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협객사(殘酷俠客史) 1-5
차례가 아직 멀었기에 난 지원자들을 지켜보며 조금이라도 참고할만한 점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특색을 보이는 지원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청룡당과 백무당이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만큼은 시선을 돌리기 힘들었다. 싸움에는 인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상대군사가 조금이라도 약해 보인다 싶으면 가차 없이 선공이 들어왔다.
어떤 조는 누가 공격이고 누가 방어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난투극을 벌였고, 구색을 갖춰 공격을 하다가도 진형이 흐트러져 군사는 어느새 바닥을 뒹굴고 마는 상황도 속출했다.
하후성과 마유가 특별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싸움에는 군사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작년에 왜 반이나 실려 나갔는지 알만했다.
그러다 정말 특이하게 이기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나이는 내 또래에 불과함에도 무사들이 일사분란하게 그 사람의 지시를 들었다. 무사들은 희귀한 진형을 갖추고 방어조를 공격했는데 주위사람 말을 들어보니 제갈 세가에서 만든 백왕군진(百王軍陣)이란다.
진법에도 무공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같은 실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상대가 허무하게 깨져버리는 모습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제갈현의 등장에 난 시험걱정도 잊고 한동안 진법이 가진 묘미에 정신이 팔려 버렸다. 짧은 시간에 저 복잡한 진법을 설명한 제갈현도 대단하지만, 그걸 그대로 적용해 사용하는 무사들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긴장 풀어. 꼬마군사님은 그냥 우리 뒤만 따라서 냅다 달리기만 하면 돼.”
긴장이라. 어차피 떨어질 것이라고 마음먹은 터라 딱히 긴장감 같은 건 없는데. 그러나 행여 싸움에 휘말려 다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걱정은 있었다.
우린 명오와 시가 선두에. 무령, 무량이 양 옆에. 그리고 탑경이 내 뒤를 따르는 화살모양과 비슷한 진형을 하고 공터로 나갔다. 한가운데 버티고 서있던 무사들의 시선이 전부 우리를 향했다. 대치국면이 되자 긴장감이 맴돌았다.
백무당 무사들 뒤편으로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군사가 보였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코웃음을 쳐 보였다. 방어조 가운데 서있던 험악한 인상의 청년이 말했다.
“명오. 어이가 없군. 그 꼬마는 뭐냐?”
명오는 싱긋 웃었다.
“걱정마. 미친개를 딱 좋을 만큼 패줄 군사님이니 말이야.”
명오가 뒤를 보며 빠르게 말했다.
“광곤한테는 무령, 무량이 붙고. 나머지는 우리가 해결한다. 꼬마군사님은 알아서 피해. 설령 붙잡히더라도 죽지 않을 만큼만 맞을 테니 걱정 마시고.”
죽지 않을 만큼 맞는 것과 죽기 직전까지 맞는 건…… 차이가 없다.
“그럼 신나게 놀아 볼까?”
명오와 시가 기합과 함께 달려 나갔다. 쌍둥이 형제는 가장 빠르게 광곤에게 붙었다. 탑경은 내 어깨를 툭 치더니 뒤를 가리켰다. 뒤에 숨으란 소린가?
싸움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략적인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염려했던 만큼 확실히 광곤의 실력이 월등해 보였다. 광곤은 무령과 무량의 공격을 사이좋게 받고 있음에도 밀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무령과 무량의 치고 빠지는 호흡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위험했을 순간이 여러 번 지나갔다. 그에 비해 세 명을 상대하고 있는 명오와 시는 한결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당장 세 명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실력 차가 나는 것도 아니어서 쉽게 제압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상황을 보니 백중지세. 확실한 방향 없이 이대로 시간만 흐른다면 불리해 지는 것은 이쪽이다.
상대 군사를 보호하고 있는 무사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탑경도 조금씩 앞으로 움직였다. 나도 덩달아 탑경을 따라 싸움터로 근접했는데 더 접근하다간 휘말릴 것 같아 일단 걸음을 멈췄다.
“간다!”
탑경과 무사가 충돌했다. 탑경의 힘은 상대보다 월등했다. 하지만 상대가 요리조리 피하면서 속도로 대응하기 시작하자 확실히 이기긴 힘들어 보였다.
백무당 무사들은 우리를 쓰러트리려고 싸우는 게 아니라 단지 시간만 끌고 있었다. 그게 방어조의 전략이다.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이 시험, 군사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 대 당의 전투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니까.
나도 더 이상 관조만 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싸우고 있는 난전 중이라면 작전이고 뭐고 조금의 힘이라도 보태야 맞는 거겠지. 이렇게 된 거 상대 군사와 싸움이라도 해야 할 판이란 생각이 들자 자꾸만 앞서 시험에서 쓰러져간 지원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상대군사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별다른 말이 오가지도 않았건만 상대 군사의 의중이 눈에 훤했다. 나 정도는 한주먹도 되지 않는다는 거겠지. 흘끔 주위를 살피니 다들 내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놀면 뭐하니 꼬마…….”
공격조는 선공이다.
난 상대의 말을 무시하고 십이절권의 동작을 펼치며 달려들었다. 한발을 축으로 도약해 상대의 가슴을 노렸다. 상대는 놀랐는지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내 공격을 막으려 했다.
굳이 방어하는 쪽으로 공격할 필요는 없기에 다음 동작으로 변환했다. 이번에는 이연격(二聯擊)이다. 손날로 옆구리를 노렸다. 이것이 실패한다 해도 몸이 회전하는 방향으로 힘을 실어 발뒤꿈치로 아랫배를 노릴 수 있었다. 그제 외조부께 이 동작을 펼치다가 가슴에 역공을 얻어맞고 비명횡사 할 뻔 했지.
“커억!”
상대는 외조부와 많이 달랐다. 상대군사가 아랫배와 옆구리 어느 한곳도 피하지 못하고 얻어맞자 나도 당황스러웠다. 한가락 있어 보이던 상대가 이렇게 쉽게 쓰러지다니. 설마 이렇게 이겨 버린 거야? 안락한 규림으로 돌아가는 내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장면이 점점 희미해졌다.
놀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광곤을 상대하던 쌍둥이 중 한명이 부상을 당해 쓰러졌다. 광곤은 하나 남은 상대를 신경도 쓰지 않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광곤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 당신이 보고 있는 게 맞아. 내가 그쪽 군사를 아작 냈어. 뭐라고? 여기 가만히 서있으라고?
이런 눈빛을 교환한 느낌이 들었다.
광곤이 등을 돌려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감각이 위험하다고 경고성을 내뱉었다. 상자가 코앞인데 저걸 버리고 도망쳐야 하나? 광곤의 미친 듯한 돌진에 눈만 껌벅이고 있는데 탑경이 어느새 다가와 내 앞을 막았다.
퍼엉!
탑경은 언제 가로막았냐는 듯 빠르게 튕겨나갔다. 거한이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모습은 현장에서 직접 보니 더 생동감이 넘쳤다.
정신팔려있을 때가 아니다. 다음은 나니까. 광곤은 거리가 가까워 돌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 무서운 주먹을 내 머리 위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쉬이익!
목숨이 위태위태한 순간이 여러 번 지나갔다.
난 외조부의 공격을 피했을 때 보다 정확히 열배는 더 빠르게 광곤의 공격을 피했…… 아니, 부리나케 도망쳤다. 광곤은 탑경을 일격에 날려 보낼 정도의 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속도도 무지막지했다. 내가 두 걸음 움직이면 그걸 한걸음 만에 따라 붙을 정도니까.
금세 따라잡히자 어쩔 수 없이 십이절권을 펼쳤다. 한번, 두 번, 연속동작이 끝날 때 까지 광곤은 눈썹하나 꿈쩍하지 않고 내 공격을 쳐냈다. 다행인 것은 외조부처럼 반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격한건 나지만 부딪힌 부위가 너무 아팠다. 또 펼치면 내 팔다리가 먼저 부러질 것 같아 도망칠 궁리에 급급했다. 천만다행으로 순발력 하나 만큼은 내가 나아 보였다.
반대로 몸을 틀어 광곤을 지나치다 문득 눈앞의 상자에 시선이 머물렀다. 훔치면 이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진다. 실력이 동등하다면 아무리 봐도 방어조가 유리한 시험이다. 정말 이 방법 밖에 없을까?
무슨 생각으로 상자를 향해 돌진했는지 모르겠다.
콰직!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무로 된 상자는 내 발에 채여 산산조각 나버렸고, 난데없는 상황에 공격조와 방어조가 전부 동작을 멈췄다. 다들 부서진 상자를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난 명오와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을 들어 숲을 가리켰다. 일단 후퇴. 상황을 좀 수습하고 다시 오자는 눈빛을 강하게 쏘아 보냈다. 명오는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시의 어깨를 쳤고, 무령인지 무량인지는 모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부축해 명오와 합류했다. 나가 떨어졌던 탑경도 다시 일어나자 우린 일단 숲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며 쓰러지듯 나무 기둥에 기댔다.
“이봐 꼬마군사. 무슨 생각으로 물건을 망가트린 거야?”
명오가 안전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내게 물었다.
“수, 숨 좀 돌리…….”
난 한동안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코앞을 오고갔던 광곤의 무시무시한 주먹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내가 이렇게 재빨리 도망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니. 이것이야 말로 남들에게 없는 재능일지도 모른다. 군사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꼬마군사. 이게 장난인줄 알아?”
사태가 진정되자 명오가 화가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대로 계속 저자세로 나갔다간 무사들이 내 말을 전혀 들어주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기왕 시작한 거 갈 때까지 가보자.
“생각이 있소.”
주도권을 내주지 않기 위해 시작한 평어에 명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생각?”
“방어 쪽은 물건을 지키는 게 본연의 임무요. 일단 그것은 실패했다고 봐야 하오.”
“그건 그렇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이긴 건 아니잖아.”
“전에는 이런 상황이 생긴 적 없소?”
“몰라. 군사시험에는 항상 백인대를 구성하는 신입무사들만 와서 우리도 올해가 처음이라고. 이건 군사시험이기도 하지만 신입무사들이 얼마나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가를 평가하는 자리기도 해. 실력을 비교할 수 있으면 그뿐이고 물건은 전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니까.”
“내 생각은 이렇소. 물건이 사라졌으니 절반은 성공한 셈이라고. 시간제한이 끝난다 하더라도 방어쪽 역시 꼭 승리할 것이라고 보장할 수는 없지 않소. 그것이면 충분하오.”
“충분하다니?”
“물건을 훔치거나 지키는 것 외에 또 다른 승리 조건이 있지 않소.”
무사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군사를 포함한 전원 모두 행동불가 상태가 됐을 경우 말이오.”
“그건 기준이 애매해서 승리조건이라 부르기도 뭣해. 애초에 불구처럼 일어나지 못해야 행동불가 판정을 받는데, 시험시간 내에 비등한 실력을 가진 무사들이 그 상태가 되는 건 불가능해.”
“만들면 되오.”
난 자신 있게 말했다.
“지금부터 저쪽 조원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는 것이오. 그것도 아주 확실한 방법으로.”
“확실한 방법?”
“이를테면, 죽이면 되는 것 아니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수의 싸움이라면 실력 차에서 오는 변수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광곤이라는 실력자가 있음에도 대등한 싸움이 가능했던 것은 여러 명이 한꺼번에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력자가 일대일을 하거나 하나를 여럿이 친다면 아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들은 처음부터 이것에 시험이라는 암묵적인 동의하에 싸우고 있소. 실제 상황도 그렇소? 적과 만나면 이렇게 치고 박다가 상대가 쓰러지면 기다려주고 그럴 거요? 상대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은 자라면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되오. 그 점을 노린다면…….”
난 대충의 생각을 말해 준 후 동의를 구했다. 명오가 고개를 휘저었다.
“아. 나도 몰라. 군사님이 저지른 일이니 해결책도 군사님이 찾아야 하는 건 맞아. 그런데 될까 모르겠어. 시. 네 생각은 어때?”
“재밌겠군.”
시가 킬킬거리자 무령과 무량도 따라 웃었다. 탑경은 아직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무튼 세 명이 동의하자 결정은 났다.
방어조는 공터에 남아 조각난 상자를 어떻게든 추슬러 보려고 노력 중이었다. 상대편 군사는 정신을 차리긴 했는데 내 손이 꽤 매웠는지 옆구리를 움켜쥐고 연신 욕을 해대고 있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상대 무사들이 일순 동작을 멈췄다.
“껍데기를 모아서 뭐하오? 중요한건 내용물 아니겠소?”
상대군사가 이를 갈며 말했다.
“애초에 내용물 따위는 없었다. 저건 상자 자체로 의미가 있는 거야.”
“설마? 정검문 시험이 그렇게 허술할까? 당신 말처럼 상자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 물건이 저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방어조가 문제가 있는 것이 맞지 않소?”
“말도 안 되는 소리. 네놈, 규칙은 알고 이걸 때려 부순 거냐?”
상대가 날 쏘아 보았다. 난 최대한 여유가 담긴 얼굴로 말했다.
“난 처음부터 저걸 부술 작정이었소. 행여 인정이 안 되어 그쪽이나 나나 실격패를 당한다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오.”
상대의 얼굴이 조금씩 분노로 달아오르고 있음을 확인 한 뒤 말을 이었다.
“한데 어쩌나. 나야 이번 시험, 그저 경험삼아 와본 것에 불과할 뿐인데. 보시다 시피 아직 시간이 많거든. 보아하니 그쪽은 아주 절박해 보이오. 딱하기도 하지. 내가 그쪽 나이까지 이 시험을 본다면 중도에 때려치우고 말 것이오. 가능성이 없다면 진작 그만 두는 게 낫지 않겠소? 이런 꼬마에게 농락당할 정도로 만만한 군사가 과연 정검문에 필요할지 의문이오.”
상대의 기분을 한껏 긁어 대며 난 내 장점이란 것이 이렇게 비아냥거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군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재주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오. 전원이 행동불가가 되면 이긴다는 규칙도 있으니. 요 작은 주먹에 흙냄새 좀 맡은 그쪽 군사님처럼 말이오.”
상대군사의 머릿속에서 끈 하나가 뚝 끊기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한명만 제대로 걸리면 된다.
“그리고 말인데. 그쪽에 광 뭐라고 했던가. 미친개라고 불리는 누구 있지 않소? 아까 내가 살짝 두들겨 줬더니 놀라서 상자를 부수는데도 가만있더라고. 내 주먹이 그렇게 아팠나? 누군갈 탓하기 전에 그자부터 탓해야 할 거요. 이런 주먹에 놀라다니 말이오. 딱하기도 하지.”
내가 주먹을 흔들어 보이자 광곤이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나도 이 말을 내뱉고 내 면상을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을 정돈데 광곤은 오죽할까?
“내가 무서워 그렇게 넋 놓고 있는 거요?”
번쩍이는 눈빛들. 시작이다.
“당장 저놈을 잡아 처 죽이시오!”
상대군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날 욕했다. 광곤이 눈에 불을 켜고 내게 뛰어왔다.
난 광곤이 달려드는 걸 확인하자마자 숲으로 줄행랑쳤다. 등 뒤에 들리는 바람소리만으로도 상대가 근접해오는걸 느낄 수 있었다. 잡히면 실려 나가는 지원자 명부에 이름을 올릴 것이 분명하기에 죽을힘을 다해 다리를 움직였다.
붙잡히는 거 아니야? 이렇게 절박하게 외조부와의 수련에서 도망 다녔다면 정말 한 대도 안 맞았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다.
마침내 청룡당 무사들이 잠복해 있는 근처에 다다랐다.
“꼬마야. 다신 얼씬 거리지 못하게 해주마.”
광곤의 음성이 지척에서 들렸다. 난 전력을 다해 몸을 급반전시켰다. 달리는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대나무를 들이 받았다. 데굴데굴 굴렀으나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몸을 추슬렀다.
공격조 무사들이 약속대로 홀로 떨어져 나온 무사를 포위했다. 다수가 하날 상대한다. 더러운 수법이라고 욕할지 모르나 공격조 무사들은 이미 내 의견에 동의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혼자 오시나?”
시가 광곤을 향해 검을 들이댔다. 명오와 탑경이 광곤의 뒤를 막았고 양 옆으로 쌍둥이가 달라붙었다.
난 한시름 덜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무리 광곤이라도 다섯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광곤은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은 이후 정신을 잃었다.
“무기 좀 빌려 주시오.”
“어디다 쓰게?”
명오에게 단검을 건네받자마자 광곤의 목에 들이댔다. 그리고 가볍게 그었다.
“뭐, 뭐하는 짓이야?”
명오가 내 행동에 놀라 소리쳤다.
“살갗만 그었을 뿐이오. 증거가 있어야 할 게 아니오.”
“깜짝 놀랐잖아.”
시가 정신을 잃은 광곤의 뺨을 쿡쿡 찔러 보더니 말했다.
“꼬마군사. 의외로 섬뜩한 면이 있군.”
우린 광곤을 공터까지 데려갔다. 목 부근이 피범벅이 된 광곤의 모습에 방어조 무사들의 시선이 얼어붙어 버렸다.
“흔한 격장지계(激獎之計)에 당하다니. 조언해줘야 할 군사가 같이 그래서야 되겠소?”
상대군사가 분노해 부들부들 떨었다. 이후부터는 간단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데다가 싸울 의지마저 잃어버린 그들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난 일일이 그들의 목에 칼을 대고 실제라면 목이 달아났을 것이 분명하다는 엄포를 놓았다.
“미친놈.”
“어서 해.”
“나, 나는 죽었습니다.”
그들 전부 ‘나는 죽었습니다.’를 세 번씩 반복시킨 후에야 풀어주었다. 상대군사는 닳아 사라지지는 않을까 걱정 될 정도로 이를 갈았지만,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 상황이라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자가 부서져 탈취할 물건이 없기에 우린 시간이 종료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렸다.
명오가 시험이 끝나기 직전 날 보며 말했다.
“적을 도발하는 것도 능력이지. 다시 봤어.”
“칭찬은 고맙소.”
상자를 부순 후부터 이미 뽑히리란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기에 난 미리 청룡당 무사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운이 나쁘면 그들 중 몇 명은 승급하지 못하고 내년 시험장에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종료를 알리는 깃발이 보이자 우린 모두 숲에서 걸어 나왔다. 지금으로서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몰랐기에 걱정 반, 근심 반으로 걷고 있었는데 등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너 이 새끼!”
곧바로 충격을 받아 정신을 잃었기에 이후의 상황은 떠올리고 싶어도 아무 기억이 없다.
- 작가의말
오늘은 여기까지만...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