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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고 구르면 어느새 옷자락이 걸려있습니다.

헌팅 헌터 앙티테아트르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퓨전

구름말이
작품등록일 :
2022.02.19 20:56
최근연재일 :
2024.04.27 23:29
연재수 :
13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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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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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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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게으름보다 안락한 것(8)

DUMMY

나름대로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그동안 많은 연락을 받았던 차였다. 내 번호를 알려달라고 사정사정하는 인간이 어떤 목적을 가졌을지, 몇 가지 가닥을 잡는 건 가능했다.


‘남한도 헌터 저 최민호입니다. 전화를 안 받으셔서 메시지 하나 남깁니다.’


기억나지도 않는 이름인 건 이제 당연했다. 떠올려 보려고 노력하기보단 연결음이 조금 길어지는 이유만 생각했다. 기다렸지만, 기대하지 않은 전화였을까. 오히려 놀라 머뭇거리는 걸까.


-여보세요? 나, 남한도······. 남한도 헌터 전화 맞습니까?


기대했던 느낌과 거의 닮은 불안한 목소리가 나왔다. 내 이름을 확인하며 긴장과 의심이 한껏 뒤섞이는 기색이었다. 이 사람이 기억하기 쉬울 법한 톤을 고민하며 읊조리듯 대답했다.


“제가 남한도 맞습니다. 최민호 씨세요?”


-아! 맞아요, 맞습니다! 남한도 헌터! 저, 최민홉니다! 기억하십니까?


“실례지만 모르겠습니다. 누구시죠? 왜 전화 주셨는지 궁금합니다만.”


-어······. 기억······이 안 나신다고요? 저를, 그럼······. 아니, 잠깐만요. 그러실 수 있죠, 예! 꽤 오래됐으니까요.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짧은 분노에 무거운 비굴함을 억지로 이어 붙여 부자연스럽게 늘어지는 말이었다. 가닥의 수를 줄이며, 나는 이 시점을 기준으로 삼았다. 자신을 다시 벼리기 시작할 좋은 타이밍이 어쩌면 지금이라 느꼈다.


혹시 내가 기억해 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인지 최민호 씨의 목소리가 급하게 떨렸다. 나는 굳이 진정시키지 않고 그가 설명을 제대로 끝내도록 차분히 기다렸다.


“그러니까.”


들어보니 날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마석 테러 진압, 기지국 탈환, 안전 구역 확장, 그렇게 3가지 작전에 함께 하셨다는 거죠?”


-예! 옆에서 몇 번 밥도 같이 먹었고요! 어, 얼굴 보면 바로 기억나실 겁니다!


“만나자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저는 정말 가, 감사하죠!


이번엔 티 나는 기쁨 뒤에 묘한 두려움이 이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런 줏대 없는 감정을 보며 어쩐지 내 마음도 움직였다.


“알겠습니다.”


시간 낭비가 될 거라 예감하면서도 최민호 씨를 만나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쓸모없고 허무하게, 전혀 강렬하지 않은 방식으로 느슨함의 끝을 맞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


나만 빼고 모두 소란스러운 게 아닐까, 어느 날 혼자 이질적인 사람이 된 것처럼 궁상스럽게도 침착한 아침을 맞았다.


-야이, 남한도 미친놈아. 스트레스가 쌓이면 그냥 술이라도 한 잔 하자고 그래. 나라 시끄럽게 또 웬 지랄이야.


내 기상 시간을 잘 아는 친구 새끼가 매우 민폐를 끼치는 방식으로 정보를 이용하며 아침부터 난리였다.


-시발, 미담을 더 퍼뜨려도 모자랄 상황에 논란 거린 왜 만드냐고.


“논란은 무슨 논란.”


-헌갤 안 봤냐? 존나 또 활활 타는 거 몰라?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떠들어 봤자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안 변해.”


-아니, 이 새끼가 진짜······.


“내가 알아서 할게.”


-또 시작이네. 사회적 합의가 존나 중요하네 마네, 입바른 말 처 하던 새끼가 이번엔 왜 이러는 건데? 20억 점 때문에 질려서 그래? 시발, 내가 같이 벌어줄게. 도와준다고 미친놈아! 너 그거 못 버틸 새끼 아니잖아.


“···다시 말하지만 논란까지도 아니야. 그냥 알아야 할 과거를 사람들이 알게 된 것뿐이고, 내가 떳떳하게 있으면 될 일이야.”


-그래서 이제 혼자 처 하겠다고? 넌 나랑 하는 약속이 그렇게 쉽냐?


“넘겨짚지 마. 내가 언제 혼자 일하겠대?”


-그럼 뭔데?


“채널은 유지할 거야. 거기서 니가 빠지면 나도 곤란해.”


알아서 한다는 말이 오늘 박세정의 발작 버튼인 모양이었다. 오해를 바로잡아 주니 그제야 말투가 누그러졌다.


-알았어. 이번 일은 너 알아서 해야 할 별개의 문제라고 치자. 그래도, 좀··· 사리면 안 되겠니? 최모 씨인지 뭔지 하는 그런 아픈 사람들하고 만나는 건 좀 자제하고.


“유명인이 겪는 흔한 일 아니겠냐? 나도 이렇게 경험 쌓는 거지.


-그 사람이 돈 요구했다며? 안 줄 거지?


“미쳤냐? 나한테 5억이 어딨어?”


-···없어?


“있겠냐.”


-뭐야, 존나 거지였네. 진짜 어디 기부라도 했니?


“금수저 발언 수준, 쯧쯔······.”


-아무튼 몸조심이나 해. 빠가 까 되는 거 한순간이니까. 떳떳하다는 스탠스 잘 지켜라. 사람들이 불공평하다고 느낄 짓은 하지 말고.


“너나 잘해. 아, 그리고.”


-뭐.


“앞으로 협회하고 좀 더 긴밀하게 움직일 생각이야. 나 좀 바빠질 거다.”


-너만? 나는?


“넌 합류하고 싶으면 우선 집안일부터 정리해. 스크래처 쪽하고 깔끔하게 끊지 않는 이상 같이 일 못한다.”


-오랜만에 아빠랑 또 개싸우겠네. 알았어.


얼굴에 물도 묻히기 전에 귀 따가운 전화를 한 통 끝내고 말았다. 불미스럽게 퇴역한 헌터와 만나 푸닥거리를 한 게 또 걱정이 된 모양이겠지. 상대가 내 과거를 폭로한답시고 커뮤니티에 싸지른 글이 잘 타는 장작으로 쓰였으니까.


‘씨발 내 여동생 강간한 새끼 내가 죽이겠다는데 그 금수만도 못한 새끼를 잡아다 바치는 게 그게 그렇게 중요했어? 남한도 넌 명예에 미친 위선자 새끼야! 너가 모른 척했으면 복수하고 깔끔하게 끝났겠지 범죄자 하나 보호한다고 동료 헌터였던 날 이 지경으로 만들어? 다 너가 자초한 거야 너가 날 이렇게 쓰레기로 만들었다고!’


박세정에게는 떳떳하다고 얘기했지만, 그건 역시 객관적인 명분의 관점이었다. 실은 난 떳떳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저 내 능력적 한계일 뿐이라 기억했다.


내겐 이제 힘이 생겼고, 앞으로도 개인적인 구원을 바라는 손길이 파도처럼 밀려오겠지. 실상 협회장이 내게 제안하는 건 그 모든 호소를 뿌리칠 핑계를 주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세종시로 가는 열차를 예약해 두고 욕실로 향했다. 양치질하고, 세수하고, 면도하고 머리 감고, 몸을 거품 타월로 쓸어내는 일련의 과정 중에 문득 거울을 보았다.


“와.”


뽀얗게 젖은 채로 나타난 내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탄식에 가까운 감탄성을 터뜨렸다.


“못생겼네.”


낙담할 필요도 없는 변화였다. 잘생기든, 못생기든, 잘못 생기든, 이제 행동으로 많은 걸 설명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 타고난 외모의 가치는 희박해졌다. 연애와 담쌓는 시기를 또 오래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만 짧은 미련이 반짝 스치다 사라졌다.


봄이 이렇게도 완연한 날에, 왠지 나는 때 이른 겨울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래 이어질.


간단한 변장도 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날 알아보는 사람들은 수군거리거나, 슬쩍 옆으로 피하거나, 가까이 다가오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게 다시 떨어져 나갔다.


지금 내 표정은 어떨까? 거울을 다시 확인하진 않았다. 그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니었다.


조금 심술을 부려보겠단 생각으로 연락도 없이 협회를 찾았다. 사람들의 은근한 기피를 헤치고 안내데스크로 걸어갔다. 앉아있던 여직원이 처음에는 날 보며 반갑게 맞았다.


꽤 친밀하게 말하는 게 뭔가 개인적인 용건을 꺼낼 것도 같은 눈치였지만, 오늘 내 이름으로 된 일정이 있느냐 묻는 대화를 이어가며 점점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게 보였다.


의식적으로 표정 근육을 느슨하게 조절했다. 붉어졌다가 하얘졌다가 점멸하듯 피부의 색이 변하는 여직원이었다. 평소에는 또박또박 말하던 사람이 조금은 더듬기까지 하며 엘리베이터로 향하도록 안내했다.


갑자기 찾아오긴 했는데 예약이 잡힌 상태였다. 김주혁 씨의 부하 직원들이 밥값은 제대로 하는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에 카드키를 대자 역시 기다렸다는 듯 김주혁 씨가 나타났다.


“잘 오셨습니다. 남······한도 씨.”


웃으며 반기다 흠칫 놀라는 김주혁 씨에게 마주 인사를 돌려주었다.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날 협회장실로 데려가는데, 그런 의아하단 태도에 난 특별히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버릇인 것처럼.


유난히 메마른 소리를 내며 협회장실의 문이 열렸다. 내게 인사를 건네며 김주혁 씨와 닮은 놀람을 보이는 협회장이었다. 나도 오늘은 협회장을 보며 조금 놀랐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김주혁 씨가 직접 차를 가져왔다. 녹차 두 잔을 가져와 하나는 내 앞에,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협회장 앞에 내려 두고 정중한 태도로 나갔다.


사소하지만 신뢰와 호의를 의미하는 대접이었다. 먼저 몇 모금 마시고 있으니 협회장이 얘기를 꺼냈다.


“칼 한 자루가 들어오는 줄 알았네요. 일선에서 물러나고 꽤 되었지만 지금의 남한도 씨는 제가 그동안 잊고 있던 긴장감을 되살려 주는군요.”

“칭찬이십니까?”

“반성이죠.”


썩 마음에 드는 대답이었다.


“생각을 정하신 걸로 보이네요.”


담백한 재촉에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내가 대답을 들려줘야 할 자리였다. 이게 협회장의 마음에 들지 안 들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차수현에게 하나 물어본 게 있었어요.”


적당히 뜸을 들이다 운을 뗐다.


“마음먹으면 지구의 게이트 박멸할 때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말이에요. 하는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는데, 뭐, 1분도 안 걸린답니다.”

“그렇겠죠.”

“지금껏 안 없애고 뭐 했냐고 물으니까 우선 순위를 들먹이면서 거절했습니다. 저한테 오히려 되묻더라고요. 지금 게이트로 인해 벌어지는 여러 피해도 결국 인간이 인간답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 중 하나 아니냐고. 그냥 원인인 인간 자체를 세뇌라도 해주면 되겠냐고.”

“극단적이군요. 전능한 존재들의 특징이죠. 단계적인 답을 굳이 밟지 않아도 될 존재들이니까요.”

“저는 거기서 아무 대답도 안 했습니다. 그냥 다른 얘기로 말을 돌렸죠.”

“대답할 가치도 없지 않겠어요?”

“아뇨, 극단적이지만 그것도 방법 중 하나라고 내심 인정해서였어요. 단지 거부감 때문에 입을 다물었죠.”

“···그러셨군요.”

“협회장님은 어떠세요?”

“무엇을 말씀이시죠?”

“제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으세요?”


그래, 결국은 협회장 밑에 붙으려고 여기까지 왔다. 지금까지 일부러 듣지 않았지만, 대체 어떤 거창한 일을 벌이는 중인지 내막을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협회장님이 공익을 위해 하신다는 그 일은 대체 뭡니까?”

“이 대화를 하려고 참 먼 길을 돌아왔단 생각이 드네요.”


내가 했던 것처럼 협회장도 녹차를 몇 모금 마셨다. 말을 고르듯 찻잔을 주무르다가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았다.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라는 소설을 아시나요?”

“아뇨, 이름만 들어봤습니다.”


작가가 스릴러 장르의 대가라고는 알고 있지만 그 사람의 글을 읽은 적은 없었다. 그럴 수도 있다는 느낌으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협회장이 말을 이었다.


“세계적인 유전공학자가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온 세상에 퍼뜨리려 하고, 그것을 주인공이 막기 위해 움직이는 게 이야기의 골자죠.”


너무 간략한 설명인 게 문제였을까, 그냥 들으면 평범하고 심심한 내용이겠지. 물론 협회장이 꺼낸 본론은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결말은 이렇습니다. 주인공은 과학자를 막지 못했고, 전 세계 사람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죠.”

“그럼 다 죽고 끝나는 겁니까?”

“바이러스는 감염된 사람을 불임으로 만들었어요. 단, 소수의 면역자는 빼고. 그 유명한 타노스처럼 그저 인구수를 줄이는 게 목표였죠.”

“아······.”

“그 책에서 제가 명장면으로 꼽는 부분은 과학자가 통계 자료를 가지고 토하는 열변이에요. 환경 오염을 포함한 각종 사회 문제의 증가는 결국 인구 증가와 직접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당신들은 모두 그 사실을 외면하는 중이라고.”


알고 보니 소설의 내용은 마음속 깊은 곳에 숨은 불안감을 건드리는 오싹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로 어떤 결론을 유도해 낼 생각인 걸까. 조금 흥미로워졌다.


“저는 그 과학자의 발상 자체에는 공감하는 편이에요. 인간의 행복은 결국 수요와 그것을 충족하는 공급의 시스템 안에 있고, 그 안에서 발생할 문제를 최소화하려면 공급의 폭발, 즉 생산 시스템의 획기적인 발전이 필수 불가결한데 그 속도를 인간의 요구가 언제나 앞서고 있죠.”

“···그릇 커지는 속도보다 먹는 양이 훨씬 빨리 늘어난다는 말씀이죠?”

“단순히 입이라고 표현하시지 않는 걸 보니 통찰력이 있으시군요.”

“그래서요. 발상은 공감하는데 행동은요?”

“인구를 줄이는 건, 상대적으로 적기야 하겠습니다만, 사실상 그릇 크기마저 줄이는 행동일 겁니다.”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말씀이네요.”


내가 툭 던진 얘기에 협회장이 웃었다. 굳이 분위기를 맞춘답시고 같이 웃어주진 않았다.


“저는 게이트가 나타나기 직전의 지구를 기억해요. 기술의 발전은 덩치만 불린 욕심쟁이들에 의해 관심이 치우쳐 정체되고, 사람들은 오늘 먹을 음식의 양이 모자라 내일의 몫을 빌려오는 악순환을 반복했죠. 모두의 인내심이 착실히 깎이고, 당연히 여겼던 평화의 아래에 잔잔하게 전운이 피어오르던 시절이었어요.”


그동안 많이 참은 건가. 협회장의 밑밥 깔기는 조금 길었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게이트가 나타났죠. 희생된 분들에겐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것은 공급 기술의 변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어요. 처음엔 위협일 뿐이었던 게이트가 지금은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자원으로 변했죠.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폭력과 평화가 꽤 안정적으로 양립한 이 시절에.”


게이트 폭주로 가족을 잃은 사람 앞에서 하기엔 조금 거친 표현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협회장의 말이 맞다는 걸 안다. 타협할 수 없는 적이 있고, 그들을 상대하며 얻어지는 여러 부산물이 우리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있으니까.


마치 흔한 RPG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화내지 않았다.


“남한도 씨의 말씀처럼, 전 제가 커다란 결정을 내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요.”


이것은 사실상 자신이 롤 언노운의 숙주라는 걸 인정하는 말이었다.


“지금의 평화가 평화가 아니라는 것을 남한도 씨는 아실 겁니다. 허용해 버린 폭력들이 느슨해진 감시를 틈타 목줄을 하나씩 푸는 중이죠. 영악하게 숨죽이면서요.”

“헌터우월주의자들이요?”

“그들을 포함해, 그들을 빌미로 삼아 사회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금기조차 무시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죠.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대충은 이해했습니다.”


슬슬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규모의 사회 문제를 예견하는 모습이었지만, 절망 같은 건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롤 언노운이란 치트키를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 일선에서 물러나 이 사람은 무슨 연구를 했던 걸까? 왠지 기대감을 갖게 했다.


“게이트가 모두 사라지면, 사실 생기지 않을 문제겠죠. 하지만 전 그게 아까 말씀드린 과학자의 선택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장은 조용하겠지만, 이미 이렇게나 익숙해진 풍요를 포기하는 건 다시금 인류를 전운에 휘말리게 할 뿐이에요.”

“아마······. 그렇겠죠.”

“그래서, 큰 결정을 해야 할 사람으로서 저는 이런 선택을 하려고 해요. 게이트로부터의 풍요를 사수하는 선에서 지금의 평화를 지켜내겠다고.”

“어떻게요?”


미심쩍다는 의미의 물음을 듣고도 협회장의 은은한 자신감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더욱 고조된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말이 곧 협회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게이트 발현의 공간적 조건을 지구에서 화성으로 변경할 겁니다.”

“잠······! 아니, 잠깐만요. 뭐라고요?”

“지구 대신 다른 행성에 게이트가 생기도록 할 계획이에요.”


소름이 쫙 돋았다. 아니, 소름을 넘어 손끝과 발끝에서 생겨난 전율이 머릿속에 똬리 틀던 갑갑함을 몰아내고 불꽃을 일으켰다.


“어떤가요? 게이트 폭주의 위험을 직접적으로 감수하지 않으면서 자원을 채취할 수 있고, 더불어 인류가 꿈꾸던 제대로 된 우주 진출까지 앞당길 수 있겠죠. 숙원 사업 중 하나인 화성 이주를 말이에요.”

“···획기적이긴 하네요.”


이건 진짜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는 발상이었다. 솔직히 이거보다 더 나은 방법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협회장 말대로만 된다면 지구에 사는 분쟁쟁이들도 힘을 못 쓸 테고, 자본가들의 확장 욕구를 더욱 광활한 공간으로 돌릴 수 있겠지.


“그렇죠? 화성 유인 탐사는 이미 어느 정도 안정성을 확보했지만, 정작 그곳의 환경을 개조하는 건 아직도 먼 목표예요.”

“그래서 게이트의 특성을 이용한다는 겁니까?”

“예, 게이트 내부는 지구의 환경과 흡사하니까요. 화성에서 게이트를 폭주시키면 저희가 애써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그 불합리한 조율이 알아서 테라······.”


협회장의 말을 들으며 기분이 조금 업된 나머지 나는 그 뒤에 나올 단어를 가로채고야 말았다.


“테란사기.”


그래, 그렇게만 된다면 애써서 화성에 대기를 조성하지 않아도, 물을 확보하려 개지랄 떨지 않아도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겠지. 자기장이 없는 건 걱정거리도 아니었다. 게이트 폭주 지역 자체가 태양풍을 막는 강력한 우산이 되어줄 것이다.


본인이 할 말을 뺏겨서 그런 건가. 협회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 테라포밍.”

“아.”


···시부럴, 틀렸네. 괜히 나댔다.


“···아무튼, 이 일엔 두 가지 방해 요소가 있어요.”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협회장이 계속 얘기했다.


“하나는 차수현.”

“그 인간이 왜요?”

“이미 저희는 필요한 이론을 정립했고 첫 실험으로 달을 선택했죠.”

“그런데요?”

“차수현이 나타나 결과를 확인할 새도 없이 달 표면의 게이트를 제거해 버렸어요. 실험을 하는 족족.”

“아니, 그 인간이 방해를 한다는 거예요? 왜요?”

“이유는 아직 불명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차수현이니까요.”


와씨, 이거, 존나 빡센 방해물인데.


“그럼 다른 하나는요?”

“제 계획을 눈치챈 범죄 단체입니다. B-Name을 위시한 무면허 헌터 조직들이죠.”

“···그건 협회가 가진 힘 정도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않나요?”

“그들의 우두머리, B-Name의 수장이 저희와 같은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다시 밝혀지는 진실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차수현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빡센 방해물인 건 마찬가지잖아.


민현주 협회장, 지금까지 대체 무슨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겁니까.


“차수현은······. 따로 생각해 둔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상대를 해보려 합니다. 다만, 그러는 동안에 저는 다른 신경을 쓸 틈이 없어요. 그러니······.”

“남은 하나는 제가 상대하란 겁니까?”

“그렇습니다.”

“후발 주자인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자는 저보다 강하지만, 결국 일개 헌터에 지나지 않아요. 저는 남한도 씨에게 무력행사를 포함한 다방면의 견제를 부탁드리고 싶어요. 그 정도면 충분히 시간을 끌고도 남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창한 역할을 맡도록 요구당하는 느낌이었다. 협회장이 저번에 얘기했지, 사소한 의무를 무한하게 수행할 자리를 주겠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사소한 느낌의 제안이 아니었다.


무력행사는 그렇다 치고, 다방면에 걸친 견제란 게 대체 뭘 말하는 걸까?


“저더러 뭘 어떻게 시간을 끌라는 건가요?”


그렇게 설명이 더 이어졌다.


단기적인, 혹은 장기적인 몇 가지.


체계적인, 혹은 대략적인 몇 가지.


잠자코 듣고 있으려니 점점 또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내 표정이 썩어가는 걸 느꼈는지 협회장도 눈을 슬슬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예.”


아카데미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일도, 유튜브로 어그로를 끌던 일도 지금 협회장이 내게 요구하는 역할에 비하면 선녀나 다름없었다.


“저는 남한도 씨가······.”


웃음기도 없이 협회장이 진지하게 말했다.


“헌터계의 아이돌이 돼주셨으면 합니다.”


정신 나가버리겠네, 진짜.


작가의말

2절 끗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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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19. 게으름보다 안락한 것(7) 23.07.11 19 0 14쪽
119 19. 게으름보다 안락한 것(6) 23.07.02 16 0 17쪽
118 19. 게으름보다 안락한 것(5) 23.06.25 21 0 17쪽
117 19. 게으름보다 안락한 것(4) 23.06.23 19 0 16쪽
116 19. 게으름보다 안락한 것(3) 23.06.04 21 0 15쪽
115 19. 게으름보다 안락한 것(2) 23.05.20 26 0 16쪽
114 19. 게으름보다 안락한 것(1) 23.04.30 30 0 15쪽
113 18. Remind Me, Like A Dog.(3) 23.04.25 31 0 12쪽
112 18. Remind Me, Like A Dog.(2) 23.04.24 26 0 12쪽
111 18. Remind Me, Like A Dog.(1) 23.04.22 33 0 15쪽
110 17. 포장되는 거짓말(4) 23.04.18 30 0 13쪽
109 17. 포장되는 거짓말(3) 23.04.17 27 0 14쪽
108 17. 포장되는 거짓말(2) 23.04.15 34 0 12쪽
107 17. 포장되는 거짓말(1) 23.04.13 32 0 12쪽
106 16. 가을이었다(5) 23.04.10 34 0 16쪽
105 16. 가을이었다(4) 23.04.09 32 0 16쪽
104 16. 가을이었다(3) 23.04.07 29 0 15쪽
103 16. 가을이었다(2) 23.04.03 31 0 15쪽
102 16. 가을이었다(1) 23.03.31 31 0 13쪽
101 15. 오히려 안 좋아(12) 23.03.29 32 0 15쪽
100 15. 오히려 안 좋아(11) 23.03.27 36 0 15쪽
99 15. 오히려 안 좋아(10) 23.03.25 38 0 14쪽
98 15. 오히려 안 좋아(9) 23.03.22 34 0 14쪽
97 15. 오히려 안 좋아(8) 23.03.20 30 0 13쪽
96 15. 오히려 안 좋아(7) 23.03.07 33 0 12쪽
95 15. 오히려 안 좋아(6) 23.03.01 35 0 15쪽
94 15. 오히려 안 좋아(5) 23.02.23 33 0 15쪽
93 15. 오히려 안 좋아(4) 23.02.17 38 0 15쪽
92 15. 오히려 안 좋아(3) 23.02.09 39 0 14쪽
91 15. 오히려 안 좋아(2) 23.01.27 40 0 13쪽
90 15. 오히려 안 좋아(1) 22.12.29 42 0 12쪽
89 14. 몇 종류의 엇갈림(13) 22.12.26 41 0 15쪽
88 14. 몇 종류의 엇갈림(12) 22.12.11 45 0 14쪽
87 14. 몇 종류의 엇갈림(11) 22.12.05 40 0 14쪽
86 14. 몇 종류의 엇갈림(10) 22.12.05 44 0 13쪽
85 14. 몇 종류의 엇갈림(9) 22.11.22 40 0 12쪽
84 14. 몇 종류의 엇갈림(8) 22.11.22 37 0 13쪽
83 14. 몇 종류의 엇갈림(7) 22.11.22 43 0 15쪽
82 14. 몇 종류의 엇갈림(6) 22.09.06 52 0 13쪽
81 14. 몇 종류의 엇갈림(5) 22.08.31 63 0 13쪽
80 14. 몇 종류의 엇갈림(4) 22.08.31 53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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