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협객사(殘酷俠客史) 1-6
#6
“으으.”
정신을 차리자 가장 먼저 날 반겨준 건 지끈거리는 두통이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내가 약냄새가 진동하는 어떤 방에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괜찮아요?”
한쪽에서 풀을 으깨고 있는 꽤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난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 앉았다. 어질어질한 느낌에 중심을 잡는 데만 한참 걸렸다.
“정검문 사람치고 약선당을 안 거친 사람이 없긴 하지만 들어오기 전부터 이지경이라니. 꽤나 인상적인 출발이군요.”
공혜는 풀냄새가 가득한 그릇을 내밀었다.
“발라두세요.”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쳐다보자 공혜가 뒷머리를 가리켰다. 난 반사적으로 머리를 더듬었다. 뒤통수에 만져지는 커다란 혹은 내가 어떻게 정신을 잃었는지 충분히 설명해 주고도 남았다.
“어떻게 된 거요?”
“어떻게 되긴요? 백무당 무사한테 얻어맞아 실려 온 거죠. 얘기는 들었어요. 시험 중에 무사의 목을 베려고 했다면서요?”
마지막 목소리 광곤이 아닐까 했는데 역시 그랬다.
“살갗을 벤 것뿐이오. 정황상 어쩔 수 없었소.”
공혜는 내가 멍하니 있자 그릇을 뺏어들고 직접 뒤통수에 으깬 풀을 발라 주기 시작했다. 시원한 느낌이 들며 고통이 좀 가라앉았다.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방어조 전원이 몰살당하고 끝난 건 처음이라고. 뭐라더라? ‘나는 죽었다’를 외치라고 협박도 했다던데. 그 시험 그냥 물건을 지키거나 뺏거나 하면 그만인 시험 아닌가요?”
“물건을 부숴버려서 어쩔 수 없었소.”
“시험도 어쩔 수 없이 본건 아니고요?”
“혹시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소?”
공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당연한 걸 왜 물어요?”
“당연?”
“붙었으니까 외부 약방이 아니라 약선당에서 치료를 받는 거죠.”
내 귀가 의심스러워 되물었다.
“정말이오?”
“그렇게 들었는걸요?”
“음.”
“치료는 다 끝났으니 좀 쉬다가 군사부를 찾아가면 될 거에요.”
다시 두통이 찾아와 손가락으로 미간을 짓눌렀다. 그런 방법이 인정을 받았단 말인가?
“공의원! 곧 환자 하나가 올 거야!”
바깥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무슨 환자래요?”
“배가 터졌다나 뭐라나. 당주님이 얼른 준비하라신다.”
“오호.”
공혜는 급히 방문을 열고 한발 내딛다가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아무리 제가 보고 싶어도 일부러 다치거나 하진 말아요. 이래봬도 무지 바쁜 몸이니까. 후후.”
공혜가 한쪽 눈을 찡긋 감은 후 바람처럼 사라졌다.
난 정신이 없는 가운데도 이 상황을 정리해 보려고 애썼다.
육 개월 전만 해도 혼수상태였다는 것. 어머니의 명령으로 시험을 봤다는 것. 생전 처음 보는 무사에게 얻어맞아 침상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 날 분해하려 들었던 마의와 달리 마의의 딸은 방금도 날 치료해 줬다는 것. 그리고 시험에 통과 했다는 것.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군. 하하…….
정검문이 얼마나 큰지는 내가 이리저리 헤매다 저녁이 되어서야 군사부에 도착했다는 사실로 절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도성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는 느낌이랄까? 당장 눈앞에 보이는 군사부의 넓은 누각도 우리 집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군사부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무사에게 물어 정욱의 방을 찾았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무거운 분위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난 떨떠름하게 안쪽의 인물들을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문이라도 두드렸어야 했나?
“늦었군. 앉게.”
정욱이 탁자의 끝을 가리켰다. 탁자 주위에는 낮에 보았던 지원자들이 앉아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제갈현과 눈이 마주쳐 가볍게 목례를 했으나 상대는 못 본 것처럼 고개를 돌려 버렸다.
“늦은 사람을 위해서 한 번 더 설명해 주지.”
정욱이 직접적으로 날 쳐다보았기에 난 육 개월 간 아버지께 혹독하게 익힌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 그대로 표정을 굳혔다.
“여러분들은 이제 입문시험에 통과 한 풋내기다. 군사부에는 여러분들과 똑같은 처지에 승격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만 세 자리 숫자가 넘어. 그러나 여러분과 그들이 다른 점이 하나있다. 여러분들은 이제 막 군사부에 들어온 견습에 불과할 뿐이고 그들은 일 년 이상 이곳에서 분위기를 익히고 공부를 해온 경험자들 이라는 것이다. 견습은 항상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그 평가에 따라 자격이 주어지지. 각 지부에서 요구하는 군사의 숫자는 매달 달라. 중요한 건 상위권에 들지 못하면 견습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경쟁해야 할 상대는 여러분들 보다 오랜 기간을 이곳에서 지낸 실력자들이다. 그 실력자들도 몇 년 동안 공부해온 자들과 경쟁해왔어. 그런 틈에서 살아남아야 정검문의 정식 군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분위기가 싸했던 것은 이것 때문이었나? 그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시험에 통과했더니 앞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 때문에?
“여러분이 무엇을 기대하고 정검문에 들어 왔건 상관없다. 군사부에 들어온 이상 이제부터 군사부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정욱이 설명한 군사부의 규칙은 간단한 듯 하면서도 이래저래 제약이 많았다.
견습은 기본적으로 군사부의 일을 돌아가면서 겪어봐야 한다. 한 달 단위로 각 부서를 돌며 육 개월이 지나야 최초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그러나 최초 평가의 자격만 주어지는 것일 뿐, 실제로 뽑히는 것은 부서의 일을 수도 없이 겪어 본 이후가 될 것이라는 정욱의 침착한 의견이 뒤따랐다. 결국 최소 몇 년은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다. 내겐 오히려 다행이다. 난 모든 것이 이제부터 시작인 사람이니까.
부서에서 일을 하는 만큼 급료가 지급 될 것이고, 부서를 바꾸게 되는 이틀간 휴식할 수 있다는 말이 이어지고 정욱의 설명이 끝났다.
조금 얼떨떨했다. 견습 군사가 되어 앞으로 이곳에서 쭉 지내야 할 상황인데다가 내가 뽑힌 이유 같은 건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상태였으니. 객잔에 계실 외조부님께 서신을 보내면서도 계속 이 상황이 착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확히 말하면 밤이 되자마자 착각은 직접적인 현실로 다가왔다.
“그러니까 너희는 지금 왜 야밤에 끌려 나와 이렇게 서있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거야. 우리도 너희와 같은 처지의 견습일 뿐인데 이럴 자격이 있느냐, 뭐 이런 생각.”
숙소에서 강제로 끌려 나와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자니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그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안면을 정지시킬 수밖에.
“걱정할 것 없다. 이곳에는 순찰당의 현역군사인 진륭선생님께서 참관하고 계시니까. 적어도 너희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우린 순찰당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을 수밖에 없어.”
무리 가운데 가장 선두에서 말을 하고 있는 사내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 서로에 대해서 좀 알아야겠지? 난 지휘부의 견습장을 맞고 있는 묵염이라 한다.”
묵염은 옆에 서있는 다섯을 일일이 소개해줬다. 여섯 개의 부서에서 각각 견습장을 맞고 있는 이들이다. 지휘(指揮), 정보(情報), 지원(支援), 관리(管理), 병참(兵站), 교육(敎育). 정욱은 분명 여섯 개의 부서를 돌면서 일을 익히고 수련해야 한다고 했다.
“너희의 신상에 관한 정보는 우리가 조사한 바가 있거든. 혹시 틀린 점이 있다면 얘기하도록. 참작할 여지가 있으니.”
참작이라니? 낮에 보았던 하후성이 두루마리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수석 합격자 제갈현. 나이 열여덟. 제갈세가 출신. 신기자(神機子)의 진전을 이었음. 현역 군사로 실무에 투입 되도 무방할 정도로 진법의 운용이 뛰어나나 이기적인 성격 탓에 적응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됨.”
하후성의 말이 끝나자 묵염이 제갈현을 보며 물었다.
“덧붙일 말 있나?”
“뭐 하자는 거지?”
“좋아. 할 말 없는 걸로 알겠어. 다음.”
“차석 합격자 고원. 나이 스물둘. 광동 소학관 출신. 초시(初試)를 통과했으나 이후 진로를 바꿔 군사직에 지원. 침착함과 폭넓은 지식이 강점이나 체력적인 한계가 뚜렷함.”
“덧붙일 말 있나?”
합격자들은 대부분 아무 말 없이 없었다. 소개가 이어지며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한겸. 나이 열일곱. 전 청룡당주 손궁의 외손자로…….”
하후성은 두루마리를 읽다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묵염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계속 읽어봐.”
“마의괴사(魔醫怪事)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환자. 연화살겁(連花殺劫)때 지옥비마에게 살해당할 뻔 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생존. 이후 오년간 혼수상태. 육 개월 전에 극적으로 깨어남. 능력 불분명. 음.”
하후성이 읽다말고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날 보는 시선이 황당에서 경악으로 변해가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이번 시험에서 방어조를 몰살 시킨 그 합격자구나. 청풍검의 후손이 무부(武部)가 아닌 군사부에 오다니. 놀랄 일이군.”
난 별로 답할게 없었으나 오히려 묵염이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눈치였다.
“소개가 끝났으니 지금부터 자리를 정하도록 하겠다. 합격자들은 서로 간에 거리를 좀 벌려 서도록.”
묵염의 뒤편에 모여 있던 무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합격자 대부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것도 모른 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사람들이 우릴 기준으로 정렬하기 시작했다.
“자자. 시간이 없으니 빨리 결정해.”
줄 서기가 끝나자 묵염이 숫자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편식들 하고는. 수석과 차석에게 몰리는 건 어쩔 수 없군. 좋아. 지금부터는 바꿀 수 없어. 자 그럼 이제 장들의 선택이 있겠다. 먼저 정보.”
“제갈현. 능력만 놓고 보면 월등하다. 따로 붙일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력한 후보를 택했군. 교육은?”
“고원을 택하지. 이건 체력보단 머리가 필요한 일이니까.”
장들의 선택이 끝나자 묵염은 날 보며 말했다.
“난 이해가 안가. 마의와 지옥비마를 모두 만나고도 멀쩡히 살아있다니. 이 의문에 한번 걸어보지. 난 한겸을 택하겠어.”
우리를 두고 무언가를 하긴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감이 오질 않았다.
“물어 보고 싶은 게 많을 거야. 간략하게 설명해 줄 테니까 잘 듣도록.”
묵염에게 전 합격자들의 이목이 쏠렸다.
“너희는 지금부터 한 가지 경기를 할 거야. 이건 매년 해온 경기니까 절대 빠질 수 없어. 경기의 끝은 해가 뜨는 시각까지다. 당연한 얘기지만 경기의 끝엔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 우승자는 자기가 갈 최초의 부서를 직접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는 말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보시다 시피 너희의 가능성을 평가한 결과가 바로 너희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다. 사람이 적은 쪽은 저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거지. 저 사람들도 너희와 같아. 오늘 만큼은 너희의 순위에 따라 다음 달 부서의 선택권이 달라지지.”
“어차피 돌아가면서 모든 부서를 겪지 않습니까?”
누군가 묻자 묵염이 코웃음을 쳤다.
“착각하고 있군. 평가의 주기가 육 개월로 정해져 있을 뿐, 어디서 무얼 하는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린 문제다. 막말로 지원부에서 육 개월 동안 구르다 보면, 군사부 생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재고해보게 될 거야. 물론 다른 부서를 폄하 하는 건 아니야. 각자의 역할이 있으니까. 그러나 지휘부에서만 일 년을 지낸 사람과 병참과 관리를 돌며 지휘와는 전혀 상관없는데 시간을 쓴 사람 중 한명을 암영당의 군사직에 추천한다면 과연 누굴 꼽아야 할까?”
합격자들의 눈빛이 일순간 달라졌음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경기의 규칙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 경기의 이름은 단초유희(端初遊戱). 감이 조금 오나? 앞에 보이는 세 개의 함에는 각각 열 개의 종이가 들어있다. 첫 번째 함에는 정검문 인사들 이름이, 두 번째 함에는 정검문 내부건물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리고 마지막엔 숫자가 적혀있지. 이제 각 함에서 종이를 하나씩 꺼낼 것이다.”
묵염은 상자 별로 종이를 하나씩 뽑아 작은 상자에 봉인했다.
“이제 남아있는 종이를 모두 수거할 것이다. 총 스물일곱. 이중에 스무 장은 너희가 나눠 갖는다. 남은 일곱은 일각 마다 이 장소에서 공개된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무엇이 뽑혔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무엇이 뽑히지 않았는지 아는 사람은 존재한다.”
열 명의 인원이 종이를 두 장씩 나눠 받았다.
단초유희라. 이건 각 함에서 한 장씩 뽑은 인물, 건물, 숫자의 정체를 남은 종이를 이용해서 추론하는 경기다. 참으로 군사부다운 발상 같다고 느껴졌다.
“하나의 종이는 지금 바로 공개하겠다. 청룡당이군. 이걸로 확실해 졌어. 청룡당은 지정된 장소가 아니다. 너희는 이제 봉인된 함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행하면 된다. 특정 인물을 특정 장소로 데려가 특정 숫자를 보고하는 것이다. 자신이 성공했다는 확신이 들면 이 장소로 돌아와 끝났다는 선언을 해라. 어때? 간단하지?”
묵염이 웃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진지 모르겠지만 난 종이 두 장을 손에 쥐고서 막막함을 느껴야 했다. 서른 개의 종이 중에 달랑 두 장으로 어떻게 작은 상자에 봉인된 종이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거지?
“가장 중요한 규칙을 설명해 주지. 참가자는 전원 다른 참가자와 마주쳤을 때 질문을 한 가지 던질 수 있다. 단. 질문은 무조건 한 단어로 답할 수 있는 것에만 한한다. 또한 직접적으로 종이에 적힌 내용을 묻는 것은 안 돼. 이를 테면 ‘뭘 들고 있지?’ 같은. ‘청룡당을 들고 있지?’ 같은 우회적인 질문은 가능하다. 대답은 자유나 대답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질문 할 수 없다. 서로 질답이 정상적으로 끝났을 경우 자신의 종이 하나를 상대에게 건네준다.”
질문과 교환이라.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니군.
잠시간 묵염의 침묵이 이어졌다.
“뭣들 하고 있지? 경기는 시작됐는데?”
난 밖으로 향하는 참가자들을 보며 움직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어떤 부서를 가도 상관없다. 여기서 못잔 잠을 자다가 아침을 맞아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으니까.
“크흠.”
묵염의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내 뒤에 줄을 서고 있는 견습 선배들과 눈이 마주쳤다.
“음.”
나가지 않으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강렬한 눈빛을 쏘아대는 통에 얼른 걸음을 옮겼다. 나만 편하면 다가 아니다. 내 가능성에 건 선배들이 뒤에 있다. 이거 생각보다 압박감이 심하다.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