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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일반소설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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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75
추천수 :
623
글자수 :
659,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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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8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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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Tears. 한계가 아닌 줄 알았는데

DUMMY

서희가 연습실에 들어오자 굳은 표정으로 가이드 노래를 듣던 예린이 말했다.


“서희 언니 아까 지원실에서 찾았어요.”

“나?”

“네. 출근하면 와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서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지원실로 갔다.

직원인 소명훈이 그녀를 보고 조그만 봉투를 집으며 일어섰다.


“이게 뭐예요?”

“HAP라는 분이 여우비 노래 작곡가시라던데 맞아요?”

“네.”

“이거 그분이 보내셨습니다.”

“네?”


서희는 깜짝 놀라며 봉투를 받았다.

여러 겹으로 밀봉된 봉투에는 ‘여우비 자작곡의 작곡가 HAP입니다. 보안 때문에 이렇게 보내니,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이 봉투를 강서희 양에게 전해주세요. 부탁합니다.’라는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명훈이 설명을 덧붙였다.


“회사 기획실 앞으로 서류 봉투가 왔는데 뜯어보니까 그게 있었다더라고요. 여우비가 저희 회사에 온 걸 외부에서 모르게 하려고 이렇게 보낸 것 같습니다.”

“네.”


서희가 봉투를 뜯으려는데 테이프로 꽉 봉해졌고 테이프가 붙은 위치도 찾기가 어려웠다. 그것을 본 명훈이 가위를 주고서야 서희는 봉투를 열 수 있었다.

봉투 안에는 USB 메모리가 있었다. 3라운드 경연이 끝난 후 그녀가 정완에게 주었던 것이었다.


서희는 명훈에게 감사 인사한 후 지원실을 나왔다. 휴게실 컴퓨터에 메모리를 꽂자 새 폴더가 보였고, 그 안에는 세 개의 MP3 파일이 있었다.

은별이 휴게실로 들어오자 서희는 USB 메모리를 가리켰다.


“지원실에서 언니 왜 찾았어요?”

“이거 왔어.”

“앗!”

“못 봤던 노래 있는데 바로 보낼게.”


서희는 제 스마트폰에 노래를 담은 후 은별에게 전송하고 일어섰다.


“나 숙소 갈게. 미안한데 숙소 오고 싶어도 한 시간 넘어서 와.”

“네.”


은별은 서희가 건물을 나서는 모습을 보다 제 스마트폰을 열고 이어폰을 꽂았다.

그리고 첫 번째 노래를 재생시켰다.


“아아!”


일그러진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정완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화양연화> 원곡 : 이승환


기억 속에 멀어지는

가슴속에 타오르다 만 이름을

불러보고 불러보려 한다.


바람결에 흩어지는 가느다란 너의 어깨와

세월 따라 두둥실 떠가는 흐린 새털구름처럼.


하얗게 흩어져간다.

네가 너무나 많아서. [Missing you]

네가 너무나 흔해서.

한 조각 닿지 않고 붉게 물든 하늘.


다 타 들어간다.

네가 너무 그리워서. [Missing you]

네가 너무 보고파서.

오늘도 산 너머 누운 태양에 널 묻기로 했다.


(간주)


너로 인해 시작되고

너를 통해 어지럽히던 내 맘을

정리하고 정리하려 한다.


숨턱까지 차오르는 같이 울고 웃고 뛰놀던* 기억

세월 위로 두둥실 떠가는 구겨진 종이배처럼.

[화양연화]


하얗게 멀어져간다.

네가 너무나 멀어서. [Missing you]

네가 너무나 작아서.

한 조각 닿지 않고 붉게 물든 바다.


다 타 들어간다.

네가 너무 그리워서. [Missing you]

네가 너무 보고파서.


오늘도 달빛 아래 눈부신 너와 나.

손을 잡던 반짝이던 너와 나.

입 맞추던 잊지 못할 너와 나.

모두 묻기로 했다.


다 묻기로 했다.





“흑!”


은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참지 못한 울음소리가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정완은 자신의 화양연화(花樣年華), 즉 삶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노래 속 ‘너’가 은별 자신이라는 사실과 함께 달빛 아래 손잡고 입 맞추었던 추억이 되살아났고, 잊는 게 아니라 묻는다는 말에 담담해졌다고 믿었던 가슴이 한순간 메어왔다.


이것이 은별을 향한 정완의 마지막이다.

따라서 은별 역시 마지막이어야 한다. 추억은 좋았지만 더 이상은 떠올리지 말자는 뜻이리라.


‘난 오빠의 음악에 끌렸으니까 음악으로 보내주세요.’


그 말처럼 정완은 은별뿐 아니라 음악마저도 음악으로 보낸 것이다.

흘리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눈물이 기어이 쏟아지고 말았다.


한편 서희는 빠른 걸음으로 숙소에 들어와 침대에 앉았다.

그녀는 파일을 보자마자 정완이 두 사람과의 이별에 즈음하여 자기의 심경을 노래했음을 알았다. 은별 앞에서 노래를 듣는 순간 어떤 표정이 될지 몰라 숙소로 온 것이다.


“하아아.”


서희는 이어폰을 꽂고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첫 번째 파일을 재생시켰다가, 이 노래가 <화양연화>임을 안 순간 재생을 멈춰 버렸다. 어쩌면 은별은 이 노래를 들으며 울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녀는 두 번째 노래를 누르려다 멈추고 곧바로 마지막 노래를 재생했다.


“두. 두두두, 두. 두두두, 두. 두두두, 두. 두두, 두.”

“어?”


서희의 눈이 떨리며 조그맣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 유명한 후렴은 몇 년 전 개그프로에서 남녀가 썸 타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배경음악으로 등장하여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하게 일그러졌다.

아일랜드 밴드가 부른 원곡에는 그런 의미가 없다.





<Ode To My Family> 원곡 : Cranberries / 개사 : HAP


(Hook & 전주)


두 분께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내어봅니다.

당신들 향한 그리움 조금은 덜어내려 해요.


날 향한 두 분 미소조차 기억나지 않는 이 밤에

죄송해 놓지 못했었던 피아노를 덮어 놓아요.


언젠가는 만날 거라고 믿었던 희망 덧없으매

구름처럼 멀어져 가는 두 분의 흔적 바라봐요.


엄마, 두 분 먼 곳에서 나와 더 멀어지나요.

아빠, 두 분 뜻 이루기에 혼자는 힘겨웠어요.


(Hook & 간주)


나를 너무 미워하지 않길 소망해봅니다.

당신들께서 원하셨던 행복과 더 멀어졌어요.


고단한 두 분과 나를 쉬일 데조차 없던 이 도시.

누구도 반겨주지 않던 이곳을 이제 나 떠나려 해요.


먼 훗날에 여기 돌아오면 나 웃을 수 있을까요.

담담하게 지을 미소 그리며 내 마음 끌어안아요.


엄마, 슬픔의 눈으로 날 보진 말아주세요.

아빠, 꼭 웃어주세요. 나 힘내 살아갈게요.


살아갈게요. 살아갈게요. 살아갈게요.

살아갈게요. 살아갈게요. 살아갈게요. 살아갈게요···.


(Hook & 후주)





정완은 ‘가족을 향한 송가’라는 원곡의 제목에 맞게 가사를 바꾸었다.

노래에는 훌륭한 음악가가 되라는 부모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을 떠나는 심경이 담겼다.


서희는 무릎에 얼굴을 묻고 <Ode To My Family>를 여러 번 들었다.

정완이 담담하게 부른 후크 ‘두두두’가 들을수록 슬펐다.

눈이 터질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뜰 수도, 얼굴을 뗄 수도 없었다.


정완은 음악을 놓고 서울을 떠난 지금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서희는 슬펐지만 울 수 없었다. 눈물조차 사치라고 느껴졌다.

그리움을 덜어내겠다고 노래하는 사람도, 그 노래를 듣는 자신도 그리워했던 사람을 더 그리워하고 있었다.



***



다음 날.

<C-POP Artist season 5>의 진행자인 홍영기와 프로그램 제작진들이 저녁시간을 앞두고 뮤컬트 엔터테인먼트를 찾았다.

4라운드 미션을 전달하고 첫 방송에서 화제가 된 팀원들과 인터뷰하기 위해서다.


“여우비 팀은 첫 방송이 나간 후 가장 크게 화제가 되었습니다. 방송 끝나자마자 검색어 1위에 올랐고, 자작곡 <비 오는 아침>은 첫 방송에 나온 곡으로는 최초로 음원 차트에서 1위를 했죠. 물론 예선 참가곡으로도 처음입니다. 기분은 어떠세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좋은 노래 받아서 최대한 저희 감성에 맞게 부르려고 노력한 것뿐인데, 많은 분들께서 알아주시고 저희 노래를 돈까지 내고 들어주시는 게 신기해요.”

“첫 방송 전까지 가족이나 지인 분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이젠 주위에서 다들 아시죠?”

“네.”

“뭐라고 하시던가요?”

“방송 나가고 연락 많이 받았어요. 다들 격려해주셔서 힘이 됐습니다.”

“아무래도 첫 방송의 엔딩이었고 <비 오는 아침>이 아주 좋아서 더 그랬겠지요. 저도 노래 듣고 참 좋았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여우비에 대한 기사가 가장 많이 나왔고 댓글도 많이 달렸어요. 읽어보셨나요? 기분은 어땠어요?”

“저는 첫 방송 다음 날 딱 한 번 읽었습니다. 노래하는 게 즐거워서 여기 참가했는데, 댓글 읽다보니 제가 노래 외적인 이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어요. 제 노래나 랩에 대해 비판과 조언을 해주신 분들, 그리고 응원의 댓글 써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합니다. 아직 실감이 잘 안 나는데 마음이 좀 가라앉으면 천천히 읽어보고 비판과 조언을 새겨듣겠습니다.”

“저도 조금만 읽었어요. 좋게 봐 주시고 응원해주신 분들도 많았는데 악플도 있더라고요. 응원해주신 분들께는 죄송한데, 응원보단 악플이 더 기억에 세게 남아서 지금은 솔직히 읽기가 무서워요.”

“이젠 길거리 다니다보면 사람들이 많이 알아봐서 불편할 것 같은데 어때요?”

“알아봐주시면 감사하겠지만, 저는 요새 연습 아니면 집에만 있어서 거리를 다닐 일이 없어요.”

“저도 그래요. 어쩌다 집 근처에 나가도 혼자 다녀서 그런지 잘 모르시더라고요.”

“하긴. 지금 한창 연습할 때니까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영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 정도 인터뷰를 다음 주 방송에 내보낼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생겼다.

2차 예선에서는 인터뷰 없이 경연만 진행되었으므로 시청자들은 여우비의 인터뷰를 매우 궁금해 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맹숭맹숭한 인터뷰만으로는 시청자들의 관심을 유지하기에 부족하다. 그렇다고 참가자와 사전에 말을 맞추고 제작진이 원하는 답을 말하도록 유도하면 프로그램의 진정성이 훼손될 것이다.

그는 고민 끝에 제작진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던 내용을 꺼냈다.


“사실 여우비에 대한 시청자 분들의 의견이 갈리고 있어요. 지금까지 외모로 이렇게 크게 이슈가 됐던 팀이 없었기 때문인데요.”

“···.”

“여우비는 첫 방송이 끝나자마자 ‘씨팝여신’이 됐습니다. 모든 시즌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참가자들이 한 팀에 있다는 의견이 많아요. 솔직히 저도 두 사람 처음 보고 드라마에 나와야 될 사람들이 씨팝엔 웬일인가 생각했죠. 물론 음악 오디션에서 음악으로만 봐야 하지 않겠냐, 이런 의견도 비등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서희는 이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서 은별이 그녀를 힐끗 본 후 먼저 대답했다.


“좋게 봐주시니 감사드리지만 좀 부담스러워요. 저는 저희에게 예쁘다고 말씀해주신 분들보다는 저희 노래에 대해 의견, 특히 비판을 주신 분들께 더 감사했어요. 저희들끼리 노래하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의견을 주신 분들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싱어송라이터로 참가했으니 제일 중요한 건 자작곡이나 곡 소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음악으로만 평가해 주셨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인가요?”

“네. 저희는 아직 가수라고 할 만한 실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모 때문에 예선을 통과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외모는 개개인이 다른 것뿐 비교대상이 아니니까요. 씨팝은 실력이 뛰어난 참가자를 가려내는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이고, 실력은 심사위원님들과 시청자 분들께서 비교할 수도 있고 순위를 매길 수도 있으며, 저희 역시 그 전제 아래 오디션에 참가하고 있어요. 저희는 시청자 분들께서 앞으로도 저희의 외모가 아닌 음악적 기량을 냉정하게 봐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저 역시 작년까지 시청자로서 참가자들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했어요. 저희도 그렇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예쁘다는 말씀은 저희보다는 가족이나 애인에게 하셔야 모두가 행복해질 거예요.”

“하하! 그렇죠. 그러네요.”


서희와 은별의 말에 영기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웃었다.

지금까지 <C-POP Artist>에서 여우비만큼 외모로 이슈가 된 팀이 없었기에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은 제작진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려 있었다. 그래서 영기는 통편집을 각오하고 질문을 던졌는데, 서희의 대답에는 품격이 엿보였고 은별의 말에는 뼈마디를 때리는 위트가 있었다.

그래서 영기는 ‘앞으로 이 친구들에게 외모 얘기는 안하겠습니다.’라며 인터뷰를 마무리한 후 흔쾌히 두 사람을 격려할 수 있었다.


“어우! 너희들 정말 잘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처음엔 이걸 방송에 쓸 수 있나 했는데, 외모 얘기 안 물어봤으면 큰일 날 뻔했어. 대신 앞으로 그 얘긴 안 한다. 그리고 나 이 프로 끝나면 콘서트 하는데, 시간 되면 게스트로 나와서 <비 오는 아침>이랑 <나의 아리랑> 좀 불러줘. 수고해!”

“감사합니다.”


서희와 은별은 영기와의 인터뷰를 마친 후 장소를 옮겨 또 다른 인터뷰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4라운드의 미션곡을 받고 그 느낌을 이야기하는 인터뷰다.


“4라운드 미션은 담여원 심사위원님이 주신 지정곡과 자유곡이에요.”

“네.”

“미션지 드릴게요.”


여원이 여우비에게 지정한 노래는 수(Sue)의 <Someday>였고, 두 사람은 이 노래와 함께 자유곡 하나를 불러야 한다.

서희와 은별은 미션지를 받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Someday>는 여성 듀엣 수의 데뷔곡이고 97년에 발매되었어요.”

“죄송하지만 처음 들어봅니다. 97년이면 제가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이네요.”

“노래 들어보시겠어요?”


은별은 이미 제 스마트폰으로 <Someday>를 검색한 후 눈이 커져 있었다.

독특한 분위기를 내뿜는 여자 멤버 두 사람이 마치 키스할 듯이 서로의 입술을 가까이한 사진이 <Someday>가 수록된 앨범 <Various>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봐도 놀랄 만한 사진이 21년 전에, 그것도 앨범 재킷에 있었다니.


“이, 이 노래 콘셉트가 이런 거예요?”

“일단 들어보자.”


서희는 <Someday>를 들으며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곡가 하림이 만든 보사노바 리듬의 곡은 매우 세련되었고, 원곡 그대로 불러도 두 사람의 파트를 나누기에 어렵지 않아 보였다.

가사는 억지로 관련짓지 않는 이상 재킷사진이 생각나지 않을 듯했고, 특히 서희는 가사에 제 희망이 녹아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여우비는 2라운드 1위로 올라왔으니 거부권이 있지요. 혹시 쓸 생각이 있나요?”

“저는 마음에 들지만 지금 바로 답을 드릴 수는 없어요. 은별이랑 상의하겠습니다.”


서희와 은별은 인터뷰를 마치고 휴게실로 돌아왔다.


“언니, 나도 저 노래 좋아요.”

“그럼 저거 할까?”

“그래요. 근데 자유곡은 어떡하죠?”

“하아.”


은별의 질문에 서희는 한숨으로 답했다.


뮤컬트의 다섯 팀 중 보컬로 참가한 예린을 제외한 네 팀이 싱어송라이터이며, 이들 중 3라운드에서 자작곡을 부른 팀은 하트헤르뿐이었다.

따라서 여우비와 미란, 도진 등 세 팀은 이번 라운드에서 반드시 자작곡을 불러야 한다.


하트헤르에서 작곡을 맡은 지혜는 이번 라운드에서도 좋은 자작곡을 선보여 생방송 무대에 진출하고 싶어 하지만, 직전 경연에서 곡의 완성도를 지적받은 탓에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다.

도진은 올해 초 앨범을 발매한 후 <C-POP Artist>에 급히 나서느라 만들어 놓은 곡이 없다.

작사가인 미란은 작곡가를 찾는 일이 어렵다.


뮤컬트 팀원들은 우진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최고의 대책이라고 생각했다.

우진은 지난 2년 동안 순정남녀 노래를 제외하고도 여러 곡을 만들어 소속 가수들에게 주었고, 그의 실력은 음원 시장에서 충분히 검증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진은 소속가수의 앨범을 프로듀싱하고 있으며, 사전대결에 나설 예린의 곡까지 작업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팀원들의 곡을 한꺼번에 뽑아내는 것은 제아무리 작곡계의 신성이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아리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우진이 오빠한테 휴식이 필요하다고.”

“여긴 프로듀서 셋으로도 빡빡하다는데 지금 둘밖에 없잖아.”

“우진이 오빠가 많이 지쳤나 보더라고요.”

“우진 씨도 그렇지만 애들도 지금쯤이면 꽤 지쳤겠지.”

“언니 지쳤어요?”

“조금.”


서희의 막힘없는 대꾸에 은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목표에만 집중하여 감정을 소모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휴식하면 회복되는 체력과 달리 심리적으로 지친 것은 회복할 방법도 없었다. 서희는 이런 경험을 처음 겪는데다가 며칠 전까지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없기에 더 힘들었다.

은별은 한동안 입술을 앙다물고 서희를 바라보다 말했다.


“PD님만 있었어도 언니가 이렇게 힘들진 않았겠죠?”

“···.”

“미안해요. 저 때문에 언니가 그분한테 말도 제대로 못하고.”


이 말에 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



<이방인> 원곡 : 전람회


쉴 곳을 찾아서 결국 또 난 여기까지 왔지.

내 몸 하나 가눌 수도 없는 벌거벗은 마음과 가난한 모습으로.


네 삶의 의미는 나이기에 보내는 거라며

그 언젠가 내 꿈을 찾을 때

그때 다시 돌아올 날 믿겠다 했지.


수많은 세월 헤매이다가

세상 끝에서 지쳐 쓰러져도

후회는 없을 거라고 너에게 말했지.


뒤돌아보면


네 삶의 의미는 나이기에 보내는 거라며

그 언젠가 내 꿈을 찾을 때

그때 다시 돌아올 날 믿겠다 했지.


수많은 세월 헤매이다가

세상 끝에서 지쳐 쓰러져도

후회는 없을 거라고 너에게 말했지.


수많은 세월 헤매이다가

험한 세상 끝에서 숨이 끊어질 때

그제야 나는 알게 될지 몰라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나의 머물 곳은 너였음을.

숨이 끊어질 때

그토록 찾아 헤매던 나의 머물 곳은 너였음을.





정완이 남긴 두 번째 노래는 <이방인>이었다.

서희는 노래를 듣자마자 노래 속 ‘너’가 자신이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첫 곡은 은별, 마지막 곡은 부모님께 보내는 노래였기 때문이다.

은별 역시 이 노래에 대해 ‘이건 언니한테 들려주는 노래네요.’라고 말했다.


서희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정완을 향한 제 마음을 그가 알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혹시나 그 역시 자신에게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녀는 잠시 미소를 머금었다가 또 눈물을 흘리곤 했다.


“SS가 불렀구나?”

“네.”


서희는 연습하지 않을 때 주로 휴게실에서 노래를 듣거나 시집을 읽었다.

특히 정완이 부른 <이방인>이나 <Ode To My Family>를 들으며 백석 시인의 작품을 읽을 때면 모든 것을 버리고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솟아났다.

이때 그녀는 툭 건드리면 울 것 같은 표정이었기에 은별이나 아리마저도 그녀에게 말 걸지 못하고 조용히 나가곤 했다.


여원은 감정표현이 넘치는 건 가수로서 좋은 재능이라며 서희를 격려하는 한편, 표정의 이유가 너무 궁금했기에 양해를 구하고 그녀가 듣던 노래를 들어보았다.

여원은 정완이 남긴 세 곡을 모두 들은 후 벌게진 얼굴로 한동안 말을 못했다.


“후우. 너희들이 왜 감성이 좋나 했더니 이 노래 들으니까 알겠네.”

“네.”

“작곡은 우진이, 기타는 제이미, 피아노는 유경이라고 생각했는데 노래는 든솔이, 아니 그 이상이었구나.”


여원의 말에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SS가 너희들한테 여기까지가 지 한계라고 하던데, 난 그 말은 틀렸다고 생각했거든. 걔 얘기 듣다보니까 겨우 그게 걔 한계는 아닐 거라고 봤어.”

“···.”

“근데 한계 맞네. 능력의 한계가 아니라 감정적, 심리적인 한계였구나. 더 나갈 힘을 잃었어.”


여원의 말에 서희는 연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보컬트레이너 할 만해. 셋 다 마이크 하나에 연주랑 노래랑 한 번에 녹음한 것 같은데 감성도 엄청나고, 저음 고음 다 깔끔하고 노래할 때 이상한 버릇도 없어.”

“네.”

“이승환이나 전람회 노래는 아주 어려운데 이렇게 소화를 하네. 감성이랑 스타일이 원곡자들이랑 다른데···. 분명히 든솔이나 현수보다 나아. 씨팝에서 이렇게만 부르면 우승도 가능하겠는데. 하아.”


여원이 서희를 찬찬히 보다 말했다.


“이 사람 옛날에 은별이랑 만났다고 들었어. 지금은 헤어졌고.”

“네.”

“너 혹시 이 사람 좋아해?”


서희는 또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여원은 뭔가 말하려다 말고 잠시 생각하다 다른 말을 꺼냈다.


“몇 년 전에 시어머니가 나한테 말씀하셨어. 내가 당장 이혼한다고 해도 당신은 말리지 않겠다고. 남편이란 놈이 그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는데 뒷수습까지 혼자 다 해가면서 이혼 안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시더라. 그때 내가 뭐랬는지 알아?”


서희가 고개를 들어 여원을 빤히 보았다.


“어머님 때문이라고 했어.”

“왜요?”

“이혼하겠다고 수십 번을 결심했다가도 그 인간 얼굴만 보면 그냥 다 용서가 됐으니까. 그 인간이 시어머니를 많이 닮았거든.”

“네.”

“처음에 그 인간 봤을 때 되게 놀랐어. 꼬질꼬질한 옷 입고 머리도 며칠 안 감았는데 빛이 나더라고. ‘담여원 씨. 앞으로 잘해봅시다.’ 목소리 착 깔고 되게 사무적으로 말했는데, 난 뭘 잘해보자는 거지 싶어서 혼자 설레고.”

“···.”

“너도 SS 처음 봤을 때 그러지 않았을까 싶어서.”


여원의 말에 서희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정완을 보았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서희는 떨리는 눈빛으로 정완을 보다 저도 모르게 정말 잘생겼다고 말해버렸다. 이때 정완은 ‘뭐 그냥 사람같이 생겼지. 열심히 하자.’라고 심드렁하게 답했는데, 그 심드렁한 표정과 말투마저 그녀의 눈에는 정말 잘 어울려 보였고 멋있었다.

이때부터 그녀가 정완에게 하고 싶지만 못하는 말이 늘어났다.


조금 전 여원의 말은 어디서도 말한 적 없고 병안도 모른다.

세간에는 병안이 여원에게 첫눈에 반하여 끈질기게 구애하여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원의 속내는 달랐다.


여원은 2집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병안에게 청혼을 받았지만 단칼에 거절했다.

당시에는 여성 솔로가수가 연애나 결혼하는 것은 가수 이미지에 치명적이었고, 가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앨범 하나 정도를 더 성공하여 오랫동안 활동하기를 바랐다.


여원은 제 마음을 숨긴 채 병안을 지켜보았고, 1년 후 3집 활동이 끝나자마자 자신이 프러포즈하여 그와 결혼했다.

이때 그녀가 했던 ‘사람 돼서 나랑 살래, 사람 같지 않게 살래?’라는 말은 방송에서 공개되어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지 앞가림 못하고 성질 더러운 것도 다 알고 결혼한 걸 어쩌겠어. 근데 그 인간한텐 딱 두 가지만 보이더라고. 잘생긴 거랑, 다른 여자한테 한눈 안 파는 거. 앨범 준비하면서 무지하게 싸웠는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해대는 욕을 나한테는 한 마디도 안 하더라고.”


서희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간이 사고 칠 때마다 힘들었는데, 난 이번 생에 그 인간 못 벗어나나보다 생각하니까 견딜 만하더라고.”

“네.”

“너한테 꿈이 있다면 하루에 한 번씩 기도해. 그럼 이뤄지든가, 이룰 방법이 떠오를 거야.”


여원은 뜻 모를 말을 남기고 휴게실을 나가며 ‘내가 그랬으니까’라고 혼잣말했다.

서희는 저절로 닫힌 문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작가의말

생각해 보니까 오늘 <오디션2> 연재분을 안 올렸네요.. ㅠ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오늘이 가기 전에 후딱 올립니다.

남은 하루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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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Audition) 2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5 Aphrodite. 풀밭, 꽃, 그리고 꿀 20.06.16 167 10 21쪽
24 Round 4. 너를 잊지 않았듯 +2 20.06.14 152 9 24쪽
23 Burden. 그대에게 옮은 감기 20.06.09 161 9 27쪽
22 Clue. 또 다른 오디션 +4 20.06.04 165 10 25쪽
21 Slough. 그녀의 취미 20.05.31 159 6 31쪽
» Tears. 한계가 아닌 줄 알았는데 +6 20.05.28 180 11 23쪽
19 Abyss. 눈물조차 사치라고 느껴질 때 +6 20.05.24 175 9 22쪽
18 Restart. 욕심이 되어버린 밤 +2 20.05.21 193 9 27쪽
17 Separation. 신데렐라처럼 +4 20.05.17 181 11 24쪽
16 Friendship. 내일 일어날 일 +4 20.05.14 192 8 23쪽
15 Limitation. 임무를 마친 자의 여유 +2 20.05.10 189 11 21쪽
14 Round 3. 자신과의 싸움 +4 20.05.07 198 11 23쪽
13 Preparation. 조금 덜 치열해도 괜찮은 곳 20.04.30 209 10 29쪽
12 Wedding. 순정남녀가 순정부부로 20.04.23 223 9 29쪽
11 Goodness. 이럴 줄 알았으면 +2 20.04.21 222 8 23쪽
10 Round 2. 치열하게 따분한 날 +2 20.04.12 200 8 23쪽
9 Deeper. 녹음이 잘 되지 않는 이유 +8 20.04.09 235 11 22쪽
8 Fangs. 그녀의 실수 +8 20.04.07 233 12 28쪽
7 Round 1. 화살은 누가 쏜 걸까 +4 20.04.02 225 11 29쪽
6 Reoccurrence. 묻고 싶었던 말 +4 20.03.31 242 11 31쪽
5 Suggest. 좋은 제안이지만 +2 20.03.29 239 13 29쪽
4 Preliminary 2. 비 오는 아침 +2 20.03.24 265 11 29쪽
3 Preliminary 1. 저 사람들 또 +2 20.03.22 265 10 30쪽
2 Making. 만들어야 할 게 노래만은 아닌 팀 +4 20.03.15 352 13 28쪽
1 Prologue. 오래 전 약속 +4 20.03.15 710 16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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