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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te 님의 서재입니다.

배같은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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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rte까르
작품등록일 :
2020.01.17 23:48
최근연재일 :
2021.02.27 22:00
연재수 :
85 회
조회수 :
4,832
추천수 :
77
글자수 :
487,621

작성
20.03.24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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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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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28. 합법적 잣대 - 8

DUMMY

조금씩 감각이 돌아올 즈음,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양팔과 양다리가 밧줄로 꽁꽁 묶인 채 교복이 먼지투성이가 된 상황, 나는 흐릿한 시선으로 불 켜진 컨테이너를 둘러보았다. 모자는 챙이 거꾸로 가있었고 마스크는 어딘가로 사라져 보이질 않았다. 잠시 뒤, 컨테이너 너머로 한 사람의 인기척이 보였다.


둥근 티타늄 테 안경을 쓴 짙은 흑발에 벽안인 계집, 규리는 아까와 똑같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규리는 나와 시선을 마주쳐 그대로 내 쪽으로 걸어왔다.


"지금 이 상황이 재밌나 봐. 꼽사리 오빠?"


규리의 익살스러운 미소는 가까워질수록 거북한 느낌을 주었다. 그 후, 발길질로 내 앞에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내 목구멍을 괴롭히면서도 낄낄 웃어대는 규리의 표정은 가히 압권이었다. SMK 계집들 중 가히 최강이라 해도 무방했다. 나는 기시감 따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했다.


"원하는 게 뭐지?"


"눈치 빠르네. 꼽사리 오빠라고 부르는 이유야 이미 간파하고 있을 거고?"


규리는 고개를 갸웃대 오달진 미소를 지었다. 조명 너머 역광으로 인해 더욱 거북한 인상을 주었다.


말하는 걸 보아, 규리 또한 내가 SMK에 있는 걸 극도로 반대하는 듯 보였다. 이는 SMK 선유파에게 들었던 적이 있어 어느 정도 짐작한 사실이었다. 채팅창에서 조용히 의견만 내던 계집이 갑자기 이런 행동을 보인 건 예상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기죽을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들어오는 게 그렇게 싫었으면, 하유나를 탓해. 언제까지 표적을 곡해할 생각이야?"


"그때 찬성하지 말았어야 했어. 너 때문에, 평화로웠던 S&M이 박살 났잖아!"


"웃기지 마!"


하나같이 똑같은 말만 지껄일 뿐, 무슨 잘못을 저지르는지 자각하지 못하는 계집들 투성이었다. 나는 크게 몸부림쳐 컨테이너 옆벽을 통해 몸을 일으켰다.


"네들이 S&M부터 해온 것들이 얼마나 역겹고 추한 일들인지 모르지? 학생들 스토킹이나 하고, 사람 무자비하게 린치하고, 파벌 갈라서 네들끼리 심판 놀이나 하고. 그런 만행을 벌이고 있으면서 다 나한테 죄를 뒤집어 씌울 생각이야?"


이에 규리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뒤이어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깔깔 웃어댔다. 컨테이너 안을 맴돌아 이곳저곳이 공명할 정도였다. 규리는 웃음기를 거두어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 후, 제자리에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네. 피해자라서 이런 데 예민하겠어."


"뭐?"


"시치미 떼지 마. 여기 처음 온 것도 아니잖아?"


순간적으로 동요할 뻔했다. 유나로 인해 컨테이너로 납치되었을 당시, 내 얼굴을 본 목격자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규리가 대상자일 거라 확신할 순 없었다. 내 의식적인 시선에서 규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숨기고 다닌 덕분에 미스 포인트를 비집을 수 있었다.


"이런 좁고 을씨년스러운 장소는 이번이 처음이라."


"아까부터 꼴사납게 실이."


규리는 바닥부터 허공으로 손을 휘날려 또다시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나는 매캐한 숨구멍으로 헛기침만 나올 뿐이었다. 주변이 잠잠해질 동안, 나는 아무런 대꾸도 못한 채 규리를 바라만 보았다.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까?"


규리는 교복 카디건 주머니에서 꺼낸 걸 내 이마에 툭 쳐댔다. 나는 단단하고 무거운 감촉에 고통과 함께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 뒤, 규리가 무언가를 내 앞 바닥에 툭 던져놓았다.


"!"


고통이 무색할 정도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익숙한 사이즈에 검은색 실리콘 케이스, 뒷면 우측에 붙은 곰 캐릭터 스티커까지 내가 잃어버렸던 휴대폰과 완벽히 일치했다. 규리는 발로 내 휴대폰을 툭툭 건드렸다.


"예전에 컨테이너를 탈출했던 적 있잖아? 담벼락 근처에서 요걸 발견했지. 가장 먼저 입수한 건 유나였지만, 지금은 내가 소유한단 사실, 다 처음 듣는 얘기 아니야?"


규리는 발길질로 내 휴대폰에 먼지를 먹였다. 나는 이성을 차려 상황을 유려하게 바라보았다. 여기서 발끈하면 스스로 상황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근데 이 휴대폰, 진짜 더러울 정도로 보안을 걸어서 뭘 제대로 하질 못하겠더라. 프로필도 뭐 요상한 아이콘 배경을 쓰니 알 방도가 있어야지. 뭐, 이젠 물에 빠져서 제대로 작동이나 할지 모르겠지만."


규리의 대화는 매우 공격적이었다. 그러나 직관적인 방식에 말릴 이유는 없었다. 복잡한 보안 덕분에 유나가 내 휴대폰 안을 확인하지 못한 건 오히려 호재에 가까웠다. 규리는 찡그린 인상으로 내 쪽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젠 귓구멍도 막혀서 안 들리는 거야?"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지 통 모르겠네.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얘기가 덜 됐네. 그 휴대폰, 무대 행사 때 유나가 갖고 있던 걸로 알고 있지?"


규리는 이내 내게 다가와 오달진 미소를 지었다.


"그거 다 뻥이야. 그전부터 내가 갖고 있었거든."


나는 여기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이후, 규리는 휴대폰을 들어 내 쪽으로 들이밀었다.


"내가 오빠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달라 얘기했지. 지금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텐데?"


규리가 말한 대로였다. 알고 있던 내용에 대한 모순, 그리고 이를 모두 간파하는 규리의 행태가 수상쩍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휴대폰 관련한 상황을 되짚었다. 얼마 안 가 이에 연관된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 수 있었다.


"미로가?"


무심코 입에 내뱉은 걸 수습하려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규리는 낄낄 웃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야 얘기가 좀 통하네. 안 그래 미로 오빠?"


"뭐?"


놀랄 새도 없이 컨테이너 입구 쪽으로 미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져 차마 눈을 뗄 수 없었다. SMK 완장을 찬 미로와 미로에게 붙어 므훗한 미소를 짓는 규리의 모습이 마냥 자연스러웠다.


"멋대로 소꿉친구 코스프레하면 그렇게 보일 줄 알았어? 진짜 소꿉친구끼리 계획을 짜니까 이렇게 감쪽같잖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내게 정보를 공유하기 바빴던 미로가 되레 내게 정보를 캐고 이용하려는 첩자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미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로야, 아니지? 저번에 은정이 일 터졌을 때 먼저 나서서 도와줬잖아."


미로는 묵묵부답이었다.


"SMK 같이 만들자면서. 지금까지 축제 준비 열심히 하고 있었잖아!"


미로는 고개를 저어 내 기대를 묵살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상황을 믿지 않았다. 미로를 단적으로 몰고 가기엔 너무도 많은 것들이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규리는 나긋한 미소로 미로를 흘겨보았다.


"말해. 어차피 이렇게 일 벌인 거 물러설 것도 없잖아?"


미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연한 온도 차이였다. 미로는 덤덤한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았다.


"선배는 너무 상냥하니까요. 제가 실수로 보인 동정에 그대로 속아 넘어갔죠."


"무슨 소리야. 저 계집한테 휘둘리는 거면 지금이라도 그만둬!"


"선배, 이제 그만해요. 선배는 규리 손에 완전히 휘둘렸던 거니까요..."


미로의 불쾌한 표정을 본 후, 나는 더 이상 미로에게 신임을 줄 수 없었다. 적막해진 분위기 뒤로 미로는 고개를 숙여 내 시선을 피하려 들었다.


"유나랑 플러팅 하자고 말할 때부터, 선배는 규리가 짠 계획을 수긍했던 거예요. 라임포트 파크에서 우연히 SMK 애들을 만난 것도, 은정을 상대로 괴롭혔던 것도, 스튜디오 근처에서 깽판을 부렸던 것도 전부, 거기다 승준을 이용해 강연 선배를 유인한 것도 규리가 짠 계획이었죠."


"왜 그러는 거야? 그게 한 번에 될 리 없잖아..."


규리는 또다시 발길질로 먼지바람을 일으켰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아 주변 공기가 가라앉을 동안 숨을 참아냈다. 눈을 뜨니 규리가 깔보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내 머리니까 가능한 거 아니겠어? 내가! 사실상 SMK의 중심이라고! 그러니까 이렇게 팬클럽이 잘 돌아가는 거 아니겠어?"


이젠 광기를 넘어 이성마저 날려버린 계집의 모습이었다. 상대할 기력조차 없어질 즈음, 나는 계집의 행태에 의문점을 발견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여 규리가 제정신일 타이밍을 노렸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왜 나를 끌어들이면서까지 SMK를 유지하려는 거지? 유나를 엿먹이기 위한 밑작업 같은 건가?"


"처음에는 서로 얘기가 맞았어. 유나가 선유파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오빠 대표로 넘어가겠다고 하니까 그 자리를 꿰찰 수 있잖아?"


"그게 다야?"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지만."


현재 행동치곤 제법 고분 한 대처였다. 어찌 됐든 유나가 규리보다 위압적인 부분에서 한 수 위란 걸 알 수 있었다. 잠시 뒤, 규리는 컨테이너 밖으로 검은 완장을 찬 계집들을 불러왔다. 계집들은 종이 서류 뭉치를 규리에게 건네주었다.


"강연 오빠, 유나가 요즘 학교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들어본 거 있어?"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후 규리는 내 앞으로 종이 뭉치를 던져두었다.


"시간 나면 읽어봐. 꽤 재밌을 거야."


나는 시선을 내려 종이 뭉치 겹겹이 삐져나온 글자들을 보았다. 양식을 보아 학교에서 처리한 문서처럼 보였다. 그 후, 들어온 계집 두 명이 내 양측에 붙어 섰다. 나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규리 또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오빠 누나, 장애인 맞지?"


"!"


나는 본능적으로 험악한 인상을 지을 뻔했다. 그러나 사리겠다는 약속을 떠올려 상황을 덤덤히 대처할 수 있었다.


"그게 뭐?"


"아, 우리가 좀 혼내주면 어떻게 될까 싶어서."


'뭐?'


나는 또다시 이성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규리가 지껄인 말에 동요되기 직전, 나는 다시 화를 풀어내 규리를 노려보았다.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사회적 약자까지 손댈 셈이야?"


"어차피 장애인 취급받는 거, 몇 대 맞는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


끝까지 봐주려 했으나, 저 망할 계집이 기어오르는 걸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내가 몸을 움찔거린 순간, 정해지기라도 한 듯 주변 계집들이 내 등을 걷어차 바닥에 넘어트렸다. 계집들은 나를 짓밟아 어떻게든 제압하려 들었다. 규리는 내 반응에 오달진 미소를 보인데 반해, 미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규리를 건드렸다.


"규리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심하잖아!"


"미로 오빠는 좀 가만히 있어! 오빠도 우리한테 빌붙은 공범이잖아."


미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런 미로가 원망스러웠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


"알겠어! 시키는 대로 할 게. 그러니까 얘기로 하자."


규리는 코웃음을 내뱉었다.


"결국 계획에 순순히 따를 거면서 나대긴."


양측에 있던 계집들은 다시 나를 일으켜 벽 옆쪽에 세워두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규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결국 내가 SMK 분위기를 해치고 있단 거잖아. 내가 나오면 마찰 없이 넘어갈 거고."


"대충 자기 주제는 알고 있네. 어디 더 말해 봐."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재밌는 게 뭔지 알아? 나랑 은정이가 짜고친 계획도 결국 내가 SMK에 나오기 위한 거였어. 그걸 조건 삼아 SMK 세력을 뒤흔들 생각이었지."


말을 맺자마자, 규리는 발을 들더니 직접 내 몸을 걷어찼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컨테이너 뒤쪽에 내동댕이쳤다. 계집들은 다시 날 세워 있던 장소로 돌려보냈다. 규리는 아까와 달리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언제까지 나댈 생각이야? 진짜 장애인 하나 조져볼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차분해진 분위기 속에서, 나는 고개를 저어 모자 속 먼지들을 털어냈다.


"이제 너랑 타협해서 새로 계획을 짤 생각이야. 최대한 소리 소문 없이 넘어갈 수 있도록 말이야."


"뭘 그렇게 머릿속에 그려놨길래 자꾸 계획에 집착하는 건데?"


규리는 바닥에 묻은 먼지를 내게 집어던졌다. 나는 따가운 시선을 어떻게든 참아 입을 열었다.


"이번에 레미에서 동아리 축제를 하잖아. 그걸 마지막으로 내가 SMK를 탈퇴하겠다고 선언할게. 그러면 내막도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고, 내쪽 목적도 달성할 수 있으니까."


미로는 당황한 듯 내게 다가오려 했다. 그러나 규리가 앞선 탓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규리는 또다시 내쪽으로 발을 들어 올렸다. 나는 일찌감치 고개를 돌려 몸을 움츠렸다. 다시 차일 것만 같던 순간, 규리는 발을 내려 내쪽으로 가볍게 먼지를 걷어찼다.


"바보 아니야? 그러면 SMK 내부 수습이 안 되잖아."


나는 다시 규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걱정 마. 내가 유나든 은정이든 만나서 잘 얘기할 거니까."


나는 넌지시 미소를 지었다.


"설마, 대표 자리를 못 지킬까 봐 겁먹은 거야?"


"뭐? 누굴 봉으로 알아! 그쪽을 좋아했던 애가 잘도 선유 오빠로 갈아타겠네!"


"알면 됐어. 이번 일을 계기로 유나 영향력이나 줄여봐. 그래야 네 손아귀에 놓을 수 있지 않을까?"


규리는 입에 손을 갖다 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정도 동요에 성공한 낌새였다.


"그러기엔 유나가 너무 센데. 밑에 뿌린 것들이나 보고 말해."


양측 계집들은 내 뒤통수를 밀쳐내 밑으로 시선을 고정케 했다. 이전 계집들의 난동으로 인해 종이 뭉치들이 이리저리 흩어진 상태였다. 대부분 진술서, 징계 장부들로 표제나 부제 주변 이름란에 하유나라는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정확한 내용은 흙먼지들로 인해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규리에게 팔을 풀어달라 요구했으나, 규리는 되레 내게 손찌껌을 했다. 이를 미로가 제지하려 들었다.


"이제 그만해! 선배가 타협할 생각으로 그러는 거잖아."


"치."


규리는 내게 손을 거두었다. 나는 찜찜한 기분으로 미로와 시선을 맞대었다.


잠시 뒤, 규리는 양측에 있던 계집들에게 손 제스처를 취했다. 이내 계집들은 컨테이너 밖으로 이동했다. 미로 또한 제스처 따라 내 뒤쪽으로 이동해 포박된 밧줄을 쥐어 잡았다. 규리는 먼지로 뒤덮인 교복을 터는 중이었다.


"어차피 유나랑 얘기할 거잖아. 알아서 잘 해결해."


"내 제안을 받아들인단 뜻이야?"


"뭘 해도 일단 오빠를 내보내는 게 중요하니까. 약속대로 이번 축제를 마지막으로 SMK, 아니, 레미에서 나오는 걸로 하자."


"뭐?"


나를 비롯해 미로 또한 당황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고 거절 시 레미를 상대로 무슨 짓을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최악의 경우, SMK 계집들이 누나를 건들 수 있었다. 사실상 내게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알겠어."


"선배!"


규리는 또다시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신 SMK에 관여하지 않고 관련된 인연들도 청산하는 게 조건이야. 그러면 우리도 오빠 주변에 손 뗄 거니까. 어때?"


"알겠어. 이제 말할 기력도 없으니까 이거나 풀어줘."


모든 걸 내려놓고 나서야 나는 자유의 몸으로 컨테이너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약속 따라 나는 그대로 호수공원까지 정면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붉게 물든 저녁노을 아래, 나는 또다시 먼지로 인해 따가운 눈을 닦으려 했다. 하늘은 흐릿한 시선에 일렁이다 일몰로 인해 삽시간에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집에 도착해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누나는 나를 보자마자 또다시 구급상자를 가져와 주변을 확인하려 했다. 나는 학교 내 창고 정리를 하다 늦었다는 식으로 상황을 모면했다. 지난번과 달리 육안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방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낸 뒤, 난간으로 들어가 먼지 묻은 교복을 털어냈다. 손목이고 발목이고 저번처럼 붉게 흉 진 부분들로 가득했다. 나는 긴팔과 긴 추리닝 바지로 누나의 시선을 피해야만 했다. 오늘 저녁이 아침에 만들어둔 카레란 것이 작은 위안거리였다.


저녁 식사 후, 누나는 운동복으로 갈아입어 공원 산책에 나섰다. 나는 누나의 인기척을 떨쳐낸 후에야 화장실로 들어가 몸을 씻을 수 있었다. 팔이고 다리고 점점 시퍼렇게 물드는 모습이 이전 컨테이너 때랑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이후 나는 방에 들어가 책상 서랍장을 뒤적였다. 구석진 곳에서 구형 충전 케이블을 꺼낸 뒤 이전 휴대폰에 연결해 보았다. 나름 기대를 품어보았으나, 규리 말 따라 휴대폰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질 않았다. 멀쩡한 거라곤 유심칩 정도였다. 잠시 뒤, 현재 휴대폰으로 문자가 도착했다. 미로에게 온 것이었다.


「선배 잠깐 얘기 가능해요?」


나는 바로 SNS 창으로 이동했다.


「어」


곧바로 작성 중인 상태창이 떴다.


「그동안 숨기고 다녀서 정말 죄송해요... 용서할 필요 없어요...」


「네가 그때 한 말을 염두에 뒀어야 했어. 한 방 제대로 먹었네.」


조금은 풀어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다행히 미로도 조금씩 마음을 놓아 얘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승준의 경우, 병원까지 무사히 도착해 내일 등교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내 안도감에도 미로는 계속 내 눈치를 살피는 듯 보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상황이었다. 미로가 승준을 미끼 삼아 내게 접근한 걸 부정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감정적으로 굴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미로와 어색해진 사이를 풀어가는 데 집중하려 했다.


「학교 가서 평소처럼 지내자. 그래야 규리가 말했던 것처럼 진행할 수 있으니까.」


「선배... 레미 나가겠다는 건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레미에 말하고, 유나한테 말하고, 담임쌤께 말하고 뭐 그렇게 차차 나가려고.」


미로는 답장을 이어가지 못했다. 나는 다시 휴대폰 자판을 두들겼다.


「SMK한테 얘기 좀 두루뭉술하게 잘해줘. 그래야 내쪽에서도 편하니까.」


「네...」


미로를 너무 얕잡아 보았다. SMK에 접촉해 정보원을 맡는다는 것부터 일찌감치 의식해야 할 부분이었다. 나는 미로와의 채팅을 마친 뒤, 하련을 채팅창으로 불러 오늘 자초지종을 얘기해 주었다. 하련은 장난인 줄 알고 내게 맞장구를 치려 했으나, 누나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얘기에 금방 분위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 내용이 레미로 퍼져나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로 또한 SMK에 상황을 알려 작전을 순조롭게 이어나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방송실에 들어가 레미 학년 대표와 미로가 오길 기다렸다. 부원들은 들어올 때마다 내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하나같이 초조한 표정으로 주변 눈치를 보려 했다. 나는 방송실 바깥쪽 창문을 닫은 뒤, 의자에 앉아 부원들을 둘러보았다.


"나미 선배, 이렇게 돼서 정말 죄송해요..."


나는 입술을 헐뜯은 채 고개를 숙였다. 나미 선배는 내게 다가와 어깨를 쓰다듬었다.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SMK를 경시한 레미 모두가 책임질 문제라고 생각해."


그 후, 미로는 내 등에 손을 댄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연 선배는 최대한 마찰 없이 레미를 살리고자 이런 결단을 내린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강연 선배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방법 밖에 없어요."


하련은 이를 탐탁지 않게 보았다. 급기야 나미 선배 옆으로 다가와 미로 쪽을 노려보았다.


"윤미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SMK 걔들이 뭔데 이래라저래라 난리 치냐고!"


"하련 선배, 진정해요. 그렇다고 다연 선배한테 위해를 끼칠 순 없잖아요."


"그런 문제가 아니야!"


하련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나는 말없이 하련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말이 안 되잖아! 강연이 패고, 같은 일원 괴롭히고 심지어 승준이까지 아무 이유 없이 괴롭혔단 말이야! 왜 우리가 이렇게까지 SMK에 승복해야 되는 거야?"


"그거야..."


나는 미로를 말려 상황을 제지했다. 이후 하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SMK를 고발하면 이 무대가 사라질 거라 우려하고 동조한 건 우리였어. 우리는 그저 무대를 같이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좋았던 건데, 그걸 SMK가 독점하니 입장이 뒤틀린 거야.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가 원했던 무대를 고쳐가고 가꾸어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면 결국 넌 떠나는 거잖아!"


"그렇겠지. 과도기라 생각하면 편할 거야. 선생님이 추천해 준 동아리니까 좀 아쉬운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하련을 비롯한 학년 대표 학생들은 큰 대꾸 없이 내 얘기를 들어주었다. 마지막 축제 준비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말 뒤로, 우리는 아침 조례를 준비해야만 했다. 대충 분위기 쇄신에 성공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감정적으로 나설 여유는 없었다. 나는 작전을 지키기 위해 합법적 잣대를 들어 이를 무마해야만 했다.


마지막 축제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새우는 나였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파트는 8부작으로 완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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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4. 합법적 잣대 - 4 20.03.19 35 0 16쪽
24 23. 합법적 잣대 - 3 20.03.16 40 0 11쪽
23 22. 합법적 잣대 - 2 20.03.10 46 0 11쪽
22 21. 합법적 잣대 - 1 20.03.09 43 0 11쪽
21 20. 필연적 접근 - 7 20.03.05 49 0 11쪽
20 19. 필연적 접근 - 6 20.03.04 48 0 12쪽
19 18. 필연적 접근 - 5 20.02.20 50 0 19쪽
18 17. 필연적 접근 - 4 20.02.18 53 0 12쪽
17 16. 필연적 접근 - 3 20.02.16 48 0 13쪽
16 15. 필연적 접근 - 2 20.02.15 48 0 11쪽
15 14. 필연적 접근 - 1 20.02.14 55 0 11쪽
14 13. 망할 계집 - 7 20.02.12 67 2 11쪽
13 12. 망할 계집 - 6 20.02.11 68 3 10쪽
12 11. 망할 계집 - 5 20.02.10 69 3 14쪽
11 10. 망할 계집 - 4 20.02.09 80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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