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협객사(殘酷俠客史) 4-7
“축하해요.”
소율이 말을 걸어왔다.
“축하 받을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정검대에 어떤 무사들이 오는지 알면 축하 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될 거에요.”
“무슨 의미요?”
“혹시 청풍검이 사풍검결을 정검문에 넘긴 것은 알고 있어요?”
나야 류사혁에게 정확하게 들어 알고 있지만, 소율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정검대의 무사중 상당수가 사풍검결을 익히고 있어요. 물론 그것보다 더 강력한 무공을 익힌 사람도 있지만, 사풍검결 덕분에 상승고수의 반열에 오른 사람도 적지 않아요. 당신이 한겸임을 알면 대우가……. 우읍.”
아니 이 여자가. 난 소율의 입을 막고 담벼락 사이로 잡아끌었다.
“비밀을 지켜 달라고 말하지 않았소. 날 쫓아내려고 작정한 거요?”
“이미 다 알려진 거 아니었어요?”
“알려지다니?”
“혜 언니가 그랬어요. 손궁 어르신이 당신을 만나기 위해 회원에 들를 거라고. 당신이 말한 거 아니에요?”
누가 누굴 만나?
“비밀로 하겠다면 지켜주겠지만, 청풍검의 손자는 당신이 유일한데 탄로 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나는 소율을 놓아둔 채 공혜의 거처로 향했다. 정신없이 달려가 공혜의 방 앞에 도착했다.
급히 방문을 열었다.
“어?”
평소에는 이러지 않는다. 안에 누가 있건 말건 막무가내로 문을 여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옷을 갈아입고 있던 공혜의 맨살을 감상하며 어색한 순간을 맞이하게 된 건, 다 평소에 하지 않을 짓을 저질러 버린 덕분이다.
“웬일이에요?”
공혜는 태연하게 상의를 내리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등을 돌렸다. 그녀처럼 침착하게 받아칠 수가 없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외조부님이 이곳에 온다는 말을 들었소.”
“그래요? 어쩐 일로 오신데요?”
“그거야 당신이 더 잘 알지 않소?”
잠시 공혜의 음성이 멈췄다. 갑자기 손바닥이 마주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공혜가 탄식을 내뱉었다.
“맞다. 소율이한테 얘기했구나. 잠깐 말한 건데 안 잊어버리다니. 역시.”
공혜가 별일 아니라는 듯 혀를 차기에 나는 화가나 고개를 돌렸다.
음.
공혜의 하의가 실종되어 있었다. 난 재빨리 원상 복귀했다. 내가 옆에 있음에도 태연자약하게 옷을 갈아입다니.
“빨리 갈아입으시오.”
“봐도 상관없어요. 저는 이미 볼 거, 못 볼 거 다 봤는걸요.”
순간 영약을 먹어 사경을 헤매던 날, 알몸으로 깨어난 그때가 떠올랐다. 공혜는 그 상황에서도 내 어깨를 베고 잠을 자고 있었지. 난 계속 이러고 있다간 휘둘리기만 할 것 같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외조부님께 사실을 말한 거요?”
“네.”
“어째서?”
“그야 당신보다 당신 외조부님의 힘이 훨씬 크기 때문이죠.”
“힘이 크다니? 무슨 소리요 그게.”
“엄중하게 말하시는데 거절 할 수가 없었어요. 당신의 위치를 말하지 않으면, 저라도 붙잡혀 갈 기세였으니까요.”
외조부는 마의가 내게 한 짓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분이다. 규림에서 정검문으로 향하는 여행기간 내내 외조부는 그 사실을 모른 척 했다. 내가 사실을 몰랐더라도 문제가 됐겠지만, 알고 있는 지금은 배는 더 걱정이 몰려왔다.
“너무 고심할 필요 없어요. 일전에 북경에 처박혀 있던 당신을 찾을 수 있게 도움을 주신분이 바로 할아버님이니까요.”
옷을 다 갈아입었는지 바로 뒤에서 공혜의 기척이 느껴졌다. 난 조심스럽게 등을 돌렸다. 경황이 없어서 생각지 못했는데, 공혜는 간편한 의복이 아니라 어디 연회라도 참석하는 사람처럼 넓은 소매의 화려한 비단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녁에 분타 사람 모두가 모여 결의를 다지는 행사를 가질 거라는 말을 들은 거 같긴 한데.
공혜가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어디보자. 살을 좀 찌우고. 미간을 찌푸리는 버릇 좀 고치고. 눈꼬리를 내리면.”
공혜는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러면 순진한 손자처럼 보일 거에요.”
“그만 두시오.”
“후후.”
난 공혜의 손을 붙잡았다. 평소처럼 공혜의 이마를 뒤로 밀치려는데 생각지도 못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무슨 짓이오?”
공혜가 그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까스로 충돌은 면했으나 공혜의 숨결이 코앞에서 느껴졌다.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미녀의 살결을 공짜로 감상한 것도 모자라 이런 일도 당했는데?”
이런 일?
쪽.
공혜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내 황당함과는 달리 공혜는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가 평소와 다르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건 이때부터였다. 그녀의 분위기에 완벽하게 말려들고 말았다.
공혜는 약간 상기되어있는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다시 이마를 들이밀지 않을까 당황하여 손을 빼려는데 이번엔 공혜가 손을 놓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거요?”
“당신이야 말로 왜 그래요?”
공혜는 붙잡고 있던 내 손을 그대로 자신의 가슴위에 얹었다.
“나는 이렇게 두근거리고 즐거운데 당신은 뭐가 그리 괴로워서 뚱해 있어요? 내가 당신 앞에서 이런 행동 하는 게 싫어요?”
“싫은 건 아니오.”
“그럼요?”
“모르겠소.”
“당신 속마음을 당신이 모른다는 게 말이 되요?”
손을 타고 전해지는 심장박동. 온통 붉어진 공혜의 얼굴. 방금 전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런 게 아니오.”
분홍빛 입술. 새빨갛게 물들은 뺨.
“확실하게 말해요.”
내 몸에 감정을 조절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단언컨대 마비된 것이 분명했다.
“내가 싫어요?”
난 손으로 공혜의 뺨을 감싸 그대로 입을 맞췄다. 흠칫 떠는 것이, 살며시 눈을 감는 것이 있는 그대로 느껴졌다. 부드럽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버린 느낌이다. 이 순간만큼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상관없었다. 그저 입술에 닿은 감촉이 계속되길 바랄 뿐이었다.
“공 의원. 준비 됐으면…….”
쿵!
내가 벌컥 열고 들어왔던 문이 누군가에 의해 굉음을 내며 닫혀 버렸다. 공혜의 뺨에서 손을 떼고 물러서려는데 이번엔 그녀가 내 어깨를 붙잡고 몸을 기댔다.
“움직이지 마요.”
공혜가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쓰러질 것 같으니까. 잠깐만 이대로 있어요.”
공혜로부터 전해진 온기가 전신을 파고들었다. 나는 공혜를 가볍게 감싸 안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있었다.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공혜의 입술을 탐한 후였다. 거기에는 어떤 강제력도 작용하지 않았다. 그저 그러고 싶었을 뿐이다. 따뜻한 기운이 한가득한 이 여자와 입을 맞추고 싶었을 뿐.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혼란이 더했다.
내게도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욕구가 있긴 했던 것일까? 심장의 욕망을 감추고 살아가기로 결정했다고 다른 욕망까지 감춰져 있던 것은 아니었나보다.
공혜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좋았어요?”
난 사실대로 답해주었다.
“좋았소.”
공혜가 활짝 웃었다.
“좋은 사람 표정이 뭐 그래요? 나는 당신이 갑자기 다가와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두 번째는 처음보다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더욱 부드러웠다.
인정할건 인정해야겠다. 공혜가 곁에 있으면 편안해진다. 그녀는 내 몸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상대다. 싫지 않다는 건 이 느낌을 숨기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다. 함께 있는 것이 혼자 있을 때보다 낫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내가 아무리 불안정하고 그늘이 가득한 속마음을 지녔다 해도 말이다.
열다섯째 날.
난 새벽부터 눈을 떴다. 어제부로 보직이 변경된 덕분에 앞으로 무척 바빠질 터였다. 정검문에서는 뒤치다꺼리를 하는 임시 삼군사에 불과했지만 이젠 직접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위치다. 따져보면 스무 명의 무사가 전부인 작은 부대일 뿐이지만, 다른 곳처럼 상위 군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독자적인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최대 수혜자가 정검문이라는 제갈현의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 인사도 그렇지만 어제 회의에서 있었던 인사개편에 반감을 가진 인원이 꽤 많았다. 오로지 능력만 따져 인사이동을 감행한 것은 사망유희에서 정검문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나는 뻗어있는 세 명의 군사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짐을 챙겼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연회에서 어찌나 과음을 하던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동택이야 술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다른 군사들도 마찬가지로 술인지 물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들이켰다. 놀라운 건 소율도 엄청나게 마셨는데 별로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내들이 거하게 취해 주작단 무사에게 술을 먹여 자빠트리느니 하는 음담패설을 날리자 조용히 떠나긴 했지만, 그 전까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었다.
짐을 챙겨 방을 나오는데 소율이 세안을 마치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벌써 숙소를 옮기는 건가요?”
“밖으로 돌아다닐 일이 많을 것 같아 미리 옮기는 거요.”
“부지런하군요.”
“견습이 일을 망쳤다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않겠소.”
“손궁 어르신과 관련된 일은 어떻게 됐어요? 혜 언니와 말해 봤어요?”
난 어제일이 떠올라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일단은 기다리기로 했소. 부탁이니 밝히지 말아 줬으면 좋겠소.”
정검문을 출발할 때만해도 만만해 보였던 소율은 그녀 기억력이 가진 무서움을 깨달은 순간부터 만만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소율은 한번 기록되면 절대 지워지지 않는 책과 같다. 내용을 수정할 수도 덧붙일 수도 없다.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 어떤 식의 기억을 끄집어낼지 모른다.
짧게 인사하고 건물을 나서려는데 소율이 불러 세웠다.
“정검대에 차출된 인원 중에 주작당 무사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뭣 때문에 그러오?”
“주의하실 점이 있거든요.”
“주의?”
“그녀는 결벽증을 갖고 있어요. 크게 문제될 건 없겠지만 알고 계셔야 할 거에요. 먼지가 많다거나 환경이 좋지 않은 장소로 가야하는 임무는 아마 한사코 거절할 거에요.”
이때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작당 무사에 관한 문제를 직접 체감할 시기쯤엔 이미 정검대 안에서 주의해야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후였으니까. 결벽증 따위는 가볍게 용인할 수 있을 정도랄까?
정검대가 배정받은 건물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직 북경에서 도착하지 않은 인원이 대다수기 때문에 삼, 사일이 흘러야 모두 모이게 될 것이란 말을 들었다. 정욱 선생에게 건네받은 명단을 읽어 내려가는데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청룡당의 시. 암영당의 삭풍월. 금검당에는 원평의 이름도 보였다. 이 인사에 금의위의 농간이 들어갔을 것 같다는 예감이 살짝 일었다.
금검당에서 차출된 무사는 원평 말고도 한사람이 더 있었다.
문주의 셋째 아들 북궁찬.
삼군사 생활을 하면서 많이 겪어보진 않았지만 좋은 성품을 가졌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북궁표 만큼 미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유일한 위안거리일 뿐, 개차반인 성격은 금검당 내에서도 골칫거리였다. 일부러 마주치지 않을 일만 맡아 충돌하지 않았다지만, 스무 명이 전부인 정검대에서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나니 정작 할 일이 마땅치 않았다. 임무가 떨어진 것도 아니고, 사망유희는 아직 보름의 유예기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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