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붉은머리 에아론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공모전참가작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4.05.08 15:28
최근연재일 :
2024.06.20 22:40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751
추천수 :
133
글자수 :
251,832

작성
24.05.20 20:30
조회
20
추천
3
글자
20쪽

정찰꾼 스뇰 (4)

DUMMY

"삼촌?"


에아론은 놀란 눈을 하고서 몸을 일으켰다. 설마 마을 들판에서 마주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스뇰은 언제나 그 허름한 오두막에서만 지낼 줄 알았는데.


"여, 여기엔 웬일이세요?"

"웬일은 무슨, 난 뭐 여기에 오면 안 된다는 거냐?"

"아뇨. 그게 아니라 숲에서 안 나오시는 줄 알았어요."

"난 사람이지, 짐승이 아냐. 먹을 거 구하러 마을에 내려올 때도 있다고. 아무튼 간에, 자."


스뇰은 괜히 얼굴을 찌푸리고서 에아론에게 손을 뻗었다. 에아론은 얼결에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모른 척하고 지나가려 했는데 네가 하는 꼴이 너무 답답해서 오고야 말았다. 이 빌어먹을 놈아. 네가 한심한 녀석이라는 건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한심할 줄은 몰랐다."

"제가 뭘 어쨌다고요?"

"어쩌기는 아이고. 야, 이 녀석이 네 애인이라도 되는 거냐? 아니면 네가 짝사랑하고 있는 상대라도 된다는 거냐? 왜 바닥에 확 내동댕이치지 않느냔 말이다. 쥐뿔도 없는 녀석인데."


주변 사람들은 스뇰로부터 슬금슬금 물러났다. 스뇰이 보이는 우악스러운 모습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냄새가 영 곱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와 가까이 있는 스바르도 별반 차이는 없었기에 당연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스뇰이 자신을 가리키며 모욕적인 말을 내뱉자 기분이 확 나빠졌다.


"아저씨는 누군데 왜 여기 있어요. 동냥질할 거면 여기가 아니라 다른 데나 알아보세요."

"입 다물어. 네 아가리에서 나는 잡내가 어지간히도 고약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니까."


스바르의 얼굴이 벌게졌다. 당장 이 눈앞에 보이는 털북숭이 남자를 확 무너뜨리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남자의 체격이 생각보다 꽤 된다는 걸 알자 뭔가 망설여졌다.

그 사이, 프라가 빠르게 에아론에게로 다가왔다. 멀리서 봤을 때는 누구인지 몰랐지만 가까이 오자 그제야 스뇰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프라는 에아론을 끌어와 자신의 뒤로 숨겼다. 스뇰은 미간을 찌푸린 채 프라를 쳐다봤다.

보모치고는 젊은 것 같고. 어디서 보긴 봤는데 누구더라.

아.


"첫째 형수였소? 참으로 오랜만입디다. 안 본 사이에 주름이 많이 늘었군요."

"여긴 뭣하러 오셨소."

"뭣하러 오기는요. 누구 말마따나 음식 동냥질이나 하러 왔지요."

"볼일 다 봤으면 어서 가시게."

"저도 그러고 싶은데 말입니다. 저 꼬맹이가 눈에 밟혀서 영 발걸음이 안 움직인다는 거 아니요. 한심해도 너무 한심해서 마냥 볼 수가 있어야지요. 한데 이제 보니 저 녀석, 형수 아들이었나 봅디다? 그럼 뭐 겸사겸사 잘 됐지요. 사람 구실 좀 할 수 있게 잠깐만 빌려 가도 되겠지요?"


그리고 스뇰은 프라의 허락도 받지 않고 에아론에게 손짓했다. 프라는 경계심에 찬 얼굴로 에아론을 더욱 제 뒤에 숨겼다.

스뇰은 참 답답한 어미일세, 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때 에아론은 프라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괜찮아요, 어머니."

"저런 불한당 같은 놈에게 배워봤자 남는 게 없다. 어미 말 들으렴."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프라는 마뜩잖았다. 스뇰의 덜떨어진 인간성을 생각해 본다면 에아론을 저 자의 손에 맡기는 건 원치 않았다.

그러나 스뇰 눈앞에서 대놓고 거절을 하는 것도 예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저래 보여도 어쨌든 현 족장의 동생이었다.

정찰꾼 노릇을 한답시고 마음대로 숲에 들어가 틀어박힐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이에 대해 다른 이들이 함부로 막을 수 없던 것도 다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프라는 에아론을 안는 척하며 귀에 속삭였다.


"무리하지는 말거라."


에아론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아론이 제 옆으로 다가오자, 스뇰은 에아론의 어깨에 두터운 팔을 둘렀다.


"야, 덩치 큰 꼬맹이. 너도 이리로 와."


스바르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난데없이 나타나서는 강제로 승부를 펼치라 하는데 누가 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스뇰은 씩 웃더니 그런 스바르를 도발했다.


"왜. 질까 봐 무서운가 보지? 네 아비가 불쌍하구나. 겁쟁이 아들을 둬서 말이야."


스바르는 와락 얼굴을 구기더니 스뇰에게 삿대질을 했다.


"야만인! 나랑 붙어! 당장!"

"자, 시작!"


스뇰이 에아론의 등을 퍽 치고는 뒤로 물러났다. 스바르는 스뇰에게 당장이라도 욕을 하려다가 멈췄다. 에아론이 조심스러우면서도 확실하게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바르는 이 상황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에아론을 확 거꾸러뜨리기로 하였다.

이 녀석을 확실하게 억눌러야 저 냄새 나고 더러운 인간의 기분도 망가뜨릴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스바르는 어설프게 뻗어오는 에아론의 손목을 탁 친 뒤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곧바로 목을 조르려 든 스바르는, 그러나 스뇰의 우렁찬 외침에 흠칫 놀랐다.


"뭐 하냐, 등신아! 마구 비틀어야지!"


스뇰은 푸닥거리는 시늉을 하며 열성적으로 외쳤다. 에아론은 망설였다. 에아론은 그동안 상대에게 한번 잡히면 얌전히 당하고만 있었다. 할퀴거나 꼬집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 이상의 저항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에아론의 심리를 읽은 건지, 스뇰은 목청껏 말했다.


"시부럴, 몸끼리 부딪히다 보면 상처도 날 수 있고 그런 거지, 그게 무섭다고 안 하면 되냐? 빨리해!"


에아론은 이를 악물고 몸을 뒤흔들었다. 처음으로 에아론이 반항을 해서 그런지 스바르는 약간 당황했다. 잠시 틈이 보이자 에아론은 앞으로 몸을 굴러 불리한 위치에서 빠져나왔다.

스뇰은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그래! 그렇게 하라고!"


스바르가 몇 번이고 조르기를 시도하려고 할 때마다 에아론은 스뇰이 알려준 방식으로 계속 벗어났다.

그게 반복되자 스바르는 점차 짜증이 났다. 별것도 아닌 게 자꾸 벗어나니 열이 받은 것이다. 무엇보다 의외로 힘이 세다는 것도 기분을 나쁘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었다.

에아론은 분명 자신보다 체격도 작고 겁도 많았다. 허구한 날 꽃과 하늘을 구경하기를 좋아하였던 녀석이다. 당연히 힘도 약할 게 분명한데 이상하게 제대로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아론은 공격은커녕 피하기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스바르가 훨씬 더 유리하는 건 아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겁 먹지 마! 다가온다고 물러나지 말란 소리다. 확 다리를 걸어야지!"


에아론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다만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사이 주변을 빙빙 돌며 눈치를 보던 스바르는 왁, 하고 달려들더니 에아론의 허리를 붙잡았다.

에아론은 마구 발버둥을 쳤지만 체력이 부족했다. 스바르의 어깨에 올라타게 된 에아론은 바닥에 그대로 엎어지게 되었다.

스바르는 팔다리를 이용하여 에아론을 구속했다. 그 상태에서 팔을 뒤로 꺾자 에아론의 상체가 뒤로 들렸다.

이건 에아론이 벗어날 수 없는 자세였다. 그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에아론은 일단 항복 의사를 표했다.

스바르는 놓아주지 않았다. 이 또한 경기의 일환이라는 듯 더욱 강하게 압박을 했다.

초조한 듯이 보고 있던 프라가 앞으로 나서려던 그때였다.

스뇰이 얼굴을 팍 구기더니 스바르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쳤다.


"상대가 항복을 했으면 물러나야지, 이 건방진 자식 같으니라고."


순간 울컥한 스바르는 스뇰에게 달려들었다. 스뇰은 씩 웃었다.


"봐라, 꼬맹아. 이렇게 하는 거야."


스뇰은 스바르가 뻗은 손에서 벗어나더니 발끝으로 스바르의 발 옆면, 척골을 툭 건드렸다. 그러자 스바르는 관성에 의해서 앞으로 꽈당 넘어지고 말았다.

스바르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을 지었다.


"힘? 중요하지. 체격도 당연히 중요하지. 하지만 글리마는 기술도 좋아야 한다. 기술 중에는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것도 있어. 꼭 우직하게 힘 대결을 펼치지 않아도 된다 이거다."


스뇰은 스바르를 힘으로 억누르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에아론이 보고 배울 게 없기 때문이었다. 스뇰은 에아론이 충분히 따라 할 수 있게끔 일부러 몸도 낮추는 둥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을 내세웠다.

스뇰은 넘어진 스바르가 벌떡 일어나는 걸 보고는 에아론에게 말했다.


"보고 있냐? 이렇게 심하게 넘어져도 바로 일어나는데 뭐가 그리 걱정하는 거냐. 그냥 마구잡이로 팽개치고 힘을 쓰란 말이다."

"닥쳐!"


스바르는 스뇰이 아까부터 종알종알 거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꾸만 사람의 신경을 건드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스뇰이 원하던 바이기도 하였다. 스뇰은 스바르가 앞으로 달려들자 제 어깨로 스바르의 겨드랑이를 툭 쳤다. 그와 동시에 다리로 걸어버리니 스바르는 쪽도 못 쓰고 넘어지고 말았다.

스바르는 다시 일어나 또 덤볐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스바르는 점점 모멸감에 얼굴을 붉혔다. 아까는 화가 났다면 지금은 창피한 감정이 더 했다. 가뜩이나 연전연승을 펼치고 있던 참이었다.

그랬는데. 그래서 모두가 자신을 우러러보고 있었는데. 이 거지 같은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신을 농락하다니.

스바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그걸 본 스뇰의 눈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거기까지 해라."


스바르가 행동을 멈췄다.


"주먹싸움을 원한다면 그땐 나도 봐주지 않는다. 그래도 할 테냐?"


스바르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스뇰을 이기고 싶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의기도 투지도 사라졌다. 정말 덤빈다면 자신은 쪽도 쓰지 못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으아아!"


주체 못 하는 분노를 토해낸 스바르는 발로 흙바닥을 걷어차고는 씩씩거리며 떠났다.

스뇰은 그 모습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저놈은 확실히 큰형 성격을 닮았군."


에아론은 스바르를 아무렇지 않게 가지고 노는 스뇰을 보고 감명이 깊은 듯했다. 바르가 아무것도 못하고 이리저리 농락 당하는 모습을 이번에 처음 본 것이다.

스뇰은 주저앉아 있는 에아론에게 말했다.


"남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괴상한 논리로 널 구속하지 마라. 승부를 펼칠 때는 남을 위한다느니 그딴 건 다 버리란 말이다. 다른 사람이 널 마음대로 하는 건 되면서 넌 왜 다른 사람에게 반격을 하지 않는 거냐? 그렇다면 나중에 적과 싸울 때 상대에게 몸을 내던질 거냐? 마음대로 잡숴주십사, 하면서?"

"그럴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꼭 다치면서까지 이겨야 하는 그런-."

"이기고는 싶은데 남을 다치게 하는 것도 싫다고? 그런 건 없다. 승부를 한 번 펼치면 반드시 상처가 날 수밖에 없어. 그게 무서우면, 그렇게 하기 두려우면 처음부터 하지를 말았어야지."


에아론은 고개를 푹 숙였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이 너무 무르게 생각했음을 다시금 통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스뇰은 그런 에아론에게 뭐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들썩였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스뇰은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빽 소리를 질렀다.


"뭘 봐! 가서 똥이나 싸고 자기나 해!"


아이들은 어디 스뇰이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났다. 스뇰은 흥, 하고 콧김을 뿜고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숲으로 돌아갔다.



*



어머니가 깊은 잠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에아론은 꾹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에아론은 프라가 확실히 자는지 확인했다. 코밑에 손가락을 살짝 댄 에아론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에아론은 살그머니 일어나 이불을 옆으로 젖혔다. 바닥에 발바닥이 닿자 서늘한 감촉이 들었다. 아무리 무더운 여름이 온다 하여도 성의 돌바닥이 데워지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에아론은 잠옷을 벗었다. 그러자 안에 입고 있던 외출복이 드러났다. 에아론은 잠옷을 곱게 포개어 침대 밑에 둔 뒤 방에서 살금살금 나왔다. 최대한 문 소리가 덜 나게 닫은 에아론은 복도를 가로질렀다.

혹여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덕분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에아론은 이전에는 어머니의 방, 그러나 지금은 누나가 홀로 쓰고 있는 방으로 조심히 들어갔다.

아스테리아는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달빛을 맞으며 자고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

아스테리아는 평소 습관처럼 이불을 자기 입까지 끌어올려 덮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해오던 버릇인데 이 때문에 이불 끝자락이 젖는 일이 많았다.

옛 추억에 빙긋 미소를 지은 에아론은, 사실 그 추억이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기껏해야 열흘이었다.


고작 열흘이라는 시간 만에, 우리 남매는 이렇게 갈라지고 말았던 거구나.


서글픈 눈으로 누나를 바라보던 소년은 이내 자신이 왜 여기 왔는지를 상기했다. 에아론은 이불을 살짝 밑으로 내렸다. 그러자 아스테리아의 볼이 드러났다. 볼은 퉁퉁 부어 있었다. 프라에게 맞았던 그 부위였다.

에아론은 몰래 챙겨 갖고 온 연고를 이용하여 아스테리아의 볼에 발라주었다. 혹여 깨지 않을까 싶어서 최대한 손가락에 힘을 뺐다.

이윽고 연고를 다 바른 에아론은 조막만 한 손을 뻗어 아스테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스테리아는 깊이 잠들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에아론은 조심히 자리에 일어나고서 발자국 소리를 죽인 채 문을 닫고 나갔다.

복도 너머로 발자국 소리가 사라질 즈음, 아스테리아는 눈을 떴다. 아스테리아는 손가락으로 제 볼을 매만졌다. 끈적한 느낌이 들었지만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스테리아는 창가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달과 은하수. 그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수많은 별들.

그 가운데에서 유독 빛을 내는 별, 스타르나 성.

아스테리아의 두 눈동자에 스타르나가 한가득 들어왔다. 그 별을 보며 아스테리아는 전심으로 키놀께 기원했다. 부디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기도를 올리며.



*



누나의 방에서 나온 에아론은 제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 가지 일이 또 있었기 때문이다.

성에서 몰래 빠져나온 에아론은 달빛을 받으며 길을 따라갔다. 달은 완연한 원형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고 있었다. 달이 차오르면 차오를수록 성인식 또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성인식은 보름달이 완전히 차오르는 그날 아침에 시작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도 전혀 어둡다는 걸 느끼지 못했다. 다만 숲에 들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질 테지.


'아냐. 그래도 갈 거야. 할 수 있어.'


에아론은 스뇰의 오두막이 있는 곳까지 갈 작정이었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오늘 낮에 벌어졌던 일로 인하여 더 이상 주저하고픈 마음이 사라졌다.

스뇰과 있으면 많은 걸 배울 수 있으리라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숲으로 향하려던 에아론은,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마을 근처에 있는 들판. 낮까지만 하더라도 글리마 연습으로 인하여 열풍이 불었던 곳.

그곳에 스뇰이 자리에 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네 극성맞은 엄마한테 들키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진다. 어서 돌아가라."


스뇰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에아론은 주먹을 꾹 쥐었다.


"제가 올 거라는 걸 알고 계셨나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여기가 별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아 있었던 것뿐이야. 네가 뭐가 예쁘다고 그런 귀찮은 짓을 한단 말이냐."


말 내용 자체는 여전히 퉁명스럽고 신랄했지만 어조는 아니었다. 스뇰의 어조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에아론은 하고픈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스뇰은 이미 답을 해버렸다.


"싫다."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요?"

"글리마 가르쳐 달라는 거겠지. 싫어, 귀찮아. 어차피 성에도 널 가르쳐 줄 사람은 많잖아. 그놈들한테 배워."

"싫어요."


스뇰은 이마에 주름을 잡힌 얼굴로 에아론을 쳐다봤다. 마치 '어쭈, 이놈이?' 하는 듯한 눈이었다.

하지만 에아론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제가 왜 제대로 승부를 펼치지 못했는지, 그걸 알아차린 사람은 삼촌 말고는 없었어요. 그러니 삼촌한테 배울래요."


그랬다. 에아론도 사실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몰라 지금껏 머리 싸매고 끙끙 앓고 있었다.

그 문제를, 스뇰은 단번에 알아챘다. 에아론이 어떤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이 어떤 문제를 불러일으켰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던 것이다.


"부탁드려요. 삼촌. 알려주세요."


스뇰은 에아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 내가 그래야 하는지 말해 봐."


에아론은 혀로 입술을 축였다. 온갖 말들이 머릿속에 감돌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아니,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 삼촌 앞에서는 거짓말을 해봤자 통하지 않을 테니까.


"성인식 날, 글리마 대회가 왜 열리는지 알고 계시죠?"

"알다마다."

"전 그 대회에 나갈 생각이에요."

"그러냐? 근데 왜 그걸 나한테 말하냐. 이번에 성인식 치르는 놈한테 얘기해야지."

"비요른 형을 위해서 참가하는 게 아녜요. 전 큰형이 성인식을 무리없이 통과할 거라 믿고 있으니까요. 전, 누나를 위해서 참가하는 거예요."


스뇰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에아론은 눈을 내리깔았다. 소년의 발치에 있는 흙바닥이 살짝 밀려 올라갔다.


"누나는 항상 절 위해줬어요. 제가 혼자 있을 때, 다른 형한테 놀림받고 어머니한테도 관심을 받지 못했을 때 언제나 누나는 제 옆에 있어줬어요. 그런 누나가 이번에 떠난대요.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슬프지만, 그래도 누나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래서 전 대회에 나가서 우승하고 싶어요. 그러면 키놀께서도 특별히 누나를 봐주시지 않을까 해요."


에아론은 스뇰을 쳐다봤다.


"삼촌은 키놀이 없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전 그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이런 제가 어리석다고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스뇰은 에아론을 다시금 훑어봤다. 외형만으로 봤을 때는 브레고아와 닮은 구석이 많았다. 하지만 알맹이는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스뇰이 손짓으로 에아론을 불렀다. 에아론은 스뇰 곁에 다가가 앉았다.

스뇰은 아까 전에 에아론에게 하려던 말을 지금에서야 꺼내게 되었다.


"넌 큰형님하고는 다르네."

"저희 아버지요?"

"그래. 얼굴은 비슷한데 여긴 달라. 여긴 우리 아버지하고 조금 닮았어."


스뇰이 에아론의 가슴을 검지로 콕 찍었다. 에아론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쓸고는 스뇰을 바라보았다.

스뇰은 생각에 잠긴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굳이 글리마를 잘하는 방법을 알려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일 뿐이지, 에아론은 실력이 있었다. 그걸 이끌어내기만 한다면 충분히 우승을 할 가능성도 있었다.

체격이 좀 작긴 하다만 그것 말고는 문제될 게 없었다.

어차피 또래 아이들끼리 하는 건데 체격이 차이가 나봐야 얼마나 날까 싶기도 하고.

힘도 쓸 만큼은 갖고 있었다. 맨주먹으로 문짝을 경첩 째로 뜯는 걸 보면 결코 약한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관건은 이것이겠지.


'어떻게 하면 이 녀석을 담대하게 만들 수 있을까.'


스뇰은 에아론을 훑어보았다. 허리춤에 있는 단검이 하나 보였다.


"그거 줘 봐."


에아론은 의아해하면서 일단 단검을 주었다. 숲을 통과하면서 혹시나 마주할 짐승과의 조우를 대비하여 가져온 것이었다.

스뇰은 이가 다 빠진 단검을 살펴보더니 제 품에 넣었다.


"내일 아침에 와라. 맛있는 것도 많이 싸 들고. 꽤 고단할 테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 작성자
    Lv.68 원투쓰리..
    작성일
    24.05.20 21:13
    No. 1

    스뇰 - 스타르나/ 에아론 - 아스테리아
    금단의 사랑으로 얽힌 운명인가?ㅋㅋ

    스뇰이랑 스바르 글리마 붙은 다음 스바르 이름 바르라고 오타난곳 있어요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붉은머리 에아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6 붉은머리의 피 (2) +1 24.06.20 10 3 16쪽
35 붉은머리의 피 (1) +1 24.06.19 9 3 15쪽
34 지원 (5) +1 24.06.18 9 3 13쪽
33 지원 (4) +1 24.06.16 10 3 12쪽
32 지원 (3) +1 24.06.15 11 4 16쪽
31 지원 (2) +1 24.06.14 14 3 14쪽
30 지원 (1) +1 24.06.12 13 4 16쪽
29 3년 후 (4) +1 24.06.11 13 3 13쪽
28 3년 후 (3) +1 24.06.10 16 3 13쪽
27 3년 후 (2) +1 24.06.08 15 3 13쪽
26 3년 후 (1) +1 24.06.07 14 4 17쪽
25 분노 (5) +1 24.06.06 14 4 17쪽
24 분노 (4) +1 24.06.04 15 3 18쪽
23 잘 있어 24.06.03 16 3 13쪽
22 분노 (3) 24.06.01 15 3 14쪽
21 분노 (2) 24.05.31 16 3 14쪽
20 분노 (1) +1 24.05.30 15 3 16쪽
19 추락 (2) +1 24.05.28 16 3 17쪽
18 추락 (1) 24.05.27 19 3 15쪽
17 변화의 꼬리 (3) +1 24.05.25 16 3 19쪽
16 변화의 꼬리 (2) +1 24.05.24 13 2 17쪽
15 변화의 꼬리 (1) +1 24.05.23 17 2 14쪽
14 아담한 승리 +1 24.05.22 14 4 15쪽
13 정찰꾼 스뇰 (5) +1 24.05.21 15 4 16쪽
» 정찰꾼 스뇰 (4) +1 24.05.20 21 3 20쪽
11 정찰꾼 스뇰 (3) +1 24.05.19 18 3 13쪽
10 아픔 +1 24.05.17 19 5 19쪽
9 정찰꾼 스뇰 (2) +1 24.05.16 17 5 16쪽
8 정찰꾼 스뇰 (1) +1 24.05.15 23 4 14쪽
7 다짐 24.05.14 20 4 1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