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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극 님의 서재입니다.

정령의 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무량극
작품등록일 :
2018.04.19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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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30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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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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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23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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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천적 (2)

DUMMY

주인은 알고 있었다. 정령화를 해서 정령이 된다면 지금 모은 이 힘을 더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죽기 위해서가 아니다. 정령화 도중에 기억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미 그는 육체를 잃었다. 뇌를 잃었다. 기억을 관장하는 기관을 잃었다. 그런데도 그가 아직 기억을 유지하는 것은, 그 본인이 생물의 탈을 반쯤 벗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기억이 뇌와는 다른, 정신에 보관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하지 않다. 지금도 그는 머리에서 흐려지기 시작하는 자신의 생각들을 억지로 붙들고 있는 상태다.


그리고 정령화는 정신과 자연력으로 신체를 만드는 것. 강인한 정신도 변화를 맞이하기 마련이다. 그 변화가 어떤 식으로 작용될지는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물론 강한 영물은 기억을 잃지 않을 확률이 약한 영물보다는 높다. 주인 본인도 세계 최강의 영물이며, 자연력에 대한 높은 친화력을 가졌다. 하지만 자연력에 대한 적성과 정령화의 적성은 별도의 적성이다.


게다가 확률이란 언제나 장난과 같다. 1000이 될 확률이 아무리 높아도, 도달한 결과가 0이라면, 그 전의 확률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오랜 세월 전, 전설의 시대가 멸망하기 전에, 비교적 약한 영물이 정령화를 이겨내고 정령이 되어서도 기억이 온전한 것을 본 적이 있고, 반대로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강인한 영물이 오히려 기억을 잃는 것을 본 적도 있다.


그렇기에 정령화를 할 수 없었다. 갑자기 기억을 잃는다면 파괴자에게 곧바로 당할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힘이 주인에게 흡수된다. 그것만은 아니 된다.


무엇보다 지금 이 상태가 되어서도 자신이 품고 있는 가족들의 자연력이, 흩어질 것이다. 휴와 하스트는 지적하지 않았지만, 정령화가 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주인의 정수 안에 여러 개의 작은 정수가 모여있다. 그렇기에 언뜻 안정화되어 보였던 정수의 속은 지금도 굉장히 불안정했다.


“고대의 괴물이여. 왜 다시 세상에 기어 나왔느냐. 넌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존재다.”


주인은 필사적으로 대답이 없는 파괴자를 피해 다니며 시간을 끌었다. 파괴자가 가장 먼저 노리는 존재가 정령인 것은 그도 알고 있다. 원래라면 휴를 먼저 노려야 하고, 실제로도 파괴자의 시선은 처음부터 휴에게 닿아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주인 자신도 정령에 가까운 존재. 그가 힘을 발휘하자 파괴자는 더 큰 자연력을 뿜고 있는 주인에게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그렇기에 파괴자가 휴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시간을 끌 수가 있는 것이다.


생에 미련이 없던 주인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최선을 다한다.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의 끝이 어떠한가를. 결국 자신의 목표가 이뤄진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다. 미리 패배를 정해놓고 전투에 임하는 것이 한심해 보일 수도 있으나, 이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지금 자신이 이런 모습인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래의 거대한 육체였다면 도저히 파괴자의 손길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리적 힘이 강하기에 어느 정도 저항은 했겠지만, 결국 힘의 흡수에는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주인은 오직 도망 다닐 뿐, 공격은 하지 않았다. 아직 파괴자는 힘을 모두 되찾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아무리 파괴자라도 운동능력에 제한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자신이 힘을 사용한다면 오히려 힘을 흡수당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시선만 끈 채로 도망만 다닌다.


이 상태라면 적어도 몇 날 며칠은 충분히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주인의 착각이었다.


파괴자의 금속 몸체가 갑자기 빨라진다. 방금과 너무도 다른 속도에 주인이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물을 분출하여 이동했지만, 파괴자가 더 빠르다.


“이런!”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여진 주인은 수압포를 쏘아냈다. 파괴자는 수압포에 대응하려 했지만, 주인의 목표는 파괴자가 아니었다. 파괴자 발 밑의 대지였다.


딛고 있는 땅이 수압포에 밀려 사라지자, 파괴자는 균형을 잃었다. 주인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하지만 균형을 잃는 것도 잠시, 파괴자는 땅을 딛자마자 구덩이에서 도약하며 다시 주인에게 쏘아진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수압포를 파괴자에게 쏘아낸다. 아무리 파괴자라도 공중에 떠 있는 상황이라면 분명히 수압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밀려날 것이다.


그리고 주인의 생각은 반쯤 맞았다. 갑작스럽게 시도된 공격에 파괴자가 느리게 반응했다. 결국 파괴자는 완벽하게 피하지 못하고 팔을 수압포의 강력한 공격에 노출시키고 말았다.


아무리 모든 자연력을 흡수하는 파괴자라고 해도 한 순간에 모든 자연력을 흡수하지는 못한다. 특히 주인의 공격처럼 엄청난 응집력을 가진 술법은 미처 흡수를 하기도 전에 파괴자에게 닿을 수 있다.


아직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파괴자는 내구성 또한 완전하지 못했다. 수압포에 얻어맞은 팔의 일부가 뜯겨나간다.


확실히 성공적인 일격으로 보였지만, 주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약화되는군.’


지금 파괴자의 내구성 정도라면 방금 일격에 팔 전체가 통째로 뜯겨나가야 정상이다. 하지만 팔에 닿기 전, 그리고 팔에 닿는 순간 수압포의 자연력이 흡수당했다.


하지만 손상이 없는 것은 아니니 이 상태가 그대로 이어진다면, 수압포를 여러 번 날려 파괴자를 정지시킬 수 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였다면 파괴자에게 그런 명칭들이 붙어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전설의 시대는 막을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재생···’


허공에 흩어진 파괴자의 일부들이 다시 붙어와 그를 원상태로 돌려놓는다. 재생에 사용한 자연력은 파괴자가 흡수한 수압포의 자연력보다도 적다. 이렇다면 아무리 효과적인 공격이라도, 일격에 잠재우지 못한다면 오히려 파괴자의 힘을 키워주고 만다.


주인은 파괴자를 견제하며 거리를 두었다. 파괴자는 이미 복구가 끝났는데도 가만히 서있다.


주인은 그 이유를 알았다. 흡수한 자연력을 소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파괴자에게서 자연력이 느껴진다. 흡수한 자연력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자연력을 그 쇳덩어리 육체에 부여한 상태로 파괴자가 다시 주인을 향해 쇄도한다. 확실히 아까보다 빠르다. 주인은 어떻게든 수압포를 사용하지 않고 회피 기동을 취하지만, 익숙지 않은 형태이기 때문일까. 회피에 실패한다. 이에 악수라는 것은 알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수압포를 쏘아낸다. 다른 공격은 생각할 수도 없다. 파괴자에게는 오로지 단 한 가지, 흡수 속도를 웃도는 고도로 응축된 공격만이 유효하다.


이번에도 파괴자는 피했지만, 수압포의 궤도에서 몸의 전부를 이탈시키지는 못했다. 아니, 아까랑은 다르다.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피하고 있지 않다. 대신 팔을 들어 수압포를 옆으로 쳐낸다.


수압포의 힘 때문에 이번에도 파괴자의 팔이 손상되었지만, 그것은 사소한 문제였다. 수압포를 쳐낸 반동 덕택에 그나마 돌진력을 최소한으로 손실시켰다. 그리고 이는 주인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몸 같지도 않은 자연력 덩어리를 움직여 파괴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안된다. 파괴자의 손이 주인을 따라잡는다. 주인은 자신을 따라오는 절망의 손아귀를 피하지 못했다.


콰직.


결국 자연력이 한 움큼 뜯겨나간다. 그나마 정수가 아닌, 정수 주변에서 막을 이루던 자연력이 뜯겨나갔다. 정수가 먹히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만약 정수 본체에 파괴자에 손이 닿았다면 그 순간 통째로 먹혔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인가...”


하지만 주인은 여기가 자신의 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뜯겨나간 양은 전체에 비해서는 치명적일 정도로 많지는 않다. 너무 이른 포기로 보인다. 하지만 주인은 느끼고 있다. 뜯겨나간 구멍을 통해서 자신의 자연력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애초에 지금 주인은 정령도, 생물도 아닌 그저 자연력의 덩어리인 불안정한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주인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 한계를 맞이했다.


주인의 정수가 요동친다. 불안정성이 한계를 맞이해 결국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아이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구먼···’


파괴자를 깨운 원인은 분명 자신에게 있다. 이미 생에 미련이 없는 그는 어떻게든 오랫동안 버티고 싶었지만, 그리 오랜 시간을 버티지 못했다. 자신의 절망이, 다른 사람의 절망까지 앞당기고 말았다.


‘하지만 너에게 더 이상 힘을 넘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난 믿는다.’


믿음. 이제 사라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밖에 없다.


주인은 점점 붕괴되는 정수를 느끼며, 힘을 쏟아내었다. 최대한 파괴자의 손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시 파괴자가 움직여 주인을 잡으려 하는 순간, 수압포가 뿜어진다.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하늘로 높이 올리기 위한, 스스로에 대한 장례 의식을 위한 것이다.


“우리 세대에서는 이루지 못했던 숙원이었다. 우리는 너희를 막지 못했다. 세계는 파괴되었다.”


주인이 하늘 높이, 끊임없이 올라간다. 수압포에 담긴 힘 때문에 주변으로 물의 자연력이 퍼지고, 파괴자가 그것을 흡수하고 있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 본체가 통째로 먹히는 것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낫다.


“하지만 장담하지. 너희는 결국 끝을 맞이할 것이야. 이번에는 너희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것이야!


주인의 정수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인은 자신의 지배력이 사라지기 전에 어떻게든 자신의 자연력을 파괴자에게 닿지 않는 곳으로, 세계로 퍼트린다. 특히 자연력이 포화되지 않은 남부를 향해서 퍼트리기 위해 말 그대로 사력을 다했다.


“아이들아! 이겨내거라! 시대를 이어가거라!”


현귀라는 이름을 가진 호수의 주인. 누구나 존경하는 현명하고 인자한 당대 최강의 영물. 그의 마지막 외침이 세상으로 퍼져나간다.


그의 외침과 함께 하늘에 짙게 퍼지는 물의 자연력이 주위의 수분을 끌어당긴다. 주인의 정수에서 나온 물의 자연력 중 일부가 하늘에서 구름을 이룬다. 많은 구름이 주인의 마지막 소망을 기필코 지켜내겠다는 듯이 바람을 타고 서서히 남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인의 자연력이 거의 다 사라질 무렵, 추락하기 직전인 그의 눈에, 햇빛을 머금고 눈부시게 빛나는 새로운 구름이 비춰진다.


‘여보...’


그 구름은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아내처럼 새하얀 거북이었다. 그 뒤로 작은 거북의 구름들이 새록새록 생겨난다. 구름들이 주인을 포옹하듯이 주위를 에워싸며 주인의 추락을 막아내었다.


‘다시 함께구려···’


주인의 정수가 마지막으로 생전의 모습을 취하고 사라진다. 그 얼굴에는 분명 미소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구름이 더 생겨난다.


구름들은 정답게 서로 엉키더니, 다 함께 북쪽을 향해 흘러가기 시작했다. 한동안의 여행 끝에 그 구름들은 산맥의 가장 높은 산에 걸려서 형태를 잃고 사라졌다. 마치 그곳이 자신들의 안식처라는 듯이.


그날 남부에는 이해할 수 없는, 슬픈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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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끝나지 않은 위기 (1) 18.11.12 293 1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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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전사들의 안식 (1) 18.11.10 275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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