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협객사(殘酷俠客史)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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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없는 상대와 동행한다는 건 혼자 길을 걷는 것보다 삭막한 감이 있었다. 말을 건넨다고 대답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바위가 꿰뚫린 것처럼 내 머리에도 당장이라도 구멍 날 수 있다는 공포감에 이따금 식은땀마저 흘러 내렸다.
맨발소녀는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이 상황 자체를 즐기는 중이었다. 소리만 내지 않고 있다 뿐이지 세상 모든 것을 처음 본 것 마냥 사방을 뛰어 다녔다. 내가 마음먹고 도망치려 했다면 그럴 수 있을 정도로.
목장을 지날 때는 양에 시선이 꽂혀 일각동안 숨도 쉬지 않았다. 설마 처음 본건가? 나 역시도 세상 경험이 풍부한 편이 아니지만, 저 소녀에게 비할 바는 아닌 듯 했다.
아무튼 나는 맨발소녀의 기이한 행동에 이끌려 한참을 뒤따라 걷기만 했다.
“어디까지 가려는 거요?”
언제까지고 따라다닐 수만은 없어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입을 열어봤다. 맨발소녀가 몸을 휙 돌리더니 바닥에 글자를 적었다.
‘청화원(清花园)에서 연꽃 축제를 한데.’
청화원은 또 어디지? 그래도 목적지를 알았으니 한시름 덜었다고 생각하는 찰나 맨발소녀의 글자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시릉(始陵)엔 흙으로 된 인형이 천개나 있다지?’
시릉도 가겠다고?
‘양쪽 눈이 시퍼렇게 멍이든 귀여운 곰을 알아? 웅묘(雄猫)목장에 가면 볼 수 있데.’
음.
‘용경협(龙庆峡)은 산꼭대기에서 강이 흐른데.’
‘자금성(紫禁城)은 꼭 봐야 하고.’
‘천산폭포(天山瀑布)에 가보지 않고는 물맛을 논하지 말라던데.’
‘거용관장성(居庸關長城)도, 천단(天壇)도, 옥천산(玉泉山)과 북해(北海)호수도…….’
맨발소녀의 글자는 끝이 날 줄을 몰랐다. 이봐. 자주 도망쳤다며? 그동안 도망쳐서 뭘 한 거야? 저걸 하루에 다 보려는 생각 자체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몸이 여러 개라도 오늘 안에 그걸 다 보는 건 무리요.”
맨발소녀의 표정이 변했다. 기분이 상한건가? 참 알기 쉬운 반응이다.
‘다 보기 전까지는 안돌아 가.’
“아무 말 안겠다고 약속할 테니 나라도 좀 보내주시오.”
‘내가 잡히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실랑이가 이어지자 맨발소녀의 막무가내식의 대꾸는 정도를 넘어 나도 말문이 막히게 만들었다.
맨발소녀는 거칠게 등을 돌리더니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갑자기 묵염에 대한 원망이 샘솟았다. 애초에 날 버리고 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나올 일도 없었을 텐데. 그녀가 복귀하지 않는다면 난리가 날 것이라던 지원부장의 말이 떠올랐다. 농땡이를 피고 있다 수색에 동참하게 된 내 처지 역시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래. 이건 날 위하는 일이기도 하면서 모두를 위한 일이다.
“내가 봤을 때는 청화원부터 가는 게 좋겠소.”
맨발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다른 곳은 모르겠고 거용관이나 용경협은 북경에서 한참 외곽으로 나가야 볼 수 있는 곳이오. 일단 시내에 있는 장소부터 돌면서 차근차근 움직이는 게 낫다고 보오.”
맨발소녀가 솔깃한 듯 걸음을 멈췄다.
‘웅묘목장도 가까워.’
“그럼 청화원으로 갔다가 웅묘목장으로 가는 거요.”
‘좋아.’
그렇게 난 맨발소녀의 의견에 동조하는 척 하면서 시내로 향했다. 가는 길에 문방에 들려 간이필기구를 샀는데 맨발소녀는 의사소통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고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의외로 빈틈이 많았기에 종이에 청화원으로 갈 것이라는 내용을 적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장 어귀에서 표국의 간판도 확인했다. 문제는 맨발소녀의 주의를 완전히 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시장 한쪽에 강아지를 파는 상인이 보였다.
“저쪽으로 가보는 게 어떻소?”
양을 봤을 때도 그렇고 웅묘를 보고 싶다는 것도 그렇고. 왠지 동물이라면 좋아할 듯 싶어 맨발소녀를 이끌고 갔다. 예상대로 넋이 나가 버렸다.
기회는 이때다. 난 쏜살같이 표국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정검문으로 보내 주시오. 지금 당장.”
요금을 정확하게 계산할 세도 없이 손에 쥔 돈을 집어 던지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맨발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난 가빠진 호흡을 최대한 눌렀다. 아버지께 익힌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한 채 그대로 안면을 굳혔다. 맨발소녀는 종이에 뭘 적더니 내게 들이 밀었다.
‘웅묘부터 보자.’
뭐라고? 당연히 안돼지!
“청화원을 갔다가 목장으로 가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소. 날이 저물기 전에 황궁도 구경해야 하지 않소. 지금 목장으로 가면 빠듯할 거요.”
‘그래?’
“그렇소.”
겨우 구슬려 맘을 돌려놨지만 안심이 되지 않아 급히 지나가던 상인에게 산사자(山査子:사탕)를 구매해 맨발소녀의 입에 물려줬다. 그 효과의 탁월함은 맨발소녀가 청화원에 도착할 때까지 무척 조용했다는 것으로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말이 없으니 입증이 안 되려나.
청화원이 보이자 맨발소녀는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아주 환한 얼굴로 달려가 버렸다. 같이 있은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저 표정을 하면 적어도 일각 정도는 넋을 잃고 주변을 살핀다는 사실쯤은 파악하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는 만큼 표정의 변화는 내가 지금껏 보아온 어떤 사람보다 풍부했다. 표정만으로도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을 정도니까.
그저 꽃밭이겠거니 여겼던 청화원은 규모가 상상 이상이었다. 개인의 정원이라고 부르기엔 민망할 정도로 커다란 호수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중앙 호수를 감싸는 거대한 화원은 확실히 맨발소녀가 왜 이곳을 찾았는지 이해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해 보였다.
맨발소녀는 호수 외곽을 걸으며 신이 났는지 걸핏하면 난간 위에 올라가 양 손을 들어 올리고 ‘만세’일 것이 분명한 동작을 해보였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정작 목소리는 내지 않는 것을 보니, 확실히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있으면 정검문에서 사람들이 올 것이다. 난 배도 고파진데다 시간도 끌 겸 해서 길 한쪽에서 파는 꼬치를 한가득 사왔다. 자리를 잡고 사이좋게 나눠먹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버렸다.
툭툭.
응? 맨발소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거요?”
‘그냥. 여러 가지로.’
이제 곧 붙잡혀 돌아갈 시간입니다 아가씨.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내 목숨은 두 개가 아니니.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네.”
“한겸이오. 당신은?”
‘한진서. 근데 겸(謙)이라고? 별로 겸손해 보이지 않는데.’
“정해진 이름 그대로 따라 살면 무슨 재미가 있겠소. 그쪽도 진(眞)과 서(書)가 있으면서 발가락으로 글을 쓰지 않았소?”
음. 그러고 보니 맨발소녀, 아니 한진서는 아직도 맨발이다. 맨발이 너무 자연스러워 신경도 못쓰고 있었네. 난 상점에 들어가 청화원이란 글자가 꽃처럼 그려진 신발을 샀다. 상당한 바가지를 썼지만 외숙부에게 몰래 받은 공돈이 꽤 되는 터라 상관없었다.
신발을 사서 한진서에게 내밀었다.
“신으시오. 발바닥이 안 찢어진 게 용하오.”
‘튼튼하거든. 어쨌든 고마워.’
“고마워 할 필요 없소. 미안한건 이쪽이니.”
‘미안?’
“온 것 같군.”
순찰(巡察)이 새겨진 완장을 차고 있는 무사 다섯이 정확히 내 쪽을 보며 다가왔다. 한진서는 그들을 확인하자 지금까지 지었던 표정과는 백팔십도 다른 얼굴로 돌변했다. 차갑게 굳어진 그녀의 표정에 난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아까 그녀가 던진 돌멩이 같은 것에 스치기라도 하는 날엔 상여휴가 대신 평생휴가를 떠날 수도 있다.
한진서는 날 쏘아보며 원망의 눈길을 보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구경이고 뭐고 다 좋은데 이제 저녁이잖아.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밤새 구경할 수는 없는 거 아니야?
“네가 지원부 소속의 견습 군사인가?”
“그렇소.”
“물러서 있어. 위험하니까.”
위험?
한진서가 내 시야에서 사라진 건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이다. 사라진 그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무사들 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사들은 기습을 받았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침착하게 한진서를 둘러쌓다. 그리고 검을 꺼내 일제히 그녀를 향해 내리쳤다. 무사들이 쥐고 있는 검은 날이 살아있는 진짜 검이다. 그 검을 마치 그녀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휘두르다니. 분명 문주의 양녀라고 들었는데.
카앙!
무사들의 공격보다 놀라운 건 맨손으로 검을 쳐낸 한진서였다. 손과 검이 부딪혔음에도 쇳덩이가 부딪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발바닥만 튼튼한 게 아닌가보다. 무사들이 재차 검을 휘둘러 그녀를 압박했다.
한진서의 팔을 감싸고 있던 옷가지가 다 찢어졌지만 피는 보이지 않았다. 무사들은 섣부르게 접근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벌려 그녀의 힘을 빼는데 주력했다. 그녀가 검을 쳐내고 달려들면 무사들은 정확히 서로의 간격을 유지하며 물러섰다.
다수가 하날 상대할 때 유용해 보이는 전법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한들 그걸 상대하는 방법에 따라 상황은 천차만별로 바뀌어 버린다. 이렇게 눈으로 그 사실을 확인하니 무시무시해 보이던 그녀의 능력도 볼품없게 느껴졌다.
연화봉에서 지옥비마는 앞을 가로 막는 건 모조리 꿰뚫어 버릴 힘을 보였다. 쇳덩이. 아니 쇠꼬챙이가 된 것 마냥 포위고 뭐고 거침없이 길을 뚫었다. 그러나 한진서는 달랐다. 같은 무공을 익혔다면 비슷한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지금 그녀에게서 그날의 한철광을 떠올릴만한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기대감이 아쉬움으로 바뀔 무렵 무사의 발차기가 지친 한진서의 등에 강타했다. 그녀가 바닥에 쓰러지자 무사들의 거친 공격이 이어졌다. 범죄자를 상대하는 것처럼 일말의 자비도 없었다. 문주의 딸인데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한진서는 피를 토할 정도로 거센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무사 하나의 발을 붙잡았다.
우지끈.
분명 그런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무사는 발이 앞으로 꺾여 커다란 비명소리를 질렀다. 다른 무사의 주먹이 한진서의 뺨을 강타했다. 입술이 터지는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정확히 다음 목표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 목표는 그녀의 손에 붙잡히지 않았다.
한진서가 정신을 잃었음에도 다리를 다친 무사가 이를 갈며 그녀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어째서? 어째서 저렇게 잔혹하게 대하는 거지? 정검문은 그녀를 보호해 주고 있는 게 아니었던가?
응?
나는 분명 가만히 서있었는데 왼손이 앞으로 움직였다. 왼손에 이끌려 내 몸도 같이 앞으로 움직였다. 의식적으로 저지하려고 해봐도 그럴수록 왼손은 더욱 앞으로 뻗어 나갔다. 내가 난데없이 끼어들자 무사들이 동작을 멈췄다.
난 무릎을 꿇고 한진서 앞에 앉았다. 왼손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을 건드렸다.
“너 뭐하는 거야?”
한진서를 구타하고 있던 무사가 날 보며 소리쳤다. 이봐. 나도 멈추고 싶다고.
“미쳤어? 안 비켜?”
병이 분명하다. 공혜에게 정확한 진단을 받았어야 했는데.
왼손이 다친 무사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빼들어 그대로 무사의 발에 내리찍었다. 생전 처음 가진 느낌. 사람을 벤다는 건 말로 표현 못할 무언가가 있었다.
깡!
무사의 발을 베기 직전 다른 검이 앞을 가로 막았다. 왼손의 반응은 그것보다 빨랐다. 가로막은 무사를 향해 일직선으로 검을 날렸다. 다른 무사에 의해 다시 공격이 막혔음에도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차례로 하나하나. 만약 무사들이 서로 방어해주지 않았다면, 확언컨대 왼손은 누군가의 심장을 찌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일격으로 한진서를 제압했던 무사들을 방어에 급급하게 만들다니. 광곤을 쓰러트렸을 때도 그렇고. 왼손은 이미 내 의지와 상관없는 독자적인 체계를 갖고 있었다.
왼손이 두렵다고 느껴진 그 순간, 난 혼란에서 벗어난 무사들의 공격을 받고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무사들은 내게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또 쓰러지는 거냐? 젠장.
- 작가의말
대충 한번에 5편씩 올리게 될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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