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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다] 두억신님께서 주신 팬픽.

 

 

한 여름의 귀브저택. 계절마저 무마시키는 귀브가의 명성은 장녀 뮤 류클리오스 요네즈가 골든=라인의 선봉에 서서 이룬 무수한 업적으로, 여러 이종족들에게 등불이 되었지만, 어찌 되었든 이곳 리흰에서는 전과 별다를 것이 없는 시간이 지속되고 있었다.

 

다만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두 모녀가 정원에서 피크닉을 즐기는 정도..?

 

소박한 샌드위치와는 대조되는 현악4중주는 시오나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사치였지만, 일주일에 한번 있는 딸과의 피크닉이라면 감수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계세요?"

 

"아아.. 요하스가 아카데미에 입학했잖니, 자꾸 눈에 밟히는구나."

 

"그러고 보니 요하스는 잘 지내고 있을까요? 후우.. 어째서인지 저랑은 말도 하지 않고, 마법에만 몰두하던데"

 

거짓말이었다. 물론 요하스 생각도 하긴 했지만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이 아닌 멈추어버린 성장. 흔히 롤리타콤플렉스라고 불리는 소아성애자가 아니면 매력을 느끼기 힘든 몸매, 10살 이후로 진척이 없는 성장은 어쩌면 자신의 피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머리가 아파왔다.

 

'그때 내가 스트레스를 너무 줘 버린것 때문일지도.. 한참 안 먹었었지 그 애"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석은 짓이었지만 당시에는 최선이었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아쉬움이 남는것이 인간이라는 종족의 특징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그만 피크닉을 접기위해 일어섰다. 욕심대로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딸과 함께 있고 싶지만, 점점 강렬해지는 햇살은 병약한 딸에게 큰 부담이 될 터였다.

 

"이디야 이제 그만 일어나자, 곧 있으면 퀼이 올 시간이구나."

 

항상 티격태격하던 퀼은 어느새 점심시간이 끝나면 귀브가로 출근도장을 찍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그 사실이 조금은 기쁘기도, 한편으로는 약혼자도 이미 있는 딸에게 악영향을 끼칠까 두렵기도 했지만, 크라우스가문의 귀부인은 그 사실을 방관하고 있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린 후에는(물론 고민하고 있는 시오나에게 휴알레이가 불어넣은 입김이다. 영리한 그녀는 약혼을 파기시키고서라도 둘을 이어주고 싶은 생각임을 시오나가 알 리가 없었다,) 편하게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에에..? 어머니 퀼은 너무 자기 멋대로에요, 어떤 날은 하루종일 한마디도 안하고 노려보다 간다니까요...."

 

재잘재잘

 

자기 앞에서 귀여운 입을 저렇게 놀리는 이디를 볼 때마다 시오나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 때

 

 

"애애앵- 치..침입자다. 저택의 벼..별관쪽에 세 마리의 샨크레도!"

 

과거 요네즈가 공주와의 일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설치한 알람마법이 울렸다. 신기하게도 그 마법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지가 되고 있었는데, 그 목소리는 얼마 전 아크메이지가 된 '침묵의 학살자 무슈'의 목소리와 매우 닮아있었다. 골든=라인에 들어가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으나 입대 당시 자기소개를 한 후로는 그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그는, 그 차가운 분위기와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는 시크함에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아마 그들이 이 소리를 들었다면 크게 놀랐으리라.

 

그리고 침입자들이 당황했다.

 

어느새 샨크레도에서 내려 시오나의 앞에 선 이들은 인간과는 조금 달랐는데, 등에는 윤기가 흐르는 갈색의 두장의 날개, 팔의 바깥쪽에 새의 깃털이 달려있었으며 발은 맹금류의 그것인 두억새 라는 종족이었다.

 

샨크레도가 없이도 날 수 있는 그들이 굳이 샨크레도를 타고 온 것은 그들이 특사(特使) 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리라.

 

그들의 우두머리는 무릎을 꿇는 예의를 취하였으나 뒤에 있던 두 이종족들은 당황했는지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저거, 무슈님 목소리 아니야?’ ‘응, 녹음구에서 들었던 거하고 똑같아, 그런데 왜?’

 

다음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메이지 무슈 반리는 변했다.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게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늘지 않던 마법실력도 아크메이지 수준으로 갑자기 부쩍 늘었다고 한다. 어쨌든 아직 말을 더듬을, 순수하던 그 때의 목소리는 차가운 마법사의 이미지가 절대적인 그를 아는 이들에게는 가히 메가톤급 충격일 것이 자명했다.

 

명색이 특사란 자들이 저렇게 당황하는 것이 보기 싫었는지 우두머리로 보이는 두억새가 거대한 두 장의 날개를 크게 펄럭였다. 명백한 분노의 의사였다. 물론 마주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않는 두억새만의 예의였다.

 

때마침 수련 중이던 기사들이 몰려와서 포위하였으나 샨크레도와 무릎 꿇은 것을 보고는 달려들지 않았다. 혹시라도 경솔한 짓을 했다가는 경을 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저들이 암살자일수도 있기에 여차하면 검을 뽑을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그리고 주위가 조용해졌다고 판단되자 선두에 있던 우두머리 두억새가 입을 열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폭탄?! 뭐라도 상관없다. 당장 저 미확인물체를 거두어야했다. 그리고 이제 창을 겨누고, 검을 뽑는 귀브저택의 기사들과는 달리 흑색의 무언가가 섬광과 같은 속도로 달려 나가 그 두억새를 저지했다. 아니 저지할 뻔 했다.

 

챙. 간단한 효과음으로 설명이 가능했다. 누구도 제대로 보지 못한 그 공격을 이종족은 작은 단검으로 막은 것이다. 충분히 뒤로 밀려날 만 했음에도 그 자리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있었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은 하나같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일개 암살자가 저런 무위를? 아니 게다가 지금 습격을 가한 이는 차기 소드마스터의 유력한 후보인 에퀼경이 아닌가? 그리고 이어지는 이종족의 말에 그들은 다시 놀라야만 했다.

 

“오랜만이군요 에퀼, 조금은 실망이 큽니다. 고작 이정도 밖에 성장하지 못했다니. 아직 그분을 따라잡으려면 한참 멀었군요.”

 

워매. 지금 저 새대가리가 뭐라고 지껄이는 것이여? 리흰의 미래를 아주 아랫사람 대하듯이 대하는 이방인의 태도에 모두가 놀랐지만 정작 에퀼 본인은 숙연해 보였다.

 

“..크윽.. 무슨 일로 오신겁니까 압펠(Apfel).”

 

“골든=라인에서 귀브가에 전할 말이 있다. 아무리 너라도 얘기해줄 수 없다.”

 

“무슨 일인지 대충 알겠군요, 그리 감추실 필요 없습니다. 바쁘신 골든=라인에서 이런 촌구석까지 오실 정도면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거든요, 요네즈가 필요한거죠?”

 

그는 주의를 줬음에도 임무를 맞춰버리는 소년을 보며 불쾌함을 드러냈지만, 몇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 유창해졌다는 사실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것도 요네즈, 그 신비한 소녀의 힘인 것인가? 혼자서 감탄을 하던 (무공과는 별개의 의미로) 압펠은 이내 이상한 점을 눈치 챘다. 그가 아는 요네즈라면 자기 얘기가 나오면 긍정이든 부정이든 강하게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귀부인의 옆에 다소곳하게 서있는 저 아이는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궁금해 마지않는 표정으로 자신을, 아니 에퀼을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순간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생각에 그는 반쯤은 긍정하면서 반쯤은 아니기를 바라는, 자신을 속이는 이중적인 작태를 취하며 어벙하게 물었다. 더 이상 비밀 임무가 일반인에게 드러났다는 사실은 문제가 아니었다.

 

“요네즈, 설마 기억을.. 잃은 것입니까?”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눈길에 이듀르웬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했다. 가엾은 저 아이는 과거의 기억이 지워졌다. 모두 요네즈 때문이다, 내 딸의! 사랑스런 저 아이의 가장 아름다워야 할 시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것도 그녀이고, 이디가 항상 불안해하고 의존적으로 변한 것도 그녀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도 저 자들은 내 딸에게서 요네즈를 찾고 있지 않은가? 처음부터 그래왔다. 요네즈가 사라졌을 때 기뻐하기보다 슬퍼하는 자들이 더 많았다. 혹시라도 남아있을까 기대를 갖던 이들은 모두 실망하였다. 그 무책임한 행동이 저 아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다가왔을까. 괜찮단다 얘야, 이제 엄마가 지켜줄게

 

“그 아인 이제 없습니다. 기억을 잃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드디어 제자리를 찾았어요. 당신의 언행이 이 아이에게 어떤 상처를 남길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당장 돌아가주신다면 오늘의 무례는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에퀼이 속삭였다.

 

‘여기서 더 얻으실 건 없어요, 무슈나 요하스를 찾아가세요, 그들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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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펠은 절망했다.

 

 

 

귀브가에서 들은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요네즈는 이듀르웬 D 귀브의 몸을 빼앗은 악령이며, 수년 동안 주인행세를 하다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니.. 그녀와 직접적 대화를 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백색의 영광이 들어온 후로 가장 큰 추종자를 모은 인물이라면 요네즈와 무슈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시 천상의 선율을 자아내는 그 자그마한 존재의 매력에 이끌려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딜 봐서도 악인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남에게 상처줄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그들로 하여금 보호본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악령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요네즈가 속으로 얼마나 힘들어 했을지, 또한 어째서 그렇게 불안해보였으며, 활발했는지가 이해가 되었다. 분명 그것은 활발한 척 한 것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지만 자신이 시오나였다면? 자신의 딸의 돌이킬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위험한 골든=라인에서 활개를 치고 다녔다면? 우리는 동료이기에 요네즈에 대해 슬퍼할 수 있고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이다. 아마 그녀가 미치도록 밉겠지.

 

그 생각이 들었을 무렵, 근방에 마물들의 기운과 마법의 기운이 충돌하는 게 느껴졌다.

 

‘제대로 찾아왔군, 그대라면 뭔가 알고 있겠지. 뮤리오스의 전속마법사 무슈 반 리!’

 

 

 

요네즈가 사라진 귀브저택...

 

 

 

그를 태운 샨크레도가 전장에 도착했을 즈음 전투는 이미 끝나있었다.

 

‘꽤나 많은 마물의 기운이 느껴졌는데, 벌써 해치운건가.’

 

스승과 제자라지만 마법의 성향이 너무나도 달랐다. 요네즈의 노래에는 살의나 증오, 냉혹이 전혀 없었던 반면 이 전장에는 오직 살의와 허무만이 감돌았다. ‘마물마저 소멸시키는 허무라, 허무로 이루어진 저들에게 어쩌면 가장 적합한 죽음일지도.’

 

에퀼을 수련시켜줄 때면 이따금씩 붉은머리의 소녀가 도시락을 싸들고 왔었다. 그 소녀는 자기 오빠라면서 무슈를 자랑했고, 분명 강하지는 않으나 뛰어난 마법사이며 순수하고 귀여운구석도 있다고 하였었다. ‘지금의 모습과는 정 반대로군, 그녀가 이 모습을 본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평소엔 하지 않는 잡생각이 오늘따라 난파선의 잔해가 물 위로 떠오르듯 불쑥불쑥 떠올랐다.

 

초소에 돌아가던 자들이 우릴 보더니 반겨왔다.

 

내가 무슈 반 리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그들은 데려다주겠다며 흔쾌히 앞장을 섰다.

 

이젠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게 실감나서인지, 단지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한 자신에게 드는 자괴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발걸음이 사형선고를 받아 사형장에 걸어가는 사형수마냥 무거웠다. 과연 그는 어떤 말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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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떤 천막 앞까지 우릴 인도하고는 친절하게 안에 있는 자를 불러주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붉은 머리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자가 천막에서 나왔다.

 

순간적으로 친하게 지내던 여자들을 떠올렸으나 눈앞의 여자는 그녀들과 달리 화려했으며 도전적이었다. 그녀의 눈은 생명이 충만했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칼은 윤기가 가득했다.

 

“제 남편을 보러 오셨다고요? 그이는 30분쯤 후에 돌아올 거에요, 그분이 사라지신 후로는 항상 그러니 안에서 기다려주시겠어요?”

 

생각났다. 약 십년 전 켈베로스로부터 어떤 여자를 추적하라는 명령에 골든=라인에서 빠져나와 쥬느에 들렸을 때, 쥬느왕의 청혼을 거절했다는 무희가 속해있는 유랑극단이 풍년을 기원해 광장에서 공개 콘서트를 열었었다. 보고받은 자료에 의하면 그 닐니르 라는 여자는 유랑극단을 좋아할 것 같았다(?). 절대 내가 궁금해서 본 것은 아니다.

그날 밤 유랑극단에서 빛나던 소녀, 사브리나 린렌 쥬느의 무희. 결국 난 그날 밤 그녀의 춤에 매료되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라니.. 쥬느의 왕을 버리고 저 남자와 결혼한 건가? 물론 그분이 누구를 뜻하는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수행원들은 샨크레도를 매어둘 곳을 찾기 위해 떨어져 있는 터라 그들이 오기전까지 사적인 질문을 할 수 있다. 야호! 신난다. 물론 부하들 앞에서는 근엄함을 지켜야지, 암 어떻게 지켜온 이미지인데.

 

천막안은 보기와는 달리 굉장히 쾌적했는데, 마법임이 분명한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있었다. 예를 들어 바닥이 떡갈나무로 되어있다 던지, 화로 대신 마나레인지와 마나발전기(아크메이지 뮤리오스 요네즈가 개발한 발명품으로, 마나를 연소시켜 불을 일으키는 장치와 마나를 주입할 수 없는 일반인을 위해 열에너지를 마나로 바꾸어주는 장치)가 있는 모습은 꽤나 이색적이었다.

 

주전자를 마나레인지에 올려두고 그녀가 접대용으로 보이는 의자에 앉으며 반대편의 자리를 권했다. 부드럽게 주시한다. ‘그이와 관련된 일...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가요.’ 잠시 멍하게 있는 동안 그녀가 말을 건넸다. 너무 편한 분위기여서인지 긴장이 모두 풀려버린 것 같았다.

 

사브리나, 그녀 또한 요네즈의 측근인사중 한명이다. 이런 민감사항은 셋을 센 후에 긴장감이 조성되었을 때 말하는 것이 가장 좋지.

 

하나.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하악하악

 

둘.

 

“요네즈와 관련된 문제입니다.”

 

평온하던 사브리나의 표정이 크게 동요하는 것이 보였다.

 

젠장, 당황해서 둘만에 말했다! 거기다가 아크메이지와 뮤리오스도 빼먹었어! 젠장, 이게 다 저 눈동자 때문이다. 대체 인간이라는 종족은 눈동자가 왜 저리도 초롱초롱한 거야.

 

과거 크라우스 소공자를 가르칠 때도 저 눈동자 때문에 고생했었다. 깊고 흐릿한 우리 종족과는 달리 인간의 눈동자는 뭐랄까... 그래, 마력이 있다. 이 표현이 적당한 것 같다. 우리 종족은 먼 곳을 볼 줄 알며, 대류의 움직임과 바람의 표정을 감지해야하기 때문에 깊고 무거운 다른 종족으로부터 선망 받는(마주하고 있으면 편해진다고 한다.)눈을 가졌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깊지는 않지만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선명함과, 열망이 담기는 눈동자는 나로 하여금 미치게 한다. 젠장, 아무래도 이건 병이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상황으로 봐서 뭔가 지뢰를 밟은 것이 분명하다. 뭔가 방법이!!

 

그래! 타개해야한다. 이대로 뻘쭘히 있다간 궁금했던 것은 한마디도 못한 채 부하들이 와버릴거야.

 

“하지만 그 전에, 사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군요. 이건 정말 사적인 문제인데.”

 

급 밝은 목소리에 나도 놀랐다. 다시 예의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이런 소공자도 눈을 피해줬는데 이 여자는 굽힐줄을 모르는군. 그런다고 꺾일쏘냐! 두억새의 긍지를 보여주마.

 

“무..무무무무슈님 팬입니다. 평소엔 어떤 분이신가요?”

 

 

제길. 이래선 변명할 거리도 사라지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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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컥

 

한창 대화가 무르익어갈 무렵 방해꾼이 등장했다. 쩝 오랜만에 유익한 대화였는데 대체 누구야!

 

“당신, 오셨어요? 골든=라인으로부터 손님이 오셨어요”

 

음.. 메이지 무슈 반리였군 흠흠.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오른주먹으로 왼쪽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골든=라인에서 통용되는 특사라는 뜻이 담긴 제스쳐다.

 

“반갑소, 오랜만이군 메이지 무슈. 이렇게 들린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아크메이지 뮤리오스에 대한 소식을 듣기 위해서요”

 

“사라, 밖에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더군, 차라도 대접해줘. 츄”

 

츄? 여기까지 소리가 들린다 이것아!! 아니, 부하녀석들 왜 안 오나 했더니 엿듣고 있었던건가? 이걸로 내 이미지는 날아갔군 허허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힘을 억제한 게 실수였다. 맹금류로서의 본능이 남아있는 두억새는 선천적으로 육감과 위엄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권능은 굉장히 유용하지만 이종족과의 교류에서는 절대적인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수년간 왕따아닌 왕따로 살면서 권능을 억제하는 기술을 터득했고 지금은 거의 반자동적으로 억제하는데... 이런 결과를 낳다니!

 

사브리나가 앉았던 자리에 무슈가 앉았다. 그가 입을 열길 기다렸지만 이거 왠지 차만 마시다 끝날 분위기인걸? 아까 말하는거 봤거든! 여기서까지 컨셉지키지마!

 

내가 먼저 말을 하려는 순간 침묵의 학살자가 마침내 긴 침묵을 끝내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것을 보면 리흰에는 이미 가보셨겠군요, 저 역시 그분이 어디 계신지 모릅니다.”

 

“정말 모르십.. 아니, 더 이상의 질문은 무의미하겠군요. 그럼 제 방식대로 찾아보겠습니다.”

 

확고한 그의 표정이 나로 하여금 더 이상 추궁할 수 없게 하였다. 말은 저렇게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찾아야할지.. 소문이라도 쫓아야하나?

 

내가 남은 차를 마시고 일어나려 할 때쯤 그가 나를 말리듯이 새로운 얘기를 꺼냈다. 한참동안의 고민 끝에 나온 이야기는 나에게 한가닥 희망을 주었다.

 

“무무슈, 제 별명이었습니다. 말을 더듬는다 해서 붙여진 별명이죠. 그분을 만나기 전까진, 아니 그분을 만나고 나서도 한참동안은 말을 더듬었습니다. 저는 약한 인간이었으니까요. 그분은 저에게 자신감을 주셨습니다. 사라를 대하는 감정조차 모르던 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려주셨죠, 솔직히 저는 그분을 대하는 당신 골든=라인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바보같이 착하기만 한 그분께서는 언제나 죄책감에 덜덜 떠시면서도 전장에 나가셨습니다. 그런 그분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쥬느, 그리고 리흰에 있다면..”

 

그는 말을 끊더니 주머니에서 목걸이를 꺼내더니 우수에 찬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브리나의 마기를 정화하는 목걸이, 한때 골든=라인에서 대여해간 그 물건이었다.

 

“그분은 사라지셨지만 아직 이 목걸이는 노래합니다. 그분이 완전히 사라지신건 아닌거겠죠.. 동생을 찾아가십시오, 시간이 꽤 흘렀어요. 그라면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그분에 대한 정보를 얻었을] 겁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비극을 예고하는 불안이 언령이라도 되듯이 내 몸을 관통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 도착했을 때 요하스는 사라져있었다. 불길한 마법진과 인체실험의 흔적을 남겨둔 채.. 그의 방에는 짙은 마기가 남아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당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누님”

 

“요하스.. 넌 미쳤어 흑..”

 

“아니 누나, 이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야. 이제 주문한번만 더 외우면 누님이 돌아온다고!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나? 지금 내가 여기서 숨 쉴 수 있는 게 누구 덕분인데, 누님만이 날 구하러 와줬어! 그런데 너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불공평해 그분은 누나의 육체로 계실 때조차 죄책감에 시달려하셨어, 그 짧은 시간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셨단 말이야, 이제 내가 그분을 구해드릴 차례야. 후우..”

 

피로 낭자한 저택의 홀에서 두 남매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발의 누이는 피눈물을 흘리며, 금발의 동생은 순진한, 그렇기에 더욱 광포한 미소를 지으며 겁에질려 떨고있는 누이의 육체를 훑어보았다.

 

“늘 고민했지, 어째서 그분은 누나의 몸으로 들어오게 됬는지.. 답은 하나더군 바로 누나의 영혼이 그분의 영혼과 공명한다는 점, 누나의 귀여운 그 육체도 나는 괜찮지만 그분은 필시 불편해하시겠지. 그래서 선물을 준비했지. 이거라면 분명 그분도 만족해 하실거야 후훗”

 

요하스와 이듀르웬 사이에 거대한 바람이 일었다. 이듀르웬이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곳엔 순백의 침대와(침대에는 여러 가지 마법진과 수식들이 그려져 있었지만 마나를 불어넣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방식이기에) 그 위에서 자는 듯이 죽어있는 소녀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대개는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디는 느낄 수 있었다. 저건 틀림없는 시체라고. 죽은 소녀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이디는 자신의 상황도 망각한 채 소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공주님과도 같은... 고요함이 흘러나오는 흑단의 생머리하며, 마치 수정으로 세공된 조각상을 바라보는듯한 착각을 주는 하얀 피부, 거기다 그녀는 굉장히 어려 보였다. 안그래도 유아체형인 자신과 비교했을 때 오히려 자신이 커보이다니, 하지만 그 점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앞으로 피어날 꽃, 그래 그녀를 비유하자면 앞으로 피어날 꽃봉오리였다. 어서 눈을 뜨고 날 바라봐줘!

 

금단의 충동에 잠식당한 이듀르웬은 그 소녀가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하고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했다. 실제로 머리색을 적발로 바꾼 뒤 몸을 볼륨 있게 바꾼다면 지금의 이듀르웬이 나올 것이다. 그 모습은 요하스가 처음으로 요네즈를 만났을 때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에퀼은 달랐다. 저 모습은 분명 요네즈이다. 요하스가 귀브저택으로 돌아왔을 당시 에퀼은 그와 대면하기가 껄끄러웠기에 과거 요네즈의 방에 숨어있었다.(이듀르웬으로 돌아오자 시오나가 불길한 방이라면서 폐쇄하였다,) 그리고 그의 감각에 잡히는 지독한 살기와 혈향. 에퀼은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고 검만 잡는다면 소드마스터인 아버지를 빼면 자신을 이길 자가 없다고 자부해왔던 그였다. 귀브가의 모든 기사들과 던전에서 수련중이던 마법사들까지 죽었지만 퀼은 나갈 수 없었다. 자신을 짓누르는 그 압박에.. 이상하게도 그 순간 생각나는 사람은 부모도, 공주도 아닌 요네즈였다. 그 녀석과 있을 때는 마물이 몰려올 때도, 마왕과 대면할 때도 두렵지 않았다.

 

‘바보녀석, 왜 항상 결계를 걸어준거냐 난 이제 네가 보호해주지 않아도 충분히 강하다’

 

‘바보 퀼, 그러다 네가 다치면 공작부인한테 혼나는 건 나라구’

 

다리에 힘이 들어왔다. 단지 과거를 떠올렸을 뿐이었는데 마치 요네즈가 옆에 있는 것 같았다. 약지에 끼워둔 반지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요네즈는 사라지기 두달쯤 전에 반드시 필요할 거라면서 주변에 있던 모두에게 이런 것을 나눠주었다. (약지에 끼운 이유는 어머니가 원래 반지는 약지에 끼우는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공작과의 결혼반지를 보여주며 에퀼을 설득했다.)

 

그래, 지금이 그녀석이 말한 순간이다. 그렇게 다짐하며 퀼은 홀에 서있는 요하스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뛰었다. 분명 녀석은 눈치 채지 못했을 터이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내 몸은 뒤로 밀려나는 거지?

 

 

그 시각 시오나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휴알레이가 근무중인 공주성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녀를 태운 4두마차는 그녀의 심정을 표현하듯이 빠르고 경쾌했으며, 요하스를 맞이하고 바로 기쁜 소식을 남편에게 알리기 위해 저택을 나섰기에 지금 귀브저택에서 어떤 피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을지 그녀로선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요하스가 드디어 그 아이를 잊고 우리의 곁으로 돌아와 주었다. 이제 빼앗겼던 두 아이를 모두 찾고 다시 행복하게... 그녀역시 요하스가 요네즈를 잊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가장 민감하던 시기에 그렇게 아끼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는데 그걸 잊을까? 그럼에도 그녀는 믿고 싶었다. 다시 예전의 행복한 가정이 돌아올 거라고..

 

공주성에 들어가는 건 쉬웠다. 남편이 근무중인데다 그녀 자신에게 무력이 거의 없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드마스터 지오리트 P 크라우스가 공주의 호위를 맡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통과의례는 간단하게 치러졌다.(호위병은 마차에서 대기했다.)

 

시녀에게 휴알레이의 위치를 묻자 공주의 방이 있는 방향을 가리킨 후 인사를 하더니 가버렸다. 평소의 시오나라면 건방진 시녀의 태도에 얼굴을 찡그렸겠지만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맑았다. 이건 그녀의 남편이 알려준 것으로 요네즈가 사라지고 이틀 뒤 세피아공주는 기나긴 잠에 빠졌다. 그녀가 잠들기 전 남긴 말은 ‘동화속 공주님처럼 잠들어있으면 요네즈가 깨우러 돌아올까?’였다. 세피아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잠들자 국왕은 크라우스 소공자를 불러 물었다. 대체 그 동화가 무엇이냐고,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요네즈가 잠들기 전 들려줬다는 그 이야기는 결과적으로 운명의 상대가 키스해주면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었다. 국왕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고 그 사이 남편과 크라우스공작이 대안을 세웠다. 운명의 상대를 찾을 때 까지 공주가 잠든 사실을 비밀로 둔다. 가장 단순한 방법이었지만 이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없기에 왕도 마지못해 허락했다. 하지만 리희닌의 피를 짙게 물려받은 공주님의 운명의 상대가 과연 있기나 할까? 아니 있었다면 십년도 전에 소문이 났을 것이다. 그렇기에 공주는 아직까지도 깨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신하들의 원성에 공주의 사실을 비밀로 두는 것도 한계에 임박했다. 당연히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기 위해서 시녀들을 벙어리로 교체하였고 공주의 방엔 얼씬도 못하게 만들었다. 모든 관리는 크라우스 공작이 하며 때때로(라고 쓰고 매일이라 읽는다.) 국왕과 휴알레이가 방문하는 시스템이다. 놀랍게도 잠든동안 공주는 수척해지거나 생리활동을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시오나는 홀연히 공주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자신이 공주성에 왔을 때부터 크라우스공작은 자신의 기척을 느끼고 남편에게 말해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공주의 침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ㄷ자 구조로 되어있기에 모퉁이를 돌기 전에는 끝자락밖에 보이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자 모든 장면이 보였다. 시오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평온하게 누워있어야 할 공주가 머리카락을 산발한 채 뺨을 붉히다니, 그리고 자신의 남편과 크라우스 공작이 취하고있는 행동은 대체 무엇이란말인가? 시오나는 눈이 틀리길 빌었다. 제발 저건 거짓말이라고, 세상에 맙소사.

 

두 사내는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주먹을 왼 손바닥으로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언제나 기품이 넘치던 공주는 어째서인지 머리는 흐트러졌으며 뺨은 붉게 상기되어있었다. 그녀는 오른손에 걸려있는 작은 하늘색 팔찌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요네즈가 왼팔에 차고 다니던 붉은 팔찌와 한 세트로 보이는 그 팔찌는 푸른빛을 띄며 회전하고 있었다.

 

재앙이다. 시오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요네즈가 사라지고 딸이 돌아왔을 때 가장먼저 한 걱정이 바로 공주였다. 이디는 공주에게 빠졌었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데 가장 존경(시오나는 세피아에 대한 이듀르웬의 마음을 이 이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하는 공주가 요네즈를 내놓으라면서 행패를 부린다면? 분명 심한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녀의 파급력은 굉장하다. 딸을 어떻게 하면 보호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 공주가 잠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와 얼마나 기뻤던가. 자신 역시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정말로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깨어나다니.. 거기다 지금 이 방 안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남편과 크라우스공작뿐이다. 혹시 휴알레이가 입맞춤을 해서 공주가 깨어났다면.. 자신은 남편을 포기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확정된 사실은 아니지만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저 둘 중 운명의 상대라 할 사람은 누가 봐도 자신의 남편이었다.(시오나는 남편에 대해 객관적이지 못하다.) 마치 사형선고가 내린 듯 했다.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닐 때 공주가 입을 열었다.

 

“요네즈가 깨어났다. 큰일이야 뭔가 잘못되었다. 당장 귀브가로 가야만해!”

 

덜덜 떨며 입을 여는 공주의 모습은 지금까지 완벽했던 그녀의 이미지와 다르게 굉장히 불안정해 보였다. 그러나 공주에 이어 요네즈크리까지 먹은 시오나가 그런 사실을 인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천국의 문턱에서 지옥의 입구까지 떨어지는 경험을 한 시오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기절한 에퀼을 바라보는 요하스의 표정에는 한줌 감정도 없었다. 반지를 끼고 돌진한 것은 그의 실수였다. 요하스는 저택에 가까워질수록 목걸이가 공명하는 것으로 이미 에퀼의 존재를 눈치 챈 상태였다. 준비하고 있던 반 중력마법을 그의 돌진과 함께 터뜨려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요하스를 제어하는 마지막 장치였다. 안전장치가 사라진 요하스는 마법으로 바닥을 파냈다. 파내는 도중엔 어떤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지만 약 1cm정도로 파내어진 바닥에 죽은 기사들의 피가 흘러들어가면서 그것이 둥근 모양의 마법진임을 알 수 있었다. 그 마법진은 거대한 원 안에 같은 크기의 작은 원 두 개와 여러 가지 문자들이 적혀있었다. 한 원에는 이듀르웬을 나머지 한 원에는 요하스가 준비한 몸이 올라갔다. 요하스는 두 원 사이에 서서 단검을 꺼내 자신의 손바닥을 가볍게 그었다. 피가 흘러나오는 왼손바닥을 앞에 쭉 뻗었다. 놀랍게도 피는 그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고 일정한 양으로 쭉 흘러내렸다. 1분쯤 지났음에도 피는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미 한 사람에게서 나올 양을 초월했음에도 요하스는 멀쩡했다. 피는 바닥에 고이지 않고 파내어진 틈 사이로 흘러들어가 마법진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다시 1분여가량 흐르자 마법진이 완성되었고 피는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요하스가 주먹을 쥐었다 펴자 이번엔 반짝이는 가루들이 흩날리며 이듀르웬과 시체에 달라붙었다. 요하스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누님이 빌린 몸을 돌려주고 올 동안

당신을 사모했던 저는 울다가

마왕이 속삭이는 달콤한 소리에

한 번 더 누님을 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벌을 받더라도 두렵지 않아”

 

요하스는 단검을 역수로 쥐어 한때 사랑했었던 누이의 심장을 찔렀다. 마법진이 빛나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이 가슴에 안기길 원했다. 이 어깨를 안아주고 싶었다. 저 입술을 탐했다. 그런데 지금은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저 피를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그 순간 어떤 느낌이 몸을 관통했다. 환희, 성취감, 자괴감 그리고 모든 것을 덮는 반가움

 

마법진에서 나던 빛이 사그라들며 고여 있던 피도 사라졌다. 사방이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 성공했을까? 요하스는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였을까?”

 

소름끼치도록 반가운 목소리, 항상 그리워하며 갈망하던 그 존재가 등 뒤에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모두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비록 떨어져 있었지만 다시 만난것이다! 그것도 극적으로, 이제 지켜줄 수 있다. 언제나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근친이라는 벽도 허물어졌다. 믿을 수 없는 충족감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나가지 않았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분은 이걸 광기라고 했던가? 그런건 중요치 않았다. 혹시라도 누님이 떠날까봐 뒤에서 걱정만하는 어린 요하스는 이제 없었다. 자신이다. 오직 자신만이 누님을 구할 수 있고, 그렇게 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뒤를 돌아보기가 겁이 났다. 차라리 이대로 그녀가 돌아왔다는 사실만 기억한 채 세상이 끝났으면 했다. 요하스는 텔레포트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묘한 위화감이 그에게 돌아가라 말하고 있다. 자기보호다. 분명 상처받을 거다. 그녀에게서 부정당한다면 더 이상 살아갈 자신 따윈 없는 것이다. 충족감은 썰물 빠지듯 쓸려나가고 빈자리는 두려움과 위화감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거의 완성된 텔레포트를 시전하기 직전 요네즈의 말이 요하스의 이성을 강타했다.

 

“그렇게나 큰 잘못이었을까? 네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뻐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조차 나에겐 과분한 일이었을까? 요하스, 사랑하는 동생아 미안해, 내가 욕심을 부려서 네가 망가지고 말았어.”

 

절대 움직일 것 같지 않던 고개가 너무나도 쉽게 돌아갔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하고서.

 

요하스의 머리가 정지했다. 더 이상 이성은 그를 지배 할 수 없었다. 오직 본능이였다. 뒤에서 이듀르웬이 경련하고 있었지만 요하스에겐 보이지 않았다. 억눌렸던 감정이 봇물터지듯이 터져나와 몸을 지배했다. 울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사랑스러웠다. 소유하고 싶다. 웃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는모습도 아름답다. 그녀의 모든 모습이 사랑스럽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새로운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싫어하는 모습, 괴로워하는 모습, 아끼던 동생에게 상처받는 모습. 괜찮다. 그녀가 어떤 상처를 입더라도 치유해줄 자신이 있었다.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할 수 있다면 오직 자신에게만 허락된 모습을!

 

요하스는 울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강제로 입을 맞췄다. 갑작스런 키스에 그녀는 당황했는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입술은 목을 타고 내려왔다. 울음소리는 계속 되었다. 그러나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울음소리였다.

 

본능은 파격적이었지만 동시에 간헐적이었다. 어느새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기분은 모두 사라지고 눈앞에 울고 있는 그녀와 너무나도 추잡스러운 짓을 해버린 자신이 보였다. 이해되지 않았다. 이러려고 그녀를 되돌린 것인가? 아니다.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고, 자유를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단지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을 뿐이었고, 그녀가 착해서 못 누린 모든 것을 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힘이 생겼고, 그녀를 지켜주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결과는? 자기 손으로 더럽혀버리고 말았다. 상처 주었다. 그리고서 하는 생각이 고작 치유해줄 수 있어! 라니 이기적이고 유치했다. 이제와서 보상이라도 받겠다는 것인가? 더 이상 그녀를 볼 자신이 없어졌다. 더 이상 자신은 사랑스러운 동생이 아니었다.

 

“힘들었지? 미안해 요하스. 너에게 한 마디도 안하고 떠나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고개가 숙여졌다. 머리 위로 그녀의 체온이 느껴졌다. 이제는 넓어진 등을 조그만 팔로 놓칠세라 꼭 잡아주고 있다. 어릴 때 그녀는 자주 이렇게 안아주곤 했다. 그리움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데 저분은 어찌 저리도 상냥하단 말인가. 저렇게 착하면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제발 나쁘게 살랬더니 아직도 저렇게 착하단 말인가. 나쁘지 않았다. 자연스러웠고 그리운 느낌이었다. 언제나 자신은 그녀를 걱정했고 그녀는 그런 자신을 감싸안아주었다.

 

비로소 원래 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그녀는 이듀르웬을 되살려 달라고 하였다. 단검은 육체에 손상을 주지 않는다. 오직 영혼을 찌를 뿐이었다. 물론 육체가 찔린 만큼이나 위험하지만 요하스가 누구인가. 요네즈를 위해 어렸을 적부터 영혼과 육체의 관계에 대해 공부해왔던 그였다. 간단한 시약과 주문만으로 누이는 완치되었다.

 

세피아 공주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었다. 어서 떠나자는 말을 하기위해 뒤를 돌아보자 요네즈가 목걸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하스의 목에 걸려있던 그것이었다. 아마 안아줄 때 풀어간 것 같았다.

 

“이 목걸이 속에서 쭉 지켜봤어.. 저 몸으로는 이제 곧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모두에게 나눠준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야.. 언제든지 볼 수 있도록.”

 

그 말을 하는 요네즈의 표정은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그런데 모두 날 잊지 못하더라, 이 목걸이에 담긴 내 의지가 그렇게 만들었던 걸까? 죽어서도 떠나지 못하는 원혼처럼? 그런데말이야.. 이상하게 기뻐 나 못됐지? 모두가 나 때문에 슬퍼한 사실이 너무도 기뻐”

 

“누님 자책은 그만둬요, 만약 제가 사라진다면 누님도 똑같이 하셨을 거잖아요? 누님은 원혼같은 게 아니에요.”

 

이럴수가 내 누님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는데. 솔직한 표현을 하며 칭얼거리는 (훌쩍거리는 이지만 요하스의 눈에는 애교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요네즈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렇게나 전적으로 자신에게 기대오는 요네즈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마워.. 요하스 하지만..날 살리기 위해서 너는..”

 

아아. 과연 사랑하던 누님이다. 자신을 이렇게나 걱정해 주다니.

 

“마왕에게 영혼을 바쳤잖아”

 

“괜찮아요 누님. 그런거 저는 그저 당신을 볼 수만 있다면”

 

당신. 아아 거의 고백이나 다름없다. 이제 누님은 나를 받아 주실까? 입꼬리가 올라갔다. 드디어!

 

“고작 이런 환상을 보는 데 생명을 주다니.. 크큭.. 고마워 요하스”

 

뭐..라고? 그게 무슨소리.. 환상이라니?

 

끔찍하게도 사랑스럽던 요네즈의 얼굴이 점점 흐물흐물해지더니 마왕으로 변해갔다.

 

“간단해, 너는 나에게 영혼을 팔았고 나는 그 대가로 너에게 환상을 보여줬지. 이제 만족했어? 수집품씨?”

 

그 말을 끝으로 마왕은 영혼이 담겨있는 구슬을 들고 커다란 방으로 갔다. 그 방에는 사람의 얼굴이 비치는 구슬이 수천개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모두 그의 수집품이었다. 마왕은 구슬을 진열대에 올려놓고 ‘금방 친구를 만들어 줄게 마침 너와 같은 계약을 한 인간들이 꽤 있어서 말이야. 뭐 너는 평생 이곳에서 환상이 깨는 고통을 맛봐야 겠지만 말이야’ 라고 말한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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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펠은 허무한 표정으로 요하스의 장례식을 지켜보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찾았을 때 이미 아카데미 측에서 시신을 거두어 장례준비를 하고 있었고, 압펠이 다녀간 직후 귀브가와 무슈에게 그의 죽음이 전해져서 지금은 모두가 상복을 입고 있었다.

 

압펠은 그의 시신 앞에 붉은 꽃한송이를 남겨두고 조용히 빠져나와 걸었다. 비록 친하지는 않았지만 연결점이 있었다면 가족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기에 더욱 쓸쓸했다.

 

세피아공주와 그를 친형처럼 따랐던 에드워드 왕자가 장례식에 불참한 것은 모든 리흰인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거기다가 몇 달 전부터 궁을 나오지 않아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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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마왕의 진열장에는 구슬이 더욱 늘어나 있었다. 이번 컬렉션은 세트였다. 흡족해하며 돌아선 마왕은 다음날 분노에 가득 차 쥬느 일대를 허무로 삼키게 된다. 영문모를 마왕의 갑작스런 등장에 골든=라인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룬마스터인 지유=클로버를 잃게 되었다.

 

그 날 마왕의 진열대에는 멀쩡해야할 구슬 여러 개가 깨져 있었고 한 송이 붉은 꽃이 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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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억새들에게는 죽은자에게 붉은 꽃을 바치면 죽은이가 행복한 윤회를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 두억새가 애인을 지키기 위해 싸웠으나 결국 애인을 지키고 죽은... 시체에서 붉은 꽃이... 압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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