원으로 출근했다.

예선 및 1라운드 참가곡과 연습곡을 부르며 트레이닝을 마친 후 쉬는 시간이 되자 정완이 난데없는 말을 꺼냈다.


“커피 한 잔 할까?”

“네?”

“네! 좋아요.”


잠시 후 서희와 은별의 손에 갓 내린 커피가 쥐여졌다.


“PD님이 웬일이에요? 화장실 갈 시간 없다고 커피도 못 먹게 하던 분이.”

“어차피 오늘은 콘셉트고 뭐고 하나도 안 정했잖아.”

“네.”

“너희들은 이거 하기 싫을 때 없었어? 난 오늘 그래.”


은별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완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휴가 어떻게 보냈어?”

“···.”

“둘이 또 만났어?”


서희와 은별이 고개를 저으면서도 선뜻 말을 잇지 못하자 정완이 또 말했다.


“난 첫날에 막내 형님이 자기 매장 봐달라고 해서 하루 종일 거기 있었어. 점심 때 들어가랬는데 내가 그냥 초과근무 하겠다고 했어.”

“왜요?”

“집에 가 봤자 할 일이 없으니까.”

“아아.”


정완은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트레이닝 기간에야 음악 많이 듣고 영상도 많이 보지만, 나도 휴가 때는 이걸 쉬어줘야 하지 않겠어?”

“그렇죠.”

“난 TV나 게임은 별로야. 책은 가끔 읽는데 이번엔 그것도 귀찮더라고. 따분해 죽겠는데 시간은 안 가고, 뭐라도 할까 하다보면 금방 하기 싫어졌어. 차라리 잠이나 잤으면 좋겠는데 잠도 안 오더라.”


정완의 의도적인 말에 은별이 먼저 반응했다.


“나도 그랬어요. 따분해 죽겠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은 거. 특히 공부는 죽어도 하기 싫은 거 있죠?”

“내 말이. 난 하루 종일 TV 틀어 놓고 웹툰 몇 개 새로 올라와서 봤는데 재미없었어. 얼마나 심심했으면 내가 아프리카 사자 교미를 봤겠어.”

“풉! 네?”

“푸후후.”


서희가 심드렁하게 한 말에 은별뿐 아니라 정완까지 웃었지만, 사실 서희는 사자가 교미하는 다큐멘터리보다 홈쇼핑 채널의 남성복 판매 방송을 훨씬 더 많이 보았다.

정완이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암 생각 없이 튼 TV, 아프리카 사자 교미, 기다렸던 웹툰 No 재미, 나에겐 전혀 No 의미. 이런 건가?”

“헐. PD님 이제 랩도 하시게요?”

“자아. 공감대가 형성됐다. 확실히 우린 다음 단계 가려면 휴가가 있어야 해.”

“···?”

“이제부터 진짜 본론이 되겠네.”


서희와 은별은 정완의 의도를 간파했다.


“이걸로 다음 노래 만들게요?”

“실마리 정도는 생각할 수 있지.”

“아프리카 사자가 교미하는 노래를 부르라고요?”

“풉!”

“교미하는 모습을 본 걸로 만들자고. 폰 꺼내.”


정완은 셋의 단체 채팅방에 사진을 올렸다.

나흘 전 그가 미디어센터 주차장에서 메모지를 촬영한 사진이었다.


“헐. ‘신나지오’요?”

“얘네들 댄스 아이돌인데···.”

“저희더러 애기들 노래를 부르라고요?”

“샤이니도 댄스 아이돌이다. 원곡 가수가 애기든 수정란이든 그게 중요한가?”

“···.”

“그리고 가요계에서는 너희들도 애기야.”


신나지오는 <C-POP Artist season 3>의 우승팀으로, 신진철, 나준길, 지진우, 오상균 등 99년생 동갑내기 넷으로 이루어진 남성 댄스 그룹이다. 팀의 이름은 네 멤버의 성을 따 만들었다.

이들은 현재 KP 엔터테인먼트에서 없어서는 안 될 팀으로, 어마어마한 팬덤을 바탕으로 역대 <C-POP Artist> 출신 가수 중 가장 많은 방송 출연횟수를 기록하고 있다.


“얘들 춤 따라하면 저희 죽어요.”

“춤 안 춰. 걱정 마.”

“얘들 전부 기성곡 하지 않았어요? 미션은 방송에서 처음 발표한 창작곡이랬는데.”

“잘 생각해 봐. 얘들도 하나 있어. 창작곡.”

“···아!”


정완이 허공을 향해 검지를 까딱거리자 서희가 눈을 크게 뜨며 손뼉 쳤다.

신나지오와 전현수는 <C-POP Artist season 3> 결승전에서 수휘가 작사 작곡한 <어느 따분한 날>을 부르라는 미션을 받았고, 신나지오가 최종 우승하며 이 곡은 그들의 노래가 되었다.

<어느 따분한 날>은 멤버들의 반대로 인해 휘민락의 노래가 되지 못하여 <C-POP Artist season 3>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따라서 이번 미션에 해당되는 노래다.


“그래서 오늘 실습곡도 안 하고 휴가 얘기하신 거예요?”

“덕분에 커피 마시고 있잖아.”

“어쨌든 최대한 따분하게 불러라 이거죠?”

“따분하고 의욕도 없어 보이게.”

“알았어요.”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거 해야겠지만, 내 생각에 너희들 현실엔 지금 이게 맞아.”


서희와 은별이 서로를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할게요.”

“재미있으면 안 돼. 따분해야지.”

“알았어요.”

“그래. 그럼 이제 자작곡 얘기하자.”

“네?”

“<어느 따분한 날>이랑 어울릴 만한 이야기로 가야지.”

“곡이 벌써 나왔어요?”

“아니. 이번엔 가사 먼저 보고 곡 쓰려고 했어. 따분한 쪽이면 내가 익숙하지 않은 리듬이나 템포를 써야 할 것 같은데, 나도 공부 조금 해야겠네.”

“천천히 해요.”

“지금 노래가 나와도 빠른 게 아니야. 연습할 시간은 많을수록 좋고.”


이 말을 들은 서희는 연습량 부족을 지적받은 싱어송라이터들이 전부 탈락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수휘 선배는 따분을 몰라. 따분할 것 같으면 통기타 들고 튀어나가서 버스킹할 양반이니까. 그래서 난 너희들이 그 이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선배가 생각하는 따분이랑 비교도 안 될 만큼 따분하게.”

“우리가요?”

“충분히.”


정완은 은별의 말에 단호하게 답한 후 어제부터 생각해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어느 따분한 날>의 다음에 나올 상황을 예로 들어볼게. 하루의 이야기를 다룬 콩트? 옛날에 서희가 너무 할 일이 없어서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 만나서 영화 봤다고 했지? 그런 게 어떨까 해.”

“또 제 얘기예요?”

“그냥 인기 많은 여자들한테 있을 법한 일쯤.”

“저 인기 없는데.”


정완은 서희의 말에 멈칫했다가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엔 둘이 한 사람 역할을 같이 맡는 거야. 이 여자를 A라고 할게. A가 따분해 하고 있는데 관심 없는 선배 B한테 저녁 먹자고 전화가 와.”

“할 일이 없으니까 B를 만난다는 거죠?”

“응. 그럼 이것도 ‘네. 우리 만나요.’가 아니라 ‘하아. 알았어요.’라고 가야겠지? 기운 쭉 빠진 목소리로.”


A는 B와 만나 함께 길을 걷다 짝사랑하는 동기 C와 마주친다.

C는 “와아. 둘이 만나고 있었어요? 나 빨리 가야겠네. 좋은 시간 보내요.”라고 말하고 잽싸게 자리를 피해준다.


“헐. A 망했네.”

“불쌍해요.”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드는 남자는 연락도 받지 마.”

“그 얘기를 왜 저 보면서 하세요?”


정완은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놓고 따분해하는 모습을 묘사한 가사를 서희에게 주문했다.


“여자들만 아는 거 있잖아. 쉬는 날은 화장하기도 싫고 그런 거.”

“어디 안 나가는데 누가 화장을 해요.”

“근데 나가기로 했으니까 화장은 해야 하는데, 정말 하기 싫겠지? 그런 내용 들어가면 좋겠어. 아까 그 ‘아프리카 사자 교미’ 꼭 넣고.”

“풉!”

“난 웃기기 힘든 사람인데 네가 웃겼어. 그거 킬링 파트니까 네 랩으로 넣어.”

“아까 PD님 말한 대로 넣으면 되겠네요. 라임도 딱 맞고.”

“그럼 네 마디인데 너무 짧아. 여덟 마디는 들어가야지.”

“알았어요.”


서희는 고개를 한참 끄덕이다 말했다.


“이 정도 이야기로 붙을 수 있을까요?”

“너희들이 부르면 납득될 거야. 짜증 팍팍 내면서 대충대충 부를수록 더.”

“제가 시청자면 되게 재수 없게 볼 것 같은데.”

“그래. 그래서 이 노래는 생방송에서 부를 수 없지.”

“시청자 투표 때문에요?”

“그렇지. 어쨌든 <어느 따분한 날>부터 들어보자. 이번 라운드는 같이 공부하면서 가자고.”

“네. 열심히 할게요.”


정완은 미소 띤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서희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



세 사람은 지정곡으로 <어느 따분한 날>을 선택한 후 자작곡 <망한 하루>의 작업에 들어갔다.

정완은 서희가 만든 가사를 곡에 접목하고 의견을 맞추어 이틀 만에 두 곡의 가이드 노래를 완성하였다.

서희와 은별은 가이드 노래를 듣고 고개를 수없이 끄덕였다.


“좋아요. 이대로 할게요.”

“몇 번 해보고 바로 녹음 들어가자.”


<망한 하루>의 도입부는 메신저 알림음과 함께 남녀가 메시지를 주고받는 대화 형태로 이루어진다.

정완은 전화통화보다는 메신저 톡을 주로 이용한다는 은별의 의견을 받아들여 목소리를 주고받는 대화 형식으로 진행하되, 무대에서는 녹음한 대화가 재생될 때 은별이 스마트폰을 누르는 퍼포먼스로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 여자 목소리를 맡은 은별이 리허설을 위해 녹음실 부스에 들어가자마자 문제가 발생했다.


“마음대로 해 봐.”

“알겠어요.”

“간다. ···안녕? 나야.”

“응, 나예요.”

“풋!”

“어어, 잠깐.”


은별은 자신도 모르게 예전에 정완의 전화를 받을 때의 버릇대로 말해 버렸다.

서희가 웃었고 정완은 곧바로 녹음을 끊었다.


“아무리 마음대로 하라고 해도 그게 뭐냐? 애드리브 치지 마.”

“네.”

“그리고 그렇게 반가워하면 안 돼. 귀찮아야 한다니까?”

“반갑게 안 했는데.”

“다시.”


이후 몇 번 더 시도해봤지만, 여러 주문을 추가해도 은별의 ‘네, 오빠.’는 정완과 서희가 생각한 수준의 귀찮고 답답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서희가 부스 쪽 마이크를 끄고 정완에게 말했다.


“무관심한 남자가 아니라 싸우고 하루 종일 연락 안했던 남친이랑 통화하는 것 같아요.”

“차이가 그거였나?”

“일부러 차갑게 말하는 거랑 관심 없는 건 다르죠.”

“어떡하지?”

“지금 PD님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요. 그거 듣고 쟤가 어떻게 따분하게 나와요.”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딱딱하게 할 수는 없어. B는 A한테 잘해주고 싶은 건데.”

“그냥 쟤 파트만 따로 녹음하는 건 어때요?”

“자연스럽지 않아. 이건 드라마 신처럼 한 방에 쭉 가야 돼.”


정완은 곰곰이 생각하다 은별 대신 서희를 부스에 넣었다.

다섯 번 시도해보았지만 서희 역시 마음에 드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때 부스 밖에 있던 은별이 정완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관심 되게 많은데 안 그런 척하는 것 같아요.”

“어? 그런 게 구별이 돼?”

“여자들은 다 알 걸요? 오빠, 아니 PD님이 덜 예쁘게 얘기해야 돼요.”

“그럼 스토리가 안 살아.”


은별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완과 서희를 번갈아보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언니는 오빠란 말이 어색할 거예요.”

“왜? 말할 일이 없었나?”

“네. 형제도 남동생밖에 없고 만났던 남자도 동갑이랑 연하였어요.”


부스 밖에서 아무런 사인도 나오지 않자 서희가 헤드셋을 벗고 부스를 나왔다.


“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네 목소리가 너무 예쁘다. 내가 그렇게 반가워?”

“아니거든요? 제가 언제 반가워했다고 그래요?”

“귀찮아 보이지는 않았어요, 언니.”


은별이 뜻 모를 미소를 띠고 말하자 서희는 입을 비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다시 할게요.”

“그래. 다시. ···안녕? 나야.”

“네, 오빠.”

“으음.”


이 말만 여러 번 반복한 끝에 정완은 결국 헤드셋을 벗어버렸다.


“어휴! 내가 이상한 건가?”

“왜요?”

“B 입장에서 네 목소리는 ‘날 기다리진 않았구나. 괜히 전화했네.’ 하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니까? 지금 너는 그게 아니야. 만약 내가 B인데 이런 목소리 들으면 ‘어? 뭐지? 와아!’ 이렇다고.”


이래서 <망한 하루>의 리허설은 도입부의 ‘네, 오빠.’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결국 정완은 녹음을 포기했다.


“이거 오늘 하지 말자. 아무래도 이 ‘오빠’가 문제 같아. 거리감이 더 있어야 하니까 ‘선배’로 바꿔야겠어. 그리고 B 역할은 다른 분한테 맡길게. B랑 C 목소리가 같은 것도 이상해.”

“네.”

“목소리 역할은 서희가 하자. 딕션이 좋아서 더 잘 들리니까.”


다음 날 정완은 문제의 도입부 대화를 녹음하기 위해 한울을 학원에 데려왔다.

그런데 한울과 서희가 함께 한 녹음은 어제와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다.


“서희야. ‘알았어요. 몇 시요?’ 톤 조금만 더 다운시켜. 나른하게.”

“네.”

“언니. 저도 하나 얘기해도 돼요?”

“뭔데?”

“‘조금 늦을 수도 있어요.’도 기운 더 빼는 게 어때요?”

“그래. 알았어.”

“그리고 형님은 맨 마지막 ‘괜찮아. 기다릴게. 밤새.’ 여기 완전 들떠도 됩니다. 세은 씨 만나러 가실 때처럼요.”

“뭐 인마?”

“자자. 조용하시고, 처음부터 다시 갈게요.”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남자, 그리고 그런 남자에게 관심 없는 여자.

한울과 서희는 단 세 번 만에 이런 남녀의 목소리를 재현해냈다.


“야. 이거 그냥 시답잖은 대화구먼. 네가 더 잘할 걸 뭐한다고 나까지 부르고 그래? 내일 휴일이라 술이나 한 잔 하려고 했더니만.”

“아무리 시답잖아도 오디션입니다. 막상 판 까니까 아무렇게나 잘 안 되더라고요.”

“근데, 이럼 나는 뭐 있냐?”

“곡 제목에 피처링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중에 제가 돈가스 살게요.”

“삼겹살.”

“예! 알겠습니다.”

“갈게. 수고해. ···두 분도요!”

“감사합니다.”

“쉬고 있어. 형님 바래다드리고 올게.”

“네.”


도입부 녹음을 마친 후 정완은 서희와 은별을 두고 한울과 함께 학원을 나왔다.


“야.”

“예.”

“오늘 보니까 서희 씨가 너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아니에요. 그런 거.”

“맞다니까? 넌 몰라. 그런 건 제삼자가 봐야 잘 아는 거야.”

“형님은 그 예리한 눈으로 천세은 씨나 잘 보시죠.”


정완의 막힘없는 대꾸에 한울이 발끈했다.


“야 인마, 아까부터 세은이가 왜 나와!”

“저도 제삼자라 예리합니다.”

“이 자식이 아가씨들 다 있는 데서 마이크에 대고 어?”

“그때 세은 씨 생각해서 완전 들떴던 거 아닙니까? 무슨 썸을 7년씩이나 타요.”

“그건 그냥 세은이 친구들 앞에서만 그러는 거라니까? 연극이라고.”

“형님이 배우입니까? 그거 진심이잖아요. 턱 아프다고 오징어다리를 나노 단위로 찢어주는 게 뭔 연극입니까.”


정완의 디테일한 말에 한울의 말문이 턱 막혔다.


“어휴. 이게 도와달래서 도와줬더니···. 얌마! 너 가라. 아가씨들 기다리겠네.”

“감사합니다, 형님. 잘 들어가세요.”


정완은 한울의 차가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다 학원으로 돌아왔다.

서희와 은별이 마주앉아 말없이 배즙을 먹다가 동시에 그를 보았다.


“20분 뒤에 나머지 녹음하자.”

“네.”


정완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난 요 며칠 조금 신기해.”

“뭐가요?”

“너희들이 녹음할 때 생각이 많아졌거든. 아티스트는 녹음실 들어가면 그냥 프로듀서가 하라는 대로 해도 되는데, 너희들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노래를 개선시키려고 하니까.”

“···.”

“근데, 아티스트가 이러기 시작하면 프로듀서는 골치 아프단 말이야. 이래서 ‘씨바쌤’이 녹음실에서는 PD가 왕이라고 한 건가?”

“채병안 PD요?”

“응.”


여원의 남편인 채병안 PD는 정완이 대학교에 다닐 때 겸임교수로 근무했다.

당시 병안은 예고도 없이 휴강하는 일이 잦았고 말끝마다 학생들의 기를 죽였을 뿐 아니라, ‘내가 돈만 있었어도 이딴 산골짜기까진 안 오는데 말이야’라는 말을 달고 다녔기에 학생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언젠가 여원은 잡지 인터뷰에서 병안의 이니셜 CBA를 따서 그를 ‘씨바’라고 부른다고 말했는데, 그 잡지를 한 학생이 읽자마자 그 단어는 교내에서도 병안의 별명이 되었다.

실제로 여원은 부부동반으로 출연했던 예능프로에서도 병안을 향해 그 단어를 스스럼없이 써서 남편의 애칭(?)을 널리 퍼뜨렸다.


“그 양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애칭 값을 하신다니까.”

“풉!”

“난 솔직히 그 양반 싫어. 다른 사람 단점은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자기 단점은 죽어도 인정 못하거든.”

“그래요?”

“난 그분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정말 좋은 아티스트가 되려면 녹음실에서도 의견이 많은 게 좋다고 생각한다. 너희들처럼.”


서희는 깊은 생각에 빠진 정완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



정완은 비좁은 고시원 방에서 잠을 자다가 전화 벨소리에 눈을 떴다.


“어, 여보세요.”

[PD님, 저예요. 서희.]

“어.”

[급한 일이 있어서 전화 드렸어요. 죄송해요.]


시계를 보니 낮 12시 20분. 잠든 지 세 시간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정완이 굳은 얼굴로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괜찮아. 무슨 일이야?”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는데, <비 오는 아침>도 저작재산권 양도할 수 있겠냐고 해서요.]

“갑자기 왜?”

[본방이 예정보다 빨리 시작하게 됐대요.]

“언제인데?”

[10월 14일이요.]


본래 <C-POP Artist>의 첫 방송은 늘 10월 마지막 주 일요일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기록적인 폭염이 기승을 부린 데다 현재 방송 중인 일요예능 프로그램들의 실적이 나빠지자, CBC 예능국에서는 <C-POP Artist season 5>의 방송을 예정보다 빨리 시작할 것을 염두에 두고 2차 예선을 실내 녹화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경영진 회의에서 <C-POP Artist season 5>의 3회 연장방송이 결정되었고, 2차 예선 녹화분을 방송함에 따라 첫 방송이 예년보다 2주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C-POP Artist>와 참가자 사이에 맺은 계약에 의하면, 경연에 출품된 자작곡의 저작재산권, 즉 방송이나 음원 판매 등에 대한 관리의 권한은 CBC 방송국에서 향후 3년간 독점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계약은 2차 예선에 합격한 후 체결되었으므로 <비 오는 아침>과 같은 예선 참가곡은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물론 CBC 입장에서는 화제성 유지와 수익 증대를 위해 방송되는 자작곡들을 음원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예선에 나온 자작곡들에 대한 저작권자들의 동의가 필요해진 것이다.


“이거 동의 안 하면 방송 못 나가겠네.”

[네. <비 오는 아침>은 개별 건이라 작곡가 동의를 따로 받아야 하는데, 2시 전까지 구두 동의라도 먼저 받아달라고 해서···.]

“거기도 먹고 살아야지. 너희들한테는 CBC가 소속사고 제작자니까. 너는 동의할 거지?”

“네.”

“나도 동의한다고 하고, 악보든 음원이든 필요한 거 전부 알려달라고 해. 내일까지 보내준다고.”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서희야.”

[네?]

“난 여우비 노래에 대해서 네 의견대로 할 거니까, 네 뜻대로 정하고 나한테는 통보만 해. 그리고 나한테 죄송하다고 하지 마.”

[PD님 지금 주무시는 거 뻔히 아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그리고 너 앞으로 나한테 잘못한 게 있어도 사과하지 마.”

[···.]

“이따 보자.”

[네.]


정완과 서희는 전화를 끊고 각자의 벽에 기대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얘는 가끔 보면 무슨 죄인마냥, 죄송하단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나? 어휴.”


정완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잠을 청할 때 서희는 자신이 쓴 <비 오는 아침>의 가사 ‘어쩌면 이 마음도 죄가 아닐까. 자연스런 행동이 너무 힘들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오래 전 기억이 지금의 마음으로 되살아나는 오후였다.


작가의말

사이다는 거듭 죄송합니다. 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8

  • 작성자
    Lv.99 진흙44
    작성일
    20.04.09 01:25
    No. 1

    잘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0 진사로
    작성일
    20.04.09 02:14
    No. 2

    진흙44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욱일302
    작성일
    20.04.09 10:21
    No. 3

    진짜루 사이다가 필요합니다 건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0 진사로
    작성일
    20.04.10 02:23
    No. 4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욱일302님...
    노래 위주로 스토리를 연결하며 이미 상당히 많은 분량을 썼는데, 이걸 들어낼 수도 없고... ㅠ
    연재 속도를 빠르게 하는 수밖에 없겠는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2 평온하즈아
    작성일
    20.04.09 17:45
    No. 5

    윽...그래도 뭔가 달달한....이런것도 좋아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0 진사로
    작성일
    20.04.10 02:27
    No. 6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다시 읽어보니 저도 사이다가 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여튼 죄송합니다 평온하즈아님.. 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2 평온하즈아
    작성일
    20.04.10 07:36
    No. 7

    죄송할 필요 없구요..굳이 스토리 바꿀 필요 없어요...지금 너무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그냥 투정이었다고 받아주시면 됩니다...연재 속도만 좀 더 빨리 해주면 원이 없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0 진사로
    작성일
    20.04.12 02:34
    No. 8

    평온하즈아님 감사합니다.
    말씀 들으니 닉네임처럼 평온해집니다..

    솔직히 스토리 바꾸는 건 어렵습니다.
    복선을 여기저기 깔아놓는 스타일이라 하나 고치면 앞부분 전부 바꿔야 하거든요... ㅠ

    대신 연재 속도는 높여보겠습니다.
    일단 주 3회 연재해볼게요.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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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Audition) 2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5 Aphrodite. 풀밭, 꽃, 그리고 꿀 20.06.16 168 10 21쪽
24 Round 4. 너를 잊지 않았듯 +2 20.06.14 152 9 24쪽
23 Burden. 그대에게 옮은 감기 20.06.09 164 9 27쪽
22 Clue. 또 다른 오디션 +4 20.06.04 165 10 25쪽
21 Slough. 그녀의 취미 20.05.31 161 6 31쪽
20 Tears. 한계가 아닌 줄 알았는데 +6 20.05.28 181 11 23쪽
19 Abyss. 눈물조차 사치라고 느껴질 때 +6 20.05.24 176 9 22쪽
18 Restart. 욕심이 되어버린 밤 +2 20.05.21 193 9 27쪽
17 Separation. 신데렐라처럼 +4 20.05.17 183 11 24쪽
16 Friendship. 내일 일어날 일 +4 20.05.14 192 8 23쪽
15 Limitation. 임무를 마친 자의 여유 +2 20.05.10 189 11 21쪽
14 Round 3. 자신과의 싸움 +4 20.05.07 198 11 23쪽
13 Preparation. 조금 덜 치열해도 괜찮은 곳 20.04.30 209 10 29쪽
12 Wedding. 순정남녀가 순정부부로 20.04.23 224 9 29쪽
11 Goodness. 이럴 줄 알았으면 +2 20.04.21 222 8 23쪽
10 Round 2. 치열하게 따분한 날 +2 20.04.12 200 8 23쪽
» Deeper. 녹음이 잘 되지 않는 이유 +8 20.04.09 237 11 22쪽
8 Fangs. 그녀의 실수 +8 20.04.07 233 12 28쪽
7 Round 1. 화살은 누가 쏜 걸까 +4 20.04.02 225 11 29쪽
6 Reoccurrence. 묻고 싶었던 말 +4 20.03.31 242 11 31쪽
5 Suggest. 좋은 제안이지만 +2 20.03.29 239 13 29쪽
4 Preliminary 2. 비 오는 아침 +2 20.03.24 265 11 29쪽
3 Preliminary 1. 저 사람들 또 +2 20.03.22 266 10 30쪽
2 Making. 만들어야 할 게 노래만은 아닌 팀 +4 20.03.15 353 13 28쪽
1 Prologue. 오래 전 약속 +4 20.03.15 713 16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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