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전
방송사에서는 준결승이 진행되기 전에 길동과 검황의 지난 경기를 보여주며 경기분석에 여념이 없었다.
이번 경기는 뭐니뭐니해도 두 선수의 검술 대결이 초점.
검황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검술의 달인, 아니 천하제일인을 자처한다.
그런데 길동 역시 환타지아와의 8강 경기에서 신기에 가까운 검술을 시현해 갈채를 받은 바 있다.
무예를 넘어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이들의 검술.
과연 이번 경기에서는 어떤 신비한 검술을 보여줄지 자못 기대된다.
도박사들이 내건 배당률을 보면 검황이 68%의 승률로 꽤 앞서있다.
장길산과 카오스를 상대한 그의 모습이 압도적이었기에 누구도 이런 배당률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때 드로이드를 타고 경기장 안으로 들어선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맨 먼저 준결승 첫 경기에 나서는 두 선수에 대한 소개.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큰 환호와 박수가 쏟아졌다.
뒤이어 달라진 경기규칙이 있다며 말을 이었다.
“이번 준결승전부터는 오로지 초인 자신의 능력만으로 경기를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말 그대로 진검승부를 펼치는 셈인데요.
8강전까지는 나노머신이나 다른 로봇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4강전부터는 오직 맨몸으로 대결을 벌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지!
갑자기 전혀 예고 없이 이런 결정을?
칠성이가 돕는 걸 원천봉쇄하려는 거구나!
이렇게 되면 나노머신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건 검황도 마찬가지인데.
참, 그동안 검황이 나노머신을 쓰는 걸 못 봤구나. 어떻게 된 거지?’
길동은 검황의 플레이에서 배울 게 많아 장면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었다.
그런데 그동안 단 한 번도 검황이 나노머신의 도움을 받은 듯한 인상을 받은 적이 없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길동처럼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여기까지 올라온 셈이다.
“자, 선수들 앞으로 나와 드로이드 앞에 서시지요.”
나노머신의 유무를 확인하는 드로이드가 선수들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센서를 가동한다.
< 칠성아! 어쩔 수 없다. 넌 밖에서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
[ 뭔가 찜찜해. 아무래도 석연치 않아. 길동아, 지금이라도 경기를 포기하는 게 어때? ]
< 뭐? 그럴 수 없어. 저 검황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단 말이야. 너도 저 녀석이 카오스에게 한 짓을 봤잖아? >
[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 왠지 불안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잖아. 이 경기에 나서는 건 아무래도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 같단 말이야. ]
< 나도 알아. 녀석들이 날 제거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물러서면 저놈들은 우릴 더 얕잡아 볼 거라고.
겁먹은 줄 알고, 쉽게 짓밟으려 할 거야.
이번 기회에 저들이 오판하고 있음을 알려줘야 해.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란 걸 말이야. >
[ 그래도 걱정인데, 괜찮겠어? ]
< 너도 알잖아. 내가 이제 어느 경지인지 말이야! >
[ 알아. 하지만 정말 조심해야 해. 저 검황, 굉장히 무서운 놈이야. 아직 보여주지 않은 게 많은 녀석이라고. ]
< 알아. 조심할게. >
[ 게다가 관중석에도 상당히 강한 기운을 가진 녀석이 몇이나 있어. 저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 점도 신경 쓰고. ]
< 응, 나도 잘 살피고 있어. 나름 대책도 세워놨고. >
그때 길동의 몸 앞으로 주먹만 한 쇳덩이와 두 개의 고리가 불쑥 나타났다.
칠성과 D2가 몸 밖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하지만 검황에게선 어떤 나노머신도 나오지 않았다.
녀석은 어찌 된 일인지 나노머신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있었다.
황제성은 그 점 때문에 이번 경기부터 칠성을 배제한 것이다.
길동의 전력이 반감하길 기대하면서.
이 광경을 본 관중들이 놀라 웅성거린다.
“아! 대단합니다, 검황 선수.
준결승까지 오르는 동안 나노머신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군요.
다른 선수들은 호신강기를 위해서라도 나노머신 하나씩은 꼭 가지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검황에 대한 칭찬이 줄을 이었다.
“그렇다면 검황은 지금껏 갑옷이나 방패 같은 걸 전혀 안 쓰고도 이겨왔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이제야 동등한 조건에서 싸운다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검황이 지금껏 핸디캡 경기를 해온 거죠. 바둑으로 치면 상대가 흑으로 2점이나 3점 정도를 먼저 깔고 둔 셈입니다.”
“그럼 홍길동 선수가 이번 경기에선 매우 불리한 거 아닐까요?”
“그렇죠. 지금까지 저 두 나노머신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아무런 도움 없이 싸워야 하니 그의 처지에선 반대로 핸디캡을 짊어지고 경기를 뛰는 셈이죠.
그렇지 않아도 전력 면에서 검황이 앞서 보이는데, 이거 잘못하면 경기가 초장에 쉽게 끝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해설자는 나노머신 없이 준결승까지 오른 검황의 절대적 우위를 점쳤다.
댓글 창에서도 마찬가지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나노머신 없는 길동에 대한 우려가 컸다.
16강전에서 백성기가 보여준 것처럼 나노머신이 작동하지 않으면 일반인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목소리다.
나노머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다양한 무기가 제공됐다.
관중석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된 유리벽에는 여러 종류의 검과 도, 철퇴와 곤봉 등 다양한 병장기가 걸려 있어 전투 도중 필요하면 언제든지 이를 사용할 수 있다.
드디어 경기가 시작됐다.
경기장 한가운데 모여 심판으로부터 주의할 사항을 듣고는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그때 불쑥 말을 거는 검황.
“길동! 넌 오늘 여기서 죽는다. 알고 있었지?”
“아마 그럴 일은 없을걸.”
그때 검황이 찡그린 표정으로 스탠드 상단 VIP 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 참! 내 힘으로도 쉽게 처치할 수 있는데, 왜들 호들갑인지.
아무튼, 일찍 죽지 말고 잘 버텨라. 그래야 내가 재밌지!”
웃기는 녀석이다.
황제성이 경기에 끼어드는 게 탐탁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거절할 형편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넌지시 귀띔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결코 길동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다.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길동을 죽일 수 있다는 오만에서 나온 것일 뿐.
어떤 자비나 측은지심도 가미되지 않았다.
길동은 전음술로 검황에게 말을 걸었다.
< 야! 너 도대체 카오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
< 큭큭! 보면 알 거 아니야? 지금쯤 바보 멍청이가 되어 있을걸. >
입이 움직이지 않으니 관중들은 두 사람이 은밀히 대화하는 걸 알 수 없었다.
<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거냐? 장길산에게 한 것처럼 그냥 혈도를 눌러 경기를 끝낼 수도 있었잖아? >
< 카아! 너야 이제 곧 뒤질 목숨이니 내 알려줄게. 녀석이 내 심기를 어지간히 건드렸어야지. 감히 내 뇌를 만지작거려! >
< 이 미친놈아! 아무리 그렇다고 사람을 저 모양으로 만들어 놔? >
< 네가 지금 남 걱정하고 있을 때냐? 너도 참 우습다. 쯧쯧, 저기 윗분들은 널 카오스처럼 병신으로 만드는 것으론 부족한가 봐. >
< 도대체 카오스가 뭘 봤기에 그렇게 돌아버린 거냐? >
< 왜 너도 궁금하냐? >
< 내가 맞춰볼까? 넌 부모나 형제 기억이 없지? 왜 그럴까? 누군가가 그걸 지운 거지. 그런데 카오스가 네놈의 어린 시절 기억을 되살려낸 거야. >
길동은 대주천의 영역을 전개해 카오스가 검황에게 한 환각술의 내용을 들여다보았었다.
기술을 시현하는 당사자가 아니기에 세세한 내용까지 알 수 없었지만, 카오스와 검황이 내는 마음의 소리를 엿듣고 어렴풋이 알아챈 것이다.
< 뭐라고? 어디서 개수작이야! >
< 네가 카오스의 환각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내가 그 곁에 있었단 말이야. 네가 돌아버린 포인트를 내가 알고 있지. >
< 거짓말하지 마. 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믿을 것 같아? >
< 믿든 말든 그건 네 자유야. 하지만 난 왠지 네가 인간이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데. >
< 뭐? 그럼 내가 사이보그라도 된다는 말이야? >
< 네가 뭘 기억하고 있는지 떠올려 보면 알 거 아니야? 네가 네 시간을 온전히 네 것으로 하고 있어? >
< ······! >
“왜 두 선수가 서로 바라만 보고 공격하지 않을까요? 신경전이 꽤 길어지고 있습니다.”
경기장 안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여기가 뭐 눈싸움 대회장은 아니잖아?”
“뭐, 렉이라도 걸린 거야? 경기를 해야 할 것 아니야!”
멋대로 남의 기억 속으로 들어와 숨기고 싶은 불행한 과거를 엿본 걸 알고는 이성 줄을 놓아버린 검황.
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길 없었다.
< 명을 재촉하는구나. 그래 그 주둥이가 계속 나불거릴 수 있는지 보자. >
드디어 검황이 청운검을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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