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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붉은머리 에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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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4.05.08 15:28
최근연재일 :
2024.06.20 22:40
연재수 :
3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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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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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글자수 :
251,832

작성
24.05.0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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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마지막 열매 (1)

DUMMY

"명심해. 나는 네 보모가 아냐."


파편화된 햇살이 숲길을 물들이고 있는 어느 오후의 날.

스바르는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막냇동생을 보며 그리 말했다.


"내가 할 짓이 없어서 널 보호해 주는 게 아니라고. 난 이제 곧 성인될 몸이야. 너랑 다르게 머리를 붉게 물들이는 날이 머잖았다고. 알아?"

"몰라."


막냇동생, 에아론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누구는 저랑 같이 오고 싶어 했나, 뭐. 나도 스바르 형이랑 같이 오고 싶지 않았어.

에아론은 저 앞에 걸어가는 스바르를 째려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둘째 형인 스바르는 에아론보다 세 살 더 많았다. 스바르는 그 사실이 큰 자랑거리라도 되는 건지 틈만 나면 에아론 앞에서 어른인 체 굴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두 소년의 체격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차이가 났기에.

더군다나 스바르의 턱에는 어른의 상징인 수염이 조금씩 나기 시작했지만 에아론은 아니었다. 손등으로 제 턱을 쓸어만지면 맨질맨질한 감촉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에아론이 보기에는 스바르나 자신이나 똑같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둘 다 미성년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데 왜 저리 으스대는 거람.


'치. 곧 성인이 되기는 무슨. 누가 들으면 자기가 성인식 하는 줄 알겠네.'


스바르는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큰형에게 잠시 빌린 그 검은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덕에 예리한 빛을 띠고 있었다.

특히 햇살을 잔뜩 머금은 검신은 보석 가루를 뿌린 양 찬란한 빛을 내고 있었다.

스바르는 그 검이 마치 자신의 것인양 굴었다.


"이거 봐라. 너였다면 감히 빌리지도 못했을 테지. 왜냐면 넌 아직 핏덩이니까."


에아론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허리춤에는 날이 다 빠진 단검이 걸려 있었다. 스바르가 말한 대로 어린 그에겐 아직 진검은 일렀다.

에아론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무기에 딱히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은 자신에게도 진검이 있기를 바랐다.


"형이 하도 검을 달라고 보채니까 큰형이 귀찮아서 준 거야."

"그래, 그래. 그런 거라고 해줄게. 어른인 내가 이해해 줄게."

"어른은 무슨. 형도 나랑 같은 핏덩이면서."

"너야말로 핏덩이지."

"난 핏덩이가 아냐."

"응, 맞아. 넌 핏덩이야."


에아론은 저 핏덩이라는 말이 정말 싫었다. 아무리 제 몸을 살펴봐도 피가 묻어 있지 않은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오히려 핏덩이는 스바르가 아닐까 싶다. 감정적으로 격해지면, 스바르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발갛게 달아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아론은 스바르 앞에서 이 점을 지적하지는 않기로 했다.

스바르는 큰형, 큰누나와 달리 다혈질적인 성격이었다. 자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면 하루종일 짜증을 내었다.

에아론은 잘난 체 듣는 것도 힘겨운 판에 짜증까지 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찬바람이 불었다. 이미 겨울을 지나 봄이 찾아왔지만 숲 곳곳에 고여 있는 한기는 영 물러날 줄을 몰랐다.

중부였다면 진작 코를 간질이는 꽃 향기가 만연히 퍼져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타지에서 온 사람들은 그리카는 항상 추운 줄로만 알고 있다.

고집스런 노인 마냥 녹지 않고 그 자리를 고집하는, 산꼭대기에 날카롭게 쌓인 눈더미. 그리고 잊을 만하면 내리는 눈과 쉬지 않고 부는 칼바람.

그러니 외지인들이 그리카는 언제나 혹독한 겨울만 존재하노라고 착각하는 것도 당연할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남부의 뜨거운 향취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중부의 보드라운 산들바람 정도는 이곳 그리카에도 찾아온다.

그리하여 덮인 눈 아래로 고개를 빼꼼 내미는 새싹을 보면 '결국 그리카에도 봄과 여름이 있구나.'라는 귀한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에아론은 새싹들을 구경하는 걸 무척 좋아했다.

손가락 사이로 새싹의 여린 잎을 굴리고 있노라면 이 작디작은 생명체가 어찌 기나긴 혹한을 견딜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이처럼 남들에게는 시시하다고 보이는 것들이 에아론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올 때가 많았다.

그러니 이 마음씨 좋은 소년이 병든 할아버지를 위하여 산수유 열매를 따러 가는 것도 일견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두 소년이 숲에 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상냥한 할아버지가 하루라도 일찍 기운을 차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짧은 다리를 열심히 놀리고 있던 것이다.

물론 스바르는 아니었다. 스바르는 단지 에아론이 열매를 찾는 동안 옆에서 보호해 주기 위해서 온 것뿐이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인의 명령에 의해서.


"아, 그냥 빨리 찾고 가자. 나는 이런 시시한 걸 하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니까. 어서 돌아가서 비요른 형이랑 같이 수련하고 싶다고."


스바르가 따분한 얼굴로 말했다.

에아론은 그런 스바르가 조금 우스워 보였다. 아무리 봐도 큰형은 스바르를 귀찮게 여기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바르가 에아론을 귀찮아하는 것처럼.

하긴, 에아론은 자신이 비요른이었어도 귀찮았을 것이다. 틈만 나면 졸졸 따라다니면서 이거 하자, 저거 하자 하는데 누가 귀찮아하지 않을까.

물론 이 속마음 또한 에아론은 스바르에게 말하지 않았다. 자신을 버리고 성으로 먼저 돌아갈 게 분명했기에.

길을 따라 걸어가니 얼어붙은 호수가 나왔다. 다만 한창 추웠던 겨울에 비하면 꽝꽝 얼어 있지는 않았다.

호수 중간중간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마을에 사는 낚시꾼들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뚫어 놓은 듯했다.

에아론은 구멍 근처로 다가갔다. 혹여 물고기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렇게 한창 구경하고 있는데 문득 스바르가 보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스바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형?"

"난 여기 있을게. 넌 건너갔다 와."

"아버지가 같이 가라고 했잖아."

"같이 왔잖아?"

"건너편까지 가줘야지."

"귀찮아. 너 혼자 갔다 와. 여기까지 같이 와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지."


에아론은 뚱한 얼굴로 스바르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바르는 눈을 감은 채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아무래도 낮잠을 잘 생각인 듯했다.


"내가 아까 뭐랬지, 에아론? 맞았어. 난 네 보모가 아냐. 네가 따러가겠다고 한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해."

"하지만 할아버지를 위한 거잖아. 형은 할아버지가 싫어?"

"좋고 나쁘고는 상관 없어. 어차피 할아버지는 곧 죽으니까. 그러니 산수유니 뭐니 그런 거 구해봤자 다 소용없는 일이야."

"왜 그런 무서운 말을 하는 거야. 그런 말 하지 마. 할아버지는 안 죽어."

"야, 핏덩이. 키놀께서 점지하신 죽음은 누구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어."


키놀. 그것은 그리카인들이 믿는 북부의 신이었다.

에아론이 왁, 하고 소리 질렀다.


"할아버지 안 죽는다고!"

"그래. 그래. 하지만 남들 앞에서 그렇게 떼 쓰지는 마. 되게 모자라 보이거든."


그리고 스바르는 더 이상 말을 걸지 말라는 것처럼 두 눈을 감았다.

에아론은 끝내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건너편 숲으로 홀로 가는 건 무서웠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간다니. 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건 '전사'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에아론은 걸음에 주의하며 천천히 호수를 건너갔다. 겨우내 얼어붙은 호수는 봄이 왔음에도 아직 녹을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은 잠시 뿐, 건너편 뭍에 발을 딛자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응. 별 거 아니네, 뭐."


에아론은 숲으로 들어갔다. 푸른 잎들로 덮여 있는 덤불들이 보였다. 덤불들 사이사이에는 산수유나무가 자리하고 있었다. 나무 끝에는 아직 익지 않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혀 있었다.

혹시 아직 다 익지 않은 걸까? 에아론은 걱정 어린 얼굴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잘 찾아보니 익은 것도 있었다. 처녀의 입술처럼 붉은 게 보기만 해도 탐스러워 보였다.

에아론은 조막만 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열매 한 알 한 알을 정성스레 땄다.

딴 열매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자그마한 가방에 넣었다. 가방은 다람쥐 가죽으로 만들었다. 그 때문인지 에아론은 자신이 마치 다람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면 됐으려나.'


가방이 두둑해지니 마음도 풍요로워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흡족한 웃음을 흘리던 그때였다.

고요하던 숲에 기이한 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메마른 나무를 때리면서 멀리멀리 번져갔다.

에아론은 자리에 얼어붙었다.

사실, 늑대가 우는 건 그렇게 특별하게 볼 일은 아니었다.

숲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말에 의하면 번식기 시기일 때는 하루에도 두세 번 정도는 들을 수 있노라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아론은 사색이 된 얼굴로 물러났다.

스바르가 곁에 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혼자였다.

숲에 홀로 있자니 머릿속에 온갖 안 좋은 상상이 다 떠올랐다.


"스바르 형!"


에아론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날 놔두고 떠난 걸까?

여기서 스바르가 있는 곳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목소리가 닿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에아론은 몸을 달달 떨며 숲에서 나갔다. 상상 속의 괴물이 따라올까 싶어 연신 뒤돌아봤다.

곧 아까 건넜던 널따란 호수가 나타났다.

참 이상하지.

아까는 아무렇지 않게 건넜던 호수가 왜 지금은 이다지도 넓어 보이는지.


"스바르 형!"


평소에는 그렇게나 얄밉던 사람이었건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보고 싶었다.

에아론은 애타는 얼굴을 한 채 호수를 건넜다. 호수 밑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렇게 뚫려 있는 낚시 구멍 근처를 지나가던 순간, 발이 주욱 미끄러지고 말았다.

체격이 작은 소년이 구멍 밑으로 빠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차가운 물이 입안에 들어차자 숨이 턱 막혔다.

에아론은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휘젓고는 얼어붙은 호수 표면에 두 팔을 올렸다.


"사, 살려..!"


아직도 스바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에아론을 놔두고 자기 먼저 성으로 돌아간 듯싶었다.

에아론은 물에서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사지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선홍색이던 에아론의 입술이 어느새 파랗게 변했다.

그때였다.


"뭐야!"


스바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에아론을 쳐다봤다. 심심함에 못 이겨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이제야 나타난 것이었다.

에아론이 있는 곳으로 뛰어온 스바르는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스바르는 에아론의 두 손을 붙잡고 끌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힘이 부족하여 다시 놓치고 말았다.

심히 당황하던 스바르의 눈에 문득 자신이 갖고 있는 검이 보였다. 스바르는 검집이 꽂힌 검을 막대기 삼아 내밀었다.

에아론은 검을 잡았지만 황당하게도 검집만 쑥 빠지게 되었다. 놓친 검집은 구멍 밑으로 퐁당 빠졌다.


"이 멍청한 게! 꽉 잡았어야지!"


스바르는 와락 얼굴을 구기더니 입고 있는 옷을 벗더니 그걸로 검신을 친친 감았다.


"이걸 잡아!"


이번에는 검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스바르는 이를 악물고 상체를 뒤로 반쯤 젖혔다.

험난한 과정 끝에 마침내 에아론은 간신히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에아론은 살갗을 파고드는 한기에 몸을 미친 듯이 떨었다.

스바르는 하는 수없이 그런 에아론을 업고 달렸다.


"아, 진짜. 너 짜증난다. 괜히 따라왔어."


스바르도 에아론처럼 달달 떨었다. 옷을 벗은 것도 모자라 물에 젖은 동생을 업고 있자니 차가운 물이 몸에 스며들었다.

당장 내팽개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숲을 빠져나오니 익숙한 풍광이 보였다.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민가와 건물들 너머로 흑석으로 지은 성이 엿보였다.

스바르는 마을을 가로질러 성까지 뛰어갈 자신이 없었다. 벌써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탓이었다.


"이봐요, 거기 아저씨! 얘 좀 데리고 성으로 가줘요!"


마침 소 젖을 짜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퉁명스레 고개를 돌린 사육사는 스바르와 에아론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등에 업혀 있는 에아론이 거의 얼어 죽은 것처럼 보였다.


"어이구야. 난리 났구만."


사육사는 에아론을 업고는 서둘러 성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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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추락 (1) 24.05.27 19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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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변화의 꼬리 (2) +1 24.05.24 13 2 17쪽
15 변화의 꼬리 (1) +1 24.05.23 17 2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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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정찰꾼 스뇰 (5) +1 24.05.21 16 4 16쪽
12 정찰꾼 스뇰 (4) +1 24.05.20 21 3 20쪽
11 정찰꾼 스뇰 (3) +1 24.05.19 18 3 13쪽
10 아픔 +1 24.05.17 19 5 19쪽
9 정찰꾼 스뇰 (2) +1 24.05.16 18 5 16쪽
8 정찰꾼 스뇰 (1) +1 24.05.15 24 4 14쪽
7 다짐 24.05.14 21 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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