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5. 단 한 번의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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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상의를 위해 함선 위로 올라온 피렌은 이미 뛰어내릴 준비를 마친 라티안과 미야를 진정시킨 뒤 아리나를 바라보았다.
“ 여기서는 잘 안 들렸는데 뭐래? “
“ 일단.. 이곳은 외계인에게 한 번 크게 당했던 곳인 모양이야. “
크게 당한 건 문제지만
일단 외계인 자체를 처음 본 건 아니라는 말에 모두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만약 처음 외계인을 마주해서 공격했던 거라면 지금보다도 더욱 꼬여버렸겠지.
“ 그래서? 보내주겠대? “
“ 우리가 저쪽에 붙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 또 한 번 ‘ 이 행성에 피해를 줄지도 몰라서 견제하는 듯해. 단지 공격하지 않은 건 우리가 대화할 생각이 있어 보여서일 뿐이라더라. “
흐음..
우린 어느 쪽이 이기든 별로 관심 없는데 말이지..
제발 연관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들에게는 견제할만한 존재인 모양이다.
“ 우리는 사람을 죽이기 싫다고 말했고 “
“ 왜?! 죽여도 되는데! “
“ 춘향 넌 좀 가만히..! “
“ 어떻게 하면 믿어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자신들이 할 명령을 우리보고 한번 대신 내리라고 하네. “
그게 무슨 조건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했지만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들에게 있어서 외계인이며
머리카락 색도, 풍기는 분위기도 전혀 다르다.
그렇기에 우리가 앞장서서 공격하라는 시늉만 보여주어도 상대로서는 ‘ 아 외계인들이 저곳에 붙었군. ‘ 이라고 생각할 것이 당연했다.
이미 외계인들에게 한번 데였던 경험이 있기에 그 생각이 바뀔 리는 없으며
우리는 그 틈에 빠져나와 함선 내부에 얌전히 있다가 떠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쪽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는 것이
상대에게 하여금 외계인이 가진 미지의 힘과 함께 싸운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 상대가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효과가 있다.
즉석에서 만들어낸 조건치고는 상당히 현명한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외계인이 왔을 때 이렇게 하라는 메뉴얼이 있을지도.
“ 어떻게 할까. “
이런.. 애매~ 한 말을 해올 줄은... 몰랐다.
확실하게 ‘ 저 녀석들을 죽이는 데 도와라. ‘ 라고 하면 바로 거절할 수 있었을 텐데
그저 ‘ 우리가 공격 명령을 내릴 곳에 얼굴만 비춰서 지시해라 ‘ 였다.
“ 솔직히~ 죽여도 문제 될 거 없잖아? 어차피 전쟁이야 전쟁~! 누구든 죽는다구? 그런데 원래 하려던 지시만 하라고? 이건 껌이지! “
라고 춘향처럼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
아니. 이건 정말로 단순하게 생각하는 게 맞나.
어차피 우리가 아니어도 저들은 공격 명령을 내릴 것이며 자연스럽게 싸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냥 여기에 ‘ 공격해라 ‘ 한마디면 충분하다.
“ 오히려 그 정도로 여기에 정박해 있는 걸 허락해준다면.. 감사한 건가? “
어라?
그런 걸지도..?
“ 좋아. 저쪽의 제안을 받아주자. 그저 우리는 ‘ 공격해 ‘ 같은 한마디만 하고 다시 함선으로 복귀하는 거야. “
그 어디를 생각해봐도 저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상 손해 볼만한 건 없다.
아무래도 외계인에게 크게 당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저쪽도 얌전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거겠지.
괜히 그들이 조심하는 것을 비틀어서 알파 은하의 흐름을 비틀어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 좋아. 갔다 올게. 라티안, 미야. 따라와. “
“ 응! “
“ 네! “
“ 이드 집행관님. 진짜 괜찮은 겁니까? “
뭐. 불안할 수밖에 없긴 하지.
이드도 불안하기는 하다.
외계인.
그들은 한 번 우리를 멸망시킬 뻔했다.
그들의 기술력은 압도적으로 높았으며
전투 능력 또한 원거리에서 순식간에 쓸어버리는 무기가 있었기에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이 떠나고
남아있는 자원을 어떻게든 긁어내 그런 외계인들을 대항할 수 있는 무기를 만든다.
그것이 파이온 행성의 현재 목표였다.
물론.. 아직 무기는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사용할 수 없었으며
그 위력 또한 아직 가늠하지는 못하는 수준이라 지금 쳐들어온 외계인들에게 사용하기는 무리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은 그저 가만히 있다가 떠나준다고 했으며
‘ 대화 ‘ 가 가능한 존재. 즉, 인간의 형태인 외계인들이었다.
“ 물론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그 녀석들을 자극해 변수를 만들 수는 없어. 지금 당장은 노예들의 진압이 우선이다. “
냉정하게
외계인을 죽이기 위해 무기를 만들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외계인이 이곳에 왔다고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그들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맞았다.
그들이 오기 전까지는.
“ 이드 집행관. “
이곳에서는 절대 들리지 않을만한 목소리에 이드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오른손을 핀 채로 왼쪽 팔을 거머쥐며 자세를 낮춘다.
“ 엔디오 왕자님. “
조금.. 아니. 많이 당황스럽다.
이전 외계인이 휩쓸고 간 파이온 행성의 마지막 남은 왕국.
마지막 남은 왕자인 엔디오 왕자가 직접 이 전선까지 왔다.
그것도 아무 말도 없이 말이다.
“ 외계인이 왔다. 하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더군. “
“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로 잠시 들렀다고 합니다. 이대로 떠난다고.. “
“ 이드 집행관. 자네는 아직도 외계인을 믿나? “
..그럴 리가.
그들이 우리에게 했던 짓은 직접 경험하지 않았어도 몸에 흐르는 피가 기억하고 있다.
“ ...믿지 않습니다. “
“ 그런데 왜 그들의 말을 믿고 있는 거지? “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약하니까.
아직 그들에게 대항할 무기가 없으니까.
아직.. 이길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
그런 나약한 말은 허용하지 않는다.
“ 죄송합니다. “
오직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공격하라. “
“ ..하지만. 왕자님. 신식 루빈 생체 분열기의 안정성이 아직 불안한 것이.. “
“ 문제라도? “
....
지금 왕자가 묻는 것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것이다.
그냥 발동하면 된다는 것이다.
“ ...없습니다. “
없지 않다.
문제는 많다.
출력 범위와 위력을 조정하는 데 있어서 오류가 있는 바람에 외계인의 생체만을 녹여버리기 위해 만들었던 신식 루빈 생체 분열기는 아직 사용해서는 안 된다.
생체에 대한 구분을 짓지 못해 파이온 행성 내부에 매장되어있는 루빈 전체를 망가뜨려 버리게 되며
위력을 약하게 쏜다면 외계인 놈들이 살아남아 우리를 공격해버릴지도 모른다.
무조건 한 번에 죽여야 한다.
그러면서도 행성에 피해는 없어야 한다.
그 적당한 수준을 찾을 기술력은 아직 부족하다.
...
그러나.. 감행해야 한다.
왕자님의 명령이니까.
“ ...이런... “
“ 이드 집행관님. 그.. 외계인들이.. 우리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
하필.. 이 타이밍에 그렇게 나오는 건가.
이드는 선택해야 한다.
이대로 외계인 놈들이 얌전히 떠나길 기다린 뒤 명령 불복종으로 목이 잘려나가든가.
아니면 신식 루빈 생체 분열기를 약하게 쏴 외계인을 공격하고 성공하면 다행. 실패하면 두 번째 외계인의 학살 쇼가 벌어지게 하든가.
“ ..왜 하필 이곳에 나타나서.. “
차라리 다른 쪽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 일단.. 대기한다. 신식 루빈 생체 분열기를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만 해 두고 상황을 살펴본다. “
“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
재차 물어보는 고문관을 향해 이드는 씁쓸한 미소를 보내주었다.
“ 어쩌겠나. 내 목숨 하나로 모두가 편안해진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
아니 어쩌면..
‘ 대화 ‘ 라는 수단을 통해서 어떻게든 협상하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단 한 번의 명령을... ‘ 노예를 향해 공격해라 ‘ 가 아닌 다른 식으로 바꾼다면..?
“ 대화.. 대화라.. 협상이 아니라 대화라.. “
그러고 보니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군.
이드는 그렇게 당장 외계인들을 만나러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쾅!!!!!!!!!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내려치자 얼마 없는 나무 테이블이 절반으로 부서져 버린다.
그 옆에서 자연스럽게 허리를 굽혀 부서진 테이블을 다시 세운 메르티는 귀한 나무를 어떻게 해야 다시 붙여서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말한다.
“ 하이른. 너무 열 내지 마. “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그래도 절친한 친구가 이렇게 말해주는 덕분에 하이른은 조금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 ...메르티.. 왔다고... 외계인 놈들이 왔다고... “
“ 그러다 한쪽 팔도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
“ 이깟 손. 없어지면 이빨로 물어뜯어 죽여버리면 그만이야. “
물론 농담이었으면 좋겠지만
하이른의 정신 나간 수준의 전투를 보자면 정말 이빨로 물어뜯어 죽일 것만 같았다.
“ 메르티. 넌 분하지도 않아? 그 외계인새끼들 때문에 우리는 지금 대대로 노예 신분이 되어있잖아. 그 자식들만 없었어도 우린 이러지 않아도 됐잖아. “
“ ...그건 그렇지. “
하이른도 함께 싸우자는 말은 굳이 하지 않는다.
싸움 자체가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 싸움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한 사람 한 사람도 전부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며
메르티도 항상 이렇게 전투를 하고 오면 다친 곳에 약을 발라주니 간접적으로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정말 싫어했었는데 말이지.
“ 복수하겠어. 내 아버지 어머니를 대신해서라도 반드시 외계인 놈들을 쳐죽이겠어... “
“ ...너무 열 내지 말라니깐. “
뭐.
약이라고 해봤자 제대로 듣지도 않고
이제는 구하기도 어렵지만..
그래도 잠깐의 고통이라도 줄여줄 수 있겠지.
“ 무리하지 마. “
“ 큭큭.. 니가 내 마누라냐? 난 남자 취향 아니니 징그러운 소리 마라. “
“ 나도 남자는 싫어. 다만. 네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들이 많잖아. “
어째서일까.
방금 메르티의 말에 하이른은 장난스럽게 웃던 미소도 지워졌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다.
그러나 여전히 메르티는 표정 변화가 없다.
“ 네녀석이 하도 웃질 않으니 슬퍼하는 표정이라도 보게끔 빨리 죽어야겠군. “
“ 내가 아니야 하이른. 이젠.. 널 따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졌어. 그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거야.
난 딱히 별생각 없어. 너가 죽든 내가 죽든. “
그렇게 말하면서도 메르티는 창고에서 붉은색 기둥 두 개를 가져왔다.
아니..
기둥이 아니다.
팔이다.
“ 뭐냐 이건? “
“ 이빨 나가기 전에 팔 한쪽 만들어뒀어. 남아있는 팔이 잘려도 이거로 써. “
평소에도 손재주가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루빈을 활용해 팔까지 만들어낼 줄이야.
...장식인가?
“ 움직이기는 하는 거냐? 어떻게 쓰는 건데? “
“ 어깨 대봐 고정해줄게. 평범하게 손을 움직인다 생각하고 움직이면 알아서 손가락이 반응할 거야. “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하이른은 마치 양손이 있는 것처럼 서로 손뼉을 쳐본다.
“ ...오.. “
다시는 칠 수 없을 줄 알았던 손뼉이 쳐진다.
물론 감촉은 살과 살이 맞부딪친 느낌은 아니었지만, 이것으로 어디인가.
이제 더이상 무기를 든 채로 머리를 긁고 싶을 때 참지 않아도 된다.
“ 고맙다. “
하이른은 흙을 쌓아 만든 집을 나온다.
매번 이런 감정을 느끼지만
매번 돌아올 거라는 다짐을 해왔지만
이번에는 모르겠다.
그래도... 말해야겠지.
“ 갔다 올게. 잘 놀고 있어라 메르티. 마음 바뀌면 언제든 연락하고. “
그러면 집 안쪽에서는 매번 똑같은 말이 들려온다.
“ 올 때 쓸만한 광물 있으면 가져와. “
참 고마운 절친이다.
“ 다들 들어라. 우리 파이온 행성에 또 한 번 외계인이 침투했다. “
하지만 이번에는..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먼 과거. 우리 피에 새겨진 이 끔찍한 배신의 감정을 씻어내기 위해 우리는 외계인을 죽일 것이다.
우리를 노예로 삼아 멋대로 부려먹던 저 거지 같은 왕국을 부숴버릴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억압된 삶에서 벗어나 자유를 꿈꿀 것이다!!!!! “
이미 전투에 나가서 패배하고 돌아온 지 몇 분 지나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모두의 눈빛은 아직 뜨겁게 타오른다.
외계인.
우리의 피에 새겨진 깊은 배신의 상처와 노예로서 살아온 분노가 겹쳐져 지금 모두의 피가 들끓는 것이다.
“ 지금 당장 출발한다. 저 거대한 배를 중심으로 포위해서 한 번에 쓸어버리자!!!!!!!! “
하이른이 주먹을 위로 들자 붉은 루빈으로 만든 붉은 팔이 더욱 강한 빛을 띠는 느낌이 들었다.
- 작가의말
진짜 타이밍 그지같이 잡고 왔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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