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_응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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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32층의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헬멧을 쓴 중국집 배달원의 모습이 인터폰 화면에 보였다. 도찬이 현관문을 열어 주려고 나가는 사이 민곽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었다.
“얼마예요?”
“육만 육천 원요.”
민곽이 지폐 몇 장을 내밀자 배달원이 앞에 찬 복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고르더니 거스름돈을 건네준다. 그 사이, 윤기와 도찬은 음식을 거실 탁자로 옮기도 있다. 주방으로 간 도여는 앞 접시로 쓸 것을 가져왔다.
“도여야. 난, 화장실 좀.”
민곽이 거스름돈을 지갑에 넣으며 욕실로 향했다.
욕실로 들어선 민곽이 문을 잠근다. 잠긴 것을 재차 확인한 민곽이 지갑에 든 지폐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쪽지와 아주 작은 비닐봉지를 꺼내었다.
- 국물. 실패할 시 동봉한 물건 사용 바람.
“국물?”
민곽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던 민곽이 무의식적으로 비닐봉지를 주머니에 넣고는 쪽지를 갈기갈기 찢어 변기에 던져 버린다.
민곽이 젖은 손을 털며 욕실에서 나오자 그들은 음식을 차려놓은 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어, 다들 먼저 먹지?”
민곽이 급히 자리로 가 앉으며 말했다.
‘잡채밥. 탕수육. 저건 탕수육 소스. 유산슬. 그리고 군만두..... 흠.’
민곽의 시선은 음식을 찬찬히 훑고 있었다. 그들이 말한 국물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아빠, 어서 드세요.”
도여가 음식을 접시에 들어 민곽의 앞에 놓으며 말했다.
“으응? 어, 그래. 고맙다.”
도찬과 윤기의 잡채밥 옆에 놓인 국물 그릇에서 급하게 시선을 떼며 민곽이 말했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음식을 씹는 소리는 TV소리에 묻혔다. 민곽은 도찬의 손짓을 계속 곁눈질로 살피고만 있다.
“어이, 비검주. 거기 국물도 마셔 가며 천천히 드시게.”
민곽이 자상한 얼굴로 도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네에....... 전, 계란탕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 드실래요?”
도찬이 무뚝뚝한 얼굴로 국그릇을 슬며시 밀며 말했다. 그러자 민곽이 당황하여 말끝을 흐렸다.
“으응? 아니, 머........”
“저 줘요. 제가 먹을게요.”
도여가 불쑥 국그릇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너는 그걸 왜 굳이 먹으려고 그러냐? 몸에도 안 좋은 걸.”
민곽이 느닷없이 도여의 팔을 잡으며 말리자 모든 시선이 그를 향했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뭐냐...... 그래. 너 알레르기가 있잖니?”
“없는데요.”
“그, 그러냐? 이상하다. 분명히 네 엄마가 있다고 그랬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횡설수설하는 민곽의 이마에 식은땀을 흘렀다.
도여는 아랑곳하지 않고 국그릇을 두 손으로 잡고 한 모금 들이켜 마신다. 민곽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버린다. 어찌 된 일인지 민곽은 젓가락으로 음식만 뒤척거린다.
“왜요? 아빠, 맛없어요?”
보고 있던 도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아, 아니다. 맛있다, 맛있어.”
도찬은 그들을 힐끔 쳐다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식사를 계속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의 음식을 충실히 소화해 나갔다.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자 도여가 남은 음식을 모으기 시작했다. 윤기는 빈 접시를 주방으로 옮겼고 도찬도 뒤늦게 그를 도왔다. 하지만 민곽은 소파에 앉아 그들을 힐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윤기가 현관 앞에 빈 그릇을 내놓는 사이, 민곽이 눈치를 살피며 욕실로 가려 하자 도찬이 그를 불렀다.
“저, 아저씨.”
“으.. 엉?”
민곽이 당황하는 눈빛이었다.
“죄송한데, 휴대폰 좀 쓰면 안 될까요?”
“뭐?”
민곽과 도찬 사이에 때아닌 신경전이 벌어졌다. 윤기가 휴대폰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민곽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도찬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그가 자신에게 휴대폰을 빌리려는 것은 분명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뜻일 게다.
‘내가 거절한다면 녀석은 더욱 나를 의심하겠지?’
짧은 순간이었지만 민곽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어, 그래. 여기!”
민곽이 밝은 표정으로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뭘... 난, 볼 일 좀 보고.”
욕실 문이 닫히자 도찬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실 소파에 털썩 앉은 그는 팔걸이에 휴대폰을 올려놓고는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곁에 놓인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며 TV 채널을 옮겨가던 그가 문득 소리쳤다.
“윤기야.”
다른 때 같으면 잽싸게 대답하고 나타났을 그가 아닌가. 도찬이 방과 주방을 번갈아 보며 다시 불렀다.
“윤기야. 윤기야, 어딨어?”
공허한 울림만이 거실을 채울 뿐이었다. 느낌이 싸하다. 뭔가 좋지 않은 기분,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욕실 쪽을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도찬이 천천히 방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방문 손잡이를 조심스럽게 잡고 돌리며 도찬은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윤기야... 자니?”
책상 위에 엎드린 윤기가 보였다. 도찬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깊은 잠에 빠진 듯 인기척에도 눈을 뜨지 않는다. 마치 약에 취한 사람처럼 몸은 흐느적거렸다.
도찬은 도여가 있는 방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도여 씨. 도여 씨.”
도여의 방 앞에서 도찬이 연거푸 그녀를 불렀지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왜 그러나?”욕실에서 나오던 민곽이 물었다.
“아, 도여 씨한테 잠시 할 말이 있어서요.”
“그래? 기다려 보게.”
민곽이 경계하는 눈빛을 보이고는 방안으로 들어갔다.
“피곤한지 잠시 잠든 것 같은데,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되겠나?”
잠시 후에 방에서 나온 민곽의 대답이었다.
“자는 게 확실해요?”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건가?”
민곽은 대뜸 화를 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윤기도 그렇고, 뭔가 이상해서요.”
“이상하다니, 뭐가?”
민곽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윤기가 의식이 없어서요.”
“뭐? 그럼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병원으로 데려가야지.”
“아니, 그게 아니라... 잠이 든 거 같은데, 그게... 그냥 잠이 아닌 것 같아서요.”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민곽이 당최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벅거린다.
“아, 아니에요. 나중에 도여 씨가 깨면 알려 주세요.”
도찬은 더 이상 말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세. 쉬시게.”
돌아서는 도찬의 어깨너머로 그의 말이 들려왔다.
방으로 간 도찬이 조심스럽게 옷장에서 비검을 꺼내 놓는다. 도찬은 윤기의 얼굴에 자신의 귀를 갖다 대고 그의 숨소리를 듣는다. 색색거리는 숨소리는 그가 잠이 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깊이 잠이 든 것이 분명했다. 도찬은 그가 깰 때까지 일단 기다려 보기로 한다.
“비검주.”
민곽이 방문을 빼꼼 열더니 얼굴을 들이밀었다.
“안 바쁘면 나랑 커피나 한 잔 하지?”
멍하니 쳐다보는 도찬을 보고 민곽이 손짓을 했다.
도찬이 비검을 쥐고 거실로 나가니 민곽은 주방으로 향했다.
“앉아 있게. 금방 가져갈 테니.”
“도여 씨는 아직...?”
“으응? 아... 피곤한지 계속 누워 있네.”
“깨긴 깼어요?”
“그럼. 불러 줄까?”
“아, 아니에요.”
도찬은 머리가 복잡했다. 윤기만 그런 건지. 우연한 일인 건지. 민곽이 무슨 짓을 한 것은 아닌지. 그런데 자신은 이렇게 멀쩡하니 당최 알 길이 없었다.
“이거나 드시게.”
넋을 잃고 멍하니 있던 도찬에게 민곽이 말했다.
“아, 네.”
도찬은 얼떨결에 커피가 든 잔을 들었다.
그 순간, 베란다에 있던 도동이 죽을 듯이 짖어댄다. 잔을 입에 가져가던 도찬이 멈칫하고 눈길을 돌렸다.
“저 녀석이 갑자기 왜 저래?”
도찬은 잔을 내려놓고 베란다로 향했다.
“조용!”
도찬이 베란다 문을 열고 소리치기가 무섭게 도동이 거실로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커피가 든 잔을 발길질했다.
“야!”
도찬이 도동을 말리려 달려가는 사이 도동은 민곽을 향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 기색이었다.
“아니, 이 녀석이 갑자기 나한테 왜 이래? 뭘 잘못 먹었나.”
민곽이 도동을 향해 소리쳤다.
‘잘못 먹어?’
순간 도찬의 뇌리에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도찬이 엎질러진 커피를 손끝에 묻히고는 혀끝에 대어본다.
“이게 뭐죠?”
“뭐, 뭐가 말인가?”
“이 액체가 뭐냐고요?”
“뭐긴? 보면 몰라? 커피지.”
“커피?”
도찬은 확신할 수 없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지만 그것만으로 민곽을 추궁할 수는 없었다. 도동은 여전히 민곽을 해칠 듯이 경계하고 있었다.
도찬은 비검을 손에 거머쥐었다. 그리고는 민곽을 향해 칼끝을 쭉 뻗었다. 우웅 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검의 칼날이 서더니 순식간에 길어졌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러나?”
민곽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도찬은 비검의 칼끝을 물기가 흥건한 바닥에 대었다. 그러자 달군 쇠를 찬물에 담근 것처럼 치익 소리를 내며 비검의 칼끝에서 하얀 연기가 일었다.
“이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찬이 민곽을 보며 물었다. 민곽은 놀란 눈으로 멀뚱히 비검의 칼끝을 바라보고 있다.
“대체... 윤기에게 아니, 우리에게 뭘 먹이려 한 건지...... 이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 무슨? 내가 뭘 먹였다고.... 나도 같이 먹었지 않은가?”
“그래요?”
도찬은 도여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여의 상태를 확인해 보려는 것이었다.
“도여 씨. 도여 씨.”
도찬이 큰 목소리로 그녀를 연거푸 불렀다. 그러자 누워있던 도여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힘겹게 눈을 뜨려는 그녀의 표정은 분명 약에 취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도여 씨. 괜찮아요? 도여 씨!”
“.......에에...”
도찬이 그녀의 어깨를 흔들어 보았지만 말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이 새끼가...!”
도찬은 이제 확신이 들었다. 민곽이 분명 무슨 짓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도찬은 비검을 치켜들고 거실로 부리나케 나갔다.
“홍민곽! 너....!”
민곽이 어느새 커다란 칼을 손에 든 채 도동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는 칼을 휘두르며 도동을 쫓아내고 있었다.
“도동, 비켜!”
도찬이 비검을 높이 치켜든 채 날아올랐다. 한동안 거실은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로 채워졌다. 도동이 도찬을 도와 불길을 뿜어댔지만 민곽은 날개를 펼쳐 그 불길을 막아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도찬은 점점 기력이 떨어졌다. 민곽도 마찬가지였지만 어느 누구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도찬은 거친 숨을 고르며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는 그의 날개에서 깃털을 하나 뽑았다. 민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표창을 거머쥐듯 깃털을 손에 든 도찬이 말했다.
“당신은 한민이 될 자격이 없소.”
“뭐? 쳇. 누군 머 한민이 되고 싶어서 됐나.”
민곽이 비아냥거리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원치도 않는 듯하니 제가 그렇게 해 드리지요.”
도찬이 깃털을 힘껏 민곽을 향해 날렸다. 민곽은 몸을 뒤로 젖히며 날아오는 깃털을 칼로 쳐 내 버린다. 깃털은 방향을 틀어 도찬을 향해 날아갔다.
“어라...”
깜짝 놀란 도찬이 다급하게 비검을 휘둘렀다. 잘린 깃털이 허공에서 나부끼며 흩어지는 사이, 어찌 된 일인지 비검이 심하게 진동하며 울렸다.
도찬은 놓치지 않으려 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칼날의 진동이 그의 양 손목에까지 강하게 전해져 왔다. 잠시 후, 그가 든 칼날이 붉은빛을 발했다. 도찬은 놀란 토끼눈처럼 휘둥그레진 눈으로 칼날과 민곽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얍!”
어리둥절해 있던 도찬을 향해 민곽이 날아오르며 칼로 내리친다. 도찬이 얼떨결에 그를 향해 칼끝을 쭉 내뻗었다. 그러자 비검의 칼끝에서 붉은 광선이 뿜어져 나갔다.
“챙!”
민곽이 칼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광선을 막았지만 그의 몸은 공중을 날아 벽으로 가 꽂혔다. 엄청난 위력의 광선에, 날아간 민곽이나 비검을 든 도찬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건 또 뭐야?”
도찬이 비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 사이, 민곽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칼로 지팡이를 삼아 힘겹게 일어섰다.
“너... 이놈이...”
민곽이 어금니를 악물며 양손으로 칼을 움켜잡는다. 자세를 가다듬은 민곽은 칼을 들고 도찬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자 도찬은 달려드는 그의 가슴을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안 돼!”
도찬이 든 비검의 칼끝에서 붉은 광선이 일던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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