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상위 그룹
“정말 수고 많으셨소.”
구단주 로이 베넷이 포도주가 담긴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 귀에 걸릴 만큼 올라가 있는 입꼬리가 그걸 확실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결국 대단한 성과를 이뤄냈군요. 이날을 기념하여 담소나 함께 나누고 싶어 이렇게 좋은 술을 보관해두고 있었습니다.”
“저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술잔을 건네받은 델 레오네는 정중한 태도로 대꾸했다.
33라운드를 끝으로 정규 리그가 종료되었다.
물론 이걸로 전부 끝이 난 건 아니다. 이제 각 팀은 다섯 번의 경기를 추가로 치러야 한다.
여기서 승점을 잘 쌓아가야 최종 우승을 거머쥘 수 있게 되며, 승점을 얻지 못하고 미끄러질 경우 막판에 뒤집혀서 강등의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
드디어 우승 경쟁 그룹과 강등 경쟁 그룹이 나뉘게 된 것이다.
물론 우승컵에 가장 가깝게 다가선 건 여전히 독보적인 위상을 보유하고 있는 셀틱이었지만 정상을 향한 경쟁을 떠나서라도 상위 그룹에 드느냐, 하위 그룹에 드느냐는 스코티시 프리미어십 팀들에게 있어 그리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애버딘은 최종 라운드에 맞붙었던 하이버니언에게 상당히 원망스러운 마음을 품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들의 수비적인 대응에 아무런 점수를 내지 못하고 1점을 나눠가지고는 하루아침에 상위에서 하위 그룹으로 결정 나버렸으니 말이다.
그 순위를 탈환해 낸 장본인 세인트 미렌은 같은 라운드에서 마더웰을 3 : 1로 잡아내며 6위에 올라섰고, 결국 마지막 경쟁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로스 카운티.
시즌 전부터 여러모로 전망이 좋지 못했던 그 팀은 상위 그룹에 무사히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2위라는 매우 좋은 성적으로 말이다. 이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해낸 놀라운 성과다.
“전임 감독에 의해서 5위까지 올라섰던 그 추억이 내 인생 마지막 최고의 행복일 거라 생각했소. 그런데 이번엔 2위라니······아직도 믿기지가 않는 일입니다.”
“아직 경기가 남아있습니다, 구단주님.”
“거의 끝난 거나 다름없지 않소. 2위와 3위의 차이도 제법 벌어져 있으니. 더군다나 델 레오네 씨가 그 얼마 남지 않은 경기 도중에 흐트러질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군요.”
그 말에 이탈리안은 피식 웃음을 지었고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며 술잔을 기울였다.
“역시 당신을 선임한 건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넷이 말했다.
“한심한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시즌 중반까지 델 레오네 씨에게 큰 신뢰를 가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당시 내 눈엔 그저 아무런 이력도 없는 수상한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말이오.”
술이 들어가고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으니 진심이 새어 나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실 달리 대안이 없었기에 당신을 선택했던 겁니다. 그래서 상황을 지켜보고 역시나 싶으면 위약금 없이 경질할 생각만 가득했지요. 새로운 적임자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니 지원도 소극적으로 해주면서 최대한 아껴볼 생각이었고······.”
이탈리안은 가볍게 쥔 술잔에 눈을 내리 깔은 채 조용히 얘기를 듣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군요. 내가 선임한 사람을 그토록 믿지 못했으니. 심지어 이렇게 훌륭한 성과까지 거두어 낸 인재를 말이오. 그나마 내가 덜 멍청했던 게 그저 다행이라 느껴질 뿐입니다. 미처 몰라봤던 것을 용서하시오.”
“괜찮습니다. 어떤 누구도 쉽사리 저를 믿기는 어려웠을 테니까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구단주님의 훌륭한 안목 덕에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요.”
살짝 재치가 섞인 아부에 베넷은 활짝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무튼 나는 이제 델 레오네 씨를 적극 신뢰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가졌던 그런 마음들은 전부 버렸소. 아니, 버린 지 오래요. 정확히는 그때부터였던 것 같군요.”
베넷은 잠시 멈추고 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델 레오네 씨가 세상에 선전포고를 했고, 그걸 보고 나서 내가 호출했을 때, 우리는 제법 기나긴 대화를 나누었지 않습니까?”
“그랬지요.”
“아마 그때부터 제대로 믿어보기로 했던 것 같소. 마침 그때 로스 카운티는 셀틱을 한 번 보기 좋게 잡아내기도 했었지요.”
‘전 이 구단의 잠재력과 제가 지휘하는 선수들을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과 로스 카운티를 믿어달라고 했을 때, 이후 베넷은 그날 온종일 그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한번 미친 척하고 괴짜 이탈리안이 꿈꾸고 있는 그 말도 안 되는 이상에 탑승해보아야 하는가? 그렇게 몇 시간을 고민하다가 일단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믿고 가보자는 결심을 내렸다.
그 신뢰의 결과는 오늘날 두 남자가 서로 웃는 얼굴로 술잔을 기울일 수 있을 만큼 만족스러운 성적표로 다가왔다.
최근에 있던 셀틱전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델 레오네 씨가 말했던 이야기가 비로소 이해되더군요. 딩월이 셀틱을 그렇게 곤혹스럽게 만들 정도의 선수일 줄은 꿈에도 몰랐소. 그걸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겁니까?”
“그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요.”
그렇게 둘은 마치 친구라도 된 것처럼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만큼 서로 간의 거리가 조금이나마 더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베넷은 델 레오네란 인물이 점차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괴짜스러운데다가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속내를 읽어볼 수 없는 남자다.
하지만 적어도 로스 카운티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정직하고 열정적인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혼란스러운 구석은 있으나, 그럼에도 신뢰가 가는 인물.
이 눈앞의 남자를 만났던 수많은 이들은 그를 향해 최종적으로 그렇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리고 그건 베넷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럼 아무쪼록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소. 델 레오네 씨의 능력은 충분히 알았으니 내년엔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해서 지원할 수 있도록 해볼 생각이오.”
“믿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강등될 수도 있던 팀을 이렇게 되살려놓았는데 믿지 않는 게 잘못된 거지요. 이미 당신은 로스 카운티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과를 입증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시즌에 이 놀라운 업적에 다시 다가서지 못하더라도 나는 델 레오네 씨를 끝까지 지지하겠소.”
“하하.”
그 말에 이탈리안은 웃음을 짓더니 잔을 내려 보며 원을 그리듯 살살 흔들었다. 안에 조금 남아 있는 와인이 그 흔들림에 의해 요동치고 있었다.
“제가 보기엔 여전히 믿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가 말했다.
“우리의 여정은 아직 반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셀틱을 끌어내리는 것도 아직 해내지 못했고, 이제 유로파라는 새로운 영역에 발을 들이는 모험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작 이걸로 최고의 성과라고 하시면 곤란합니다.”
“으음······.”
베넷은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신음을 얕게 내었다.
그 또한 이탈리안의 뻔뻔하고도 당당한 태도에 익숙해져 버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게다가 그걸 더 이상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만 치부하기엔 팀이 쾌속 항해를 해 나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 성적을 가지고 ‘고작’이라니.
“델 레오네 씨를 못 믿겠다는 건 아니지만······이 시골 바닥에서만 지내온 나로서는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군요. 물론 그렇게 된다면야 좋겠습니다만, 정말로 셀틱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끌어내고 정말로 그······.”
베넷은 순간 목이 메어 잠시 침을 삼켰다.
“로스 카운티가 정말로 우승을······할 수 있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이탈리안 감독이 대답했다.
“이번 시즌은 거의 물 건너간 듯합니다만, 애초에 올해 승부를 기울여 볼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다음 시즌에 우리는 충분히 도전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하!”
베넷은 차분한 표정의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얼굴을 천천히 두 손으로 한 번 쓸어내리더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을.
“당신은 정말로 이상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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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ottish Premiership A Group 34 Round >
로스 카운티 : 던디 Utd
2014년 4월 12일 (토) 15:00
빅토리아 파크 (관중 수 : 5,214명)
스플릿 그룹이 형성된 후 처음으로 만난 로스 카운티의 상대는 잭 맥퍼슨이 이끄는 던디 유나이티드였다.
그들의 상황은 상당히 좋지 않았는데, 상위 그룹에 올라섰다 하더라도 시즌 시작 전 그들이 내세운 목표는 그런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셀틱과의 경쟁이었으며 경우에 따라서 우승까지 노려보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경쟁을 하기는커녕 그 위치는 로스 카운티에게 빼앗겨버렸고, 인버네스 CT에게도 순위를 내주었으며, 이제 남은 경기를 어떻게 잘 해나가느냐에 따라 하이버니언에게도 자리를 내줄 판이다.
맥퍼슨은 최근 스코티시 언론에게 물어뜯기는 주요 사냥감 중 하나였다.
라커룸 안에서 발휘해야 할 통제력은 상실되어 버린 지 오래이며 팬들 또한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다는 보도가 하루가 멀다고 쏟아져 나왔다.
이제 명예 회복을 할 수 있는 것은 남은 다섯 경기뿐이다.
그중에서 로스 카운티와의 경기는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기회. 이탈리안의 부임 후 3전 0승 1무 2패라는 최악의 전적을 만회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번에 승리를 얻어내야 했다.
하지만 셀틱조차 격파해내지 못했던 수비진을 던디가 깨부술 수 있겠는가.
맥퍼슨은 로스 카운티를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서 연구를 했었으나 끝내 공략할 부분을 찾아낼 수 없었다. 심지어 선수들의 감독을 향한 신뢰는 이미 바닥까지 떨어져 있었다.
와아아 -
관중들의 함성과 함께 전개되는 로스 카운티의 역습.
“막아! 복귀해!”
맥퍼슨의 처절한 외침 속에서 군청색의 선수들이 던디의 진영으로 매섭게 치고 올라가고 있었다.
캐리의 전진 패스가 던디의 미드필더 진을 꿰뚫으며 깔끔하게 들어갔고, 수비 앞 공간을 내달리고 있던 딩월이 곧바로 횡 방향으로 백패스를 주었다.
그 볼을 받은 블랜차드의 측면을 향한 전진 패스가 오버래핑해 들어가는 스미스에게로 정확히 전달되었다.
그리고,
철썩 -
“으아앗?”
그 팀플레이의 종지부를 찍는 딩월의 슈팅이 키퍼의 손을 피해서 좌측 니어 포스트 쪽 그물을 흔들어냈다.
땅을 낮게 가르며 들어오는 크로스를 보며 오른발 바깥쪽으로 툭 건드리듯이 차낸 감각적인 슈팅이었다. 너무 감각적인 탓에 본인도 넣은 걸 믿기지 못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딩월은 흔들리는 그물을 보고서는 호들갑을 떨며 잭 마틴에게 달려갔다.
“넣었어요! 내가 넣었다고요! 마틴 형이 말한 대로 힘주지 않고 그냥 발만 갖다 댔어요! 와아, 각도도 거의 없었는데 이게 들어가다니. 저 잘했죠? 잘한 거 맞죠?”
“그래, 그래. 잘했어.”
잭 마틴은 어린아이를 어르듯이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축하해주었다.
이어서 동료들이 달려와 딩월을 축하해주었다. 그 로스 카운티 선수들 너머로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맥퍼슨의 표정은 완벽하게 대조되어 더욱 안쓰러운 몰골을 자아내고 있었다.
던디의 보드진이 그에게 날렸던 최후통첩의 기한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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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 카운티 1 : 0 던디 Utd >
에이든 딩월(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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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어제 올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분량이라도 많이 채울라 했는데
만족할 만한 글을 쓴다는 게 참 쉽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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