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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붉은머리 에아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4.05.08 15:28
최근연재일 :
2024.06.20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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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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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0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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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마지막 열매 (3)

DUMMY

현재 제 땅을 다스리고 있는 여타 씨족들과 달리 붉은머리 씨족은 꽤 오랜 시간 동안 홀 다르를 지켜왔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업적임이 분명한데 300년 전, 그리카의 마지막 대족장이 죽고 난 이후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곳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홀 다르의 땅을 넘보는 무리도 있었고 개중에는 서로 손을 맺어 쳐들어오는 경우도 적잖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 누구도 붉은머리의 땅을 빼앗지 못하였다.

어째서 그럴 수 있느냐는 물음을 누군가 던진다면 다들 입을 모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붉은머리 전사들의 잔학한 성정 때문이겠지. 그들은 일상이나 전장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던데. 오죽하면 서로를 잡아먹고 산다는 말까지 있더군. 하긴, 그러니까 머리가 붉은 거겠지."


하지만 이는 큰 오해였다.

붉은머리들의 흉포함은 오로지 전장에서만 발휘되는 것이었다.

만약 이 이야기를 붉은머리 씨족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한 번 크게 웃어준 다음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자리를 뜰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겠지. 두렵게 보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쓸데없는 도전자들도 사라지는 셈이니.

전 족장, 붉은머리 우글라는 이러한 '오해'를 아낌없이 사용하였다.

그는 아버지보다 위대한 전사는 없다는 말을 정면에서 반박한 인물이었다.

생전 그의 아버지도 들기 힘들어하던 거대한 양날 도끼, 블라스카를 한 손으로 어렵잖게 드는 모습은 아군에게도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러니 적군이라면 오죽하겠는가.

광소를 터뜨리며 도끼를 휘둘러 전장을 휩쓰는 그 모습은 정말이지, 키놀에게 총애를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굉장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영광 속에 바래진 추억들에 지나지 않았다.

우글라는 노쇠하였고 블라스카의 날에는 주인 못지않게 주름처럼 생긴 흠집이 잔뜩 잡혀 있었다.

아직 귀에는 승리의 찬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고 그의 눈은 피와 술이 흐르는 전장을 담고 있었지만 그 또한 다 옛일이었다.

이제 우글라는 제 몸 건사하기 힘들 정도로 늙어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면 이전과 달리 꽤 집중을 요할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스러져간 전사들이여. 당신들이 그토록 칭송하던 자가 이렇게 노쇠한 걸 본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텐가.'


우글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것은 회한이 담긴 미소도 아니요, 죽음이라는 늪에 빠지기 일보 직전에서야 보이는 씁쓸한 미소도 아니었다.

제 뜻을 마음껏 펼치며 살아간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상쾌한 웃음이었다.

우글라는 자리에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참 이상한 일이기도 하지. 그동안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귀찮았는데 어째서 지금은 이토록이나 힘이 넘치는 걸까.

우글라는 제 팔뚝을 바라보았다. 청년 시절에 비하면 메마른 장작을 연상시킬 정도로 마르고 힘없는 모습.

하지만 팔뚝에 새겨진 훈장과도 같은 흉터를 보니 전장에 섰던 자신의 추억이 떠오르면서 절로 힘이 샘솟았다.

주먹을 쥐니 굵은 핏줄이 서서히 솟아오르는 게 보였다.

우글라는 이보다 만족할 수 없다는 미소를 지으며 블라스카를 쓰다듬었다.


"이제 곧 머잖았다, 내 평생의 전우여. 그토록 갈망하던 피를 마음껏 마시게 해주마."


한참 동안 도끼를 바라보던 우글라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노인이 혼자 있기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방. 방에는 별다른 장식이나 값비싼 가구가 놓여 있지 않았다.

우글라가 고집스럽게 주장한 결과 침대를 제외한 눈에 거슬리는 것들은 다 치워버렸다.

그럼에도 우글라는 이런 방을 홀로 차지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 죽어가는 노인을 재우기에는 과분한 방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인 창고에 누워 있는 게 더 마음이 편할 듯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 거대한 방이 마음에 들었다. 씨족원 전부를 수용하려면 이보다 나은 곳이 없었기에.

우글라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 씨족원 모두가 모이지 않았는지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마을의 유지들도 찾아온 탓에 더 그러한 감이 있었다.

우글라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며 우묵하니 깊게 팬 눈가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있는 자들은 엄숙한 얼굴로 분위기를 잡고 있었지만 어린아이들은 졸린 눈가를 비비고 있었다.

졸음에 겨워 하품을 하는 모습. 그나마 의젓한 아이들은 가까스로 참거나 고개를 돌려 가리는 시늉이라도 하였다.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에 우글라는 더한 웃음을 지었다.

그래. 저 때는 잠을 잔다는 행위가 두렵지 않을 테지. 그다음 날 해를 보며 일어난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니까.

하지만 그날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반드시 온다.

잠을 잔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잠을 떨쳐내고 잠자리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알 때가 올 것이야.

그러나 우글라는 제 생각을 귀여운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삶의 비밀을 말해줘 봤자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에.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우글라는 언제고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미소를 보이기만 하였다.


"다 왔더냐?"


우글라가 물었다.


"아직 막내와 장녀가 오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답했다. 그는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 덩치가 가장 컸다.

빛바랜 붉은 머리칼과는 다르게 한없이 갈색 눈동자. 꽉 다문 입술과 목젖까지 길게 기른 풍성한 턱수염. 그리고 이마에서 입술까지 길게 새겨져 있는 흉터.

우글라의 아들인 브레고아였다.

두 사람은 부자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닮은 구석이 없었다.

단지 늙고 젊음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자 모두 한 덩치 하다는 걸 제외하면 모든 것이 정반대였던 것이다.

우글라는 오랜 시간 동안 홀 다르를 다스려온 노련하고 지혜로운 족장이었다.

때로 다혈질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계산된 행동이었다. 속은 여유롭고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브레고아는 아니었다. 냉철하고 차분할 것 같은 겉모습과 달리 속은 부글부글 끓는 화산과 같았다.

우글라는 작게 혀를 찼다.

그의 눈에 보기에 브레고아는 아직 애송이 족장일 뿐이었다.

전장도 많이 겪어 보지 못했거니와 지도자의 애환을 이해하기에는 경험도 적었다.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르지.

현 그리카에 있는 족장들 모두를, 아니 전대 족장까지 포함한다 하여도 우글라보다 더한 업적을 지닌 이는 거의 없으니까.


'한심한 놈. 아비 앞에 있을 때는 좀 더 부드러운 얼굴을 지어도 되거늘.'


우글라는 융통성 없는 아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잔소리를 퍼붓고 싶진 않았다.

우글라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자꾸나."

"쳇. 진짜 구제불능이네. 누구 자식 아니랄까 봐."


스바르는 작게 투덜거리며 프라를 쳐다봤다.

꽤 노골적인 시선이었지만 프라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한심하던지 스바르는 작게 비웃었다.

그때 곁에 서 있던 사람이 스바르의 어깨를 툭 쳤다. 친형이자 장남인 비요른이었다.


"말조심하라고 내가 아까 그랬을 텐데. 내 말이 우습게 들렸나 보지?"


비요른의 나지막하지만 사나운 어조에 스바르는 몸을 움츠렸다. 아까 낮에 아스테리아와 말싸움을 벌인 직후, 스바르는 비요른에게 크게 혼났다.

아무리 배다른 누나라 하여도 그녀 또한 우리와 같은 씨족이란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고 말이다.

스바르는 속으로 여전히 불만을 품고 있었지만 적어도 비요른 앞에서는 수긍하는 자세를 보였다.

비요른은 그런 철없는 동생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덧붙였다.


"그리고 이 방에는 장화사도 있다. 거동에 주의를 해야 해."


스바르는 숨을 들이켜더니 허리를 꼿꼿이 폈다.

장화사. 그것은 영정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초상화가를 부르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이 장화사라는 자들을 온전히 표현하지는 않는다.

직업적 특성상 장화사는 언제나 죽음과 함께 있다.

분명 이들의 존재 의의는 숭고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산 자들은 가능하면 죽음과 멀리하고 싶은 법이다.

오죽하면 장화사가 죽음을 몰고 온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일까.

결과와 원인이 뒤바뀐 것 같지만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어쨌건 상기의 이유로 사람들은 장화사 앞에서만큼은 거동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 앞에서 악행을 보였다간 어느 날, 소리도 없이 객사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화사들도 가급적이면 다른 이들과 말을 섞지 않는다.

자신들이 남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존재라는 걸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서 앉는 것이겠지.

물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스바르는 가급적 장화사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옆으로 슬금슬금 이동했다. 그러나 비요른에게 가로막히자 울상을 지으며 가만히 섰다.

그때 문이 열리며 마지막 두 사람이 들어왔다.

에아론과 아스테리아였다.

에아론은 온 가족이 모인 걸 보더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서 들어가셔요."


같이 온 보모가 두 사람의 등을 살짝 밀고는 바로 문을 닫았다.

에아론와 아스테리아는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갔다. 프라는 두 자식에게 눈길도 던지지 않았다.

에아론은 앞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생각보다 쾌활하고 가벼운 모습이었다.

분명 편찮으시다고 들었었는데. 혹시 다 나으신 걸까? 그렇다면 정말로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방에 모인 가족들의 반응은 기쁨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어 보였다. 에아론은 주눅이 든 얼굴로 아스테리아 앞에 섰다.

아스테리아는 동생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올 사람은 전부 왔다. 우글라는 무릎에 손등이 보이게 올려놓고는 사람들을 죽 둘러보았다.


"늦은 시간에 불러 미안하다. 나도 원래는 동이 틀 때 부르려고 했지. 하지만 키놀께서 그 이상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려 하시는군. 그분은 어서 빨리 내 용기가 어느 정도인지 보고 싶으신 모양이야."


몇몇 사람들이 헛바람을 삼켰다.

금방이라도 뭐라 하는 것처럼 입술을 오물거렸지만 우글라의 상냥하면서도 단호한 눈빛에 일단 침묵을 유지했다.


"이곳, 홀 다르에는 이제껏 수많은 붉은머리들이 관리하였지. 하지만 과거에도 그러하였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생각지는 말거라. 선조님들이 오래도록 이 땅을 관리하실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전사들이 대신 피를 흘려준 덕분이니. 그러니 자만하지 말고 오만하지 말며 교만하지 말라. 언제나 눈을 부릅 뜨고 다른 놈들이 넘보지 않는지 지켜보란 소리야."

"예. 종부님."

"나의 누이. 이리로 오시게."


고모할머니가 눈가를 훔치며 우글라에게 다가갔다. 우글라는 제 손등 못지않게 쭈글쭈글한 누이의 손을 어루만졌다.

어렸을 적, 같이 이 땅을 제 것 삼아 노닐던 그때의 추억이 둘 사이에서 넘나들고 있었다.

우글라는 고모할머니에게 뭐라 말했지만 그건 다른 이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 지금껏 다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어딘가 스윽, 스윽하고 문지르는 소리에 에아론은 고개를 돌렸다.

지금껏 목석처럼 가만히 있던 장화사가 어느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장화사는 목탄으로 종이를 검게 칠하고는 손가락으로 빠르게 문질렀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던 종이에 서서히 사람의 얼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장화가 시작된 것이다.

에아론은 장화사가 그림을 그리는 걸 멈추게 하고 싶었다.

저걸 그리면 그릴수록 할아버지의 생기 또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았기에 그저 주먹을 꾹 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글라는 씨족원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하고픈 말을 남겼다. 마을의 유지들은 우글라의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기에 구석에 모여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족장인 브레고아 차례가 왔다. 브레고아는 허리를 숙여 아버지의 입에 귀를 대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우글라는 브레고아에게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브레고아는 곧장 허리를 펴고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첫째.. 아니. 둘째 며늘아기. 네가 먼저 오너라."


에키아는 당당한 걸음을 선보이며 우글라에게 다가섰다.

우글라는 앞서 보였던 것처럼 속삭이듯 에키아에게 말을 걸었다. 에키아는 아무 감정 없이 '네, 네.'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첫째 며늘아기야."


에키아가 물러나자 우글라는 곧바로 프라를 불렀다. 프라는 긴장한 얼굴로 우글라에게 다가가더니 무릎을 꿇었다.

우글라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프라의 머리칼을 매만져 주었다. 향유를 바르지 않은 머리칼은 왠지 푸석해 보였다.

그때 우글라가 고개를 숙이더니 프라의 귀에 자그맣게 속삭였다.

얼마 안 가 그녀의 눈가가 붉어지더니 눈물이 불을 타고 내려갔다.

사람들은 다들 어리둥절해하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긴 이야기가 끝나고 프라가 물러났다. 프라는 아직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였는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어머니의 모습에 에아론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다음으로는 보다 어린 사람들 차례였다.

머리를 붉게 물들인 건장한 전사 몇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에아론에게 있어 사촌이었지만 평상시에 얘기를 거의 나눈 적이 없어 남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아스테리아 차례가 왔다. 아스테리아는 우글라를 꼭 안아주었다. 우글라는 짧게 웃더니 화답으로 장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장남인 비요른은 허리를 곧게 펴더니 주먹으로 제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한때 위대한 전사였던 할아버지를 향한 경의의 표시였다. 우글라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기만 하였다.

스바르는 어색하게 무릎을 꿇고 우글라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스바르가 하는 행동을 말없이 보던 우글라는 불쑥 입을 열었다.


"네 거칠 것 없는 당돌함은 필시 우리 붉은머리들에게 귀한 자산이 될 테지. 그러나 그 칼이 혈육을 향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배는 다르다 할지라도 아스테리아는 네 누이다. 앞으로 서로 싸우지 말고 잘 지내야 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스바르의 얼굴이 핏덩이처럼 붉어졌다.

우글라는 에아론을 쳐다봤다. 이제 에아론 차례였다.


"어서 가 봐."


아스테리아가 에아론의 귓가에 속삭였다. 에아론은 쭈뼛거리며 우글라 앞으로 다가섰다. 에아론은 자신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문득 주머니를 뒤졌다.


"저, 할아버지. 이거.."


주머니 안에 있던 건 마지막으로 남은 열매였다. 에아론은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드리려고 잔뜩 따갔는데 호수에 빠지면서 다 흘러가버렸어요."


에아론은 두 손으로 열매를 내밀었다. 그 열매는 하도 쪼그라들어서 먹을 게 별로 없어 보였다.

그때였다. 갑자기 우글라는 목젖을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살면서 이토록이나 웃었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웃음을 멈춘 우글라는 열매를 가져가고는 한 입에 바로 넣었다. 톡, 하고 터지는 소리가 살짝 들렸다.

우글라는 눈을 감고 열매를 씹었다. 씨앗이 오도독 씹히는 소리가 났다.

맛을 음미하던 우글라는 이내 이보다 흡족할 수 없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달다. 이렇게 단 걸 먹어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에아론은 밝게 웃었다. 안도감이 들더니 그간 들었던 긴장이 한순간에 빠지는 것 같았다.

그때 우글라가 에아론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에아론은 놀랐다. 할아버지에게서 아직도 이런 힘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우글라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한참이나 에아론을 바라보았다.

곧 그의 입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전사는 한평생 무기를 벼리며 살아가지. 하지만 이 나이가 되고서야 벼려야 할 것이 또 하나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에아론은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로 바라보았다. 그 순수한 눈동자 안에 자리한 홍채는 마치 꽃이 만개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우글라는 에아론의 손등에 입을 맞춘 뒤 자그맣게 속삭였다.


"너는 부디 꽃을 벼리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 에아론."


에아론은 고개를 갸웃했다. 꽃을 벼린다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남긴 말이었기에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기로 하였다.

마침내 온 가족에게 하고픈 말을 남긴 우글라는 이보다 후련할 수가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 그렸는가?"


우글라가 장화사에게 물었다. 장화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 뒤 자리에 일어났다. 장화사는 우글라 앞에 다가가 초상화를 내밀었다.

가볍게 훑어본 우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그렸군. 브레고아."


브레고아는 단검을 뽑아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우글라의 검지를 살짝 찔렀다.

우글라는 검지에 맺힌 피로 초상화의 입술과 눈동자를 칠했다. 장화사는 깊이 목례하고는 그림을 가져가 옆에 있는 브레고아에게 건네주었다.

브레고아는 초상화를 훑어보았다. 당당하고 패기 있는 모습일 거라 짐작했다. 아니었다.

초상화에는 한없는 온화함을 품고 있는 노인이 그려져 있었다. 브레고아는 미간을 좁혔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글라는 창밖을 보았다. 바깥에는 새벽녘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찬바람이 창가를 때려댔다.

자리에 일어난 우글라는 벽에 걸린 도끼를 들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병약해진 뒤로는 한 번도 들어 올리지 못했던 그 도끼를 지금 아무렇지 않게 들어 올린 것이다.

우글라는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그저 당당히 방을 가로질러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뒤를 따라간 이는 오직 브레고아 뿐이었다.

전사의 용맹을 확인하는 건 키놀과 입회인 한 명이면 족하다.

이제 브레고아는 아버지가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예정이다.

며칠 전에 곰의 서식지가 어디인지 알아냈으니 곧장 그리로 향하면 될 터였다.

가족들은 뒤늦게 성 밖으로 그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따라가는 건 성 정문까지였다.

에아론은 브레고아와 같이 걸어가는 우글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곧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당찬 모습이었다. 에아론의 두 눈은 그런 우글라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동이 텄다. 산맥 너머로 피어오른 해가 정수리 위로 올라올 즈음이었다.

브레고아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그쯤이었다. 에아론은 창가에 서서 성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


기대와 달리 아버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피 묻은 양날 도끼 한 자루만이 손에 들려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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