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수구 정령사(가제) -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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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이 들었다지?"
"예. 그렇습니다"
"범인은 누군가?"
"빈민가에 살고 있는 하인스라는 치료사입니다. 간밤에 만드라고라의 씨앗을 찾는다는 핑계를 대며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담이 큰 자로군"
찻잔을 따른 그가 이안 자작의 앞에 내밀었다.
"마시게. 아주 쓸거야"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한 모금 마신 그가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카스트로 공작이 말했다.
"나는 이제까지 포식자였어. 단 한번도 누군가에게 빼앗겨 본 적이 없지. 그래서 이번 경험이 새롭다네. 감히 내 물건을 훔치다니 말이야. 대단한 자가 아니던가"
"곧 잡힐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안 자작의 말에 공작이 손사레를 쳤다.
"당연히 그러하겠지만 재미있어서 그렇다네. 그 물건은 다른데도 아니라 팔시온 후작가에서 제공해준 거였거든"
"팔시온 후작가 말입니까?"
이안 자작이 놀라며 반문했다. 팔시온 후작가는 대대로 마법가문이고 현 가주도 마도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뭐가 아쉬워서 카스트로 공작에게 그 귀한 물건을 주었을까.
의문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감히 그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그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내 명예는 바닥에 떨어지고 사이가 아주 멀어질거야. 내전이 길어질듯 하이"
카스트로 공작은 전쟁을 염두해두며 말했다. 이안 자작은 따로 할 말이 없어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었다.
"진행의 경과가 궁금해 불러봤는데 잘 처리하고 있는 듯 하군. 한시라도 빨리 그 담 큰 도둑을 내 앞에 데려오게. 아울러 그 물건도 잘 회수하게. 잃어버리면 자네의 목도 잃게 될거야"
마지막 말에 이안 자작은 목울대를 크게 삼켰다. 소름이 다 끼쳤다. 잔잔한 듯한 말투조차도 두려울 정도였다.
"이 일은 아주 중요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자네의 능력이 발휘될 때네"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좋아. 단,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공연히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해결하게"
"예"
"나가보게"
카스트로 공작이 축객령을 내렸다. 조심스럽게 일어선 그는 들어왔을때와 마찬가지로 경례를 표하고 서재를 빠져나갔다.
"아니, 이게 누구야!"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데 올라오는 이가 있었다. 각진 턱선에 체구가 단단해보이는 30대 초반의 금발 청년이었다. 이안 자작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셨습니까? 대공자"
"늘 그렇지 뭐. 그러는 자네는 잘 지내고 있나보지? 표정이 좋아보여?"
카스트로 공작가의 대공자. 스트라이가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안 자작의 표정이 살짝 살얼음이 낀 것처럼 가라앉았다.
그는 결벽증이 있어 누가 만지는걸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 사실을 스트라이가 모를리 없는데 만나기만 하면 이런식으로 자신을 자극했다.
"그런데 오다보니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더군. 무슨 사고라도 났나?"
"공작가의 물건을 도둑맞았습니다"
"뭐라고? 물건을 도둑맞아? 놀랍군!"
물건이 도둑맞았어도 얼굴은 싱글벙글이었다.
"그래서 자네가 발바닥에 불난 것처럼 돌아다닌 것이었군. 진척은 있나?"
"범인을 찾았고 추격중입니다"
리안 자작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스트라이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래? 아쉽군. 좀 더 뛰어 다니길 바랬는데 너무 빨리 찾아낸거 아냐?"
차갑게 웃은 그가 리안 자작의 볼을 툭툭 쳤다.
"어쨌거나 고생 좀 하라고"
그러면서 한량처럼 어슬렁거리며 올라가더니 서재로 쏙 들어갔다. 난간을 잡은 리안 자작의 팔이 부르르 떨렸다. 그의 눈이 표독해졌다.
'개 같은 자식! 제 아비만 믿고 까불다간 큰 코 다칠 것이다'
분노로 몸을 떤 그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공작가를 빠져나갔다. 속에서 일어나는 불같은 살기를 감춘채.
"아버지. 저 왔습니다"
벌컥 문을 연 스트라이가 허락도 없이 터덜터덜 다가오더니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용히 차를 음미하던 카스트로 공작의 눈쌀이 찌푸려졌다.
"행실이 불량해졌구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
"방금 리안 자작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물건을 도둑맞으셨다면서요?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습니까?"
스트라이의 질문에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떤 간 큰 인간이 건드려선 안될 물건에 손을 댄 모양이다"
"도둑이 제 눈앞에 있으면 당장 때려죽이고 싶습니다"
"참아라. 리안 자작이 잘 해주고 있으니 물건을 되찾을 수 있을게다"
공작의 입에서 듣기 싫은 이름이 나오자 스트라이의 쌍심지가 치켜 올라갔다.
"그 놈의 빌어먹을 리안 자작 이야기 좀 안하시면 안됩니까?"
"왜 그러느냐?"
제 아무리 용담호혈의 공작가를 이끄는 사자같은 공작이었지만 제 자식에겐 한없이 너그러운 법. 스트라이의 무례한 행동에도 공작은 모른체 하며 물었다.
"전 그 자식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태생부터 천한 창녀의 소생이 아닙니까? 더러운 핏줄의 자식이 하는 행동이 고깝습니다. 그런 놈을 끼고 도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리안 자작은 창녀 출신의 후처 소생이었다. 선대의 리안 자작가의 가주는 유일하게 남자 아이로 태어난 크라이스트 델 리안을 가문의 후계자로 선택했다.
선대의 가주고 죽고 리안 자작가를 이어받은 그는 높은 검술 실력과 바른 예의. 거기에 판단력까지 좋아 카스트로 공작의 신임을 받는 중이었다.
"그는 보기드문 인재다. 그만한 또래의 능력있는 자도 드물어. 차라리 그를 포용해서 네 편으로 만드는 게 어떠하냐?"
"싫습니다. 아버지는 훗날 저와 리안 둘 중에 선택해야할 겁니다. 그의 면상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습니다"
스트라이의 단호한 말에 공작이 난처해하며 찻잔을 내려놨다.
"왜 너와 리안 자작을 두고 선택해야한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가문의 대공자다"
"하지만 그를 신임하시지 않습니까?"
"신임하는게 아니라 쓸모가 있어 중용한 것 뿐이다. 너도 가문의 주인으로 서게 되면 필요한 인물과 필요없는 인물을 가리게 될 것이다. 그 인물이 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마땅한 적임자라고 생각되면 주저없이 임명해야한다. 그 것이 가문을 위한 길이니까"
공작이 냉엄하게 말하자 스트라이는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닫았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공작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그가 정히 마음에 들지 않으면 빌미를 만들어 제거하거라. 선택은 네 몫이다"
"정말입니까? 명분만 있으면 된다 이거죠?"
그제야 표정이 풀어진 스트라이가 씩 웃으며 손바닥을 비볐다. 공작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시일은 걸린다. 곧 왕국 전체와 전쟁을 치뤄야할 이때에, 리안 자작같은 인재는 꼭 필요하다"
"그건 저도 압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잡아먹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스트라이는 상상으로 리안 자작의 일그러진 얼굴과 그 앞에서 피가 묻은 검을 들고 있는 자신을 떠올렸다.
천천히 올린 검이 리안 자작의 목을 벤다!
생각만으로 아주 짜릿했다.
"한시라도 빨리 가문이 전쟁을 치뤘으면 좋겠습니다"
스트라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말투에서 피냄새가 진득하게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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