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협객사(殘酷俠客史) 4-12
교염염이 빠르게 질주하며 귀도방 무사들과 싸우고 있었다. 날카로운 쾌검으로 추격을 저지하고 있지만 수적으로 너무 불리해 보였다. 더군다나 소리를 듣고 더 많은 무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귀도방 뿐만 아니라 다른 세 문파도 움직이고 있다. 아무리 실력이 떨어지는 무사들뿐이라 해도 이렇게 숫자가 많아서는 승산이 없다.
난 고민에 빠졌다. 교염염에게 주의가 몰리는 사이 어느 한쪽 성벽을 돌파한다면 빠져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정검문의 일반적인 군사로서 판단을 내리자면, 이 자리를 벗어나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그러나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임무 첫날부터 한사람이 당한다면 정검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정찰이 실패한데다 내가 참여한 조에서 사상자까지 생겨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이렇게 인원을 배분한건 나니까.
난 검을 뽑아 들고 귀도방 무사들 틈으로 뛰어 들었다.
교염염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던 무사들은 내 접근을 신경 쓰지 못했다. 한 무사의 등 뒤로 검을 찔러 넣었다. 검이 허파를 관통하자 무사의 몸이 꿈틀거렸다. 쓰러진 무사의 몸을 왼손의 괴력을 이용해 반대쪽으로 집어 던졌다.
허공에서 동료가 떨어지자 무사들의 시선이 전부 그쪽을 향했다. 난 한 무사의 어깨를 박차고 뛰어올라 접전중인 교염염 근처로 날아들었다. 뒤늦게 날 발견한 무사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검으로 연이어 몰려드는 병장기를 쳐냈다.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코앞까지 날아든 도를 왼손으로 붙잡았다.
“헛.”
상대 무사가 도를 다시 거두더니 기겁했다. 도의 끝에 왼손의 손가락 자국이 찍혀있었다. 그러고 보니 왼손 끝이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피의 조절이 조금 과했나? 갑작스럽게 난입한 덕분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난 교염염을 보며 물었다.
“괜찮소?”
교염염은 날 확인하고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뭐지? 교염염은 날 등지고 벌떼같이 모여드는 무사들을 향해 자세를 잡았다.
슈우욱!
교염염의 검이 전방을 벴다. 순식간에 대여섯의 무사가 쓰러졌다. 빠르기도 빠르기지만 무쇠도 잘라 버릴 것 같은 위력을 지닌 발검에 교염염 앞에 뻥 뚫린 공간이 생겨났다. 놀랄 새도 없이 교염염 앞으로 뛰쳐나갔다. 이건 마치 날 미끼로 던져두고 혼자 도망 가버리는 모양새였다.
“움직여.”
다행히 이번에는 혼자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난 골목 쪽을 가리켰다.
“일단 골목으로.”
넓은 길은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추적을 당한다. 난 교염염이 만든 틈을 지나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당황한 귀도방 무사들이 뒤쫓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상당한 거리를 벌인 후였다.
모퉁이를 지나 몸을 돌리는데 귀도방 무사와 마주쳤다. 난 달리는 속도 그대로 상대를 낚아챘다.
“적……. 크읍.”
왼손으로 상대 입을 막은 채 앞으로 달려 나갔다. 교염염은 내 옆에서 후위로 이동했다. 앞쪽이 좁은 길이기도 했지만, 내 뒤를 따르겠다는 표현이 분명했다. 낚아챈 무사를 골목 끝에 처박아 두고 미로처럼 얽혀있는 길로 들어섰다.
지리는 몰라도 감각은 최상이다. 우린 적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곳으로 계속해서 이동했다.
“이리 오시오.”
인적도 없고 은신하기도 안성맞춤인 공간이 보이기에 교염염에게 손짓했다. 상자가 많이 쌓여있는 창고였다.
휘익!
쌓여있는 상자 틈에서 난데없이 화살이 날아왔다. 난 반사적으로 왼손을 휘둘러 쳐냈다. 시귀의 활만큼은 아니나 묵직한 느낌의 꽤나 위력적인 화살이었다. 앞에서 희미하지만 기척이 느껴졌다.
“몽우?”
지금 같은 상황에 몽우가 아니고서야 이런 곳에 숨어 활을 쏘는 자를 만날 리가 없었다. 안쪽에서 몽우의 음성이 들려왔다.
“추격자는?”
“따돌린 것 같소.”
“들어와.”
어느새 이런 곳에 자리를 잡고 숨어있던 것일까? 난 안으로 들어가서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몽우의 복장. 북쪽 성벽에서 본적 있는 적숭파 사람들이 입고 있던 옷이었다. 그 와중에 뺐어 입었단 말인가?
“혹시 삭풍월은 못 봤소?”
몽우는 고개를 저었다. 난 긴장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근 일각을 전력 질주한 통에 숨이 가빴다. 운이 좋아 몽우와 조우했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몽우가 물었다.
“어쩔 생각이지?”
난 호흡을 고르며 생각해둔 바를 말했다.
“도시 전체에 포위망이 깔려 있소. 삭풍월을 찾지 못하면 나루터로 간다고 해도 의미가 없소.”
“동의해.”
“적들의 실력은 돌파하는 데는 문제가 없는 수준이오. 강제로 성벽을 넘으면 위험부담은 있겠지만 충분히 회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오. 아직 다른 소란스러움은 없는 것을 보니 삭풍월이 들킨 것 같진 않소. 그녀가 몽성의 네 문파 모두 동맹을 맺고 있는 점을 알아챘다면 더 많은 조사를 하기위한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필요하오.”
“또 싸우겠다는 건가?”
“최대한 시간을 벌고 빠져나가자는 거요.”
몽우는 생각에 잠겼다. 교염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 다 내 의견에 동의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삭풍월이 자유롭게 움직일 여건을 마련해 주기 위해선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염시(炎矢)는 열 세발 남았다. 이 화살 한도 내에서 널 지원하겠다.”
화살을 다 쏘면 혼자 도망가겠다는 말로 들렸지만 어쨌든 찬성의 뜻이다. 난 교염염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쩌시겠소?”
“싫어.”
너무 직접적인 대답을 들어 순간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착각이 일었다.
“시간을 끌 필요가 뭐가 있어?”
교염염이 되물었다. 무슨 소리지?
“공격해버리면 되잖아.”
몇 마디 말로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결벽증이 있기에 까다로울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던 것뿐이다. 교염염은 주저함이 없다.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알고 있고 그것을 활용하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오늘 본 쾌검술은 그녀가 왜 정검대에 왔는지 충분히 납득하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좋소. 그러나 정황상 발을 빼야할 상황이 오면 후퇴해야하오.”
도망이야 아까 상황으로 볼 때 두 사람이 알아서 더 잘할 것이다. 난 교염염의 의견에 동의했다. 공격을 가하는 것으로도 시간을 끄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우린 차후 뱃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회화강과 가장 가까운 혈야회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단 세 명이서 한 문파를 공격하기 위해 움직이다니, 몽성에 들어올 때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다.
혈야회로의 이동을 시작했다.
우린 귀도방의 수색을 피해 차근차근 움직였다. 몽우가 앞장서고 교염염과 내가 뒤따랐다. 몽우는 적절한 손짓으로 숨어야 할 때와 이동해야 할 때를 알려주었다. 몽우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무척 효과적으로 느껴졌다. 그 짧은 사이 적숭파로 위장하고 다녔다는 것부터가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을 반증하고도 남는다.
나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내가 한 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저들은 내가 누군지 잘 모른다. 그저 군사로써 정검대에 참여한 인물이라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내가 두 사람을 못미더워 한만큼 저들들도 내 능력을 믿지 못한 건 아닐까?
교염염의 쾌검만 해도 내가 쉽게 받아낼 수준은 아니다. 제남의 살인마 셋을 간단하게 처리 했다고 해서 정검대 무사들보다 높은 실력을 갖고 있다고 착각해선 안 된다. 그간 지옥비마의 능력에 심취해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옥비마의 심법은 오로지 살인마를 상대할 때만 펼쳐야 한다. 그것을 항시 염두에 두지 않으면 내가 남모르게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들어 버릴 것이다.
몽우가 손을 들어 올렸다.
“도착했다.”
혈야회의 총단은 귀도방처럼 환한 불이 밝혀져 있었다. 입구엔 수십의 무사가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귀도방을 습격했을 뿐이지만 반대편의 문파까지 단단히 방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동맹을 기정사실화 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한 증거였다.
“몽우. 보통의 화살은 얼마나 쏠 수 있소?”
몽우는 봇짐 안에 손을 넣어 만지작거리더니 말했다.
“사십 발. 화탄은 다섯 개 남았다. 화살에 꿰어 쏜다면 염시만큼 정확하진 않지만 더 넓은 곳에 충격을 줄 수 있다.”
“알겠소. 지금부터 두 사람 다 내 말 잘 들으시오.”
난 혈야회를 공격하고 동문으로 빠져나갈 계획을 설명했다.
“나와 교염염이 안으로 진입하면 몽우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적들의 건물에 피해를 주시오. 혈야회가 공격 받고 있다는 사실을 삭풍월이 알아 챌 수 있도록 소란을 피워야 하오. 교염염은 항상 몽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전투를 벌이시오. 저들을 섬멸하는 게 목적이 아니니 가능한 많은 피해를 입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좋을 거요. 몽우는 화살이 팔 할 정도 소비됐을 때 가장 큰 건물의 지붕위에 폭발을 일으켜 주시오. 그때가 되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동문으로 이동하는 거요. 삭풍월이 찾아낼 정보가 가장 우선순위라는 걸 잊어선 안 되오.”
“알겠다.”
몽우가 대답했다. 난 교염염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시작 합시다.”
혈우회의 입구로 진입하려는데 몽우의 음성이 들려왔다.
“건투를 빌지.”
“그쪽도.”
정검문의 적이라고 판단되는 세력과 싸움을 벌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정검대원 대부분은 충분한 경험을 쌓았겠지만, 나는 문서로 읽고 귀로 들은 것이 전부였다. 사망유희로 정검문이 강해진다면, 나 역시도 성장할 것이다. 심장을 흥분시키는 살인마는 없지만 이 상황은 충분히 즐길 만 했다.
“적이다!”
교염염이 빠르게 두 명의 무사를 처리했다. 그녀가 등장하자 혈우회 무사들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언제 검을 뽑았는지 확인할 수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저걸 내가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끔찍할 뿐이다.
콰아앙!
혈우회의 건물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일었다. 귀도방에서 보여준 화살의 위력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화탄을 쏘아 보낸 것일까? 화탄의 위력은 후발대와 함께 오며 체감한 적이 있다. 그때는 정확도가 엉망이라 대규모의 교전이 아니라면 효과적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몽우처럼 원거리 무기를 정교하게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다른 얘기가 될 것이다. 화살은 치명적인 곳을 관통하지 않는 한 상대를 죽이기 힘들다. 몸에 박힌 화살이 잠시 뒤 폭발해 버린다면 부상을 입는 수준에서 끝나진 않을 것이다.
낮에 몽우가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몽우는 여러모로 위협적인 능력을 갖춘 후위지원에 특화된 무사다.
난 담장을 뛰어넘어 안으로 진입했다.
건물의 폭발로 상당한 무사들이 공황에 빠져 있었다. 난 처음부터 교염염과 떨어질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더욱 안으로 이동했다. 교염염의 쾌검은 대규모 교전에서도 위력을 잃지 않았다.
내가 한겸과 갈고 닦은 지옥류 대부분은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동작에 불과하다. 내 검으로 교염염 수준의 위협을 가하긴 힘들다. 어차피 한두 명을 상대해야한다면 잔챙이가 아닌 지휘관 급의 무사를 상대하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왼팔에 피를 흘려보냈다. 그간 적당히 조절하는 것에만 심혈을 기울여 왔다. 타오르기 직전에 멈추는 것도 익숙하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손끝이 달아오르지 않았다.
강한 기운을 찾아 혈우회의 건물 사이를 달리는데 무사 한명이 날 발견하고 뒤쫓기 시작했다. 상대는 내력이 미약한 무사들과는 달리 상당한 기운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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