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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최근연재일 :
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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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0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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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쓸쓸한 달(10)

DUMMY

카린은 창문 너머로 손을 내밀었다. 달빛이 내려앉던 그녀의 고운 손 위에 대신 비둘기가 앉았다. 잘생긴 비둘기였다. 그 비둘기는 곧장 빛을 내더니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고, 종래 한 장의 편지로 바뀌어 그녀의 손에 잡혔다. 하얀 겉봉에는 ‘시스톤’이라고 용어(龍語)로 적혀 있었다. 기다리던 연락이다. 카린은 흡족한 표정으로 편지를 쥐고 저택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는 작은 축연이 베풀어지고 있었다. 군복 차림의 남자들이 밝은 빛 아래서 술과 음식을 들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엘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였다. 훈련이 막 시작했기 때문에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병사들에게도 기념식이 돌아갔다는 걸 생각하면 대규모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 축연의 주인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 걸까? 카린은 회장으로 들어가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폈다.


“레-!”


곧 그녀는 표정을 밝히며 엘을 불렀다. 그는 정원으로 뚫려 있는 낮은 테라스에 서 있었다. 엘은 돌아보지 않았다. 카린은 잠시 서서 그를 바라봤다. 달을 바라보던 엘의 분위기는 이상하게 고즈넉했던 탓이다. 오늘 오후- 그러니까 두빌과 싸워 이긴 후 줄곧 저러했던 것 같다. 왜 그러는 걸까? 카린은 아직 그 이유를 듣지 못했다. 조금 섭섭함을 느끼며 그녀는 엘의 옆자리에 섰다.


“아, 카린.”


“그런데 혼자네?”


이제야 알아보다니, 꽤 깊게 무언가를 생각하던 모양이라 생각하며 카린은 물었다. 이 연회는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래대로라면 엘의 주변은 시끌벅적해야 한다.


“두빌 장군과 싸우면서 좀 다쳤다고, 혼자 있게 해 달라고 했어.”


“헤헤, 그래? 흐음- 하여간 여기! 답장 왔어.”


이유야 어쨌든, 엘을 괜히 시시껄렁한 인종들에게 빼앗기지 않고 오붓하게 둘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다. 그녀는 밝은 얼굴로 시스톤의 답장을 엘에게 건냈다. 엘은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그 편지를 뜯어 안의 내용을 살폈다. 짧은 편지였기에 다 읽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곧 엘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편지를 접었다. 카린은 엘은 채근했다. 그녀는 같이 보려고 일부러 편지를 뜯지 않았었다.


“뭐라고 하셔?”


“모두 보내래. 그렇지 않아도 데시크리아 쪽은 인구가 부족하다는군. 그쪽에서 처벌부터 갱생까지 다 맡아 줄 테니까 안심하고 보내래.”


“다행이다!”


카린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꽃이 피어나듯 웃는 카린의 얼굴을 보며 엘은 꽤 아쉬움을 느꼈다. 그녀가 본래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이 웃음은 달을 무색케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꿀꿀했던 기분도 조금은 나아졌을 것을. 하지만 사정이 사정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카린의 본 모습은 어디서든 돋보인다. 소란을 피하려고 한다면 숨기는 게 좋다. 약간 어려보이는 게 흠이지만.


“그래. 만일 답이 부정적이었으면 꽤 골치를 썩어야 했을테니.”


엘은 안도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달리 그들을 맡아줄 사람을 물색하고, 교섭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카린은 그의 오른쪽 팔에 머리를 기대며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꿀꿀해? 기분 좋게 싸우고, 이겼고, 질질 끌던 일도 처리가 됐는데, 주인공이 주인공답지 않게 잘난 척도 안 하고 이렇게 있게.”


“음- 좀 찝찝한 이야기를 들어서.”


“찝찝한 이야기?”


“십년 전에 메르첼의 어머니는 농민에게 간살 당했다는군. 그것도 농민 추방을 막으려다가. 평소 그녀에게 기대던 자들이 그녀를 최악의 방식으로 배신했던 모양이야.”


엘은 담백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도무지 담백하게 넘길만한 것이 아니었다. 카린의 표정은 단번에 어둡게 변했다. 카린은 메르첼을 도저히 좋아할 수 없었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니 그녀에 대한 인상을 어느 정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오늘 메르첼이 나한테 와서 정직하지 못하다고 시비를 걸고 갔잖아?”


여전히 담담하게, 엘은 말했다.


“응.”


“-그게 아마 그런 경험 때문이지 않았나 싶기도 해. 평소에 그녀의 어머니는 농민들과 굉장히 친했다고 하거든. 그렇다고 하면, 평소에는 선량한 표정을 짓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표정을 바꾸고 등 뒤에 칼을 꽂아 넣은 셈이었으니, 아마 한 순간에 표정을 바꾸는 나를 보고 불쾌했던 거겠지.”


간결하고 냉정한 분석이었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카린은 알 수 없었다. 아마 그 분석이 맞을 거라는 인상과, 냉정한 엘의 분석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사실 쓸쓸함의 대지일 거라는 정도가 이어서 떠올랐을 뿐이다. 카린이 엘의 분석에 이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그녀가 아루스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결국은, 다른 가식이 다 필요 없이 ‘욕망’을 사람의 근본이고, 다들 그것만을 통해 움직인다고 파악할 수 있음으로, 배신을 걱정할 이유가 없는 국가이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걸까?”


“그럴 것 같아. 정답은 본인에게 묻지 않는 한 알 수 없겠지만. 그리고 그녀의 경험을 고려하더라도, 그녀의 생각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일이지만.”


엘은 고개를 끄덕여 카린의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욕망’이란 개념으로 세계를 해석할 때, 누구에게도 ‘선의’를 기대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그 세계에 배신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 배신의 소거는 ‘신뢰’의 소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그 세계에는 어디서도 기댈 곳이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메르첼은 냉정히 그런 세계를 택한 걸까? 그녀가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보여준 농민 계급에 대한 선명한 적의와 경멸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그럴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무엇보다, 그들 사이의 신뢰라는 것을 부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다시 엘은 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카린, 이번에 우리는 운이 정말 좋았던 것 같아.”


“갑자기, 무슨 말이야?”


카린이 엘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말야, 사실 고생을 안 한건 아니지만, 해야할 일은 명확했고, 고민은 필요가 없었잖아. 내게 필요했던 것은, 그저 허리를 조금 굽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진 이들에게, 그들이 내게 원하는 일을 해주는 정도면 충분했잖아.”


“별로 운이 좋은 것 같지는 않은데?”


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수도로 가던 길에 운 나쁘게 시끄러운 일에 휩싸였고, 오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떠맡게 됐다. 그 덕분에 마음에 안 드는 여자애에게 굽신거리며 여기까지 왔다. 운이 좋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 운이 좋다고 하는건, 그런 일을 겪지 않는 것이다. 엘은 카린의 생각을 읽은 듯, 피식 웃으며 설명했다.


“생각해 봐. 만일 내가 그들에게서 확실한 진실을 캐낼 힘이 없었더라면, 만일 그들이 이미 사람을 죽였었더라면, 만일 내가 그 싸움을 압도할 수 있을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더라면, 만일 그들을 맡아줄만한 세력을 지닌 이를 알지 못했다면, 만일 내가 그들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없었더라면, 그러면-”


“......”


“-그러면, 그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었을까? 딱 하나의 '만일'만 틀어졌어도, 아마 지금처럼 행동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그런가...”


“메르첼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런 생각이 계속해서 들던걸. 한 가지만 어긋나도, ‘올바르다’라는 관념에 대해 꽤 고민했어야 할 테니까. 그런 걸 겪지 않고, 자존심만 굽힌 정도에서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지.”


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다면 운이 좋았다. 카린도, 엘도 지금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운이 나쁜, 불행한 사람들을 돕고 있을 뿐이었고, 그것을 위해 마음에 안 드는 일을 감내하면, 그뿐이었다. 행위 자체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이-


카린은 생각을 잇는 대신에, 엘과 팔짱을 끼고 머리의 무게를 어깨에 기댔다. 엘은 그녀의 온기와 무게를 부드럽게 느끼며 달을 올려다보았다. 사부와 만났을 때 보았던 달과 모습은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달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달은, 그때의 달과 달랐다. 삶은 구차함은 명료했고, 그 명료성이 절절한 만큼 달은 멀었다. 어째서 사부가, 그렇게나 강대한 힘을 지닌 사부가, 삼좌로서 설정할 수 있는 것이 삶이 아닌 죽음의 방식이라고 답했던 것인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쓸쓸하구나.’


엘은 저절로, 달을 향해 중얼거렸다.




*챕터 끝났습니다.


*클라우드 나인님께서 훌륭한 감상을 남겨 주셨습니다. 이런 종류의 감상은 언제나 그러하듯, 감상에 비교되어 글이 찌질해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게 됩니다. ㄷㄷㄷ. 지석님의 성원에도 감사!


*의견 수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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