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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최근연재일 :
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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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15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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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수도 1(5)

DUMMY

십오구역 이십삼번지. 관리의 말에 따라 찾아가본 그곳에서, 엘은 조금 멍청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거대한 건물 여러 채가 가지런히 한 담장 안에 들어서 있었다. 한 담장이라고 해도 그 담장이 포섭하고 있는 공간은 굉장히 넓어서 어지간한 시골 마을의 규모는 될 성 싶었다. 그리고 앞쪽의 건물들은 조금 장식적이고 깨끗한 것들인 반면, 뒤쪽의 건물들은 검은 연기를 모락모락 내뿜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독특한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엘은 요상한 곳이라 생각하며 입구로 찾아갔다. 큰 입구 옆에는 집 같은 것이 있어 거기서 들어오고 나오는 사람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사정을 설명하니 지금은 벤 알리가 외출중이라며 A건물의 대기실이라는 곳으로 안내해 줬다. 대기실에는 건장한 남자가 여럿 서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때때로 엘을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노려보곤 했다. 또한 그들은 심심치 않게 망치와 같은 도구로 손을 두들기곤 했는데, 그것은 마치 엘을 위협하는 것 같았다. 엘은 불쾌했지만 그런 마음을 꾹 누르고 벤 알 리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삼십분 정도 지나서 벤 알리는 돌아왔고, 엘은 그를 만나볼 수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벤 알리라고 합니다.”


두꺼운 책들이 들어찬 책장과 이상하게 볼품없고 낡은 물건들이 늘어선 진열장이 독특하게 조화된 방으로 들어가자, 안경을 낀 젊은 남자가 의자에서 서둘러 일어서며 엘을 향해 인사했다. 스물은 확실히 넘고, 서른에는 부족해 보였다. 무척 공손한 태도였다. 아니, 공손 이전에 마치 겁을 잔뜩 먹은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대기실에서 받았던 대접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방의 양 모서리에 묵직한 체격의 남자들이 위협적인 눈빛을 보내며 서 있지 않았더라면, 엘은 어리둥절함을 느꼈을 터였다.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엘도 마주 인사하며 앞으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엘을 바라보며, 안경을 고쳐 쓰면서 되물었다.


“시, 시신을 찾으러 오셨다고요?”


“예. 필이라고, 소매치기를 하다 얼마 전 교수형을 당한 아이의 시신입니다.”


“아, 으, 음...”


그러자 벤은 양 손을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양 뗐다 붙이기 시작했고, 방안에 서 있던 남자들은 긴장된 시선으로 엘을 바라봤다. 엘은 갑작스런 분위기의 변화에 의문을 느끼면서 용건을 이었다.


“두 배, 아니 세배 가격이라도 괜찮으니 그 아이의 시신을 돌려받았으면 합니다.”


“아, 음. 이,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이미 장례를 끝냈기 때문에... 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위, 위로금으로 제 쪽에서 시신을 구매한 가격의 다섯 배로 드릴테니 물러가 주셨으면 합니다.”


벤이 말했다. 도리어 위로금을 내어주겠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엘에게 중요한 것은 이미 장례를 끝냈다는 대목이었다. 오늘까지 그 아이의 시신이 걸려 있던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미 장례가 끝났다는 것은 그 시신이 특별한 용도에 사용되지 않고 곧장 장례식을 치뤘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엘은 확인 차 되물었다.


“벌써 장례를 치렀습니까?”


주변의 남자들이 긴장된 모습을 보였다. 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바, 방금 장례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대답을 듣고 엘은 환히 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이들을 대신해서 감사드립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나중에 아이들과 함께 참배하러 갈수 있도록 묻혀 있는 위치를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아...”


엘의 말을 듣고 벤 알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양 옆의 사람들을 향해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보였지만 그의 말에 따라 방을 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나서, 방은 엘과 벤,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벤은 그렇게 말하고는 서재 옆으로 난 작은 문으로 들어갔다. 엘은 허리를 펴고 방을 둘러봤다.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특이한 방이라고 생각했지만, 천천히 살피니 그 독특함은 한결 더했다. 곧장 쓰레기통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넝마주이들이 ‘실버라이트 선집’과 같은 고급스런 양장의 책들 옆에서 동등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방의 가구는 하나같이 뛰어난 고급의 것이었지만, 동시에 충분히 관리되지 못한 듯, 정리정돈은 엉망이었다. 간결하게 줄여 말하자면, 주인을 무척이나 닮은 방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벤이 돌아왔다. 그는 양손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컵을 하나씩 들고 나와서는 엘 앞에 하나를 내밀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홀짝이기 시작했다. 엘은 그가 건내준 잔을 들고 따라서 홀짝였다. 쓴맛이 나는 갈색의 액체였다.


“개, 개척지에서 재배되는 작물을 끓여 만든 음료입니다. 처, 처음 먹을 때 마, 맛은 좀 없지만, 머리를 맑게 해 주기 때문에, 조, 좋아합니다.”


엘이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벤은 희미하게 웃으며 그 특유의 어눌한 어조로 설명했다. 엘은 “그렇습니까.”라고 호의적으로 답하고는 조금씩 조금씩 들이켰다. 확실히 맛은 좀 없지만, 몸에 좋다는 데다 호의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저, 저희 공장 사, 사원들의 무례는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요, 요즘 공장에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다, 다들 민감해져 있는 탓에 다소 무례한 모습을 보여드렸을 겁니다.”


“그랬군요. 그런데 시간을 계산해 보건데 시신을 구매하신 후 곧장 장례를 치룬 것 같은데, 그렇다면 무슨 일로 시신을 구매하신 건가요?”


엘은 지나가는 어투로 물었다. 곧장 매장할 거라면 굳이 시신을 사들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탓이다.


“아, 아이들이 어른들의 욕심에 이용당하다가 주, 죽어서 온전히 묻히지도 모, 못한다면 스, 슬픈 일이지 않겠습니까. 소아의 시신은 되도록 미리 구매해서 장례를 치러주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의, 의국이나 대, 대학에서는 항의서한이 오기도 하, 합니다만...”


돌아온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단지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서 그 아이들의 시신을 사들였다고 한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아이들의 시신을. 엘이 가슴 깊은 곳에서 벅차게 샘솟는 감동을 느꼈다. 그는 신기한 것을 확인하는 것 처럼 벤에게 되물었다.


“단지, 묻어주려고, 시신을 샀다는... 말입니까?”


“이, 이상합니까? 제 주변에서도, 이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 합니다. 그, 그렇지만, 사람이 오, 옷 입은 짐승은 아니잖습니까.”


쓰게 웃으며 벤은 말했다. 엘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다니요! 하고 계신 일은 존경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 그렇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시, 실은 돈 많은 괴짜의 도락이라고 비웃는 사람도 마, 많았거든요. 이, 이것 때문에 때, 때때로 귀찮은 일도 겪고...”


“선행은 선행으로서 판단되어야 합니다. 당신을 비웃을 수 있는 자들이 타인을 위해 과연 어떤 일일 할 수 있을지, 저는 부정적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군요. 선은 넓게 포섭하는 것이지, 잘라 구분하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엘은 열띤 어조로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의 칭찬에 벤은 창피한 듯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얼른 잔을 비우고 말했다.


“하, 하하. 감사합니다. 무덤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 가시지요.”


“예.”


엘은 마찬가지로 텅 빈 잔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기쁘게 일어났다. 사람을 만나서 기쁨을 맛보는 것은 꽤나 오랜만의 일이었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30분 정도 달려서 멈췄다. 막 지어진 듯 깔끔한 느낌을 주는 큰 공동묘지의 입구였다. 아직도 대부분의 대지가 사용되지 않고 남아 있어서 묘지라기보다는 공원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엘이 살펴보자니 공동묘지의 입구에는 ‘벤 알리 집산공장 공동묘지’라는 판이 걸려 있었다. 벤은 그의 시선이 공동묘지의 이름에 가 있는 것을 보고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 저희 직원들이 지은 이름입니다. 제, 제 이름을 빼 달라고 했는데, 표, 표결로 저렇게 붙이고 말더군요. 자, 들어가시죠.”


“이 곳은 공장 직원들을 위한 묘지인가 보지요?”


“이, 일단은 직원과 그들의 가족에게 우선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서 일반에도 공개를 할 생각입니다. 제, 제가 아이들을 묻는데 사용한 것 처럼요. 무, 물론 엘씨가 원하시면 언제든지 들러서 참배가 가능하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묘지 안으로 들어갔다. 필의 묘는 묘지의 모서리 쪽에 있었다. 거기에는 이제까지 벤이 일일이 장례를 치러온 것으로 보이는 아이들의 묘가 백여 개 가까이 서 있었다. 그의 이러한 행위가 단발성의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었다는 것을 잘 설명하는 장면이었다. 두 사람은 필의 묘비 앞에 서서 잠시 묵념을 하고는 그곳을 빠져 나왔다. 마차를 타고 다시 공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엘은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그 공장은 벤씨의 소유입니까?”


“하, 하하,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묘한 대답이군요.”


“저, 저희 공장은 ‘주식’이라는 것으로 운영됩니다. 그, 그러니까 공장의 일을 결정할 때 주식이 많이 모인 쪽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지요. 저, 저는 회사의 주식 가운데 49%를 가지고 있고, 51%는 직원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 그러니까 저의 결정권은 굉장히 강력한 것이나 전제적이진 않고, 사원들이 원한다면 언제든 저를 쫒아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러니 가진 것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니지요.”


“재밌는 제도군요. 굳이 그렇게 운영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노, 노력한 자가 보상받는 것이 당연하다면, 노동한 자가, 바, 받아야 하는 것도 당연하니까요. 지, 지금 사업을 하는 자들은 지, 지주 들과 싸우기 위해 노동가치설, 노동가치설 운운하며, 지, 지껄이고는 있지만 그것이 지, 진정으로 함의하는 바는 아, 알지 못합니다. 그, 그들은 자신들이 구매한 것이 노,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라는 것도 모, 모르고 있습니다. 저, 저는 그걸, 위해 이, 이런 제도를 만들어 운용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벤은 격앙된 어조로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눌한 말투가 역정과 뒤섞이며 많이 부서졌고, 내용 자체도 엘로서는 생경한 것이라 이해하기 어려웠다. 엘이 설명을 부탁하려고 할 때, 마차가 멈췄다. 공장 근처이긴 했지만 아직 도착한 것은 아니었다. 벤이 놀라서 마부석을 향해 물었다.


“무, 무슨 일입니까?”


“선생님, 앞에-”


마부가 조금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으, 으음...” 신음같은 말이 벤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따라서 엘도 앞을 바라봤다. 마차 앞, 공장의 입구에서 일단의 두 무리가 거칠게 충돌하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서브라임은 구조적으로 굉장히 명료한 글입니다. 주인공이 여행 과정에 겪은 모든 사건은 근본적으로 ‘같은’것입니다. 같은 사건이 다르게 표현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단호하게 말해서, 아무 것도 쓸데없이 더 많이 들어간 것 따위는 없습니다. 모든 소재와 캐릭터는 거기 종속되어 존재합니다. 그래도 엘이 무얼 하는지 모르겠다면, 엘이 겪어온 사건들에 대해 더 생각해보시거나 앞으로의 여정을 좀더 지켜보시길 권합니다. 마왕만 쫒으라, 는 서브라임이란 글에 너무 파괴적인 의견이라 간단히 설명해 봤습니다. 그나저나 숨기면 숨기는대로 역시 문제가 발생하는군요. 후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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