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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 님의 서재입니다.

지구 제국의 철인 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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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ti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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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4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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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맏형의 책무 (3)

DUMMY




*



알렉시스는 동생의 ‘괜찮다’는 말을 무조건적으로 믿지는 않았다.

과보호하는 부모들이 종종 그러하듯 그는 랜슨에게 숨겨진 상처나 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였다.

항상 테러리스트며 반군이며 세계의 각종 빌런들을 사냥하며 쏘다니는 용병왕이니 다칠 개연성은 충분했다.

다친 마음이야 열어볼 수 없겠지만 몸의 상처는 점검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가장 간단한 확인책은 맨 몸을 반강제로 드러내어 샅샅이 살피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랜슨도 똑같은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범죄자들이 형에게 총을 겨누고 옥체까지 손상시키는 광경을 보았기에 그의 불안감은 돌 다리를 두드려보지 않는 한 쉬이 잠들지 못했다.

이번에는 감쪽 같이 더미를 내세워 적들을 속였다지만, 사실 형에게는 팬들에 비례하여 적들도 많았으니 그간 정치인으로서 이런 저런 위협을 겪었다고 해도 개연성에 어긋나지는 않았다.

랜슨은 형의 신체가 온존되었는지 확인하기를 원했다.


비단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긴 하지만, 두 사람은 목욕 시설로 향하였다.

장소는 미리 전체를 대여해두었기에 사람들은 없었고 방해받거나 알아봄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편감을 고려할 필요는 없었다.

그곳은 인도 전역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깨끗하고 쾌적하며 몸에 유익하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본래 이 지역의 세신 문화가 마하트마의 근대화 개혁 이전에는 그리 유쾌치 않은 부류임을 생각할 때 이곳은 참으로 이례적이고 특출한 장소였다.



“수련을 정말 열심히 한 모양이구나.”


상의를 탈의하자마자 곧장 드러난 용병왕의 금강석 같은 강인한 육체에 알렉은 순수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 어쩌면 힘에서는 나보다도 앞서겠어.”


물론 형제들 중에서 육체적인 자질과 품질과 잠재력에 있어서도 제일 탁월한 자는 맏이이긴 했지만, 랜슨은 큰형을 제외한 나머지 가운데서는 압도적인 신체적 일인자였다.

게다가 큰형과 달리 몸 쓰는 일이나 훈련에 대부분의 시간을 매진하는 데다가 나이도 더 젊었다.

그래서 지금은 몇몇 신체적 측면에서는 근소한 간격으로 형보다 조금 더 나았다.



“형은 머리 쓰는 일이 주 업무잖아. 재능으로는 형이 더 낫지.”


랜슨은 자신 못지 않게 건장하게 꽉 짜여진 형의 어깨를 장난스레 툭툭 두드렸다.

예전에는 저 강인함을 동경하여 늘 뒤쫓아 왔는데.

이젠 적어도 체격과 힘만으로는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 같아 이유 없이 뿌듯했다.

이제 형도 자신을 마냥 감싸고 보호할 아이로 보지 않고 든든한 우군이나 충직한 부관으로 여겨줄 것이라고 기대하니 기분이 고양되었다.



“나중에 친선 겨루기라도 같이 할래? 육체 자질은 형이 우위여도 단련의 양이나 실전 경험의 분량은 내가 앞서니 이번에는 내가 이길 수 있을 텐데.”


“그러게. 다음 번에는 꼼짝없이 내가 밀리겠어. 미안하지만 난 벌써 사십이나 된 늙은이라고. 너는 반면 싱싱하고 젊은 데다 싸움과 전투 경험도 세계 순위권에 들지.”


알렉시스는 자조하듯 쓴웃음을 지었다.


“늙은이는 무슨.”


랜슨이 비웃듯 반박하였다.


“과장하지 말라구 형. 우리 핏줄은 유전자의 특성 자체가 다르잖아.

노화와 병과 독에 내성이 강한데다 저항력도 남다르다고. 선대 때부터 언약의 효력이 누적된 덕에 이미 노화 속도가 일반인의 3분의 2 가까이로 느려졌지. 심지어 나 같은 조무래기 직계 혈통조차도.”


당장 두 이복형제의 아버지인 알폰스만 해도 이미 선대보다 더 개선된 유전 조건을 얻은 덕인지 노화 속도가 일반인 평균보다 1.6배는 느렸다.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보다 꾸준히 노화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단순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80세에 가까운 나이인 알폰스의 실제 신체 나이는 50세 미만이었다.

실제로 알폰스는 그 정도의 젊음을 유지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세포 노화를 기준으로 한 것이지 근육과 신진대사와 피부의 노화 상태는 평균적인 50대 남성보다 더 양호했다.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보는 이에 따라 40대 초중반, 심한 경우는 주름만 조금 가리면 30대 후반으로 보는 이도 있었다.


직계 후손이 아닌 자들은 이러한 혜택을 완전히 누리지는 못했지만, 방계를 통해서라도 황가에 속한 혈통은 상당한 수준의 건강을 자랑했다.

또한 완전히 피가 섞이지 않은 입양아라도 입양을 통해 언약 안으로 들어온 후로는 후손 대대로 언약에 버금가는 급의 건강과 장수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 일반이었다.


더욱이 알렉시스처럼 황제의 직계 가운데서도 언약을 직접 계승할 후계자인 맏이인 경우에는 아버지보다 더욱 낫게 갱신된 신체적 축복을 누리는 것이 법칙이었다.

현재 그의 노화 속도는 대략 일반인보다 1.9배는 느린 수준이었다.

이는 황가에 대한 일반인들 사이에서의 소문보다도 훨씬 더 나은 레벨이었다.



“형은 오히려 지금 나이가 전성기잖아.”


“그런가? 하긴 그렇게 혹사하고도 견디는 걸 보면 그럴 지도?”


알렉은 대화하는 와중에도 동생의 몸 구석구석을 면밀히 관찰하며 혹시라도 상처나 흉터, 신체 이상이나 장애가 남지 않았는지를 체크했다.

다행히도 랜슨의 몸은 거의 멀쩡했다.

기껏해야 긁히거나 찰과상을 입은 듯한 자국이 거의 아문 형태로 몇몇 남아있을 뿐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도 좋지만 좀 쉬어가면서 해.”


“나도 그랬으면 해. 한 사람이나 한 가문에만 의존하는 세계나 시스템은 오래 가지 못하니까. 지금 건설하는 밑바탕들도 다 장래의 일을 위해서야. 더는 황가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세상이 흘러가도록 해야지.”


동생의 핀잔에 형은 여유로이 받아쳤다.



“너도 이젠 슬슬 안전한 자리로 돌아와야지. 어차피 이슬람이 없어지면 테러리즘의 99%는 사라져. 비록 모든 무슬림이 테러리스트인 건 아니지만, 분명 거의 모든 테러리스트는 무슬림이니까. 네가 구태여 암흑 기사가 되어 총대를 맬 필요는 이제 사라졌어.”


알렉시스는 수고했다는 듯 랜슨의 진회색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용병들도 더는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겠지. 그들도 이젠 떳떳하게 정규군에 입대하거나 사회로 돌아가 정정당당하게 경제 생활을 해야 해. 너도 마찬가지야. 안전한 군 상부로 돌아와서 기품 있게 살아야지. 별도 달고 명예도 누리면서.”


“과도한 규율에 얽매이는 시스템은 좀 별로인데.”


“그럼 다른 진로를 알아볼 수도 있겠지. 하기야 네 재능이 아깝긴 하네. 언제쯤 말 잘 듣는 온순한 군인이 되려나.”


아이러니하게도 성정 상 랜슨은 상부의 통제가 쉽지 않은 부류의 사나이였다.

나쁘게 말하면 반항아, 좋게 보면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

어찌 보면 군인 되기에는 몹시 나쁜 성향이었다.

기본적으로 도덕 관념이 분명하고 정의감이 상당히 있는 데다가 워낙 재능이 특출해서 망정이지, 원래라면 군인으로 오래 버티기 힘든 사람이었다.

남들을 지휘하는 위치라면 모를까, 정당한 이유가 없다면 순순히 통제 당할 위인은 아니었다.



“꼰대들은 마음에 안 드는 걸.”


“그래도 상사들 말은 잘 복종해야지. 아무리 황자라도 규율 위에 있지는 않아.”


“형이 군 최고 통솔권자가 되면 생각을 달리해볼게.”


“너 때문에라도 즉위를 서둘러야 하려나. 곤란하네.”


사납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맹수, 용병왕.

그런 그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지휘자는 형님인 황태자뿐이었다.

사실 아버지가 수시로 아들더러 황위의 위임을 재촉하는 이유 중에는 말썽꾸러기 동생에 대한 통제 문제도 일부는 포함되었다.

그런 랜슨이 용케 스무살 때 자기 자신을 억누르고 군의 규율 아래 자신을 내맡겼던 것은 기적과도 같았다.

그만큼 악인들에 대한 형벌을 이루고픈 욕구가 강한 탓이었다.


그리고 그런 쓴뿌리 섞인 동기를 품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큰형 탓이었다.

형제끼리 고스란히 가림없이 드러난 상태에 이르자 랜슨은 깊은 불편감과 괴로움의 눈빛으로 형에게서 시선을 돌리려 노력했다.

형이 그간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했기에 억지로 꾹 참고 두루두루 살피긴 했으나 절망적인 수난의 잔흔을 눈이 스칠 때마다 속에서 구역질과 울분이 솟구쳐올라왔다.

매번 볼 때마다 이런 감정을 참기 어려웠다.


아직 여리고 왜소했던 아이 시절에는 종종 큰형이 자신과 목욕을 같이 하며 씻는 것을 도와주곤 했었다.

그때는 딱히 불편감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다.

바빠도 항상 시간을 쪼개 자신과의 추억들을 쌓아주었던 형이 든든하고 고마웠다.

물에 몸을 누인 그 시간들과 장소들은 늘 편안하고 안락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이후로는 형과 같이 보낼 때마다 늘 큰 상흔의 아픔을 되새김질해야만 했다.

특히나 지금처럼 상대의 상처를 억지로 확인해야 하는, 씻는 때라면 더욱더.

상대가 동정심에 자존심이 상할까봐 표현하지만 못할 뿐, 랜슨의 속은 항상 미어졌다.



‘아니야, 반드시 나을 수 있어.’


의술이 많이 발전했으니 해결책이 생길 것이다.

동생은 이렇게 믿으며 억지로 희망을 가져보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형 자신의 죄책감과 트라우마였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알렉시스는 치료받아볼 의지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수치감에 평생을 자책하며 그릇된 정죄로 고난받을 것이다.


각자의 근심을 숨긴 채 두 사람은 온수에 몸을 내맡긴 채로 각종 두려움을 잠시 내려놓고서 근육을 이완하였다.

알렉시스는 그 와중에 동생이 속상해하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과거의 자신이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어리석게도 실수에 빠지지 않았다면, 차라리 명예로움을 잠시 포기하고 비굴함을 좀 더 택했더라면, 이렇게 오랫동안 가족들 앞에서 고통스러운 몰골을 보이진 않았으려나?

어느 길이 올바른 것이었는지 이젠 그도 헷갈렸다.

되돌이키고 싶으나 마음이 망가질대로 망가진 걸 어찌한단 말인가.






*


물 속에서 잠든 사이에 황태자는 고통섞인 울부짖음을 꿈 속에서 마주하며 신음하였다.

그는 또다시 그날의 선택지 앞에 놓였다.

시민들은 인질이 되어 죽임 당하리라는 두려움과 마주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깨에는 그들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이 얹혀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날의 그는 무력했다.

힘도, 권력도, 능력도, 그 자리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사회 속에서 내세우던 허울뿐인 가면과 위장들을 다 내려놓고 발가벗겨진 상태로 내팽겨쳐지면 인간 본연의 연약함과 직면해야 하는 법.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다.

그날, 스무 살의 황태손은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를 도와줄 직위도, 신분도, 군인으로서의 능력도, 그 자리에서는 매정히 그를 배신하고 떠나갔다.

오로지 적신(赤身)뿐인 자신의 맨 존재만으로 거대한 악의의 공포와 맞서야 했다.


강한 힘을 얻은 지금은 싸움을 수월히 해낼 수 있을 줄로 믿었다.

확실히 인질들의 부르짖음과 극도의 두려움 속에서 벌벌 떨며 생살 잘리는 고통을 견뎌내야 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요새, 인류 역사상 최강의 군대, 그리고 가장 탁월한 인재들을 다스릴 권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다.

그는 그 모든 것을 적재적소에 활용했고 기어코 승리했다.

초승달의 악신들은 과거에는 광기를 무기삼아 그를 철두철미하게 유린했지만, 이번에는 그에게 보기 좋게 패배했다.

이것으로 지난 실패의 추억을 뛰어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알렉시스의 추억속에서는 그 아픔들과 실패의 좌절이 극복되지 못했다.

트라우마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무의식 속에 기생충처럼 자리한 채 움크리고 있었다.

아픔은 종종 기습적으로 그의 뇌리를 갉아먹었다.



‘아, 아니야! 나, 나는! 더 이상 시민들을 구하지 못했던 어리석은 그때의 내가 아니야.’


식은땀이 소나기처럼 그의 전신에서 쏟아져내렸다.

가위에 눌린 듯 몸의 근육들이 뻣뻣하게 굳었다.

악몽, 자책, 무서움, 안개처럼 스멀스멀 스며드는 실체 없는 공포.

그 집합체가 알렉시스의 몸과 정신을 갈기갈기 찢는 것만 같았다.



<<아니, 이번에도 넌 시민들을 다 구해내지는 못했지. 그게 실패자라는 증거다.>>


정죄의 음성이 그의 귓가를 살며시 간질이며 불쾌감을 증폭시켰다.

그 말이 사실임을 깨닫는 순간 엄청난 무게감이 그의 심장을 짓눌렀다.

풋내기 시절의 그 뼈저린 패배를 겪은 후에는 줄곧 다짐하며 집착으로 자신을 옭아맸었다.

이제 그 어떤 위기 속에서도 허무하게 브리튼 시민들을 놓치지 않겠노라고.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역량에 한없이 가까이 다가갔다고 생각한 지금도 그는 여전히 한끗 부족했다.


통계학적으로 보면 역사에 기록이 없는 경이로운 승리일테지만, 이번 전쟁에서 죽거나 불구가된 시민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사망자와 회복 불가 장애자의 수를 합하면 이백 명 가량이었다.

숫자밖에 모르는 냉철한 학자들이라면 이 정도 수준의 사태의 규모를 고려할 때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하루 치 교통사고 사망 통계만도 못한 것이라며 치하할 것이다.

그럼에도 거대한 책무로 항상 마음을 괴롭히던 알렉시스에게 이것은 자신의 죄처럼 인식되었다.

자신이 시작한 계획이었으니 자신이 완벽하게 책임졌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과연 자신은 20년 전의 그 실패 이후로 조금이라도 성장한 게 맞단 말인가.



‘또다시 나의 부족함 탓에 그들이······.’


무의식 속을 헤엄치던 중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이 뇌리에서 춤을 추었다.

고통스러움이 밀려왔다.

여기에 과거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망가졌던 그날 그 여인들의 비참함이 오버랩되었다.

숨이 점점 가파지며 공황의 증상이 나타났다.



“알렉 형!”


의식을 반쯤 잃은 상태로 악몽에 짓눌린 그를 동생이 다급히 깨웠다.

랜슨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알렉시스는 부르르 떨며 목을 부여잡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 고통이 그를 괴롭히는 중이었다.



“끄으윽! 커억!”


땀으로 범벅이 된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엎드려 괴로이 몸을 움크렸다.

그간 잠재웠던 환상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잘린 신체 부위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선명했다.

그날 얇은 두께로 끝에서부터 토막토막 썰려나가던 고통이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어찌나 극렬한지 정신력이 조금만 더 연약했으면 쇼크로 기절할 정도였다.



“정신 차려!”


랜슨은 다급히 형의 맨몸을 번쩍 들어올린 뒤 침상으로 옮긴 다음 모포로 몸을 덮었다.

곧 메디컬 로봇들이 다가와 상태를 진찰하였다.

생물학적인 차원의 의학적 이상은 없었다.

순전히 심인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발작이었다.

진정제와 진통제가 투여되었다.

랜슨은 고통스러워하는 형을 진정시키기 위해 천골 부위를 손으로 두드렸다.

그럼에도 통증이 쉬 가라안지 않는 지 알렉시스는 죽어가는 표정으로 식은 땀을 흘리며 진원지를 부여잡았다.



“미, 미안해. 괜히 너를 걱정시켜서······.”


“그런 말 하지 마.”


슬픔 섞인 타박에 알렉시스는 숨을 고르며 발작을 의지력으로 힘겹게 통제하려 애썼다.

늘 강한 모습만 보여주려 노력했는데 결국 다시 나약한 몰골을 꼴 사납게 보이고 말았다.

이래서야 의지할 구석이 있겠는가.

몹시 부끄러웠다.



“형만 우리를 지키는 건 아니야.”


진정되어 가는 형의 몸을 자신 쪽에 기대게 한 뒤 랜슨이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삼촌을 잃은 그 시절, 형은 스스로 족쇄를 채웠지.”


제리가 작성한 가짜 ‘예언의 서’는 백퍼센트 날조로 지어진 것이 아닌, 일정 부분 진실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이었다.

일단 무슬림들에게 ‘황가의 혈육’을 사로잡을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들이 집결한 그 장소에 분명 황가의 직계 혈육인 용병왕이 나타난 것은 사실이니까.


게다가 예언의 서는 황가의 언약과 관련해서도 일정 부분 진실을 하였다.

각 세대의 황제나 그 후계자는 크리스토프가 최초로 신과 체결한 언약을 기초석 삼아 맹세를 통해 부가 조항들을 덧붙일 수 있으며 실제로 그래왔다.

그리고 이번 세대의 지도자인 알렉시스와 그의 부친도 마찬가지.


레미온 카르타크 브라이틀란트가 억울하게 살해당한 그 시절, 진노한 알폰스는 경솔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자 하였다.

그런 아버지를 말린 건 소년 알렉시스였다.

그는 아버지를 달래고자 아버지는 맹세의 족쇄로부터 보호하고 대신 자신이 어떤 계약을 첨가하였다.

최초 언약의 조항들과 그 위에 축적된 역대 가주들의 맹세 조항.

그 위에 알렉시스는 황태손이자 적법한 언약의 소유자로서 무시무시한 무게의 법칙을 하나 추가했다.


브리튼 제국의 지도자들은 신이 내건 몇 가지 명령과 법률들을 충실히 이행하는 조건 하에 몇 가지 국가 온존에 필수적인 은혜를 입는다.

그 은총 중 하나는 장자의 법칙이다.

그 어떤 왕조도, 부자들의 가문도, 유력한 집안도, 모든 세대에 걸쳐 예외 없이 반드시 장자가 가장 뛰어난 존재로서 형제들 위에 군림하는 은택은 누리지 못했다.

바로 그 ‘확률을 초월한 초자연적 혜택’을 크리스토프와 율리시아의 후손들만은 대대손손 누렸다.


알렉시스는 이 장자의 법칙에 대한 반동 작용으로서 ‘책무’를 유도해내었고 그것을 법률로 확정했다.

브리튼의 언약을 책임질 계승자는 맏이로서 반드시 자신의 형제들을 수호해낸다.

그 맏이가 남성이건 여성이건, 아우들과 사촌들이 직계 혈육이건 입양아건, 예외없이 적용되는 법칙.

알렉시스는 이 법칙을 적용 받는 최초 세대의 계승자였다.



“형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를 보호하려고, 우리가 안전하고 자유로이 살아갈 세상을 건설하겠다고 몸을 깎아내며 노력하겠지. 신과 맺은 약속은 깨트릴 수 없으니까. 하지만.”


랜슨도, 황후의 다른 여섯 자녀도, 그리고 입양된 다섯 아이도, 큰형에게만 영영 큰 족쇄를 남겨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게으름을 내버리고 독한 마음으로 강해졌다.

형 발목 잡는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도리어 형을 지켜내고 보호해내어 제국의 지도자로서 맘 놓고 뜻을 펼치도록 돕기 위하여.

황자들은 그렇게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다.

랜슨을 지금의 막강한 용병왕으로 완성시켜준 원동력도 그 각오였다.



‘이젠 내가 형을 지켜낼 차례야.’


이심전심으로 그 의지가 닿은 것인지 알렉시스를 괴롭히던 극심한 공황 발작과 환상통이 아주 조금은 잦아들었다.

그는 몸을 닦고 그 위에 목욕 가운을 둘렀다.

호흡이 차차 안정되었다.

이내 주치의들이 찾아와 황태자의 건강 상태를 살펴주었다.



“괜찮습니다.”


몸 자체는 이상이 없기에 구태여 소란을 키울 필요는 없었다.

알렉시스는 그들을 모두 물리고 동생과 함께 따뜻한 휴식실에 몸을 뉘였다.

아직 극복하지 못했구나.

자라나지 못한 건 동생들이 아닌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반작용이겠지.



“랜슨, 오늘 곁을 지켜줘서 고마웠어. 하지만 며칠 쉰 뒤 조만간 너도 귀국하도록 해. 아버지께도 잘 해명하고. 그만 너도 철 들어야지.”


랜슨은 군말없이 숙연한 표정으로 형의 요청을 귀담아 들었다.



“내일부터 다시 시작이야. 브리튼을, 커버넌트 그룹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갈 이 세계를, 파괴의 길이 아닌 건설과 올바른 번영으로 이끌거야.”


그리고 그 꿈을 위해서는 남겨진 숙제를 확실하게 마무리지어야 한다.

뭐든 시작보다는 끝이 아름다워야 하는 법.

유종의 미를 거두려면 초승달이라는 악몽을 이만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야 한다.

인간이 비참해지는 방법이 아닌, 오로지 악령들만 비참해지는 방식으로.

복수 대신 교훈으로써 맺어야 한다.

이것이 따뜻하고 너그럽되 한없이 공정해야 할 의무를 짊어진 브리튼 지구 제국의 황태자의 정도(正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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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정산 (1) 24.03.05 5 0 14쪽
69 어둠의 무리 24.03.02 9 0 14쪽
68 타르타로스 (6) 24.03.01 7 0 16쪽
67 타르타로스 (5) 24.02.29 10 1 12쪽
66 타르타로스 (4) 24.02.26 10 1 14쪽
65 타르타로스 (3) 24.02.25 9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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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라지쿠마르 (2) 24.02.10 9 0 13쪽
57 라지쿠마르 (1) 24.02.03 11 0 18쪽
» 맏형의 책무 (3) 24.01.31 9 0 20쪽
55 맏형의 책무 (2) 24.01.29 6 0 12쪽
54 맏형의 책무 (1) 24.01.28 1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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