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결승
레비오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준결승까지 오른 길동.
단원들이 우르르 선수대기실로 몰려와 길동을 응원한다.
함께 온 구미호가 길동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너 검황이랑 싸우는데 D2로 되겠어? 그만 고집부리고 D9으로 바꾸는 게 어때?”
길동은 이번 대회를 앞두고 나노머신을 업그레이드하라는 구미호의 제안을 줄곧 거절해왔다.
일루젼의 간섭이나 감시가 귀찮아 업그레이드를 거절한 것이다.
칠성이 D2를 핸들링할 수 있다고 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일루젼은 어찌 된 일인지 칠성이 나노머신을 통제한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게다가 자신의 기술력을 총동원해 칠성의 정보까지 빼가지 않았던가!
D2도 그 정도였는데 D9으로 업그레이드한다면 훨씬 신경 쓸 게 많아질 것이다.
물론 D9으로 롱쏘오드를 장착하면 검술에서는 많은 이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길동은 이미 나노머신의 레벨 차이가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지에 도달했다.
뛰어난 나노머신이 제공하는 검의 날카로움이나 강도, 그리고 추진력이 SSS급을 초월한 전사에게는 미미한 작용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나노머신을 바꾸면 적응이 안 돼 경기를 망칠 수 있어서요. 그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D2로도 잘 싸워왔으니까 더는 말하지 않겠다만.”
걱정이 앞서는지 구미호의 표정에선 불안을 지울 수 없었다.
“참, 아까 검황의 경기를 보면서 느낀 게, 뭔가 분노나 흥분을 잘 조절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 어때? 길동이 네가 느끼기론.”
“네. 아까도 카오스 선배가 환각으로 상당히 괴롭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런 복수 방법을 선택한 것이겠죠.”
“녀석이 흥분하면 평정심을 잃어 허점이 드러나는 거 같아. 그걸 잘 이용해봐.”
“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카오스가 정상이었다면 검황의 약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분노하면 포커에서 올인으로 배팅하듯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든다는 것.
‘그만큼 자신 있다는 이야기지만, 이번에는 그 자신감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제대로 깨닫게 해주마.’
“아무튼, 우리 레비오사에선 너만 남았으니까 어깨가 무겁다. 그렇지 길동아?”
구미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무 부담 주는 거 아닌가요?”
길동은 여유를 부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호호! 부담이라니, 넌 충분히 잘할 거야.
난 원래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었어.
길동인 아마 알 거야. 우리가 따로 특별 훈련한 게 큰 도움이 됐다는걸.”
구미호는 길동이 빠르게 성장한 건 다 자신의 덕분이라고 여기는 듯 우쭐해 하는 표정이다.
“네. 교수님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길동은 왠지 구미호가 천진난만한 소녀처럼 느껴졌다.
나이로는 수백 살이 넘는 꼬부랑 할머니 중의 할머니인데 어쩜 저렇게 해맑을 수가 있을까?
특히 일루젼에 쭉 있었으니 수많은 전투와 참상을 겪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죄 없는 외계인들을 잡아들이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을 텐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구미호는 이번 대회에서 길동이 잠재력을 터뜨릴 것이라 예상했다.
4강전, 결승에서도 분명 좋은 결과를 낼 것이라 믿고 있었다.
“라온의 후예답게 멋진 경기 보여줘, 알았지?”
“네. 물론이죠.”
레비오사 단원들이 모두 떠나고 이제 연수와 단둘이 남았다.
아까부터 말없이 길동을 바라만 보던 연수.
그녀가 천천히 다가와 길동에게 안긴다.
말하지 않았지만, 어젯밤 마음고생이 많았던 걸 알 수 있었다.
얼굴이 하루 사이에 반쪽이 된 듯하다.
길동은 연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랫동안 말없이 안고 있었다.
서로의 가슴을 맞대고 영혼의 교감을 나누는 시간.
거센 운명의 파도 앞에서 두려움이 앞서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둘이서 변함없이 하나가 된다면 충분히 이겨내고, 마침내 영광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뭐든지 잘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연수야.
우리 사랑만 변함없다면,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수 있을 테니. 힘내자, 우리!”
연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길동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망울에는 눈물이 맺혀 글썽인다.
도저히 그저 바라만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로의 호흡과 시간마저 다 잊혀, 모든 게 아득한 저 너머로 사라진 듯하다.
경계가 지워지고 닫혔던 문이 활짝 열려 새로운 세계에 접어든 두 사람.
연수가 다시 길동에게 안긴 채 말했다.
“어제 한순간이었지만, 너랑 어색한 사이가 되는 거 싫어.”
“미안, 내가 잘못했어. 그 이야기 듣고 나도 당황했나 봐.”
“아니야. 내가 경황이 없어서 네 생각을 미처 못했어. 내가 미안해.”
“그런 말 하지 마. 앞으로도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 그런 말 할일 없을 거야. 절대 그럴 리 없으니까.”
“난 엄마같이 살지 않을래. 콘도르가 무서워 도망가지도, 너랑 헤어지지도 않을 거야.”
길동은 연수의 말을 듣고 벅찬 감동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혹시 연수가 만에 하나 옵티머스인처럼 사제의 길을 걷겠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 걱정이 일순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난 어떻게든 아빠를 찾아서 이 지구에서 행복하게 살 거야.
우린 분명 지구인이잖아. 그렇지?”
“맞아. 우린 옵티머스나 아리별 사람이 아니야. 누가 뭐래도 지구인이지.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우리와 같은 지구인 동료인 거고.”
연수가 포옹을 풀고는 지그시 길동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사랑을 지키려면 앞으로 정말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거야. 각오는 됐어?”
길동이 지그시 웃으며 화답했다.
“물론이지. 걱정하지 마.
넌 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킬 테니까.
콘도르가 근처도 못 오게 할게.
언제든 내 곁에 있어. 떨어지지 말고, 알았지?”
“응, 난 언제나 네 껌딱지지, 하하!”
연수가 다시 길동에게 착 안긴 다음, 몸을 부비며 더 깊이 파고든다.
애교 있는 그녀의 미소와 몸짓에 녹아버린 길동.
“연수야, 이번 대회 끝나면 너도 나랑 같이 수련하자.
더 강해져서 너 혼자서도 콘도르를 혼낼 수 있게 해줄게.”
“정말, 그래 줄 거지?”
“응, 내가 아는 거 너에게 다 전수해줄게. 이제 너에게 다 공유할 테니까.”
“고마워, 길동아! 나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너에게 맨 먼저 의논할게.”
고개를 들어 길동을 바라보는 연수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다.
“넌 어쩜 이렇게 점점 든든해지는 거니?”
불쑥 던진 말에 당황한 길동.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내가 좀 그렇지, 하하!”
* * *
그 시각 황제성의 VIP 대기실.
어둑어둑한 큰 방 한가운데.
커다란 중역 의자에 앉은 황제성이 두 발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담배를 태우고 있다.
그의 앞으로는 양복을 입은 다섯 명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내내 어떤 움직임도 없다.
재떨이에 담뱃불을 지져 끈 황제성이 운을 뗀다.
“일 처리를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 지금까지 제대로 된 게 뭐가 있지?”
“죄송합니다. 회장님!”
다섯 명이 일제히 90도로 허리를 숙여 용서를 구한다.
“마지막이야. 이번 4강전에서 끝내. 더는 안 돼. 내 인내심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고. 알았어?”
“네, 회장님. 명심하겠습니다.”
황제성의 중저음 톤에는 무시무시한 살기가 배어 있었다.
그의 뒤로 검붉은 기운이 마치 금방이라도 솟구칠 것처럼 크게 꿈틀거리고 있다.
그가 분노를 삭이며 간신히 참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번에 지시한 일마저 실패할 경우 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황제성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운을 뗀다.
“홍길동 저놈이 가지고 있는 큐브머신이 문제야. 지난번에 보니까 진짜 탐나더군. 역시 아리별 얘들은 다른 것 같아.”
서 있던 부하 중 하나가 맞장구를 친다.
“맞습니다. 저희 기계종도 우주최강임을 자부하는데, 막히는 부분이 있는 걸 보면.”
“길동이 저놈 큐브머신이 없으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거야.
4강전부터는 나노머신 없이 하는 걸로 해봐. 그래야 확실히 제거할 거 아니야!”
“아! 좋습니다. 제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정말 탁월한 혜안이십니다.”
다른 한 녀석이 황제성의 비위를 맞추며 아부를 해댄다.
“전부 달라붙어서 끝장을 내라고, 알았어?”
“네. 회장님. 이번엔 확실히 차질없이 진행하겠습니다.”
* * *
드디어 준결승전이 시작됐다.
첫 경기는 길동 대 검황의 경기.
전 세계의 이목이 이곳 볼음도 경기장으로 쏠렸다.
미국은 대부분의 주가 자정을 넘어 새벽 시간에 접어들었건만 30%의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유럽은 아침 출근 무렵인데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핸드폰으로 생중계를 보는 사람이 많아 무려 50%의 시청률이 나오고 있었다.
아시아권은 대부분 황금 시간대라 무려 60%가 넘는 시청률.
전 세계 인구 절반가량이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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