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협객사(殘酷俠客史) 6-21
#17 축시(丑時, 오전1시-오전3시)
다른 이의 지식을 – 설령 죽은 이의 지식이라 해도 -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무한한 가능성을 갖게 된다. 경험하지 않아도 한 분야에 능통한 자가 될 수 있다? 그런 자야 말로 완벽에 가까운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혜의 말에 따르면, 고독고가 습득한 지식은 대부분 상궤를 벗어나는 사공을 익힌 자들의 것이다. 생령이란 것이 고독고 본인의 섭혼술을 단기간에 발전시켜 만들어낸 것임을 감안하면, 과거 일만의 강시를 만들며 무림공적이 됐던 때와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상대로 다시 태어난 것과 다름없었다.
언제든 손과 발이 되어줄 강력한 무사를 창조해 낼 수 있는 능력이란 것은 사실상 무적의 세력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 더 큰 문제는 고독고가 실체를 알 수 없는 몸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표로, 북궁산으로 나타나 죽음을 당했으면서도 소멸되지 않았다. 어쩌면 공혜는 정말 해선 안 될 짓을 저질러 버렸는지도 모른다. 정검문의 힘으로도 고독고와 류사혁을 저지할 수 없다면, 무림은 정말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들 것이다.
우린 객잔을 벗어나 모두가 집결하기로 한 합류지점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난 고독고에 관한 문제를 고민할 시간도 충분치 않음에도 다른 한 가지 사실 때문에 고심해야 했다.
스물한 살. 무림인이 아닌 일반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가정을 갖고 아이를 키우고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던 것이 현실로 찾아오자 내겐 일반적인 상황이 아닌 문제가 되어 버렸다. 살인귀를 죽이면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피가 묻은 손으로 아이를 대할 수 있을지 불안감이 일었다.
뒤 따라 걷고 있는 공혜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혜라면 문제없다. 류사혁의 손에서도 아이를 지켜냈을 만큼 단단한 심기를 지녔으니까. 헌데 난? 과연 내가 가정을 지키는 가운데 정검문의 군사직과 살인 모두 병행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한겸.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왜요?”
공혜와 눈이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난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혹시 이형양의로 금제된 상태를 다시 되돌릴 수 있소?”
마의가 남긴 의서를 섭렵한 공혜는 의도치는 않았으나 금기된 의술의 달인이 되어 버렸다. 류사혁이 처리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이해는 갔다. 그녀는 고독고와 같은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강호 유일의 존재니까.
“있어요. 다만…….”
공혜는 대답하기 껄끄러운지 다른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남궁경일과 태긍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인가? 뭐, 가능하기만 하다면 앞으로 평생 독 묻은 단검을 지니고 다녀야 하는 문제는 없어질 테니까. 난 고개를 끄덕여 준 후 나중에 들어도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다 온 것 같군.”
남궁경일의 음성에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결지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자 낮의 기억이 떠올라 고개를 휘저었다. 덕오에게 붙잡혀 대머리가 됐다면 자식이고 뭐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을지 모른다.
보은사의 탑은 폭발로 인해 윗부분이 재가 되어 있었다. 아침의 멋진 풍경과 비교하자면 참혹한 분위기를 풍겼으나 저것 덕분에 소주 사람들이 안전해 진 것이다. 따라서 의미 있는 희생이라고 라고 억지로 우길 수는 있다. 보은사의 승려들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해줄지는 미지수지만.
제갈현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덕오대사에게 걸려있던 섭혼술을 다른 두 문파의 문주와 마찬가지로 풀어준 것이다. 단 한사람이라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이때에 당주급의 무위를 뽐내던 덕오가 합류한다면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보은사의 입구를 지나 내부의 언덕을 오르는데 경내에서 꽤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소리가 들려왔다. 안쪽에 도착해 마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마주하자 난 제갈현이 정말 류사혁 일당을 치려고 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당에는 보은사의 승려들뿐만 아니라 참백문과 현양파의 무사들이 함께 자리해 있었다. 약간 높은 지대에 있는 작은 석탑 앞에 주요 인사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곳에 제갈현과 동료들이 서있었다.
“백건?”
내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벌떡 일어선 시의 등 뒤로 그림자 하나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난 미처 방비할 수도 없을 만큼 재빠른 돌진에 눈만 뜨고 그 움직임을 지켜봐야 했다.
팟!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날 끌어안은 그림자는 뒤쪽의 인원들, 그중에도 공혜를 확인하고 흠칫 놀랐다.
이것 참.
난 한진서와 공혜의 시선을 모두 느끼며 몸이 굳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이 달아날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이런 기분은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그 어떤 위기상황에서 보다 말문이 막혔다. 나는 분명 한진서를 거부했고 공혜를 택했다. 그러나 공혜의 눈앞에서 내 몸을 끌어안고 있는 한진서를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공혜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황산에서는 나도 죽이려 들었다. 공혜의 목숨이 위태로워 질 가능성도 충분하다.
내가 이렇다 보니 남궁경일과 태긍도 아무 소리 못하고 상황만 지켜봤다. 누가 나를 이 상황에서 구제해줄 사람 없는 건가?
“물러서십시오. 한 소저.”
뒤늦게 달려온 동료들 틈으로 제갈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영과 시가 검을 빼들고 우릴 겨눴다. 다른 동료들도 경계의 눈빛을 하고 우리 일행을 바라보자 남궁경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손을 들어올렸다.
“왜들 이러나?”
“한 소저. 물러서시라고 했습니다.”
제갈현이 재차 종용하자 한진서가 곱지 않은 시선을 쏘아 보내며 물러섰다.
“백건. 공 의원을 보니 류사혁과 접촉하고 온 게 확실한 것 같은데?”
“그렇소.”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해 줘.”
제갈현이 주머니 하나를 꺼내 내게 던졌다.
“너와 공 의원. 그리고 함께 온…….”
제갈현이 조금 놀란 눈으로 태긍을 바라봤다.
“태긍? 죽었다고 생각했었는데.”
태긍이 싱긋 웃었다.
“워낙 명줄이 긴 놈이라 말이지요.”
주머니 속을 보니 당중산이 만든 침이 들어 있었다. 우리가 섭혼술에 걸려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건가?
“어이. 제갈 군사. 난 이미 한번 했는데 빠져도 되겠지?”
남궁경일이 손을 든 상태로 앞으로 나서자 제갈현이 고개를 저었다.
“이들을 확인한 이후에 이쪽으로 오십시오.”
“내 참. 백건. 얼른 해치워. 난 그 고통 다신 겪고 싶지 않으니.”
남궁경일은 혀를 차며 자리로 복귀했다.
난 침을 손에 쥐고 고개를 돌렸다. 제갈현의 말도 일리는 있다. 온종일 정신이 홀린 사람들을 상대해 왔는데 우리라고 걸리지 않았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을 테지. 하지만 고독고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공혜가 섭혼술에 걸려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거기다 태긍의 섭혼술을 풀어주기까지 했기에 더더욱 의심이 들지 않았다.
“저쪽의 의심을 먼저 풀어야 할 것 같소.”
지금으로서는 확실히 하고 가는 게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그건 뭐죠?”
난 공혜에게 침의 역할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독으로 머리를 마비시킨 후 해독하여 섭혼술을 해제하는 방법을 찾았고, 그것으로 여러 사람을 구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독이요? 지금 독을 머리에 꼽아야 한다는 말이에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순 없어요.”
공혜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녀의 음성에 동료들의 안색이 변했다.
“아무리 미량이라고 해도 아이에게 영향이 갈 수 있는 신경독을 체내로 받아들일 순 없어요.”
아이. 영향. 이 단어에 동료들은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라 공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나는 순간 한진서의 눈치를 보게 됐다. 이걸로 단념한다면 그것도 괜찮……. 난 등골이 오싹해 짐을 느끼고 즉시 고개를 돌렸다.
매도파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좌 군사. 공 의원이 아이라고 한건 설마 배, 배, 뱃속의 아이를 말하는 건가?”
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누구겠소?”
“그때 했던 소리가 허세가 아니었다니. 자네 정말…….”
매도파가 허리 쪽에 슬쩍 손을 대고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삭막했던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 지는가 싶었지만 제갈현은 불가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백건. 너는 네 스스로 류사혁에게 항복했어. 우린 네가 죽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작전을 짜는 중이었어. 그런데 공 의원과 함께 멀쩡히 살아 나오다니. 내가 의심하지 않아야할 합리적인 이유를 대봐.”
합리적인 이유라. 제갈현 정도면 눈치를 챘을 텐데. 다른 동료를 납득시켜라 이 말인가?
“난 적들의 섭혼술이 걸리지 않는 몸이오. 금노야의 경우와 비슷하오. 아마도 죽었어야할 운명에서 비켜나왔기 때문이 아닌가 싶소. 그래서 고독고는 내게 다른 종류의 섭혼술을 시행했소. 내 속에는 나 말고도 다른 인격이 존재하오. 그 인격은 류사혁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돕길 원하고 있소.”
난 이후 저택 안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 했다. 동료들은 내가 고생한 부분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 없이 받아들이더니, 공혜가 류사혁을 협박해 무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십일이나 함께 고생했는데 이렇게 차별대우 하다니.
“좋아. 하지만 네가 류사혁에 동조하고 있는 인격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지?”
“믿지 않으면요?”
공혜가 발끈해서 앞으로 나섰다.
“우릴 포박해서 심문이라도 할 건가요?”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하니까요.”
제갈현이 유영에게 눈짓했다. 유영이 검을 겨눈 자세를 유지한 채 강제로라도 침을 놓겠다는 듯 다가서자 공혜가 흠칫해서 물러섰다. 난 어떡하면 의심을 풀 수 있을지 고민하던 와중에 제갈현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푸른빛이 맴도는 것을 감지했다.
뭐지? 왜 내력을 끌어 올리고 있는 거지?
다음 순간, 제갈현의 전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적들과 같은 기운을 풍기는 자가 있어.’라는 음성에 난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하는 기분으로 고개를 돌리다 공혜의 등 뒤로 한 사내가 쏜살같이 접근하는 것을 확인했다. 눈으로 보고 반응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유영이 급히 달려들었으나 태긍의 속도가 더 빨랐다.
태긍은 공혜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지에서 돌아온 동료를 이렇게 박대할 줄은 몰랐어.”
동료들 전부 무기를 빼들고 태긍의 주위를 감쌌다.
태긍에게 가해진 섭혼술은 분명 해제했다고 들었다. 다른 금제술이라도 행했다면 애초에 나와 공혜의 탈출을 도운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난 혼란스러운 감정을 억누른 채 태긍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미리 밝혀두지만 내 목이 달아나기 전에 이 손을 먼저 움직일 자신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
태긍의 바뀐 말투와 눈빛에서 난 한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독고. 이번엔 그 몸에 들어간 건가?”
“하하. 역시 빨라. 그럼 내가 왜 우리 편까지 속여 가며 널 따라왔는지도 알고 있겠군.”
공혜의 목숨보다, 이미 손에 들어왔던 나보다 더한 가치가 있는 건……. 난 자연스레 한진서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네놈들 때문에 일정을 앞당겨야 하는 불이익이 생겼어. 그럼 우리도 그만한 이득을 챙겨야 하지 않겠어?”
제갈현이 태긍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말했다.
“너 혼자 여기서 무슨 짓을 할 수 있다는 거지? 공 의원을 건드리는 순간 너 역시 살아 나갈 수 없어.”
“그럼 한번 죽여 봐.”
공혜의 어깨를 꿰뚫고 단검이 비죽 솟아 나왔다.
“흐읏.”
그 광경에 모두 깊은 침묵상태에 빠져 들었다. 공혜는 가까스로 비명을 삼켰으나 파리해진 안색과 일그러진 눈썹은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 있는 그대로 전해주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에 쥔 검에 내력이 깃들었다. 단칼에 베어 버리고 싶었으나 아직 공혜의 목에 닿아있는 칼날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난 이를 악물고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한진서를 넘겨.”
“그녀는 물건이 아니야.”
“네 아이를 품고 있는 여자를 죽이면서까지 한진서를 보낼 수 없다 이건가? 냉정하군. 다시 한 번 말하지. 한진서를 넘기면 너희들 전부 살려 보내 주겠어. 우리 일을 망쳐놨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이대로 공혜가 죽는다면 나는 아마 죄책감에 빠져 평생을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한진서를 저들의 손에 넘기는 것 또한 향후 무림에 어떤 폭풍이 휘몰아칠지 모를 엄청난 일이 되어 버린다. 어느 쪽이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동료들의 시선은 날 향해 있었다. 내가 모든 것을 무시하고 공격하자는 눈빛만 보내도 전력을 다해 움직여줄 이들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빈틈을 노려 공혜를 구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제기랄! 내 스스로 날 욕해봤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한진서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해가 지기 전에 네가 했던 말을 들을 걸 그랬나봐.”
“당신 잘못이 아니오.”
한진서는 태긍을 보며 말했다.
“날 원한다고 했어? 좋아.”
태긍이 피식 웃었다.
“눈물겨운 희생이군.”
난 한진서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무슨 짓이오?”
“내가 가면 살려준다잖아.”
“아직은 아니오.”
아직 아니다.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것뿐이다. 공혜와 한진서 모두를 구해낼 가능성이 아직은……. 난 오른쪽 어깨를 관통당해 상당한 피를 흘리고 있는 공혜와 눈이 마주쳤다. 심장에 조금씩 통증이 일기 시작했다.
“네가 아까 말했잖아. 내 부탁을 무조건 들어 주겠다고. 그러니 말리지 마.”
한진서는 어깨에 올려 진 내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이정도 빚이면 평생 날 잊을 수 없겠지?”
한진서의 미소에 심장이 도려낼 듯 아파왔다. 지옥비마가 가슴 속에서 미쳐 날뛰기라도 하는 것처럼 피가 부글부글 끓었다.
한진서가 태긍 앞으로 걸어갔다.
“이동을 할까 하는데. 혹 이 몸을 공격하려는 수작을 부리기라도 한다면 이번엔 심장을 꿰뚫을 거야.”
“난 너희처럼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아. 공혜를 놔줘. 그럼 네가 싫다고 해도 널 따라가 줄 테니.”
태긍은 공혜의 목에 닿은 검을 서서히 한진서의 목 쪽으로 움직였다.
“신용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군.”
태긍이 공혜를 앞으로 밀어내며 한진서의 목을 휘감았다. 점혈을 당한 한진서의 몸이 축 늘어지자 태긍과 가장 가까이 서있던 유영이 달려 나가 공혜의 몸을 부축했다.
난 심장에서 전해지는 고통 때문에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한진서가 위기에 처하고 공혜가 안전해졌다는 사실에 지옥비마가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태긍은 거리를 좁혀오는 시에게 말했다.
“한진서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건가?”
“그 소저를 원한다며? 네놈 손으로 죽일 것 같지 않은데?”
“시체만 있어도 상관없거든. 뭐. 너희들이 시체를 불태운다면 달라지겠지만. 아마 그러기 전에 우리에게 붙잡혀 똑같은 시체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겠지.”
시가 동작을 멈췄다.
“한진서를 제외하면 너희 중에 날 붙잡을 실력을 지닌 사람은 없어. 더 놀아주고 싶어도 날이 밝으면 움직여야 하거든. 말했지만 이대로 너희가 꽁무니 빠지게 도망친다면 굳이 쫓지 않겠어.”
태긍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일견하기에도 나 아니면 쉽게 따라갈 수 없는 경공술이다.
난 사라지는 한진서의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통증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을 골랐다. 한진서가 붙잡았던 손의 체온이 아직 가시지 않았건만, 그녀는 이제 류사혁 일당의 손에 들어가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서 의원! 어서 도구를 가져와!”
“젠장. 넋 놓고 당했어.”
“백건. 이 멍청한 자식아! 걱정시킨 것도 모자라 적이랑 함께 찾아와?”
“이번엔 경솔했어.”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챘으면 좋았을걸.”
“힘들었을 거야. 그자 처음부터 공 의원 옆에서 한 차례도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귓가로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에게 미안하군. 공혜에게도. 한진서에게도. 내 심장에게도.
가빠오는 숨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 자리에 주저앉았다. 부상을 당한 공혜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데. 몸이 도저히 말을 듣지 않는다. 눈까지 천근만근 감겨와 정신을 놓기 직전의 상태까지 도달했다.
이대로 쉬고 싶다.
오늘 입은 수많은 충격과 고통들은 두고두고 내 몸을 괴롭게 만들 것이다.
저벅. 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려와 억지로 눈을 떴다. 익숙한 발모양이다. 고개를 더 위로 들어보니 어깨를 움켜쥐고 단단히 화가 나있는 표정으로 다가온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피를 많이 흘렸을 텐데 그리 쌩쌩하게 움직일 기력이 남은 건가?
짝!
공혜의 손이 매섭게 내 뺨을 때리고 사라졌다.
“비겁하게 굴지 마요. 당신이 시작했으면 당신이 끝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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