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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환생했더니 블랙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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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탄탄비
작품등록일 :
2024.05.26 22:09
최근연재일 :
2024.06.23 23:04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4,558
추천수 :
62
글자수 :
132,779

작성
24.05.30 09:21
조회
334
추천
3
글자
19쪽

1화. 블랙홀이 된다는 것 (5)

DUMMY

시간으로 따지면 눈 한번 깜빡이기 힘든 찰나.

하지만 호율은 분명 보았다.

광활한 우주를 떠다니는 검은 구체를.

동시에 느꼈다.

그 구체로 존재할 때의 느낌을.

짐작가는 것이 있었다.


‘웜홀.’


바로 과거로 돌아오기 위해 만들었던 웜홀.

그것이 아직 이어져 있는 것이다.

이 육체와 블랙홀 사이에.

호율이 다시 정신을 차리게 한 건 뒤편에서 울려 퍼진 날카로운 외침이었다.


“야!!! 정신 안 차려!!!!!”


-카가가강!


라일라가 군터 병사들의 칼을 받아내며 소리쳤다.


-탁!


호율은 황급히 다시 오르드의 가슴팍을 손으로 짚었다.


‘할 수 있어.’


소혹성들을, 행성들을, 심지어 빛마저 집어삼켜 봤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삼켜봤다.

그 감각은 아직도 고스란히 살아있다.

무려 3천 년 동안이나 그러고 있었으니까.


-우우우웅!


호율은 눈을 감곤 손에 감각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잠시 후,


-꾸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

“!”

“!”

“!”

“!”

“!”

“!”


가장 먼저 이변을 눈치챈 건 호율을 도와 오르드를 부축하고 있던 신관들이었다.

연신 접혔다 펴지길 반복하는 그들의 귀가 그들이 얼마나 놀랐는지 나타내는 중이었다.


“이, 이럴 수가!”

“독이! 독이 사라져간다!”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군터 병사들이 황급히 오르도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오르드님!”

“정신이 드십니까!”


곧바로 신관들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조용!”

“치료를 방해하지 마라!”

“소리를 내거나 움직이는 놈들은 그 즉시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가장 나이 든 신관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고 그러길 무섭게 실내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심지어 라일라와 칼을 섞던 병사들마저 얼어붙은 것처럼 한순간에 멈춰 섰을 정도였다.


‘젠장, 또 뭐야?’


군터들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라일라는 호율 쪽을 바라보았다.

무슨 사고를 쳤나 싶어서.

그런데 사고가 아니었다.


“뭣?”


라일라는 저도 모르게 짧게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꾸드드드드드드득!


군터들 사이로 비치는 오르드의 모습 때문이었다.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가슴팍이 원래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를 짚고 있는 호율의 손바닥을 시작으로.

벌써 세 번째였다.

텔레포트.

군터의 언어를 구사.

그리고 뱃사의 독을 해독하기까지.

전부 그녀를 포함 인류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만약 사실이라면 엄청난 가치를 지닌 정보다.


-탁!


그렇게 생각하며 막 걸음을 옮기려던 라일라가 갑자기 흠칫거리며 멈춰섰다.

그리고 몸을 흠칫거린 건 그녀 뿐만이 아니었다.


-커억!

-윽!


몇몇 군터들이 라일라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라일라와 그들 사이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바로 각성자(覺醒子)라는 것.

때문에 실내에 퍼지고 있는 호율의 기질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지금 라일라와 그들이 느끼고 있는 것은 바로,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아득함이었다.

도무지 그 크기를,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무언가를 마주한 것만 같은.


“웁!”


라일라는 칼로 바닥을 찍으며 하마터면 쓰러질 뻔한 것을 버텨냈다.

금방이라도 의식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렇게 될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영영 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호율이 뿜어내는 에너지의 기질은 너무나도 음습했던 것이다.


"아윽!"


다행히 너무 오래가진 않았다.

다시 의식이 회복되기 무섭게 라일라가 숨을 토해냈다.

멀리 호율은 오르드의 가슴팍에서 손을 떼는 중이었다.


‘됐다.’


드디어 완전히 원래 색으로 돌아온 오르드의 가슴팍을 보며 알 수 있었다.

성공.

그야말로 티끌만큼도 남기지 않고 독을 모두 빨아들였다.

남은 건 오르드가 다시 눈을 뜨는 것 뿐.

하지만 정작 오르드는 미동조차 없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만약 그랬다간 분명 라일라의 말대로 전쟁이 일어나게 되리라.

호율은 문자 그대로 피 말리는 심정으로 오르드가 눈을 뜨길 기다리기 시작했다.

고요하기 그지없던 실내가 한껏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터져나온 환호성이 실내를 가득 메웠다.

군터 병사들이 내지른 환호성이었다.


“쿨럭! 쿨럭!”


눈을 뜬 오르드가 힘겹게나마 다시 숨을 내쉬기 시작했던 것이다.

군터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오르드에게 몰려들었고 이리저리 채이던 호율은 간신히 군터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라일라는 여전히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호율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자, 장교님, 일단은.”


호율은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쿵!


곧바로 호율의 동공이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


방위군 병사들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갑자기 협상 체결이라니.

그들 역시 바보는 아니기에 짐작가는 바는 있었다.

아까 대치 상황에서 본 누군가의 모습이었다.


“그럼 진짜 군터 말을 할 줄 알았던 거야?”

”저쪽 지휘관하고 열심히 떠들어대는 거 봤잖아.”

“혹시 군터들 사이에서 자랐다거나.”

“그러고보니 언제 탑승한 거지? 이전 정류장에선가?”

“듣자 하니 중위님이 숨겨두고 있었다던데.”


이래저래 많은 말들이 오고 갔지만 진실을 아는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호율이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 아는 이는 한 명 뿐이었고.


“오르드가 뭐래?”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대요.”


라일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퀴클롭스에서 병력 빼달라고 해. 정중하게.”

“퀴클롭스에서 병력을 빼주실 수 있냐고 묻습니다.”


오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성에 복귀하는 대로 바로 철수시키겠다. 그 외에 더 요구할 건 없나.”

“그럼 하나 부탁드리겠습니다. 제위에 오르시거든 앞으로는 두 종족 간에 반목이 없었으면 합니다.”

“확답은 못 주지만 최대한 노력해보겠다고 약속하겠다. 이 정도면 되겠나.”

“네, 충분합니다.”


라일라가 호율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라고 또 둘이서만 속닥속닥 대는 거야.”

“그냥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자 했어요.”

“주제넘은 짓 하지 마. 네가 무슨 인류 대표인 줄 알아?”

“인간.”


호율은 다시 오르드를 바라보았다.

오르드가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우리 모성에 데려가 대접을 하고 싶은데 어떤가.”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해야 할 일이 있어 가진 못할 것 같습니다.”

“아쉽군. 그럼 이건 어떤가. 내 딸 중 하나와 결혼하는 걸로.”

“네?”


호율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딸을 주겠다.

그건 군터에게 있어 자신의 명예를 걸고 선물을 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최고의 은인에게나 베푸는 최고의 호의.

당연히 거절하는 건 그만큼 실례였다.

문제는 바로 군터라는 종족의 특성이었다.

귀 끝이 뾰족하거나 둥글거나.

군터의 여성과 남성의 외적인 차이점은 단지 그것 뿐이었던 것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내 딸들은 나를 쏙 빼닮았다. 당연히 무척이나 강하다. 사흘 밤낮을 헤엄쳐 섬으로 건너간 적도 있을 정도로.”

“오우, 정말 대단한데요.”


‘미치겠네 진짜.’


순간 머리 긴 오르드의 모습을 떠올려 버린 호율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본 오르도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만 해도 그리도 좋은가. 지금 바로 모성에 연락해서 데려오도록 하겠...”

“죄송합니다만!”


호율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이미 결혼을 한 몸입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종족은 중혼을 인정하지 않고요.”

“결혼을?”

“그렇습니다. 미리 말씀 못 드린 점 사과드리겠습니다.”

“아쉽군. 분명 내 딸의 훌륭한 반려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오르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 보여다오.”

“네? 뭘요?”

“너의 반려 말이다. 한번 보고 싶다. 너 정도 되는 인간과 짝을 이룬 반려자의 모습을.”


‘환장하겠네 진짜.’


아마 사진 같은 걸 요구하는 것이리라.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만 결혼한 사이라면 그런 게 한장도 없을 리가 없으니까.


“죄송하지만 사진은 갖고 다니지 않습니다.”

“흠, 어째서.”

“필요가 없으니까요.”


호율은 재빨리 옆의 라일라를 가리켰다.


“이 인간 여자가 바로 저의 반려입니다.”

“뭣!”


오르드가 눈을 치켜떴다.


“그럴 수가! 아까는 그렇게 험담을 해대더니!”

“지, 지금 부부싸움 중이라서요. 저희 종족은 한번 싸우면 꽤 심하게 싸우거든요. 아예 남인 척 해버릴 정도로.”

“허어, 어쩐지 저 인간 여자가 계속 소리를 지르더라니 그런 사연이 있었을 줄이야.”


오르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대신 다른 선물을 줄 수밖에.”


오르드가 왼손 검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 들어 호율에게 내밀었다.

호율이 채 무어라 말하기도 전 옆에서 지켜보던 라일라가 호율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무조건 받아.”

“네? 저게 뭔데요?”

“잔말 말고 빨리!”


호율은 고개를 끄덕이곤 오르드가 내민 반지를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곧바로 군터들 사이에 약간의 웅성거림이 일어났지만 오르드는 손을 들어올려 바로 그것을 잠재웠다.


“이 반지가 있으면 우리 종족의 영역은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을 거다. 또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이것을 증표로 내밀어라. 모든 군터인들이 최선을 다해 너를 도울 테니.”

“감사합니다. 모쪼록 주신 선물이니 잘 쓰도록 하겠습니다.”

"나야말로 감사한다. 우리 종족 전체를 대신해서. 물론 이것으로 은혜를 모두 갚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르드가 씩 이빨을 드러냈다.


"또 만나자 인간. 언젠가. 반드시.”"


얼마 안 있어 군터들이 철수를 시작했다.

방위군 병사들은 그런 군터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중이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그 호전적인 군터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떠나다니.

어쨌거나 군터의 전함이 떠나가기까진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찌저찌 무사히 잘 끝났네요."


호율이 멀어져가는 군터의 전함을 보며 말을 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장교님."

“됐고, 아까 오르드가 뭐라 했길래 그렇게 쩔쩔맨 거야? 혹시 딸이라도 주겠다고 했어?”

“그, 그럴 리가요. 그냥 갖고 싶은 게 없냐길래 퀴클롭스에서 병력 물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했죠.”

“그 아까운 기회를 그렇게 날렸다고? 하아.”


라일라가 이마를 쓸어올렸다.


“그런 줄 알았으면 아예 켄타우로스계 전체에서 빼달라고 하는 건데.”

“아무튼 다 끝난 거 맞죠. 저 먹을 것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아까부터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것 같아서요.”


손가락 사이로 물끄러미 호율을 바라보던 라일라가 이내 몸을 바로 세웠다.


“따라와.”


******


식사는 도무지 끝날 줄을 몰랐다.

정확히는 식사라기보다 흡입이었다.


‘맛있어. 너무 맛있어.’


호율은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을 우걱우걱 먹어 치우는 중이었다.

살아있다.

음식을 삼킬 때마다 그게 실감이 났다.


‘역시 살아있는 게 최고야.’


라일라는 호율의 손가락에 끼워진 오르드의 반지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호율은 모를 것이다.

저 얼핏 투박해 보이는 반지가 어떤 물건인지.

어떤 일들을 가능하게 하고 또 어떤 것들과 맞바꿀 수 있는지.


“내가 널 어떻게 해야 할까.”


호율은 딸꾹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또 무슨 말씀이시죠.”

“계속해야지. 아까 하던 거.”

“혹시 죽이니 살리니 하시던 거 말인가요.”

“걱정 마. 죽인다는 선택지는 없어졌으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일라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암만 봐도 연기는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아까도 마찬가지였지만 호율의 얼굴엔 긴장이 역력했다.

진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모순이었다.

아까 오르드를 치료하며 보여준 기운은 너무나 막강했다.

아니, 불가사의했다.

그 편린에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하마터면 의식이 날아갈 뻔했으니까.

라일라가 내린 해답은 군의관의 것과 비슷했다.


‘기억이 강제로 지워졌다거나.’


라일라가 슬며시 턱을 괬다.


“대신 다른 선택지를 줄게. 1번, 평생 미등록자로 살아간다. 2번, 입대해서 시민 번호를 받는다.”


호율은 라일라의 말에 숨은 뜻을 눈치챘다.

시민 번호. 그게 없으면 호율과 같은 연고가 없는 인간은 평생을 부랑자 비슷하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얼씨구나 하고 입대를 선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까 일로 봐선 옛날 지구 군대하곤 차원이 달라.’


위험한 일도 무척 많을 것이고 덩달아 사망률도 무척 높을 것이다.

그게 문제였다.

죽기 싫다.

절대로.


‘각오는 했지만 군인은 아니었어.’


인류가 멸망하는 미래를 바꾼다.

그것을 위해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살아있어야 가능한 일.

호율이 애초에 계획한 것은 정치가나 사업가였다.

권력이나 재력, 혹은 그 두 가지를 충분히 갖추면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


“왜 대답이 없을까?”


라일라가 눈웃음을 지었다.


“죽을까 봐 무섭다거나.”

“네, 당연하죠.”

“희망적인 얘기 하나 해주자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거의.”

“아까 보니 별로 그런 것 같지 않던데요.”

“바로 그거야. 아까 일로 상황이 바뀌었거든.”


라일라가 몸을 바로 세웠다.


“오르드는 곧 황제가 될 테고 그러자마자 뱃사한테 선전포고를 하겠지. 그럼 두 종족은 전쟁을 시작하는 거고.”

“그럼 더 위험한 것 아닌가요.”

“우리가 왜? 인류는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냐. 오히려 놈들끼리 치고받는 동안 중간에서 열심히 이득만 챙기겠지. 워낙 세력이 비등비등한 녀석들이니 앞으로 반세기는 넘게 계속될 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율이 살짝 눈을 치켜떴다.


'맞다, 그러고보니.'


옛날처럼 한낱 영토나 대륙이 아닌, 이제는 별들 수십개를 내걸고 전쟁을 벌인다.

당연히 시간은 훨씬 더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못 잡아도 50년.

즉, 앞으로 그 세월 동안 인류가 전쟁에 휘말릴 일은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되면.'


호율이 마른침을 삼켰다.


‘미래를 바꾸고 뭐고 안 해도 되겠는데?’


호율은 생각을 시작했다.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멸망을 안 하면 그걸로 되는 거잖아.’


인류가 언제 멸망하는지 정확히 모른다.

10년 뒤일 수도 있고 100년 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라일라의 말대로 군터와 뱃사가 전쟁을 하게 된다면.

그 시기는 그만큼 뒤로 밀려나게 될 터.

즉, 자신은 그동안 실컷 즐기며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는 뜻.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호율은 마음을 굳혔다.


“전 1번을 선택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강제로 입대시킬 순 없는 노릇이니까.”


라일라가 몸을 트는가 싶더니 옆에 놓여있던 뭔가를 집어 탁자 위에 올려놨다.


[퀴클롭스 인질 구출 작전 명령서]


서류철이었다.

호율은 다시 고개를 들어 라일라를 바라보았다.


“이걸 왜 저한테...?”

“왜라니, 입대는 안 해도 돈은 갚아야 할 거 아냐.”

“돈이라뇨?”

“군터들한테 준 윤활유. 분명 네가 값을 치르겠다고 했잖아?”

“그걸 제가 내라고요? 아니, 저 아니었으면 군터랑 싸워야 했을 거고 그랬으면 장교님 포함 여기 있는 병사들 다 전멸했을 텐데요? 그리고 오르도 치료해준 거 저인데 오히려 감사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전멸은 무슨 전멸?”

"네?"


라일라가 다시 특유의 눈웃음을 머금었다.


“이길 자신 있었는데?”


‘아잇, 이 여자가 진짜.’


호율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얼만데요. 윤활유값.”

“앞으로 임무 10회 동행. 그거 끝나면 돌려보내 줄게.”

“윤활유치곤 너무 비싼 거 같은데요.”

“아까 말했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라고.”


라일라가 호율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기 시작했다.


“목말랐던 사람. 우물이었던 사람.”

“...그럼 저도 조건 하나만 걸게요.”

“일단 들어보고.”

“위험한 임무는 안 따라가요. 목숨이 아까우니까.”

“그래라. 근데 대신 그만큼 기간이 늘어난다는 거 알지?”

“죽는 것보다야 낫죠.”


사악,

라일라가 대답 대신 서류철을 호율의 앞으로 밀었다.

호율은 첫 장을 열어젖혔다.


‘내 팔자야.’


호율은 내용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퀴클롭스라는 게 소혹성 지대였구나. 소혹성들을 파내서 광물을 채취하는가 보네. 아직 물질을 자유롭게 생성하는 단계에는 도달 못한 건가.’


군대 서류답게 내용은 일목요연했다.

퀴클롭스는 100년 전 체결된 협정에 따라 그 어떤 종족도 독점할 수 없는 일종의 자유 무역지구 비슷한 것이었다.

그랬는데, 얼마 전부터 그 인근에서 뱃사와 군터가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사이가 악화되어 대규모 교전이 벌어지는 중이었고 그 사이에서 애꿎은 인류 측 노동자들만 억류 중-

대강 그런 내용이었다.


‘오르드도 여기서 당한 거겠지.’


보고서대로라면 인류 역시 뒤늦게나마 병력을 파견하려고 했지만 혹시나 둘을 자극하게 될까 상황만 지켜보는 중이었다.


‘엄청 위험해 보이잖아.’


군터가 발을 뺀다고 해도 뱃사는 여전히 남아있다.

호율이 보기엔 전투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았다.

무척이나.


‘굳이 할 이유는 없지.’


호율은 마저 읽는 척이라도 해야겠다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뒷부분은 현재 억류 중인 인질들에 대한 인적 사항이었다.


‘등록번호가 없으면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건가.’


호율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블랙홀로 수천 년을 살아봤는데 어떤 일이 힘들까.


‘이번 생은 진짜 행복하게 살아봐야지. 돈도 많이 벌고,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여행도 많이 다니고, 여자친구도 많이 만들... 이건 좀 아닌가. 아무튼 여자친구도 꼭 만들어야지.’


마지막 페이지에 도착한 호율은 서류철을 다시 라일라에게 건네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


-탁!


호율이 황급히 다시 서류철을 끌어당기나 싶더니 마지막 페이지를 유심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라일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는 사람이라도 있냐?”


정작 호율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시선은 서류 귀퉁이에 붙어있는 한 소녀의 사진에 고정되어 있었다.

초록색 곱슬머리.

어딘지 모르게 맹해 보이는 이목구비.

스물둘이라는 나이에 비해 조금 앳돼 보이는 얼굴의 소녀였다.


-촥!


“이게 작전 명령서를 찢어!”


라일라가 소리쳤지만 호율은 찢어낸 서류를 눈에 바짝 들이대곤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다시 봐도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이런 젠장????’


아는 얼굴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잘 아는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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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3화. 공녀는 왜 집을 나갔는가(1) 24.06.13 98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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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화. 멸망의 단서(1) 24.06.01 254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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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화. 블랙홀이 된다는 것 (2) +3 24.05.26 458 5 13쪽
2 1화. 블랙홀이 된다는 것 (1) +1 24.05.26 491 8 14쪽
1 프롤로그. 구멍이 되었다. 24.05.26 503 11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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