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용사는 질 수 없어
저주이자 악몽의 군주인 고대신과 동방제국의 황제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포기를 모르고, 집념을 실현시킬 능력이 충분했다.
그리고 남을 짓밟아야만 실현가능한 꿈을 평생 동안 품어왔다.
그러나 황제가 어떤 형태로든 거대요새를 넘어서 인류왕국 본토까지 온 반면, 고대신의 본체를 소환하는 의식은 실패로 끝을 맺었다.
목숨을 건 투쟁의 결과가 아니다.
승패를 결정지은 것은 아주 사소한 도적질. 그것도 곧바로 회수 가능할 정도로 사소한 실수.
고대신은 고작 그것 하나 때문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는 것을 납득하지 않았다.
그것이 느낀 것은 절망이 아니다. 될 대로 되란 식의 발악도 아니다.
마음에 남은 것은 순수한 분노와 폭력적인 충동.
거꾸로 돋아난 비늘을 쥐어짜여진 용이 이것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으리라.
에메랄드색 빛기둥도 없고 달이 구름에 가려진 어둔 밤 아래, 고대신의 파괴가 시작됐다.
이제까지의 싸움은 소가 파리를 쫓아내기 위해 꼬리를 휘두르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것을 입증하려는 듯 거세게 휘둘러진 촉수는 단 일격만으로 땅을 크게 도려냈다. 패인 자리에선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나 바늘산을 이뤘다.
공세는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고대신의 촉수는 둥근 빨판 안쪽의 살을 비집고 촘촘한 이를 드러내 바늘산을 이루던 자기 이빨을 찢어 갈랐다.
기이한 광경에 용기를 쥐어짜내려던 용사 일행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동료의 복수를 위해 의지를 불태우던 어린 나그네와 검사도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들이 이해하든 말든, 고대신의 자해는 계속되었다. 빨판의 아가리는 대지에 돋아난 이를 포식했고, 더 깊은 곳까지 찢어 무지갯빛으로 번들거리는 검은 피를 치솟게 했다.
“이 냄새···위험해! 다들 코를 막고 물러나!”
온갖 지형을 다녀본 탐험가의 판단은 정확했다. 검은 피에는 다른 우주의 불경한 거대짐승을 삽시간에 썩혀버릴 수 있는 강렬한 독이 있었다. 단 한 방울조차 거품을 일으키며 땅을 녹이고, 풀은 뿌리까지 썩혔다. 이파리에는 이슬 대신 노란 고름이 맺혔다.
이빨의 파편을 머금은 촉수는 그 피웅덩이에 몸을 담그고 충분히 피를 빨아들인 다음, 기둥처럼 우뚝 섰다.
이어진 것은 포효였다. 십 수 마리의 짐승이 일제히 내지른 것처럼, 빨판의 아가리 하나하나가 다른 종류의 포효를 내질렀다.
당연히 안에 머금은 것도 소리에 실려 밖으로 토해졌다.
날카롭게 으깨진 수많은 이의 파편.
가장 작은 조각에조차 감히 성분을 알아볼 염두조차 안 나는 극독이 묻어있다.
“기사! 너는 앞으로 나가라!”
모두가 탐험가의 말에 따라 달아날 때 딱 한명이 다른 지시를 내렸다.
마검이었다. 여기사의 손에 쥐어진 채 앞으로 나선 마검은 포효에 맞서 모두를 감쌀만큼 커다란 방어막을 펼쳤다.
부서진 이의 산탄을 막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는 여기사의 갑옷 곳곳에 박히거나 자잘한 흠집을 남겼다.
대신 몸이 녹아내리는 끔찍한 광경은 연출되지 않았다. 마검이 펼친 방어막이 독을 전부 정화시킨 것이다.
“으, 녹아내리···응? 어떻게 한 거야?”
“내가 아니라 네가 한 거다. 그보다 이걸론 부족하다. 손잡이를 더 꽉 쥐어!”
마검의 말을 그대로 따른 여기사는 느닷없이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마검이 크게 호통쳤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일어나! 고작 이런 걸로 무릎 꿇을 만큼 코치하지 않았어!”
“시끄러워···! 뭐 하는 건진 몰라도 이거, 엄청 힘들단 말야!”
우는 소리는 했지만 행동은 정 반대였다. 풀을 거세게 밟으면서 힘차게 일어나자 모두를 감싼 방어막은 순식간에 커져 고대신까지 감쌀 정도로 커졌다. 당연히, 그 안에서 끓어오르던 검은 피는 독성을 잃고 비릿한 냄새를 내며 지면을 적시기만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여기사가 어리둥절해 하자 마검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신의 영역에서 공기를 끌어왔다. 소환술의 일종이지.”
“어···너 그런 것도 할 줄 알았어?”
“이론 정도는. 마력은 네 걸 썼지.”
“하지만 난 마법사가 아니라 기사인데.”
“마법사가 아니라 소환사다. 네 재능은 소환사가 훨씬 뛰어나. 족보 자체가 소환술에 특화된 가문이지.”
“헤에,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후, 조금 늦게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여기사는 식은땀을 흘리며 마검에게 소리쳤다.
“뭐? 왜 여태 안 말해줬어?”
“그야 네가 원한 건 소환사가 아니라 기사였으니까.”
“ ”
“힘을 원한다고 했었지. 너에게 있어 힘이란 뭐냐. 저 뭔지 모를 괴물처럼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다 부숴버리는 힘인가? 그건 기사가 아니라 괴물이다. 한번 기사가 되었다면 우직할 정도로 기사도를 따라라. 애초에 지금 같은 긴급 상황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안 말해줬을 거다.”
“마검······.”
“잡소리는 됐고, 또 온다!”
마검의 경고에는 여유가 없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고대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여기사는 ‘그럴 만도 하지’라고 생각했다.
고대신의 촉수가 허공에서 한데 모이고 있었다.
기둥 같은 뼈대를 중심으로 촉수가 근육다발처럼 뭉치고, 살점이 마디를 보강해 손의 형태를 갖췄다. 이빨은 비늘처럼 겹쳐 손톱을 이뤘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악신의 오른손이라 부를만했다.
한데 뭉친 악신의 오른손이 황제의 손 모양에 따라 한층 더 단단한 형태를 취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주먹을 쥐었다.
피하기엔 너무 컸다.
그대로 맞으면 반드시 죽는다.
벌레라면 이를 보고 조금이라도 죽음에서 멀어지기 위해 전력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한번이라도 날갯짓을 더 하고, 다리를 놀렸으리라.
허나 이곳에 있는 이들은 벌레가 아니다.
다만 현명하지도 않다.
여기사를 중심으로 용사, 어린 나그네, 검사, 탐험가, 책 수호자는 나란히 서서 악신의 주먹을 향해 무기를 겨눴다.
두어 명이 온 힘으로 시간을 벌어주면 나머지는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서, 단 한명도 도망치는 선택을 하지 못했다.
“한명 정도는 도망쳐 줬어야지. 막는 건 기사가 할 일인데.”
여기사가 짧게 푸념했다.
“이래봬도 최연장자인데, 혼자 도망쳐서야 그림이 안 되잖나.”
탐험가가 콧방귀와 함께 허세를 부렸다.
“용사는 이런 게 일이라서요.”
용사가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여기서 도망치면 돌아갈 집도 없겠지.”
“아쉽게 됐군. 나크 녀석한테 이걸 쳐내는 걸 보여줘야 재능형 쓰레기란 소리를 다신 못할 텐데.”
어린 나그네와 검사가 결의를 다졌다.
“짓뭉개져라. 제발 이쯤하고 무너지라고 이 하등생물들아!”
간절한 염원을 담아, 고대신의 악의가 주먹이 되어 내리꽂혔다.
광풍에 찢긴 풀이 하늘로 솟구치고, 구덩이가 패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대신의 기대와 달리 쓰러진 사람은 누구 하나 없었다. 무기를 들고 마력을 엮어, 서로에게 몸을 의지해 버텼다. 무릎도, 의지도 꺾이지 않았다.
악신의 오른손을 구성하는 빨판의 아가리들이 일제히 노성을 내질렀다.
“어째서냐!” “너흰 어떻게” “그렇게” “버틸 수 있는 거야!” “도전할 자격도” “능력도” “명분도” “갖추지 못한” “멍청한 반푼이 따위들이!” “네까짓 것들이” “대체 뭔데!”
‘이 사람들을 멍청하다고 하지 마. 누군가를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강해! 내 친구들을 우습게 여기지 말란 말이야! 그리고 말했잖아!’ “용사라고!”
찍어 누르던 힘이 급격히 줄어들었을 때, 용사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폐가 찢어질 것 같은 압력을 밀어내며 토해낸 그 외침이 통했다고 말이다.
생각에서 비롯된 희망이 아니다. 땀이 안 스민 곳이 없을 정도로 탈진한 몸이 멋대로 그런 망상을 품게 했다.
허나 애석하게도.
“오냐.”
망상은 결국 망상이다.
“아······.”
“너부터" "쳐 죽여주마.”
악신의 오른손이 주먹을 풀고 엄지와 중지를 한데 모았다.
가장 유명한 명칭은 아마도, 딱밤.
주먹보다 모양새가 나빴지만, 한명을 정확히 겨냥하기엔 최적의 자세였다.
마음을 다잡을 새도 없이 중지가 튕겨졌다.
어설프게 들어 올린 검은 이날 밤, 용사가 둔 최악의 수였다.
마법적 강화도 없이 한계까지 내몰린 검은 수수깡처럼 허망하게 부러졌다.
잊어서는 안 된다.
마검에게 특훈을 받았다 해도 그건 최근의 이야기다.
용사라 해도 얼마 전까지는 상인의 딸.
붉은 모자의 사내를 동경해 모험의 길에 오른 여자아이.
영웅적인 용기가 있을지언정, 그걸 실현시킬 육체는 없다. 고대신의 지적은 지극히 정확하고 지당했다.
용사의 시야 절반이 느닷없이 어둠에 빠졌다. 세계가 마구잡이로 회전해,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겨우 멈췄다고 생각했을 땐 하늘에 머리를 박은 기분이었다.
파편처럼 바스러진 기억을 종합해 보면 공격을 맞고 엄청나게 멀리 날려졌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가요? 무기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시야까지 끌어올린 용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오른손을 들어 올렸는데 왼손이 올라와?’
의아했지만 일단 무기를 들고 있는 손이긴 했다. 무수히 많은 금이 그어진 검은 반으로 부러져있었다.
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손상된 검을 일단 앞으로 겨눴다.
다시 주먹을 쥔 악신의 오른손이 날아오고 있었고, 동료들은 그 궤적의 뒤를 쫓아 용사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기사 언니, 수호자 씨, 그리고 스튜하고 브류 씨······였던가? 다행이야. 다들 무사하구나. 어? 그런데 마검 씨는?’
여기사의 손에 들려있어야 했을 마검의 행방에 대해 의문을 품었을 때, 시야 한쪽에서 붉은 번개가 일었다.
아니. 실제로는 번개가 아니다.
지나치게 빨라서 분홍색에 가까운 붉은 마력이 번개로 보였을 뿐이다.
그 정체는 트레이드마크로 잘 알려진 붉은 모자를 쓴 사내였다. 여기사의 마검은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당신은······.”
“여기까지 잘 버텼군.”
악신의 오른손이 날아들고 있건만, 피자배달부는 이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 마냥 모자를 벗어 용사의 머리 위에 씌웠다.
“훌륭했다. 새 시대의 용사여.”
다음 순간, 피자배달부의 손에서 휘둘러진 마검은 악신의 오른손을 반으로 갈라, 땅에 떨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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