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바르디 백작가문(1)
엘의 대답에 그녀는 웃었다. 후드로 얼굴은 가리워 있었지만 아랫얼굴은 작게 드러나 있었고, 거기 드리운 음영의 굴곡이 그녀의 미소를 설명하고 있었다. 엘은 그 미소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다행입니다. 혹시 벌써 떠나시지나 않았을지 조금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그리..."
실버라이트의 후계자가 말하던 도중에 엘이 손을 내밀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여 왜 그러는지 의아하게 여기는 그녀에게 엘은 후드를 벗는 제스춰를 취해 보이며 싱긋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는 맨 얼굴을 다 드러내고 있는데 그쪽은 가린다면 공평하지 않겠지요."
"아아. 그것도 그런가요."
그리고 실버 라이트의 후계자는 후후, 하고 가볍게 웃고는 후드를 벗었다. 동시에, 은빛이 흘러내렸다. 부족한 달빛에 젖듯이 드러나는 백은의 머릿결과 부드러운 얼굴의 선은 약간 뾰족하게 튀어나온 그녀의 귀와 더불어 종족을 증명하고 있었다. 정말로 아름다운 여성- 엘프였다. 엘은 저도 모르게 휘익- 하고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경탄과 즐거움이 뒤섞인 휘파람이었다. 그리고 엘은 입을 열었다.
"우선 통성명부터 하지요. 실버 라이트니, 블랙 둠이니 하고 부르긴 피곤한 노릇이니까요. 제 이름은 엘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저는 레아입니다. 저 역시 성은 없습니다."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본제에 들어가고자 말했다.
"그런데 이곳의 악마들을 처리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다고 알고 있는데, 어쩐 일로 돌아오셨는지?"
엘프, 레아는 신비롭게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을 찾아왔지요."
"그것, 영광이군요."
엘은 그 말에 꺼리낌 없이 밝게 답했다. 그 자신만만한 대답에 레아는 즐거운 표정이 되었다.
"풋. 엘씨는 시스톤님에게 들은 그대로이군요."
"그 비만 도마뱀이 저에 대해 뭐라고 했습니까?"
엘이 불편한 얼굴로 말했다. '비만 도마뱀'이란 엘의 말에 레아는 또 웃어 보이고는, 애매한 얼굴로 답했다.
"음- 자신만만하고, 활발한 사람이라 하시더군요."
"그럴리가요."
시스톤이 자신에게 그렇게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을리 없다고 엘은 단정했다. 그 판단은 사실이었다. 레아는 애매했던 얼굴을 풀어 웃어 보이고는 들었던 대로 말했다.
"쿡. 사실은 싸가지를 수프에 말아 먹은 천둥벌거숭이라고 했어요."
"흥! 나한테도 깨진 쪼짠한 비만 도마뱀 주제에."
당장 엘이 콧방귀를 꼈다. 그러자 레아는 오른쪽 손가락 검지를 세우더니 그에게 말했다.
"아, 엘씨가 그렇게 말하면 시스톤님이 '나는 본체로 돌아가지도 않았다!'라고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녀의 말을 듣고 엘은 한동안 미묘한 표정이 되었다. 확실히, 용은 본체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전력을 다했다고 말하기 힘들다. 일단, 용의 모습이 아니고선 브레스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레아가 즐겁게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엘은 다소 무안한 기분을 느꼈고, 그리고 엘은 이제까지 이어진 말의 고리를 끊고 원래 주제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우선은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제 대신 그 아이를 도와서 영지의 승계문제를 해결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녀의 정중한 감사에 엘은 고개를 저었다.
"쪼짠한 도마뱀에게 그만한 댓가를 받고 하기로 한 일입니다. 굳이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단지 그 때문에 오신 것만은 아니신 것 같군요."
"예. 지적하신 대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그 아이를 돌보지 못하고 바삐 떠나야 했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엘씨와도 꽤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문제입니다."
어조를 심각하게 바꾸고 레아가 말했다. 엘은 미간을 좁혔다.
"저도 말입니까? 그렇다면 어비스에 관련된 일이겠군요."
"잘 아시는 군요. 사실은 바쁜 일이란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북쪽의 시몰 숲에 어비스의 악마들이 나타난 것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었거든요. 하지만 바삐 가 보니 이미 누군가가 모두 박살냈더군요. 바로 엘씨가 말이지요.(엘은 여기서 콧대를 세웠다.)그래서 누가 한 일인지 그 지역의 드래곤에게 물으니 블랙 둠의 후계자란 답을 들었지요. 그말을 듣고서야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이렇게 엘씨의 뒤를 쫒아온 것이고 말이죠."
"흐응. 굳이 이렇게 오신 것은 이 일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까?"
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질계에 대한 어비스의 개입은 언제나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물을 필요도 없겠습니다만, 악마들과 싸우면서 그 광경을 보셨겠지요?"
레아의 고운 얼굴이 찡그려졌다. 엘도 이어 얼굴을 찡그렸다.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떠올리고 있는 장면은 수백명에 달하는 사람의 머리가 통에 담겨 영문을 모를 실험에 이용당하는 광경이다. 죽는다는 것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존재의 위엄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장면이다. 세상의 많은 국면에서, 삶은 죽음보다 못하다. 죽음은 도리어 삶이 일정수준 이하의 저열함에 고통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안정장치다.
"아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레아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두 개의 작고 검은, 수정같은 거였다. 그 수정의 검은 표면이 맑고 희미하게 달빛을 반사했다. 엘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그건 무엇입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바로 그 방에서 발견된 것이었지요."
"아아..."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에서 발견된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은 그 처참한 광경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거워진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듯이 레아는 빙그레 웃으면서 엘을 향해 말했다.
"시몰 숲 쪽은 동굴을 무너뜨리셔서 이거 찾는데 상당히 애를 먹었답니다."
"어흠."
"다만 시스톤님께 문의해본 결과, 사념의 집결체가 아닐까 생각하시는 모양이더군요."
"사념의... 집결체라고요?"
엘의 미간이 좁혀졌다.
"예. 아시다시피 어비스의 악마들은 물질계의 현존재들이 외부로 배출하는 부(負)의 사념을 자신들의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삼습니다. 심지어 부의 사념은 그들 자체이기까지 합니다. 시스톤님은 이것이 그것을 하나로 결집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추측했습니다. 정황상, 상당히 그럴듯한 이야기이지요."
"무엇을 목적으로?"
엘은 악마에 대해 적지 않은 지식을 갖추고 있지만 이런 식으로 사념을 정제해 사용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레아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걸 알아내는 것이 이 일에 있어 현재 가장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겠지요. 실은 고룡 델시테리아에게 물어보려고도 했습니다만..."
레아는 거기서 말을 죽이고 쓴웃음과 더불어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천년이나 된 일로 아직도 꽁해 있답니까? 쪼짠하게."
엘이 말했다. 레아는 당혹한 표정으로 델시테리아를 변호했다.
"우리같은 이들에게 천년은 아득한 시간이지만 용에게, 특히 그와 같은 고룡에게 천년이란 그리 긴 시간이라 말할 수 없겠지요. 아직까지 실버 라이트에 대해 불편해 한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겁니다."
"뭐, 그것도 그렇겠습니다만."
엘이 드물게 선선히 자신의 의견을 꺾었다. 그리고 레아는 수정조각의 하나를 엘에게 건냈다. 엘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그것을 받아 품에 넣었다. 레아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대 삼좌가 데빌 엠퍼러를 소멸시킨지 천년이 지났습니다. 열두 악마 대공들 사이에서 어떤 합의가 이루어지거나 그들 간의 권력투쟁이 끝났더라도 이상할건 없겠지요. 삼좌의 유지를 잇는 우리는 언제나 어비스의 동향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상,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어비스가 움직인다고 해도 임모탈(불사자)인 그들의 동작은 완만할 터이니, 급할 필요는 없겠지만요. 그리고 이후, 블랙 둠 본인을 만나뵙게 된다면 이 사실을 다시 전해 주셨으면 합니다."
엘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저 나름대로 이 검은 조각에 대한 조사를 여행 과정에 지속하도록 하지요. 그건 그렇고, 나머지 한 명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아, 그게... 저도 그가 로피스트 산에 있다는 것 외에는..."
"로피스트? 험한데서 사는군요."
두 사람이 애매한 얼굴로 의견을 교환했다. 나머지 일좌가 살고 있다는 로피스트 산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마물이 많이 나온다고 알려진 지역으로, 소드 마스터라도 혼자서는 그곳에서 한달 이상 생존할 수 없다고 한다. 일부러 그런 곳에 산다면 다소 기이한 눈으로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하여간 이것으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모두 했습니다. 시스톤님과의 대결로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몸조리 잘 하시고, 앞으로도 유익한 여행이 되시길."
"저도 다른 삼좌의 후계자와 만나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특히 그 상대가 이토록 아름다운 분이시라서 한결 즐거웠음을 고백해야 하겠군요."
엘이 한쪽 눈을 찡긋, 거리며 말했다. 레아는 싫지 않았던 듯 입을 가리고 짤랑짤랑 맑게 웃는 소리를 내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솔직히 그런 말을 들으니 기쁜걸요. 하지만 엘씨가 계속 그러면 옆에 있는 그 아가씨가 화내지 않을까요?"
"아, 카린이라면 마음이 넓어서 괜찮습니다."
엘은 당당하게 말했다. 카린이 둘었다면 무슨 소릴 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것을 읽은 듯, 여전히 즐거움이 담뿍 담긴 미소를 입가에서 지우지 않고 레아는 말했다.
"흐-응. 그런가요.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이후로도 연락을 지속겠습니다."
"예.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레아는 후드를 다시 쓰고 고개를 살짝 숙여보인 다음 땅을 박찼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높게 허공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허공을 박차고 금세 엘의 시야로부터 사라졌다. 삼좌 가운데서도 가장 빠른, 신속의 몸놀림을 자랑하는 실버 라이트 다운 속도였다. 그녀는 마치 한줄기 은빛 빛살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엘은 몸을 돌려 저택으로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풍경이 환상처럼 흐려졌다. 그는 품에 담긴 검은 수정의 감촉을 느끼며 이번 여행의 목적이 한 가지 더 늘었구나, 하고 조용히 혀를 찼다.
*국어에선 集接이 야매였던 모양이군요. 앞으로는 集積으로 쓰도록 하죠. 제가 집접을 사용한 이유는 집접으로 인터넷을 검색하면 알 수 있습니다. 사전에야 안 나오지만 드문드문 쓰이긴 합니다.
*바이러스 덕분에 이것저것 에러가 나서 워드패드에서 적고 있는데 쓰기 힘들군요. 별로 적지도 않았는데 되게 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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