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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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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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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1.01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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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계전(4)

DUMMY

세키리아 왕국에는 승계전이라는 것이 있다. 봉건 시대의 유물같은 것이다. 부족연맹으로 출발한 세키리아 왕국에서 권력이란 사적(私的)인 것이었다. 권력이 사적이라 함은 제도상의 임명이나 인정보다 권력자 개인과 그들간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권력의 사적 성격은 '왕국의 장군보다 왕의 발을 씻어주는 자가 고귀하다.'와 같은 세키리아의 격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승계전은 이러한 사적 권력의 전통 위에 성립한 것이다. 요는 후계자를 결정하기 위한 결투였다. 하지만 결투라고 해서 승계 후보자 본인이 나설 필요는 없었다. 합의 아래 3대 3, 혹은 5대 5의 승부로 이루어지는 이 승부에서 중요한 것은 승리할 수 있는 강한 전사를 모으는 것이었다. 승리할 수 있는 강한 전사. 그것을 위한 수단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그것이 돈이든, 지위든, 땅이든, 여자든, 인망이든, 우정이든, 협박이든, 운이든- 그런 것은 어찌되어도 좋은 것이었다. 요는 그런 강자를 자신의 권력망 속에 편입시킴으로서 자신의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참으로 단순무식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승계전 자체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일단 세키리아 왕국에서 승계권은 정실의 장자에게 절대적으로 주어져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반론도 허용되지 않았다. 사적 권력의 최종적인 완성이 혈족 세습임을 생각하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승계전이 있는 경우는 장자의 사망으로 인해 후계자가 될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2, 3위 후보자들 간의 우열을 가르기 위한 경우나, 장자가 측실의 자식으로, 큰 나이 차 없이 정실에게서 아들이 태어났을 때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나 쓰이는 일이었다.


어느 쪽이든 롤과 같이 정실의 장자로서 형제도 없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후계자가 승계전을 치른다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저는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만, 틀렸나요?"


카린은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앞에는 오만한 인상의 남자가 의자에 앉아 카린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모자를 깊이 눌러써 얼굴이 보이지 않는 호위무사가 무심한 기색으로 서 있었고, 카린의 옆에는 마찬가지로 엘이 서서 그녀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야 아가씨의 말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지. 지금 왕국은 왕실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와중이고, 법제를 비롯해 승계나 세습에 관련해서도 많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지."


중년인의 답은 여유로웠다. 그는 중앙에서 파견한 행정관으로 지르 폰 안바르디라고 했다. 오늘 갑자기 호위무사와 함께 등장한 그는 데시크리아 남작령을 '회수'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 왕의 직할지로 바꾼다는 말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업이 영지를 국가에 귀속시키는 것이고. 특히 이런 변방지역은 국가의 방위에 관련되는 곳이기 때문에 국가로서는 되도록 빨리 흡수할 필요가 있네. 하물며 여기서는 얼마전 상당한 소란이 있지 않았나? 이번 데시크리아 남작이 확실한 지도력을 보여줄수 있다면 안심하고 영지 회수를 좀더 뒤로 돌려도 좋겠지만, 다섯살자리 아이에게 그런 것을 기대할 수는 없지."


"그 점이라면 그의 누이가-!"


카린이 반론하자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오만한 미소를 그 얼굴에 떠올리며 말했다.


"그 아이의 숙부라면 몰라도 젖내나는 계집 따위가 대장 노릇을 하면 더 믿을 수 없지. 여자는 그저 조신하게 남자의 말이나 들으면 되는거야."


카린이 매섭게 눈을 치켜떴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카린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사람들의 사회에서 여성이 멸시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완전하지 않은, 미숙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지르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왕실에서는 막무가내로 회수하겠다고 하지 않았네. 만일 승계전을 통해 이번 데시크리아 남작이 이긴다면 그의 승계를 인정하겠다는거야. 우리가 이긴다고 해도 거저 영지를 회수하지는 않네. 정당한 값을 주고 사들이지. 이 정도면 상당한 양보라고 보는데?"


듣고 있던 엘은 '양보는 얼어죽을.' 이라고 속으로 혀를 찼다. 지르 안바르디의 말은 논리적으로 들렸지만 승계전이라는 제도가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직 국가에 영토를 귀속시키지 않은 귀족들을 의식한 것일 뿐이다. 국가가 막무가내로 기득권의 재산을 갈취한다는 인상을 주어, 국가 내부의 분열을 일으켜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당한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국가기관으로, 그 정당한 가격이 터무니 없을 것임은 명백했다. 결국 정당성은 법이 담보할 뿐인데, 법은 가진자의 것이다. 롤도 원래는 가진자에 속하지만 지금은 전체적인 체제가 변하는 과도기적인 시점이라 거기서 밀려나 있다.


"후, 알겠습니다. 그럼 한 가지만 양보해 주시겠습니까?"


카린은 더 이상의 설득은 힘들다고 이해한 듯, 힘없는 얼굴로 말했다. 지르는 그녀의 태도에서 이겼다고 느낀 탓인지 자신만만하고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승계전의 방식은 3대 3으로, 승자진출전으로 하시지 않겠습니까?"


카린의 의도는 뻔했다. 승자진출전으로 한다면 요구되는 인원을 모두 모을 필요가 없다. 이론적으로 아주 강한 한 사람만 있으면 승리할 수 있다. 지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아가씨 옆에 서 있는 젊은이의 이름이 '레'라고 했던가? 그의 실력을 꽤 자신하고 있는 모양이군?"


"그건 상관없는 문제 아닐까요?"


"껄껄. 그래. 상관없지. 그러면... 좋네. 어차피 정해진 규약이 있는 것도 아니니 제안하는 대로 하지. 일주일 뒤로 하지."


"그렇게... 하지요."


그리고 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나갔다. 엘이 그 뒤를 이었다. 그는 나가기 전 스치는 듯한 눈길로 지르를 호위하던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바위처럼 굳건히 서 있었다.




"후훗, 내 연기 어때?"


마차에서 내려 방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카린이 발랄한 어조로 말했다. 엘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음, 좋았어. 아주 멋지던걸."


"후훗."


엘이 칭찬하자 기분이 좋아진 듯 그녀의 발걸음이 날듯이 가벼워 졌다. 사실 이번 회담의 목적은 승계전을 피하는데 있지 않았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승부 제도를 '승자진출전'으로 결정하는데 있었고, 그것을 위해 카린은 매우 몰리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성공해서 승계전은 승자진출전으로 이뤄지게 됐다.


"그나저나 안바르디라... 저쪽하고는 정말 질긴 악연이군."


"그러게 말야. 하긴, 세력이 워낙 크니 세키리아 왕국에서 활동하는 한에는 자주 그들과 엮이는건 필연적이겠지."


"하기야."


그렇게 두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하며 방으로 돌아가자 안에는 이미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리아였다. 그녀는 두 사람이 돌아오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엘을 향해 말했다.


"저- 상담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아, 얼마든지."


엘은 그녀의 불안을 걷어내는 부드럽고 상냥한 표정으로 답했다. 카린이 옆에서 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피리아는 곧 무거운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왕실에서 영지를 사들이겠다고 한 것으로 압니다.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영지를 파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롤이 위험해질 일은 없겠지요. 아무리 헐값으로 영지를 사들인다 해도 보상금으로 나오는 돈이 적을리는 없을테고, 현물 재산도 상당한 수준이라 저희 남매가 살아가는데는 아무런 불편도 없을테고요. 아버지와 조상님들께는 죄송하지만 영지를 잇는 것은... 저희 남매에게 짐이 무거운 것 같습니다."


"그-"


엘이 곤란한 표정을 했다. 그녀의 말은 온당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귀족이라는 것을 경멸하는 엘은 그녀의 선택을 지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시스톤과 약속을 했고, 롤의 목숨을 노린 음모의 주체를 처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후자였다. 엘은 권선징악만이 아름답다고 여긴다. 악이 처단되지 않고 흥하는 것은 추악한 일이었다. 하지만 피리아는 엘의 표정을 오해한 듯, 황망한 어조로 말을 더했다.


"무, 물론 두 분에게는 지금까지 수고하신데 대해 상응하는 만큼의 보수를 드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역시, 이런 방법이 있다면 레씨가 일부러 위험에 처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바르디 백작가는, 무서운 세력입니다. 그들은 소드 마스터마저 보유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엘은 햇살처럼 웃으며 말했다.


"-걱정마세요. 그리고 이대로 피리아 양이 물러서게 된다면 데시크리아 남작령은 직할지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데시크리아 남작령으로 남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상속자는 아마도-"


"-툴 폰 데시크리아, 입니까?"


"예. 피리아 양이 등장하자 마자 중앙의 행정관리가 연락해 승계전을 요구해 왔습니다. 우연으로 보기엔 너무 시간이 잘 맞아 떨어지지요. 소문에도 이미 툴과 안바르디 백작가의 연결은 뻔하더군요. 툴은 작위와 영지를, 안바르디 백작가는 사실상의 속령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그걸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의 이목과 행사의 정당성을 생각해 두 사람을 다시 죽이려 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엘이 엄숙한 얼굴로 설명했다. 피리아는 분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얼굴을 슬프게 풀며 떨리는 목소리로 호소했다.


"그렇지만-"


"아, 유감인걸요. 절 믿어주시지 않는 겁니까?"


엘은 다시 웃으며 살짝 토라진 모양으로 말했다. 그러자 피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엘을 의심한다니! 그런건 생각도 해 본적이 없었다.


"그, 그건 아니예요!"


"다행입니다. 그럼 믿고 기다려 주세요."


"예..."


피리아는 얼굴을 붉히고, 조금 젖은 눈길로 엘을 바라보다가 방을 빠져나갔다. 살짝 탕, 소리가 나며 방문이 닫혔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카린이 되게 심사가 뒤틀린 목소리로 말했다.


"사이가 되게 좋아 보이던데?"


"당연하잖아. 그렇지 않으면 이런 일은 할 수 없어."


엘이 무슨 뻔한 소릴 하냐는 것 처럼 약간 질책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그의 말이 옳았기에 카린은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냥 입술만 좀 앞으로 내밀었을 뿐이었다.


"음."


"후후, 하여간 이제 대충 큰 준비는 다 끝났고- 툴, 그 배불뚝이의 서류나 조사해 볼까. 이제 뒷일을 부탁해 카린."


"알았어."


그녀는 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만은 불만. 임무는 임무였다. 그리고 엘은 방 창문을 열어 방에서 뻐져나갔다. 밖으로 나가면서 그는 일주일 뒤의 승계전을 생각했다. 거기서 자신이 전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삼좌의 일인으로, 그것은 필연같은 것이었다.


문득, 지르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기억났다. 그의 기도는 범상치 않았다. 어쩌면 안바르디 백작가에서 고용하고 있는 소드 마스터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자신의 상대일리는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재밌는 승계전이 될 지도 모르겠다고 여겨졌다. 살짝 가슴이 뛰었다. 그때는 즐거운 검무와 선명한 징벌이 함께 이루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후-."


전신을 핥는 바람이 유쾌하다.




* LuminChaso 님의 추천에 감사의 마음을. 열심히 쓰겠습니다. 꾸벅. 여러분의 성원이 보약. 음.


*롤은 카린의 본명을 압니다만, 정황상 린카 쪽이 맞긴 하겠군요. 큼. 오류지적 감사.


*신정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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