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아낌없이 터는 나무
엔트 도적들의 범행수법은 늘 한결같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듯, 숲에서 평범한 나무인 것처럼 위장한 채 먹이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 적이 방심했을 때 물건을 훔쳐 달아났다.
더없이 효과적이고 강력한 사업방침이었기에 영세 도적단이면서도 업계 실적 최상위권을 노리는 게 바로 엔트 도적단이었다.
숲에 한정해 뛰어난 영업수완을 가지고 있었지만 엔트 다운 미덕도 있다. 그들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주 사업장인 야영지에서 벌레를 퇴치하고 땅에서 습기를 제거하거나 적당한 땔감을 준비하는 등, 야영지를 방문하는 모험가들에게 최상급의 야영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엔트들은 스튜일행의 검사에게 토막 나 땔감이 되는 대신 그들의 재산을 송두리째 훔칠 수 있었다.
‘오늘도 먹잇감이 왔군.’
이날 표적은 혼자 여행하는 모험자였다. 장비도 외모도 평범했지만 참된 사업가란 손님의 외양만으로 서비스의 퀄리티를 결정하지 않는 법. 최소한의 드레스 코드만 맞다면 누구에게나 강도 경험을 선사하는 게 엔트 두목의 사업 신조였다. 그야말로 엔트다운 한결같은 성실함이다.
“햣하-! 숲에선 방심하지 말라고. 이 배낭은 우리가 써주마 애송이 모험가 녀석!”
“모험가 아닌데요. 웨어울프인데요.”
“엑.”
따사로운 화톳불 위로 엔트의 세배는 됨직한 백은의 몸을 드러낸 웨어울프는 패왕류를 쓸 것도 없이 앞발로 엔트 두목을 눌러버렸다. 앞발의 젤리는 푹신하더라도 위에서 가해지는 압력은 바위와 같았다.
“마침 잘 됐다. 푸념이나 좀 들어줘라.”
잘 갈아진 발톱을 보고 거스르면 그대로 땔감이 되리라 확신한 엔트 두목은 웨어울프의 요구에 따라 부하 엔트들과 함께 나란히 정좌했다.
하지만 정작 푸념을 하겠다던 웨어울프가 말 대신 한숨만 푹푹 쉬어대자, 고객의 니즈를 캐치하는 노하우를 가진 엔트 두목은 말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대신 엔트 특유의 자연적인 포용력을 발휘해 직접 묻기로 했다.
“저기···대인께선 왜 그렇게 우울해 하시는지요?”
“결혼을 하게 됐기 때문이지.”
“아니. 그건 좋은 일이잖습니까.”
“거대 다람쥐하고.”
“ ”
“한번 같이 싸운 적이 있었는데 그쪽에서 마음에 든다고 일방적으로···다른 동료들도 도와주긴 어렵다더군.”
“그야. 다람쥐는 존재 자체가 재난이니까요.”
“알아. 그래서 원망하는 대신 최대한 도망쳐보고 있는 중이지. 유감스러운 게 있다면, 내 주인에게 제대로 작별인사도 못했다는 것 정도려나.”
“대인같은 고수를 하인으로 부리는 분이 계시다니, 대단한 분이시겠군요.”
“대단하다라.” 웨어울프는 잠시 고개를 치켜든 채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분은 강하긴 하지만 대단하진 않아. 가여운 분이라고 하는 게 맞는 말이겠지”
“이해가 안 되는뎁쇼. 강하긴 하지만 가엽다니? 그건 강하지 않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분이 원하셨던 건 강함이 아니라 가족이었어.” 씁쓸한 미소가 은색의 털 위로 번졌다. “그걸 채워드리고자 노력은 했지만, 20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하진 못했던 거 같아.”
“아뇨. 그 분이 어떤 분인지는 몰라도 필시 대인을 가족처럼 생각했을 겁니다.”
“허. 만난 지 몇 분 되지도 않은 도적이 장단을 맞추려고 노력하는구나.”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까? 사람에게 20년이란 긴 시간입니다. 그 20년 동안 같이 지냈다면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지요. 설령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말입니다.”
“그런가?”
“어차피 확인하지 못할 일이라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대인. 그분은 당신이 곁에 없더라도 언제까지고 가족이라 생각할 겁니다. 어쩌면 대인이 떠남으로서 그분이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죠. 모험은 언제 어디서 시작될지 모르는 법이니까.”
“그렇군···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어. 너 근심을 털어주는데 재능이 있는 거 같은데, 도적보다 상담사 쪽에 더 적성이 있는 거 아냐?”
“오호라. 이 사업장을 못 쓰게 되면 그때 한번 대인의 말씀을 기억하겠습니다.”
“마침 잘 됐군. 기억할 필요도 없을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뒷말은 웨어울프가 굳이 답해줄 필요도 없었다.
야영지의 땅이 굉음을 내며 갈라지고, 십 수 마리는 됨직한 거대 다람쥐들이 나타나 포효를 내질렀다. 밤공기에 공포가 풍성하게 들어찼다.
“으아아! 으아아아아아?”
작은 도토리 하나마저 놓치지 않고 찾아내는 가을의 수확자들이다. 웨어울프의 체취 정도는 천리 밖에서도 추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엔트 도적단을 한 발로 가볍게 제압했던 웨어울프는 거대 다람쥐의 입에 앙증맞게 물린 채 작별인사를 고했다.
“상담 고마웠어. 사업장이 부서진 건 미안하게 됐지만 목숨 값인 걸로 해두자고. 이참에 도적 같은 거 말고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보라고.”
진심어린 충고를 남긴 웨어울프는 거대 다람쥐가 연 포탈 속으로 웃으며 사라졌다. 나그네가 만들어서 거대 다람쥐들에게 준 포탈에선 갓 수확한 도토리 냄새가 물씬 풍겼다.
한편, 파헤쳐진 야영지를 조금 살펴본 엔트 도적단의 부하는 사업재개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평가했다.
“어쩌죠 두목. 지하에 다람쥐들이 만든 공간이 너무 커서 야영지를 다시 세우려 해도 금방 무너질 거 같아요. 그렇다고 아래부터 메꾸면 한두 푼으로 될 거 같지도 않고. 이참에 정말로 도적을 관두는 게······.”
“웃기는 소리. 이건 내 할아버지 대부터 300년 동안 해온 전통 있는 가업이야. 뭐든 털어버리겠다는 뿌리 깊은 신조를 버릴 수야 없지.”
“하지만 장소는 옮겨야 할 거 같은데요.”
“흠···분명 여기서 북동쪽으로 나흘정도 올라가면 아센이라는 시골영지가 있었지. 제법 괜찮은 길목이라 들었으니 거기서 다시 사업을 일으켜 보자고.”
“아센? 드래곤 마즈가 사는 영역이잖아요?”
“코볼트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지. 들키지만 않으면 돼. 들키지만 않으면.”
“오우.”
그리하여, 엔트 도적단은 새로운 사업장을 향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여행길에 올랐다.
너무 많은 전생자들과 사냥꾼, 사람 죽이는 기술이 뛰어난 검사와 머리에 꽃이 핀 좀비와 온갖 악, 최초의 현자가 만든 골렘과 그녀의 힘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두 남매 등, 도적이 사업을 하기엔 위험요소가 지나치게 많은 아센의 현실을 깨닫고 엔트 도적단이 절망하기까지 남은 시간. 앞으로 열흘.
- 작가의말
도적질은 (해먹기) 나쁜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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