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기우제는 백성들이 절실하게 신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만 지내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인간들이 아쉽다고 비를 내려달라고 빌어서는 안 됩니다. 빈다고 신께서 우리의 청을 다 들어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레아는 남타르를 준엄하게 비판하고, 그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비가 온다는 예측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비는 곧 올 것입니다. 늦어도 3일 안에는 비가 올 것이다. 그때 가서 3일을 기다리지 못해서 오랫동안 아시리아를 지켜온 신관을 잃은 것을 후회해봐야 늦을 것입니다. 그러니 경거망동하지 마십시오.”
남타르는 갑작스러운 일격을 맞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리란 말입니까?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 말고 뭐가 있습니까?”
샴시 일루가 그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3일 안에는 비가 온다는 말은 확실합니까?”
레아는 샴시 일루의 눈빛에 머리가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상대방의 빈틈을 구석구석 훑는 느낌의 눈초리였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테프누트를 지킬 생각이었고,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과거에도 가뭄 후에 바람이 다시 불고 하루 이틀 있다가 비가 왔다는 기록이 더러 있었다. 바람의 습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고, 구름도 몰려오고 있으니 곧 비가 올 것이다. 3일 후에 비가 올지, 5일 후에 비가 올지 확실하게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지금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되었다.
샴시 일루는 잘 되었다는 듯이 양손을 맞잡고 말했다.
“신녀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3일 안에는 반드시 비가 오겠군요.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신께서 아시리아를 버리신 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레아는 샴시 일루가 자신까지도 엮어 넣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3일 후에도 비가 오지 않으면, 신녀께서 직접 신의 노여움을 풀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녀 역시 목숨을 걸어야 했다. 테프누트만 책임을 지도록 하고, 혼자 발을 뺄 생각은 없었다.
“그러겠습니다. 3일 후에도 비가 오지 않으면요.”
왕도 레아가 이렇게까지 확신을 가지고 나오니, 그녀의 말을 믿고 밀어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왕궁에서 물러나오면서 남타르는 샴시 일루에게 물었다.
“3일 안에 비가 오면 어쩌시려고요? 그냥 테프누트 만이라도 처치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지금 하늘을 보십시오. 전혀 비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3일이 아니라 열흘 후에도 비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샴시 일루는 햇빛이 쨍쨍한 하늘을 가리켰다.
“레아 신녀는 지금 어떻게 해서든 시간을 끌어보려고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58일째 비가 오지 않았는데, 앞으로 3일이 더 지난다고 상황이 달라질까요?”
남타르는 입을 다물었다. 비가 올지 안 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신관과 신녀조차도 확신하지 못하는 일이니, 그들도 좀 더 도박을 해봐도 나쁠 것은 없었다.
“이번에 신관과 신녀를 한꺼번에 처리해버리면, 왕의 신권은 완전히 무너질 겁니다. 그러면 왕의 한쪽 팔이 꺾이는 겁니다. 왕이 신의 버림을 받았다고 사람들이 믿게 되면, 그 다음 수순은 뭐겠습니까.”
왕이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면 반란을 일으키기에 그보다 더 좋은 명분은 없었다. 남타르의 얼굴에 흥분으로 인한 홍조가 떠올랐다.
“3일 안에는 정말로 비가 오는 건가?”
왕은 걱정스러움과 고마움을 숨기기 위해서 건조한 목소리로 레아에게 물었다. 자신은 어쨌든 왕이었기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해야 했고, 대놓고 테프누트의 편을 들 수는 없었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나서서 테프누트를 구하고 시간을 벌어준 레아가 기특했지만, 3일 후에도 비가 오지 않으면 둘 다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비는 곧 올 겁니다.”
테프누트도 점점 습해지는 대기 중의 습기를 느끼고 있었다.
아쉬쿠르도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만일의 사태에는 대비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3일 후에도 비가 안 오면 분명히 폭동이 일어날 테고 두 사람의 목숨은 위험할거에요.”
야수바야는 굳은 얼굴로 덧붙였다.
“과연 두 사람만 위험할까요? 우리 모두 앞날을 장담할 수 없게 될 겁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3일 후에도 비가 오지 않으면 전국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명분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기적을 바라며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쨌든 잘 했어. 시간을 벌었으니. 맘이 여린 줄 알았는데 제법이야.”
아쉬쿠르가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레아에게 엄지를 들어보였다.
“고맙습니다.”
테프누트도 자신을 감싸주러 나선 그녀에게 감사했다.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쩔 줄 몰랐다.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라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저도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야수바야의 얼굴에도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약하게만 봤던 그녀가 그렇게 강단있는 모습이 있는 줄 몰랐다. 아쉬쿠르는 주먹을 허공에 흔들었다.
“아까 남타르 시장 얼굴 봤어?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더라. 완전히 당황해서 어버버버 거리던데.”
왕도 속이 후련한 듯 배를 잡고 키득키득 웃었다.
“그 자가 그렇게 말문이 막히는 건 처음 봤어. 왕이 뭐라고 해도 뺀질거리면서 변명을 하는 자인데 말이야.”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하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갑자기 그녀가 벌떡 일어나서 그렇게 한 방 먹일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모두가 한결 기분이 밝아졌다. 3일 후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지만, 그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면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기분이 들었다.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바람은 점점 세지고, 습도도 점점 높아졌다. 그러나 올 듯 올 듯하면서도 비는 오지 않았다. 먹구름은 비를 뿌리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갔다.
어느덧 내일이 3일째 되는 날이었다.
필레세르3세는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방안을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했다. 얼마 전부터 매일같이 기억이 나지 않는 꿈에 시달리며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머리가 아팠다.
내일도 비가 오지 않는다면 폭동과 그 뒤를 이어 반란이 일어날 것임은 자명했다. 아시리아인들끼리 피를 흘리는 내전을 하게 될 것이다.
니무르드와 아시리아의 지도를 들여다보며 만일을 대비한 전략을 고심하던 왕은 책상 위에 엎드린 채 깜박 잠이 들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몽롱한 상태에서 그는 공중에서 눈부신 빛이 내려오며 이슈타르 여신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하늘하늘한 천을 휘날리며 여신이 그에게 다가왔다.
“지상의 왕이여. 세계를 지배하기를 원하는가?”
왕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여신은 제안을 하듯이 환하게 빛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대가 아끼는 것 7가지를 버리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7가지를 얻을 것이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 알기 전에는 섣불리 응할 수 없었다. 세계를 지배하게 해준다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버려야 하는 7가지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네게 소중한지는 네가 이미 알고 있다. 무엇을 얻게 될지는 선택의 순간이 오면 알게 될 것이다. 동의하는가?”
자신의 의지로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제안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왕은 여신을 향해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여신의 손끝으로부터 빛이 흘러나와서 왕의 손을 타고 그의 몸을 휘감았다.
빛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자, 왕은 문득 현실로 돌아왔다. 텅 빈 방안에는 자신뿐이었다. 책상과 지도와 모든 물건들이 변함없이 제자리에 있었다. 방금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생생했다.
7가지를 버려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왕은 그것이 테프누트와 레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불안감에 창가로 달려갔다.
희미하게 동이 터오고 있었다.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뭔가 투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은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차가운 것이 느껴졌다. 손에 떨어지고 있는 것은 빗방울이었다. 그는 손가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바라보며 꿈이 아니기를 바랐다.
“비다! 비가 온다!”
잠을 자던 사람들은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에 밖으로 뛰쳐나왔다. 너나 할 것 없이 비를 맞으며 입을 벌려서 비를 마셨다. 몸이 흠뻑 젖도록 빗속에서 춤을 추었다. 신께 감사하며 한 방울이라도 더 비를 맞기 위해서 팔을 벌리고 펄쩍펄쩍 뛰었다.
레아와 테프누트는 신전의 첨탑 위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비를 온 몸에 맞으며 무릎을 꿇고 신에게 감사기도를 올렸다. 그들은 이 비가 며칠간 더 내리면서 땅을 적셔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야수바야와 병사들도 우물에 차오르는 빗물을 퍼 올려서 서로에게 끼얹었다.
“야, 드디어 비가 오네.”
“고생했다.”
땅에 고인 빗물을 아이들처럼 발로 첨벙첨벙 차고 소리를 질렀다. 오랜 인내의 시간을 잘 버틴 것을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자축했다.
농부들은 이미 말라죽은 밭이지만, 드디어 새롭게 뭔가를 심을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에 엉엉 울었다. 흙은 물을 빨아들여서 촉촉하고 부드러워졌고, 땅속 깊이 숨었던 지렁이들도 기어 나왔다.
비는 마른 강바닥을 적시고 흙속의 씨앗 위로 떨어졌다. 진흙 바닥에 붙어있던 물고기들이 비를 향해서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상류에서부터 쏟아져내려온 물이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강을 휩쓸고 흘러 내려갔다. 거미줄처럼 얽힌 수로를 물이 달려가며 넘실넘실하도록 채웠다.
남타르는 잔뜩 찌푸린 하늘만큼이나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결국은 비가 오는 군요.”
샴시 일루는 창가에서 비를 맞은 채 왕과 여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행진을 하는 사람들을 내다보고 못마땅한 듯이 쯧쯧 혀를 찼다.
“필레세르3세 만세!”
“이슈타르여신 만세!”
군중들은 그간의 고생을 잊고 기쁨에 넘쳐서 춤을 추며 광장에 모여들었다.
“군중들의 마음은 참으로 변덕스럽군요.”
그는 남타르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각 도시의 영주들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은 소득이라 할 수 있지요.”
남타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극적으로 테프누트를 벌하자면서 나선 도시의 영주들도 있었고, 왕의 편을 들어서 신관을 감싼 영주들도 있었다. 어느 쪽에 줄을 설지 애매한 태도를 보인 자들도 있었다. 누가 자신의 편이고 누가 반대편인지가 확실해 진 것이었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려봅시다.”
그들은 긴 한숨을 쉬며 쓴 입맛을 다셨다.
* * *
한 밤중에 어두운 신전에서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려서 두건과 검은 로브로 몸을 감싼 한 주술사가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에레쉬키갈 여신의 커다란 석상이 서 있었다. 제단에는 막 제물로 바쳐진 양이 피를 흘리고 있었고, 접신을 위해 환각을 일으키는 약초가 향로에서 타올랐다.
바닥에는 제물로 바친 동물의 피로 여러 개의 원이 겹쳐서 그려져 있었다. 그 한 가운데는 필레세르3세의 이름과 이슈타르 여신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중얼거리며 몸을 흔들었다. 그의 팔이 덜덜 떨리며 주문을 외우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갑자기 외부와 단절된 방안에 거센 바람이 불더니 모든 불이 휙 꺼져버리고 깜깜한 암흑이 되었다.
“됐어.”
그는 바닥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신전의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는 바빌로니아의 장군 무킨제리였다.
“어찌 되었는가?”
주술사가 대답했다.
“드디어 필레세르3세가 주술에 걸려들었습니다. 이제 그는 바빌로니아에게 절대로 승리를 거둘 수 없을 것입니다.”
“계속 실패했는데 어떻게 성공한 거지?”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기 마련입니다. 가뭄 때문에 피곤하고 정신이 산란해 진 틈에 꿈을 꾸도록 만들었습니다.”
장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럼 이제 뭘 하면 되는가?”
“필레세르3세가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소중한 것 7가지를 버리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에레쉬키갈 여신께서 처리해주실 겁니다.”
주술사의 말에 장군은 미심쩍은 듯이 턱을 쓸었다.
“그런데 과연 그가 자기에게 소중한 것들을 버릴까?”
주술사는 얼굴을 가린 두건 아래로 차갑게 웃었다.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자신의 야욕을 이기지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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