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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최근연재일 :
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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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2.29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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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계전(3)

DUMMY

피리아의 귀환으로 인해 데시크리아 남작령은 다시 한 번 충격에 휩싸인다. 무엇보다 그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것은 툴 폰 데시크리아다. 그는 전 남작의 동생으로 롤의 후건인이 되기로 예정되어 있던 사람이지만 피리아가 돌아온 이상 그런 것은 불가능하게 됐다. 그런 큰 일을 한 것은 이번에도 그 용병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수근거렸다. 그들은 남작령을 아예 장악하려 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한 생각이 비약에 불과한 것은 틀림없었지만 상황이 돌아가는 모양이 묘하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쨌거나, 계승문제가 일찍이 예상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은 틀림 없었다. 사람들은 툴이 어떻게 이 일에 대응할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카린은 속으로 초를 재다가 시간이 다 되었다 싶은 때에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차를 따랐다. 은근한 향이 하얀 김과 함께 주변으로 퍼지는 차의 풍미가 평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앞에 앉은 엘에게 넘겼다.


"자."


"고마워."


엘은 웃으며 그 차를 받아 품위있게 들이켰다. 이어 카린도 자신의 잔에 차를 따라 홀짝홀짝 들이켰다.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 곧 카린은 찻잔을 받침대 위에 딸각, 하고 내려놓고는 엘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설득했어? 갑자기 냅다 나타나서 설득하긴 쉽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피리아양은 엘을 굉장히 신뢰하는 눈치였고."


"음- 암시를 좀 사용했거든."


"암시? 엘은 그거 배우지 않았다며?"


카린이 기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유가 어쩌고 저쩌고 해대는 엘은 필연적으로 암시나 최면과 같은 정신의 자율성에 관여하는 술법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물론 엘이 중요시 여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자유'로서 타자의 자유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고, 적의 자유라면 심지어 능멸하는 것을 즐거워 하지만, 상대가 적이 아닌 한에는 그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공유하길 바라는 법이다. 엘은 차를 한 모금 들이키며 별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안 배웠어. 그래도 기본적인 원리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간단한 수준을 사용하는 정도는 할 수 있지. 대화하는 중에 굉장히 불안해 하는 걸로 보여서 안심시키기 위해서 사용했어. 그래봐야 그녀의 자유의지에 관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고... 말하자면 주변 분위기를 강화한 정도지. 그런데 정말 초조하긴 초조했던 모양이야. '믿을 수 있는 상대'를 갈구하고 있던 상태가 아니고서야..."


엘은 말끝을 흐렸다. 남작이 죽고 죽음의 위협을 느껴 도망간 소녀라면 그것은 아마 필연적인 일일 것이다. 그녀는 극도로 짧은 시간 가운데 그녀가 발딛고 있던 현실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다시 어제 보았던 그녀의 우는 얼굴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능하면 얼른 그들 남매가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주변을 정리해 주고 싶었다.


이 일에 용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면 남은 그녀의 불안을 정리하는 것에 도움이 되겠지만 시스톤이 이 일에 자신이 개입되었음을 알리지 않길 원하는 한, 그럴 수는 없었다. 시스톤은 이 점에 대해 롤에게도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다. 더구나 엘 자신이 충분히 믿을 상대가 되지 못해 비만 도마뱀 따위의 이름을 빌린다니! 엘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그건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그는 다시 차를 들이켰다. 폐부로 스며드는 찻물의 따스함이 유쾌했다.


"헤-에."


하지만 카린은 엘의 말을 못미더워하는 모양이다. 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엘은 엄숙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블랙 둠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건데 그걸로 그녀를 유혹하거나 하지 않았어. 그럴 생각도 없고. 자기자신에게 자신이 없는 개병신이나 그런 수단으로 여성을 유혹하려 하는 거야."


그리고 엘은 콧방귀를 흥! 하고 꼈다. 카린은 피식 웃으며 엘의 말에 응대했다.


"누가 뭐래. 그런데 네가 말하는 정도로 초조했다고 보기엔 피리아의 준비가 충실한 것 같은데."


"그녀가 준비한게 아냐. 남작이 준비했었다더군. 만에 하나를 대비한 보험 같은거라는군. 하지만 남작 본인도 그게 이렇게 일찍 사용되리라고는 여기지 못했겠지."


"흠, 어쨌거나 이걸로 우리가 마련할 수 있는 카드는 다 모인거겠고, 남은 것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 건가 하는 정도네."


"그렇지. 더불어서 하나 더 추가하자면 파리아에게 왜 툴을 그렇게 의심하는가에 대한 경위를 듣는 거겠지. 그 의심이 온당하다면 그 사람에 대해 좀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테고. 여하간 이제 시간만 끌어도 최소한 지는 일은 없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한 엘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잔은 깨끗히 비워져 있었다. 카린은 뒤따라 자신의 찻잔을 비우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엘은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하는 답이 금세 돌아왔다. 그는 "실례하겠습니다."하고 말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피리아가 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얼른 책을 덮고, 엘을 향해 정중한 동작으로 인사해 보였다.


"어제는... 실례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든 피리아의 얼굴이 붉었다. 엘은 조금 흠칫, 하는 모양을 보였다. 피리아의 얼굴이 어제 저녁 까지와는 전혀 달랐던 때문이다. 물론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저택에 도착해서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할 때 한 번 보았다. 그래도 이제 겨우 두번 째라 생경함은 채 덜어지지 못했다. 하여간 지금의 피리아가 훨씬 아름다웠다. 초상화에 그려진 피리아의 얼굴과 같았다.


"아니요. 저야말로 결례를 범했죠. 그보다 몇 가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예."


피리아는 간명하게 답했다.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롤, 너는 옆방에서 린카와 함께 놀지 않을래?"


"응. 알았어요."


아직 떨어졌던 누나와 다시 만나게 된 기쁨의 들떠오름이 다 가라앉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종류의 대화에서 자리를 비켜야 한다는 것은 롤도 잘 알고 있었다. 곧 방안은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피리아였다. 그녀는 조신한 모양으로 말을 꺼냈다.


"저- 그런데 함께 계신 카린이라는 아가씨는 동료... 인가요?"


"그렇죠. 동료 겸 제 연인입니다."


엘은 씨익 웃으면서 답했다. 피리아의 얼굴로 약한 실망이 스쳤다. 엘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담담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피리아 양은 숙부, 그러니까 툴 씨를 깊이 불신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우선은... 우리가 사라지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숙부입니다. 그리고 롤에 대한 암살 시도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두분의 사이가 매우 불편했습니다. 숙부는 영지 관리를 위한 행정의 측면에서 적지 않은 공헌을 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버지의 결단과 선택 앞에 빛이 바랬지요. 아버지도 숙부의 공헌을 인정하지 않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사이가 좋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그리고 피리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전신이 잘게 떨리는 것을 엘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얼른 그녀의 손을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말해보세요."


피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엘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곧 그녀의 전신으로 일던 떨림이 점차 진정되어 나갔다. 피리아는 깊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치솟으려는 감정을 억누르며 엘에게 설명했다.


"...결정적인 것은 숙부가 정체모를 이와 밀약을 나누는 것 같은... 장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안개가 발생하고 사람들이 실종된 것이 알려진 탓에 군대가 조직되어 파견하기로 결정된 날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간단한 약식 파티를 열었는데, 그날 정원을 산책하다가 그것을 듣게 된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죽게 되면 이 영지 모두가 숙부의 것이 된다는 종류의... 이야기였던 것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작이 죽고, 본인은 실종을 가장하기로 결심하고 실권을 툴씨에게 넘기기로 결심한 것입니까?"


"예... 그런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다시 돌아와서 좋았던 것일까요?"


그리고 피리아는 다시 그때의 긴장과 두려움이 재생된 듯 애절한 시선으로 엘에게 물었다. 엘은 그녀의 긴장된 시선을 받으며 언제나와 같이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물론이죠. 저를 믿으세요."


피리아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미소 앞에서 자신의 우려는 모두 하찮은 것 같았고, 피리아는 그 느낌이 사실이길 기원했다.





책상 앞에 앉은 툴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채 한숨만 내어쉬고 있었다. 그 앞에 펼쳐진 양피지는 텅 비워진 채 아무 것도 적혀져 있지 않았고, 툴의 오른손에는 짙은 잉크를 머금은 만년필이 쥐여져 있었다. 갈등하는 그의 옆 모습을 비추는 촛불이 고요하게 떨고 있었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어쩔 수 없는건가."


그는 회한에 물든 눈길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던 오른손을 움직여 양피지에 검은 글자를 체워가기 시작했다. 곧 그리 길지 않은 문장이 완료되었고, 그것을 접어 밀립으로 봉했다. 그 위에 찍힌 문장은 데시크리아 남작가의 가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어 툴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줄을 당겼다. 곧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아아. 이걸 영지 중앙 행정관의 숙박시설에 묵고 있는 안바르디 백작가의 정부 사절단에게 전해주게."


그리고 툴은 돌돌 잘 말린 양피지를 그에게 넘겼다. 그는 그것을 정중한 동작으로 받으며 물러났다. 문이 닫혔고, 처음과 같은 고요가 돌아왔다. 그 가운데서 톨은 다시 한 숨을 쉬었다.




*추천해 주신 천유마님께 감사의 마음을. 하지만 따지고 보면 엘은 이 글이 시작하고 한 명도 건진 적이 없죠. 카린이야 처음부터 함께였고. 그러니 실질적으로는 입만 살았달까...(...) 감히 알렉과 비교하기는 무리. 그리고 세나도 지배자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 피리아랑 비교하긴 좀 힘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지난화의 이벤트는 성공했던 모양입니다. 100개 넘으면 성공이라니... 성공한 것이겠죠. 참여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성원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이만. 오타 지적등등도 감사히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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