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협객사(殘酷俠客史) 4-22
마흔다섯째 날. 오후.
난 다시 눈을 감고 싶어졌다. 정신을 잃은 건 잠깐이었으나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버렸다. 한진서의 어깨에 메여 그녀를 붙잡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어지럼증이 먼저 일었다.
우린. 아니 한진서는 와양 내부를 가로 질러 동문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그녀를 쫓아 와양에 진을 치고 있던 무림인들이 달려들고 있었는데 그 수가 어림잡아도 수백에 달했다. 문제는 그들이 아닌 그들 사이사이에 보이고 있는 존재였다.
녹강시. 단 두 구 만으로 정검문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던 적표의 사령이 접근하고 있었다. 이대론 위험하다.
“내려 주시오.”
말을 꺼내자마자 한진서의 주먹이 날아왔다. 이런…….
마흔다섯째 날. 밤.
난 부어오른 턱을 어루만지며 눈을 떴다. 등에서 한기가 몰려왔다. 사방이 어두웠으나 한쪽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축축한 습기가 느껴지는 것을 보니 어딘가의 토굴인 듯 했다.
왼쪽 어깨에 닿은 무게감에 고개를 돌리니 한진서가 기대 잠을 청하고 있었다. 춥기도 하고 주변을 확실히 관찰하기 위해 왼팔에 피를 살짝 흘려보냈다.
한진서의 몸 곳곳엔 격전의 흔적이 가득했다. 이마엔 멍이 들어 있었고 손에도 상처가 가득했다. 옷도 군데군데 찢어진 것이 아무래도 심각한 전투를 벌인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몸에는 상처하나 없었다. 그녀가 가격해 부어오른 턱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에 한진서가 반짝하고 눈을 떴다.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또 때릴 거요?”
도리도리. 난 안심하고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도망친 거요?”
“도망친 게 아니야.”
어딜 따져 봐도 지금은 도망치다 숨어있는 상황이다. 섣불리 몰아 붙였다가 얻어맞으면 큰일이기에 잠자코 한진서의 말을 들었다.
“앞으로 내 마음대로 움직이겠다고 선언한 거야.”
순간 짜증이 인내심을 밀쳐내 버렸다.
“상황 파악은 하고서 그런 소릴 하는 거요? 섭독문은 당신을 차지하기 위해 문파의 사활을 걸었소. 적표. 류사혁도 아직 당신을 포기한 것이 아니오. 주작당주까지 전장에 투입된 마당에 당신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결전을 준비한 이대의 무사들은 뭐가 되겠소? 전대 마두의 딸을 위해 목숨을 걸었는데, 본인이 그것을 거부하다니.”
쏘아대고 보니 한진서가 주먹이 코앞인 거리에서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아.”
다행히 한진서는 발끈하지 않았다. 아니, 발끈은 고사하고 이상할 정도로 침작했다.
“그리고 네가 날 안전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도 알아.”
“무슨…….”
가장 안전한 곳이 나라고 했었던가?
“넌 세상 누구보다 날 이해하고 있어. 왜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날 잘 알고 있다고 느껴져. 네가 내게 마음을 열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말이야.”
“당신을 잘 안다고 당신을 안전하게 만들어 줄 수 없소.”
“있어.”
한진서는 단호했다.
“넌 날 보호하던 정검문 사람들과 달라. 네가 날 이용하려 들었다면, 나는 아마 네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런데 넌 내게 항상 선택지를 줬어. 넌 나보다 훨씬 현명해. 그런데도 내 의사를 존중했어. 왜지? 난 항상 네게 피해를 줬는데.”
“그건……. 단순한 동정일 뿐이오.”
아니다. 아마도 내 가슴에 한진서를 도울 수밖에 없는 강한 의지가 들어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갖고 있던 심장. 내가 살행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준 지옥비마의 의지가 날 움직이게 했을 것이다.
“이제부터 날 이용해. 대신 날 자유롭게 만들어줘.”
“어떻게 이용당하는 대상에게 자유를 안겨줄 수 있겠소?”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넌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나보다 똑똑하고, 날 잘 아니까. 그리고 내가 널 무척 좋아하니까.”
한진서는 얼굴을 붉혔다. 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다 가슴에서 찌릿한 고통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한진서는 평생을 압박 속에 살았다. 한 번도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들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목소리를 잃고, 불행한 처지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도 잃었다. 무엇이 그녀를 변하게 만든 것일까? 그것이 설마 나 때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떠올라 머리를 흔들었다.
지옥비마의 무공을 자세하게 알고 있는 존재는 천하에서 한진서가 유일하다. 그녀가 내 말을 따르게 된다면 난 심장의 기억과 금제술의 부작용으로 밖에 얻을 수 없었던 지옥비마의 능력을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용해 달라고? 이쪽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어째서 가슴이 이렇게 답답한 것인지 모르겠다.
#13
마흔아홉째 날.
정검분타가 위치한 회원을 기점으로 북동쪽의 넓은 땅을 화북(華北)평원이라 부른다. 회화강이 흐르고 완만한 땅이 많은 이곳은 가는 곳마다 밭뿐인 곡창지대였다.
나와 한진서는 와양을 벗어나 회화강의 지류를 따라 이동 중이었다. 와양에서 정동 쪽으로 수백 리를 움직이면 숙주(宿州)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일단은 그곳이 첫 번째 목적지였다.
“여긴 그렇게 볼게 없네.”
“모든 땅이 용경협 같은 명소라면 명소의 의미가 없지 않겠소.”
“이곳의 명소는 어딘데?”
“모르오.”
한진서를 쫓는 무림인들의 눈을 피해 위장 아닌 위장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정검문의 손에 극진히 보호받아온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알고 있는 이는 드물었다. 남장을 하고 갓을 쓴 것만으로도 충분한 변장이 가능했다. 나 역시 정검문의 나부랭이 군사였기에 이름조차 모르는 이들이 허다했다. 다만 지금쯤이면 정검문의 말단 군사가 납치됐다는 사실만큼은 널리 퍼져있을 것이다.
“숙주에 가면 뭘 해야 해?”
“가서 말해 주겠소.”
“심심해.”
“그럼 돌아가겠소?”
한진서는 얼른 고개를 흔들고 저만치 달려 나갔다.
나는 일단 한진서를 돕기로 결정했다. 금의위에 적표에 섭독문에 정검문까지.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추적하고 있을 상황에 한진서를 버려두고 복귀하자니 넷 중 한곳에 내 목이 먼저 달아날지 모른다는 판단이 들었다.
내게도 이득은 있었다. 한진서의 괴행동에 납치되어 희생양이 되어버린 신세는 내가 추구하려던 이상적인 위치와 연결되는 점이 꽤 많았다. 난 지금 무슨 짓을 해도 의심을 피할 수 있다. 사망유희가 막 시작된 장소에서의 자유행동이라면 이 사실 하나 만으로도 엄청난 기쁨이다.
물론 이것만이 한진서의 뜻에 동조한 이유는 아니다. 그녀는 나를 강하게 만들 수 있다. 태풍의 핵이 되어버린 존재가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난 사망유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언제, 어디에서든 원하는 싸움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 이 이점은 크다. 안휘성에서 벌어지는 큰 전쟁까지 주도권을 갖고 조정할 수 있다면, 각지의 유명한 살인귀들을 모으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향력을 갖게 되는 만큼 이것으로 겪게 될 위험은 지금까지완 비교하지 못할 수준이 될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다.
난 와양에서 벗어난 삼일동안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는 일에 몰두했다. 한진서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싸움을 가속시킬 필요성이 있었다.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져야 그녀에 대한 관심을 돌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다. 혼자의 힘이 아닌 집단의 힘. 그녀의 존재감을 이용해 움직여줄 말이 될 자들을 모으는 것이 급선무였다.
포전인옥(抛磚引玉)의 계. 작인 미끼를 던져 큰 이득을 봐야 한다. 한진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도 그녀의 이름만으로 세력을 움직이려면 유사한 존재가 필요하다. 극히 비슷해서 그녀와 따로 떨어져 설명하기 힘든 존재. 지옥비마의 후예라고 해도 먹힐 법한…….
난 그런 존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숙주에서 벌어질 작은 축제를 앞두고 벌써부터 흥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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