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협객사(殘酷俠客史) 3-6
솔직히 가능성만을 생각했다. 죽음도 불사르겠다는 결연한 의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얼마 전 무기창고에서 느꼈던 그 감각이라면 화살을 받아 낼 수 있지 않을까 예측해본 것뿐이다.
거기다 내 몸이 위험을 감지하면 나오는 왼손의 힘, 이젠 심장의 힘이라고 불러야 하겠지만. 적표를 뒤 따라 갔을 때 발휘됐던 능력은 상상을 불허할 위력을 가졌었다.
문제는 내가 직접 익힌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데 있었다.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이러는 건 절대 지양해야 할 일이다. 나 역시 대놓고 죽으러 가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지금이라도 발길을 돌리고 싶었다.
벽에 붙어 장원의 입구까지 다가왔다. 현판에 보이는 애꾸눈의 용이 더욱 음침하게 느껴졌다.
“군사님. 정말 괜찮으시겠소?”
“한 번이오. 화살이 날아오는 걸 확인한 순간 모두 전각으로 전력질주 하시오.”
난 그 한 번에 즉사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제가 하는 것이.”
“문을 열면 시작이오.”
왼팔을 가로막던 내력을 거둬들였다. 막힌 혈도가 자극을 받자 피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끔찍한 느낌이다. 내게 붙어있는 팔에 피가 흐르는 것임에도 먹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난 약간의 시간을 두고 내력을 쏟아 부어 피의 움직임을 막았다.
찌르르르. 둥둥, 둥둥. 후우, 후우.
벌레소리. 심장소리. 호흡소리. 주변의 모든 소리가 명확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난 죽은 조장이 사용했던 검을 들고 문을 열었다.
안쪽으로 한발 내딛자 신호탄에 불이 붙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각의 이층 창문에서 무언가 느껴졌다. 아까보다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살기였다.
화살을 피할 수 있을까?
쉬이이익.
화살의 소리가 다르게 느껴졌다. 아까 느낀 것이 바람을 찢어내는 듯한 소리였다면, 지금은 바람을 매끄럽게 잘라버리는 소리 같았다.
“달리시오!”
흐릿하지만 화살이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확실히 감각이 세밀해진 효과가 있었다. 속도를 보니 피하기엔 늦었다. 난 양손으로 검을 잡고 힘을 더했다.
까앙!
화살촉과 맞부딪힌 검날이 깨져나갔다. 소리가 부드러워졌다고 위력까지 부드러워진 것은 아니었다. 돌벽을 뚫었던 힘은 철마저 깨트릴 정도로 엄청났다.
난 화살의 힘에 밀려 벽에 처박혔다. 연이어 화살이 날아와 반사적으로 왼손바닥으로 가로막았다. 목이, 가슴이, 눈이 꿰뚫려 죽은 청룡당 무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쿠웅!
등 뒤로 돌담의 충격이 전해졌다. 눈이 질끈 감겼다.
“군사님!”
충격이 끝나자마자 눈을 떴다. 왼손이 화살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벌떡 일어섰다. 화살에 꿰뚫리지 않다니. 왼손은 생각보다 질기다.
곽현은 당연히 내가 죽었을 것이라 예상했는지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날 보지 말고 앞으로 달리라고! 난 반토막난 검을 쥐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쉬이익!
화살이 다시 날아왔다. 내가 죽지 않았음에 화가 난건지 재차 나를 노리고 있다. 왼손이 단단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좀 더 자신감을 갖고 한발을 내딛었다.
전신에 내력을 보내 충격에 대비했다. 검의 남은 부분으로 화살을 막았다.
깡!
검을 살짝 몸 쪽으로 움직여 충격을 흘려보냈다. 동시에 화살의 몸통에 왼 주먹을 날렸다. 피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왼손은 내력으로 방비한 다른 부분 보다 훨씬 강한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화살을 멀리 처냈다. 무사들은 전부 전각을 향해 달리느라 이 모습을 보지 못했다. 뒤따르던 곽현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화, 화살이…….”
곽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캐물으면 나중에 피곤해 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각으로 달리며 세 개의 화살을 더 처내자 검은 더 이상 검이라 부를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난 단순히 화살에 담긴 힘이 강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몇 번 겪고 보니 화살 자체도 나무로 된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다. 철인지 아니면 그것보다 더 단단한 것인지 무게가 상당했다.
전각의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피 냄새가 진동했다. 넓은 방의 한가운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미동도 없었지만 개중에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움직이는 사람도 있었다. 명오는 어디 있지? 사람들 틈에는 확실히 없었다.
청룡당 무사가 그들을 살피는 사이 난 계단의 위치를 확인했다. 올라가서 저지하지 않으면 뒤이어 올 일조 무사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다.
“군사님. 이거라도 사용하시오.”
내가 손잡이만 남은 검을 들고 있자 곽현이 자신의 무기를 내밀었다. 곽현은 이미 내가 화살을 쳐내는 모습을 목도했기에 보통의 군사라고 생각지 않는 듯 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공손했다면 이안에 들어올 일도 없었을 텐데.
“생존자가 더 있나 살펴보시오. 어디서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니 최대한 엄폐물을 활용하는 걸 잊지 마시오.”
“알겠소.”
난 이층의 계단을 올랐다. 지금의 감각과 왼손의 괴력이라면 두려울 것이 없다. 막 이층에 오르자 복도 끝에서 엄청난 속도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검으로 막았으나 왼손으로 쳐낼만한 시간이 없었다. 난 화살의 무지막지한 힘에 밀려 복도 반대쪽으로 나가 떨어졌다. 경험을 통해 흘려내는 방법에 익숙지 않았다면 어느 한곳 꿰뚫리고 말았을 것이다.
바닥을 뒹굴며 입은 피해 덕분에 아파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명오가 보였다.
“괜찮습니까?”
명오는 양 어깨에 화살이 박힌 채 그대로 벽에 붙어있었다. 명오의 주위로 화살이 여러 개 꽂혀있는 것을 보니 섭심추가 어떤 짓을 하고 있었는지 알만 했다.
“조심…….”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 긴장의 날을 빠짝 세웠다. 이번에는 충격을 검으로 흘리며 왼손으로 쳐내는데 성공했다.
“자넨…….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명오는 피를 많이 흘린 듯 생기가 전혀 없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원래 말버릇이 나왔다.
“말하지 않았소. 도움이 됐으면 됐지 방해하진 않을 거라고.”
까앙!
다시 한 번 화살을 쳐냈다. 아직 검은 깨지지 않았으나 상태를 보니 불안 했다. 화살을 재차 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있다. 마당을 달릴 때 날 저지하기 위해 연속으로 쏘았던 그 간격이 최선일 것이다. 검만 버텨준다면 언제든지 막아낼 수 있다. 문제는 앞으로 전진 하다 내가 아니라 명오에게 한발이라도 날리면 그의 목숨은 끝이라는 것이다.
“꼴이 우습게 됐군. 저건 묵강시(墨鋼矢)네. 무리하지 말고 어서 자리를 피하게.”
화살이 멎었다. 상대는 복도 끝 어둠속에 숨어있다. 화살로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달았는지 날 살피는 듯 했다.
“시는 어디에 있지? 그만 오면 돼. 다른 무사들은 절대 올라와선 안 돼.”
시만 오면 된다니? 조장인 시가 백인장보다 강하단 소린가?
“곧 올라올 거요.”
멎었던 화살이 다시 날아들기 시작했다. 내가 반쪽이 된 검을 들고 있음을 확인했는지 꾸준하게 날 압박했다. 위험하다. 온몸의 감각이 경고하고 있었다.
검이 완전히 파손되면 일차적인 충격을 막아줄 무기가 사라진다. 명오를 버리고 아래층으로 도망가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날지도 모른다.
명오는 기력을 전부 잃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였다.
“어서 도망치게.”
당신 목숨 하나 살리자고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야. 섭심추가 사람을 가지고 논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라고!
난 손잡이만 남은 검을 집어 던졌다.
“도저히 움직일 수 없소?”
“이미 늦었네.”
명오의 몸은 피에 흠뻑 젖어있었다.
난 심장이 있는 쪽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너 어디 있어? 오랜만이잖아. 두근거리지 않아? 어디 하나 화살을 맞아야 움직일 거야? 아무도 듣지 않는 울림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쉬이익!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화살이 팽그르 회전하며 내 심장 노리고 들어왔다. 이미 피하기에는 늦었다.
제길! 될 대로 되라지!
왼손으로 막았다. 내 팔이 아님에도 고통을 느끼는 건 똑같았다. 화살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자 찢겨나가는 아픔이 몰려왔다. 그러나 뚫리진 않았다. 질긴 것만은 분명했다. 검으로 막았을 때 왼손이 했던 짓을 오른손으로 대신했다.
왼손이 완전히 꿰뚫리기 전에 오른 주먹으로 화살을 쳐냈다.
“크읏!”
쇠를 맨손으로 내리칠 때 어떤 고통이 밀려오는지 톡톡히 느낄 수 있었다. 가까스로 화살을 튕겨냈으나 왼손도, 오른손도 걸레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무리다. 이젠 더 이상 막을 수가 없다. 도망쳐야겠지. 명오에게 미안하지만 심장이 도와주지 않는 한 화살을 뚫고 섭심추에게 도착하는 건 불가능했다.
잠시 정신이 딴 데 가있었기 때문일까? 난 왼쪽팔로 피가 급격하게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막으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작게 시작한 흐름이 거센 강이 되어 폭발적으로 피를 끌어당겼다.
“망할!”
팔이, 화륭신마가 넘긴 팔이 붉게 달아올랐다. 열기에 소매가 타들어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불꽃이 이글거릴 정도로 타오르진 않는 다는 점이다. 그러나 옷이 재가 되어 왼쪽 팔이 훤히 드러난 것으로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었다.
화살이 날아왔다. 달아오른 왼손으로 화살을 가로막았다. 충격으로 몸이 뒤로 밀렸으나 느낌이 달랐다. 왼팔의 무게감만으로 화살의 충격을 완화해 버렸다. 난 화살을 붙잡았다. 아니 붙잡았다고 느꼈다. 몸체가 녹아내리면서 화살이 두 동강 나버렸다.
왼손은 피를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강해진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화륭신마의 경고는 이거였다. 이런 식으로 피를 모조리 뺐긴 다면 내가 신선이라 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명오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숨소리가 미약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직 죽진 않은 듯 했다. 난 명오에게 다가가 어깨에 박한 화살을 뺐다. 강제로 지혈을 해야 했기에 명오의 양 어깨에 왼쪽 손가락을 들이댔다. 살이 타들어가자 기력이 없음에도 명오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그사이 화살이 날아왔다. 왼손을 휘둘러 화살을 쳐냈다. 피가 빨려 들어간 만큼 왼팔의 괴력도 엄청나게 증가했다. 명오를 구석에 던져놓고 복도를 걸었다.
지금 내게 화살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드디어 섭심추가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하하. 여기까지 오다니 놀랍군 그래.”
섭심추가 활을 겨눈 채 서있었다. 정검문을 역으로 불러들여 몰살시키려 했던 자의 얼굴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저렇게 편해 보이는 얼굴로 수많은 사람을 죽여 왔다니. 섭심추가 메고 있는 화살 통엔 날 끊임없이 괴롭혔던 화살이 아직 수북이 담겨있었다.
“백인대 수준에 이런 고수가 있을 줄이야.”
갑자기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피가 너무 많이 빨려 들어갔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허탈감이 전신을 강타했다. 난 마지막 여력을 짜내 왼쪽 어깨에 내력을 집중시켰다. 피가 흘러들어가는 건 멎었으나 휘청거리는 몸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섬십추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화살을 날렸다. 갓 쏘아진 화살을 눈으로만 쫓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상대가 항상 치명상을 입힐 부위만 노리는 것을 알았기에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왼팔로 심장과 머리를 보호했다.
“큿.”
화살이 예상을 깨고 옆구리를 스치고 날아갔다. 큰 상처는 아니지만 가뜩이나 부족한 피를 더 흘리게 생겼다.
“그런 외공은 처음 봐. 팔이 불타다니. 정검문은 사공을 익힌 자도 받아들인 건가?”
번개같이 재장전을 마친 섭심추가 다시 활을 겨누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난 어지러움을 동반한 구토가 밀려와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섭심추.”
“호오. 타사괴로 부르지 않는 건가?”
“네가 장원에 일부러 도둑을 끌어들여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들킬만한 짓을 한 적은 없는데 말이지.”
“네놈 꼬리는 너무 길어서 눈감아 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더군.”
섭심추가 조소했다. 조금씩 어지러움이 사라지고 있었다. 시간을 좀 더 끌면 곧장 저놈의 목을 움켜쥘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정체를 들킬 짓을 벌인 거지? 네 활이 무섭기는 하지만, 정검문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야. 생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나?”
“하하하.”
섭심추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크게 웃어젖혔다.
“마지막으로 크게 놀아보려고 했거든. 정검문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머지않아 사망유희(死亡遊戱)가 선포되면 그곳으로 들어갈 거니까.”
사망유희. 이 단어를 듣자 나도 모르게 심장이 뛰었다. 나는 모르는 말인데. 어째서 이렇게 두근거리는 거지?
섭심추는 식솔들과 찾아온 무사들 전부를 죽이고, 장원을 버리고 달아날 생각이었던 것이다. 살인에 미친 것은 맞으나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죽인 것은 아니다. 정검문에 쫓기더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인 것이다.
어지러움에서 회복됐다. 왼팔의 열기는 거의 줄어들었지만 섭심추를 처리할 만큼은 된다고 확신했다.
“저리 비키게!”
계단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시의 목소리임을 깨닫고 고민에 빠졌다. 섭심추가 코앞이다. 몇 발만 움직이면 놈의 숨통을 끊을 수 있다. 얼마만의 기회인데.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몸은 간절히 원하고 있지만 억지로 발을 뺐다.
화살이 나를 지나쳐 계단으로 날아갔다. 시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며 화살을 쳐냈다.
까앙!
시의 검은 깨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퍼런 날을 더욱 번뜩였다. 강한 기운이 검 전체에 응집되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겨우 백인대에 왜 이렇게 고수가 많아!”
섭심추가 투덜거리며 재차 화살을 당겼다. 시가 휘두르는 검이 다시 화살을 튕겨냈다. 시가 타격을 입었는지 주춤거리는 사이 섭심추는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화살 자체도 특이했지만 저 활, 평범한 무기가 아니었다. 시위가 팽팽해 질 때 나는 소리에서 상당한 기운이 느껴졌다.
까앙!
시는 침착하게 화살을 쳐냈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맴도는 검을 보니 철보다 더 단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명오에게서 느낄 수 없던 강한 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삼 년간 발전했다고 여기기엔 너무 격차가 컸다. 이건 실력을 숨기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정도의 기도다.
“겨우 그 정도인가?”
시가 어느새 섭심추 앞에 도착했다. 화살을 붙잡은 손을 향해 시의 검이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흐읏!”
손목이 날아간 섭심추가 활을 집어 던지고 창문으로 향했다. 시는 그대로 따라 붙었다. 시의 검이 기이한 곡선을 그리며 섭심추의 다리를 베었다. 힘줄이 잘린 섭심추가 바닥에 쓰러졌다.
“타사귀. 죽이지 않는 걸 감사히 여겨라.”
시가 섭심추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난 왼쪽 옆구리를 움켜쥐고 시에게 다가갔다.
“타사귀가 아니오. 이 장원의 주인인 섭심추요.”
“누군지는 상관없어. 이놈이 원흉인건 맞지?”
“그렇소.”
시는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날 돌아봤다.
“참. 군사님. 방금 본 것들. 못 본 것으로 해주면 안 될까?”
“당신이 섭심추를 간단히 제압한 모습 같은 거 말이오?”
“그래 그거.”
“상관없소.”
시가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보기보다 입이 무겁다.
“그쪽도 정검문에 이일을 보고할 때 내 얘긴 빼줬으면 좋겠소.”
“걱정마. 군사님 덕분에 피해 없이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까. 그 엄청난 실력이 어디서 왔는지 절대 비밀에 부치도록 하지.”
시가 내 왼팔을 흘끗 바라봤다. 다행히 지금은 옷만 타버렸을 뿐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명오는?”
“뒤쪽에 있소. 피를 많이 흘려서 아마 빠른 치료가 필요할 거요.”
어깨의 화상에 대한 부분은…… 공혜에게 따로 말해둬야 할지도 모르겠군.
“이놈 좀 봐주고 있어. 명오를 찾아 올 테니까.”
시는 계단으로 움직이며 아래쪽을 향해 소리쳤다.
“대장이 다쳤다! 얼른 올라와!”
일개 조장이라고 볼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시와 그걸 알고 있는 명오. 무슨 사연이 있을지 궁리해 보기에는 지금 내 상황이 너무 비참했다. 다리는 후들거리지, 어지럽지, 이곳저곳의 상처가 쿡쿡 쑤시지.
가장 중요한건. 쓰러져 있는 섭심추의 목에 야산에서 잠자고 있을 내 칼을 꼽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다 들고 왔으면 화살에 검날이 상해 다신 쓰지 못하게 됐을 것이다. 이거라도 위안을 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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