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타르
레아는 후방에 있는 막사에서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전장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한창 전투가 진행되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비명소리, 말이 울부짖는 소리, 칼과 창이 부딪치는 소리가 어지러웠다.
그런데 한 무리의 말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전장에서 이탈해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한참 전투중이니 후퇴하거나 도망쳐오는 부대는 아닐 것이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막사 밖으로 나와서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바빌로니아 군복을 입은 기병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적들이 오고 있어요!”
그녀는 진영에 남아있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병사들은 갑작스런 기습에 놀라서 서둘러 무기를 들고 위치에 서서 방어태세를 갖췄다. 대부분은 전장에 가있었고, 후방에 남아있는 병사들은 소수였다.
달려오는 적들의 맨 앞에는 바빌로니아 왕의 갑옷을 입은 자가 있었다. 아마도 무킨제리일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전투 도중에 적장이 전장을 벗어나서 이곳에 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기병들 사이에는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이 함께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흑마법사 라바시가 분명했다. 그녀는 불길한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무킨제리의 기병대는 수비하는 병사들을 쓰러뜨리고 목책과 방어선을 넘어 진영 안으로 훌쩍 넘어 들어왔다. 지휘 장교들이 모두 전장에 가 있어서 아시리아 병사들은 빠르게 침투하는 적의 기병을 막아낼 수 없었다.
레아는 두려움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도망치려 해도 어디로 도망쳐야할지 몰랐다.
“이쪽으로 와.”
아쉬쿠르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들은 헉헉거리며 말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신관은 어디 있나?”
무킨제리는 쓰러진 아시리아 병사의 멱살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아시리아병사는 숨을 컥컥거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라바시는 예리한 눈으로 진영을 둘러보았다.
“저기 도망갑니다.”
라바시가 무킨제리에게 레아가 달려가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잡아라!”
무킨제리의 명령에 기병대는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말에 올라타려는 그녀를 둘러쌌다.
무킨제리는 말에서 내려서 칼을 뽑아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쉬쿠르가 그녀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왜 힘없는 예언자를 죽이려는 겁니까?”
“예언자가 신을 돌려보내지 못하게 해야 하니까.”
레아는 그가 다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무킨제리는 히죽거리며 레아를 보았다.
“너만 죽이면 내가 전 세계의 왕이 될 수 있어.”
그는 아쉬쿠르를 붙잡아서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리고 그녀를 향해서 칼을 겨누었다. 레아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목이 얼어붙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소용없어. 멈춰.”
무킨제리를 불러 제지하는 사람이 있었다. 무킨제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테프누트였다.
“레아를 죽여도 너는 결국 실패할 거다.”
그는 무킨제리를 향해서 걸어오며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나도 예언자다. 내가 신을 돌려보낼 거야.”
라바시가 비웃음을 띤 어조로 말했다.
“그럼 형도 죽여야겠군. 나를 원망하지 마. 형이 자청한 거니까.”
무킨제리는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칼을 들고 테프누트에게로 갔다.
“예언자가 제 발로 나타나다니 잘 됐군. 둘 다 죽여주지.”
테프누트는 시퍼런 칼날 앞에서도 침착하게 무킨제리에게 말했다.
“너는 세계를 지배할 수 없어. 그 이유를 말해줄까?”
“뭐라고?”
얼굴을 찡그리는 무킨제리에게 테프누트는 말을 이었다.
“그 이유는 우리 예언자들 때문이 아니야.”
“그럼 무엇 때문이지?”
“바로 흑마법사 때문이지.”
테프누트는 라바시를 가리켰다.
“너는 흑마법사에게 속고 있어.”
무킨제리는 의심하는 눈빛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라바시가 뭘 속이고 있나?”
테프누트는 라바시의 속셈을 밝혔다.
“라바시는 너를 세계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겠지만, 과연 그럴까? 그렇게 마법이 강한데 왜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을 안 하겠나? 당연히 너는 밟고 올라서는 발판일 뿐이고 자신이 세상을 지배하려 들겠지.”
무킨제리는 테프누트가 자신을 미혹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저었다.
“라바시는 군대가 없으니 내 힘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 아무리 능력 있는 흑마법사라도 병사가 없이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겠나.”
테프누트는 그의 믿음을 망치로 깨부수듯이 말했다.
“신을 소환하면 병사는 필요 없어. 신은 전지전능하니까. 라바시에게 넌 필요 없어. 신을 소환하는 조건을 만들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일 뿐이야.”
“그럴 리가.”
무킨제리는 혼란스러운 듯이 라바시를 쳐다보았다. 라바시는 태연하게 말했다.
“적의 이간질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제가 조금이라도 제 욕심을 앞세워서 충성을 바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레아의 귀에 필레세르3세의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왕이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오고 있었다. 달려오는 기병대의 맨 앞에 선 사람은 필레세르3세였다.
“무킨제리.”
왕은 분노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차갑게 그를 소리쳐 불렀다.
“다른 사람은 놔두고 나와 일대일로 결판을 내자.”
필레세르3세의 부름에 무킨제리는 불끈 힘이 나는 듯이 말에 올라탔다. 왕만 죽이면 자신이 단숨에 아시리아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내가 원하는 바다. 둘이 결투로 결판을 내자.”
그는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듯 했다. 왕을 이길 자신이 있는지 말에 박차를 가해서 달려갔다. 왕의 가슴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왕이 그의 칼을 받아서 밀쳐냈다. 두 개의 칼이 미끄러지며 스르릉 소리가 났다.
무킨제리는 고함을 지르며 거세게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전진했다. 마치 아무 것도 그를 상처 입힐 수 없다고 믿는 듯이 거침없이 나아갔다. 왕은 여유있게 그의 칼을 받으며 그의 힘과 속도를 가늠했다. 칼이 부딪칠 때마다 공기 중에 날카롭게 떨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그의 칼이 왕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왕은 몸을 옆으로 틀어서 피했다. 몸을 원위치하며 칼로 그의 옆구리를 베었다. 갑옷을 입고 있어서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무킨제리의 갑옷이 뚫리며 피가 흘러나왔다.
“내가 상처를 입다니.”
무킨제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칼을 고쳐 잡고 콧날을 찡그리며 있는 힘을 다해서 칼을 휘둘렀다. 왕은 칼을 받아서 밀치고 그의 팔이 위로 들렸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빨리 반격해서 그의 배를 찔렀다.
치명상을 입은 무킨제리는 말에서 떨어졌다. 그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 자리에서 버르적거릴 뿐이었다. 몸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분명히 라바시가 그 약을 마시면 적의 칼에 죽지 않는 몸이 된다고 했어.”
그는 자신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검붉은 피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나는 불멸의 몸이야. 죽지 않아.”
라바시가 죽지 않는 몸으로 만들어준다고 약을 준 모양이었다. 그래서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테프누트가 고개를 저었다.
“이제야 라바시에게 속았다는 걸 알겠나?”
무킨제리가 라바시를 쳐다보자 그는 피식 웃었다.
“순진하긴. 내가 너를 불멸의 몸으로 만들어줄 것 같아? 베가처럼 너도 이용해먹었을 뿐이야. 그 약은 그냥 맹물이었어.”
“네 이놈!”
무킨제리는 억울해서 라바시를 째려보았다. 이를 악물고 눈을 감지 못하고 뜬 채로 숨을 거두었다.
왕은 말에서 내려서 레아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왕의 목소리에 그녀는 그제야 다시 마음이 가라앉으며 숨을 쉴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불안한 눈길로 라바시를 쳐다보았다. 왕이 그를 죽일까. 테프누트를 생각하면 지금 비밀을 말해야 하나 망설여졌다. 한편으로는 그는 지금 능력이 최대로 향상된 흑마법사였다. 왕이 그를 죽이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테프누트가 라바시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이제 그만 해. 다 끝났어.”
라바시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왜?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라바시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희뿌연 연기가 모이더니 활과 화살의 형태를 갖추며 나타났다.
“앗!”
그의 손에 위험한 무기가 쥐어지자 모두가 놀라서 소리쳤다.
“예언자들만 죽이면 이제 완전히 내 세상인데.”
그는 레아를 향해서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이 그녀를 향해서 날아갔다.
필레세르3세는 화살이 날아오자 재빨리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퍽 소리와 함께 화살이 왕의 등에 박혔다.
“폐하!”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왕을 불렀다. 왕의 눈빛이 점차 흐려지며 생기를 잃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녀는 절대로 현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주문이 완성되었다.”
라바시는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생명을 버리고 불멸을 얻는다.”
필레세르3세에게 걸린 마지막 주문이 발현되었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점차 거세진 바람이 그들을 날려버릴 듯이 감쌌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거센 바람이었다.
“이슈타르 여신이여! 어서 오십시오.”
라바시는 하늘을 향해서 두 팔을 벌렸다.
하늘의 구름이 갈라지며 눈부신 섬광이 왕의 몸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생기가 사라졌던 왕의 눈이 새하얀 빛으로 번쩍였다.
왕은 낯선 표정으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무표정하게 보았다. 그녀는 왕의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막으며 다리에 힘이 풀려서 털썩 주저앉았다. 거기에 있는 존재는 필레세르3세가 아니었다.
왕의 표정은 그녀가 사는 신전에 모셔진 거대한 이슈타르 여신상의 표정과 똑같았다. 왕의 몸에 이슈타르 여신이 빙의해 있는 것이었다. 왕의 생명이 사라진 육체에 불멸의 존재인 이슈타르 여신이 들어온 것이다.
“적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왕은 제정신이 아닌 듯이 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천천히 구름이 한 곳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 한 곳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며 지상의 것들을 빨아들일 듯 점점 강하게 불어왔다.
‘세상의 종말이 오고 있어.’
레아는 덜덜 떨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사들과 사람들은 겁을 먹고 울부짖으며 바람에 날려가지 않으려고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양 손을 짚고 말했다.
“이슈타르 여신이시여. 천계로 돌아가십시오. 여신께서 이곳에 계시면 지상 세계는 멸망하고 맙니다.”
왕은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이 나를 불렀지 않느냐. 나는 지상에서 이곳을 지배할 것이다. ”
“여신께서 이 곳에 계시면 지배할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천계로 돌아가셔야 지상의 생물들이 생명을 얻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혼자 힘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제가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우선 내 적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이슈타르는 필레세르3세의 몸에 빙의 해서 왕의 적들을 모두 자신의 적으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여신이 손을 들어서 옆으로 공중을 휙 쳐내자, 무킨제리의 병사들과 부하들은 한 사람도 남기 없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들은 외상도 없이 단번에 숨이 끊어졌다.
손짓 한번 만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여버리는 이슈타르 여신의 힘에 아시리아 병사들마저 공포에 질렸다. 신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누구나 단번에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렇다면 지상에 남아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여신은 라바시를 돌아보았다. 필레세르3세의 적이 모두 죽었는데, 라바시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왕에게 빙의한 여신이 눈빛을 번쩍이며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째서 죽지 않지?”
라바시는 으스스하게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오직 검은 빛만이 번쩍였다. 라바시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그것은 라바시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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