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협객사(殘酷俠客史)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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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고 있는 건 한 사람의 이름과 백무당이 적힌 장소였다. 군사부 본관에 들어서자 커다란 지도가 보였다. 정검문 내부 지도다. 일단 각 구획별 중앙 건물을 확인해보니 대충 열 개 정도를 꼽을 수 있어 보였다. 청룡당과 백무당의 위치를 제했음에도 남은 범위가 그야말로 광범위 했다.
이제 중요한건 인물인데 내 손에 쥐어진 이름을 보고서도 누군지 알 방도가 없었다. 이건 발로 뛰면서 파악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숫자는 아예 들고 있는 종이가 없어 당장 파악할 수가 없다.
무작정 군사부를 나오다 다른 참가자와 마주쳤다. 상대는 날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순찰당, 군사부, 백무당. 이중 몇 개나 들고 있소?”
“하나.”
내 대답으로 상대가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상대가 내 질문을 기다리기에 나는 별 생각 없이 물었다.
“혹시 정답이 뭔지 알고 있소?”
상대가 흠칫 놀랐다. 알고 있는지의 여부만 물은 것이기에 대답해줘야 한다.
“모른다.”
안다고 대답하면 졸졸 따라다니면 될 텐데 말이지. 어쨌든 서로 대답이 끝나자 종이를 교환했다.
난 인물이 적힌 종이를 주고 순찰당이 적힌 종이를 받았다. 종이를 받자마자 상대의 질문에서도 답에 대한 암시를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상대는 이미 종이 하나를 버릴 생각을 하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과연. 단순히 종이 두 장을 들고 눈치만 교환하는 경기는 아니란 말인가?
딱히 갈 곳을 정할 수가 없어 군사부에서 다음 종이가 공개될 때까지 기다렸다. 나처럼 기다리는 인원이 몇 명 있었으나 서로를 경계하느라 다가오진 않았다.
공개된 종이는 인물이었다. 이로서 내가 제할 수 있는 인물은 두 명이 됐다. 궁을과 소무결. 군사부 주변을 순찰하는 무사들에게 물으니 확실한 직책을 알 수 있었다.
궁을. 암영당 제삼군사. 소무결. 백무당 제삼군사.
정검문에는 열 개의 당이 존재했다. 만약 함에 적힌 인물이 각 당의 제삼군사라면 정해진 장소를 찾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저 참가자들의 손에 들린 종이만 파악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더 발 빠르게 움직여 많은 정보를 획득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난 군사부로 돌아와 제삼군사들에 관한 정보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날 응원하는 견습 선배들에게 얻은 정보로 어렵지 않게 열 명의 명단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자 참가자들 모두 경기의 흐름을 파악한 듯 쉽게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가진 정보는 최대한 적게 노출하되 자신은 많은 것을 얻어야 하는 경기에서 순간적인 질문의 선택과 대답은 가장 큰 변수였다.
가진 종이는 단 두장 뿐. 하나는 무조건 상대에게 준다고 보면 질문 여부에 따라 모든 밑천이 들통 날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설령 상대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해도 당황한 모습만 가지고 예측의 가짓수를 줄여 나갈 수 있다. 무뚝뚝한 표정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교환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같은 종이가 돌고 도는 일이 빈번해졌다. 나 역시 장소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끝까지 교환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결국 모든 이가 나와 같다면 상대가 끝까지 숨기려는 종이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마지막 공개다. 그리고 다들 너무 여유 있어 보여서 말해주는 건데 해가 뜨려면 이제 겨우 반시진 남았어.”
조급해 질수록 더욱 숨기기 어려워 질 것이다. 장소와 숫자는 둘 중 하나로 좁혀 졌으나 인물은 아직 세 명에서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 난 일단 세명의 인물 중 한명을 찾아 가보기로 결정했다. 만약 누군가 나처럼 그 사람을 찾고 있다면 봉인된 함에 적혀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잠시만.”
막 군사부를 나서는데 제갈현이 내 앞을 막았다.
“사람들 참 이상해. 내 질문에는 대답을 하려고 들질 않아. 그런다고 숨길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야.”
“그런가?”
수석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제갈현이 의외로 어려움을 겪는 듯 했다.
“내가 제안을 하나 할게. 내 질문에 답해주는 대가로 이 종이 두 장을 다 주지. 대신 넌 질문할 기회가 없어. 어때?”
매력적인 제안이긴 하다.
“내게 종이를 다 주면 이후에 질문 자체를 할 수가 없게 될 텐데?”
“괜찮아.”
괜찮다니?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거 아니야?
“정상적으로 서로 질문하고 한 장을 바꾸는 건 어때?”
“그건 내게 너무 불공평해.”
“어째서?”
“네가 맨 처음 한 질문을 들었거든.”
뭐였더라. 정답을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던가? 설마 제갈현은 내게서 하나만 파악하면 끝낼 수 있단 소린가?
“이봐. 이 종이 두 개 모두 다른 참가자들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거야. 보증할 수 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난 귀가 좋거든. 들리는 대화를 일부러 막을 수는 없잖아. 그렇게 알찬 정보를 말이지.”
제갈현이 자신의 귀를 툭툭 쳤다. 귀가 얼마나 좋으면 멀리서 대화하는 것까지 훔쳐 들을 수 있는 거지? 나 역시 외조부와 심법을 수련하며 감각이 전보다 좋아졌음을 느끼긴 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제갈현은 잘 들리는 수준이 나보다 수십 배는 좋다는 말이 된다.
질문과 답을 모두 들을 수 있다면 굳이 종이를 교환하지 않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 이 경기에서 중요한건 상대가 숨기고 있는 패를 파악하는 날카로운 물음이니까.
엿 듣는 것만으로 답을 찾는다니. 엄청난 놈이다. 결국 종이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 질문이 돌고 돌다보면 답은 나오게 되어 있으니까.
나는 순간 이 경기가 가진 맹점을 발견했다.
왜 나는 상대가 항상 진실만을 대답할 거라고 가정한 것일까? 그건 상대가 진실을 대답하지 않으면, 이건 절대 끝나지 않을 경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건 상대가 진실을 대답한다고 믿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규칙이다.
“승락이야 거절이야?”
만약 여기에 거짓이 섞인다면? 내가 숨기고 있는 한 장의 종이를 봉인된 종이인 것처럼 사용한다면? 그럼 다른 경쟁자들의 판단을 충분히 비틀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것이다. 손에 쥐고 있는 이 종이만 알게 되면 정답을 확신할 수 있다는 제갈현조차 말이다. 묵염은 질문에 답하라고 했지 거짓으로 답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상식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라 해도 말이다.
“좋아. 받아들이지.”
제갈현이 물었다.
“좋아 묻겠어. 군사부를 가지고 있어?”
내가 숨기고 있던 한 장은 백무당이다. 직접적으로 하나를 묻는 것을 보니 상대 역시 둘 중 하나로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갈현이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대답을 지체하면 의심받을 것이다.
“그래.”
제갈현이 가지고 있던 두 장을 내밀었다. 그냥 날 믿는 거야? 너무 쉽잖아.
받은 종이는 약선당과 숫자 삼이다. 둘 다 처음 보는 종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까지 누구와도 종이를 교환하지 않았다는 제갈현의 말이 사실이라는 소리다. 확실히 사기적인 능력이다.
“답을 말해주고 싶지만 도리에 어긋날 것 같군. 아무튼 이것 하나는 확실해. 네가 상위권이야.”
만약 제갈현이 날 의심해 약선당을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면, 내 거짓말은 들통나버렸을 것이다. 난 제갈현의 종이로 인해 군사부와 숫자 칠이 정답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제갈현은 장소를 백무당으로 확신하고 있다. 제갈현이 오답을 보고하는 사이 모든 참가자들을 뒤흔들어 놓아야 한다.
내가 네 장을 가진 사실은 제갈현을 제외하면 아무도 몰랐다. 난 최대한 많은 사람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실수한척, 당황한척, 은근슬쩍 내가 가진 정보를 공개했다. 물론 중요한 한가지씩은 비틀었지만 말이다. 서로 눈치를 보느라 가까운 곳을 배회하는 이가 많았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더불어 신이난 상대방이 정보를 흘린 통에 세 명의 인물을 두 명으로 압축할 수 있었다.
일각 후 온힘을 다해 백무당으로 뛰었다. 내가 추려놓은 인물은 청룡당의 문막과 순찰당의 교원이다.
백무당 앞에는 제갈현과 어떤 사내가 서있었다. 밤새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은 덕분에 상대가 순찰당의 제삼군사교원 임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은 적기가 없을 정도로 딱 맞춰서 도착했다. 제갈현이 교원에게 보고를 했다면, 더 추론할 필요도 없이 교원이 맞을 것이다.
“여어. 단서 찾기 드디어 끝나셨나?”
제갈현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끝났소. 그쪽도 끝난 것 같군.”
“후후. 그럼 수고해.”
제갈현은 정답을 선언하기 위해 군사부로 움직였다. 혹 내가 교원에게 보고를 끝내고 먼저 달려갈 것을 우려했는지 무척 걸음이 빨랐다. 음. 왠지 내가 나쁜 놈 같아 보이지만, 상대는 힘 한번 안들이고 남의 말을 훔쳐 들을 수 있는 자다. 애초에 누가 더 나쁜지에 대한 승부가 성립될 수가 없다.
난 교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함께 군사부로 향했다. 안을 살펴보니 함에 적혀있던 열 명의 인물도 대부분 군사부에 와있었다. 종료시각이 이제 반각도 남지 않았다.
군사부에는 이미 한차례 오답의 폭풍이 휘몰아친 후였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내가 나쁜 놈 같긴 했다. 대부분 정답을 선언했지만 표정이 밝아 보이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니.
난 교원에게 칠을 보고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종이 두 장으로 시작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정답을 선언합니다. 교원과 군사부에서 칠을 외치는 것.”
정말 쉽기만 한 걸까? 위화감이 든 것은 그때부터였다. 제갈현이 기분 나쁘게 웃고 있다는 것. 생각해보면 정답을 확인한 그가 웃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설마?
제갈현은 종이를 전혀 교환하지 않고 몰래 들은 것만으로 답을 찾아낸 실력자다. 내가 거짓으로 답한 것을 알아챘다면, 날 속일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
난 교원을 뒤로하고 청룡당의 문막을 찾아 갔다.
“혹시 제갈현이 이곳에서 칠을 보고했습니까?”
“응? 정답 확인 안 해봐도 되겠어? 네가 마지막이라 우리도 무척 궁금하거든.”
“대답해 주시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한데 왜 묻는 거지? 넌 교원에게 보고했잖아? 제갈현은 내게 보고했다고.”
제갈현이 여유 있게 다가왔다.
“이정도 까지는 예상 못했어. 어떤 면에선 대단하군. 그 짧은 시간에 저 사람들은 전부 속이다니.”
목소리가 상당히 컸다. 나 혼자만 들으라고 저런 소리를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시시각각 변하는 견습 군사들의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당한건가.
제갈현에게 장소를 착각하도록 거짓말을 했음에도 통하지 않았다. 내 표정에서 찾아낸 것인지, 처음부터 내가 거짓으로 답할 것을 간파했는지 알 수가 없다. 생각지도 못했다. 제갈현 보다 늦을 지언즉 실격까지 갈 필요는 없었는데.
둘 중 하나로 좁힌 내 추론을 버리고 백무당에서 교원과 대화중인 제갈현의 거짓행동을 믿어 버린 것. 그때 이미 결정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깔끔하게 속다니.
날 지지하던 견습 선배들과 묵염의 표정이 변했다. 기대도 않고 있던 군사부 생활이 갑자기 이렇게 흥미진진해 질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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