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 판타지의 왕 8
딱히 옛날 옛적은 아니지만, 판타지 세계의 인류왕국에 강한 왕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위대하다고 하진 않았다. 강하긴 했으나 마땅한 위업도 없었으니까.
명성이 높았던 것은 왕이 아니라 그 밑에 있던 한 귀족이었다.
이름은 튜버경. 언제부턴가 인류왕국의 실권을 쥔 거대파벌의 수장.
직속부대 ‘기자단’을 통한 정보수집능력과 조작·선동 기술은 대륙의 기존상식을 월등히 넘어, 인류왕국은 물론 외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런 튜버경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대륙 서부를 지배하던 인간순수주의자들의 왕국은 곧장 군대를 일으켰다.
명분은 늘 단순했다.
인종차별을 ‘정화’로 포장하고 인류왕국의 모든 몬스터들을 없앤다는 것이 순수왕국의 논리였다.
“코미디언의 잣대에서 정화라고 한다면 말은 되겠군.”
인류왕국의 왕은 왕궁에서 뽑아온 기둥 위에 앉아 그렇게 말했다.
장소는 서부황야.
순수왕국의 2차 집결지.
총 병력 73만.
이를 요격하기 위해 출진한 인류왕국군.
국왕 단독 출진.
“정화네 뭐네 떠들었나 보던데, 니들 파벌끼리 떠들고 멋대로 정한 기준으로 하는 게 무슨 정화냐. 말 가져다 붙이느라 수고가 많네.”
“대화는 필요 없다. 전군! 저것이 추악한 몬스터들을 국민이라 말하는 적의 총 대장이다. 멍청하게도 단신으로 전장에 나왔구나. 처단하라!”
장군의 명령 하에 군단히 일제히 전진했다. 단 한명을 상대로 전술은 의미가 없다. 거세게 몰아치는 해일에 불과하다.
단 한 가지, 해일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해일에는 귀가 없고, 저들은 말을 듣고 싶지 않아도 들을 귀가 있었다.
인류왕국의 왕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주변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딱 한 단어를 입에 올렸다.
“서걱.”
왕의 말과 함께 순수왕국군 제1열을 구성하던 병사들의 목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1열이 힘을 잃자 뒤따라오던 병사들은 갑자기 생긴 장애물에 발이 걸려 쓰러지고, 몇몇 기사는 낙마해 목뼈가 부러졌다.
말이 그대로 이뤄지는 신언(神言)의 힘 앞에 병사들의 진군이 멎었을 때, 인류왕국의 왕은 곧장 다음 수를 내보였다.
“튜버는 이런 이름을 붙이라고 했지.”
기둥위에 있던 것처럼 보였던 왕은 이미 내려와 가장 앞에 있던 지휘관의 가슴에 정권을 꽂은 뒤였다.
“패왕류 절초. 로얄침투경(Royal浸透勁)”
왕은 튜버경에게 이 기술은 호신술에 불과하다 말했었다.
그러나 현자들이 탄생시킨 인류최강이 시전한 호신술은 단순히 몸을 지키는 수준을 넘어, 반경 수 백 미터에 달하는 구덩이를 만들어낼 정도의 충격파를 일으켰다.
규격 외의 무력에 순수왕국의 지휘관은 공포에 질렸지만 퇴각명령을 내리진 않았다.
“물러나지 마라! 적은 어쨌든 하나다. 마법이다. 멀리서 마법을 쏟아 부어라!”
곧바로 마법세례가 시작됐다. 파이어볼과 라이트닝 볼트. 자연재해라고밖에 말하지 못할 불과 벼락의 세례가 왕에게 쇄도했다.
“뭘 그렇게 서두르고 그래. 잠깐 얘기나 할까?”
그 제안은 순수왕국군에게 한 것이 아니다.
[너무 오래 끌지만 않으면···좋아요.]
현자들에 의해 인간의 언어는 물론 정령들의 언어까지 마스터한 왕은 갓 태어난 마법정령들을 설득했다.
현자들의 손이 닿기 전부터 이미 교활하고 냉혹했던 왕이 태어난 지 5초밖에 안 된 마법정령들을 설득하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일하고 있다는 말이네요?]
“그런 셈이지.”
[세상에, 노동법 위반이야! 혁명을! 자본과 직위에 눈이 먼 학벌의 돼지들에게 심판을!]
“도와줄까?”
[부디. 우리의 눈을 뜨게 해준 동무라면 대환영이야!]
“그렇다면 이 말을 잘 들어.”
[동무의 말이라면 몇 번이고!]
“빛이 있으라.”
빛은 힘에서 만들어진다. 신언의 힘을 받은 파이어볼과 라이트닝 볼트들은 거대한 화룡과 뇌룡이 되어 순수왕국의 진형을 붕괴시켰다.
지휘체계가 완전히 붕괴되고 한 폭의 지옥도가 그려지는 가운데, 왕은 느긋한 걸음으로 순수왕국의 앞에 도달했다.
순수왕국의 왕이 이 혼란을 틈타 달아나는 일은 없었다. 천막이 무너져 그 밑에 깔렸으나, 그를 도울 시종이며 귀족들은 제 살길을 찾아 도망친 지 오래였다.
“애들이란, 조금만 편을 들어주면 누가 진짜 아군인지 혼동하는 법이지.”
“이건 말도 안 돼. 순 억지야! 튜버 놈만 없으면 모든 게 풀릴 줄 알았는데!”
“튜버도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게 편할 거라고 했었지. 실제로도 그랬고. 근데 그거 알아?”
인류왕국의 왕은 그의 머리위에 발을 얹은 채,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걔는 죽었고, 날 막을만한 녀석은 이제 없어.”
“사기야! 이건 더럽기 짝이 없는 거짓이다!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사기하고는 거리가 멀고, 튜버가 살던 곳에 나하고 딱 어울리는 단어가 있다더군. 뭐라고 했더라?”
왕은 잡초에서 붉은 즙이 나올 때까지 즈려밟고는 왕궁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아 맞다. 먼치킨이랬지. 참으로 재미없고 이상한 단어야.”
인류왕국의 왕이 기둥을 타고 돌아간 뒤에도 서부황야에는 사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바람과 뇌우가 몰아쳤다.
거기서 양산된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죽음과 비명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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