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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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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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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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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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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천살문

DUMMY

※※※



두 사람은 약선객을 만나고도 한참동안 옥수를 돌아다녔다. 여정의 채비였다. 무림인은 식음을 전폐하고도 여러날 버티며 싸울 수 있다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천살문을 만나고, 기련산에 들어갈 생각이라면 항시 만전을 기하는 것이 좋으리라.


“이 단창(短槍)들은 질이 좋네요.”


철야방도들에게 들러 부가적인 무구를 구비하는 것은 그 과정의 일환이었다. 건량과 무기들, 약선객에게 부탁한 금창약을 비롯한 각종 약재들까지도.


참으로 오래간만이었다. 이리 준비를 하는 것은.


허나.


“고민이 깊어 보이네요.”


악예린의 목소리에 백연이 머리를 번쩍 들어올렸다. 막 구매한 단창을 휘릭-잡고 무게를 가늠한 그녀가 어느새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백연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약선객에게 들은 말 때문인가요? 무슨 내용이었는지 몰라도 백연을 이리 고민하게 만들 일이라니.”

“......맞습니다.”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흘려넘길 수 없는 말을 들어서.”


약선객 제갈명.


그가 백연에게 이야기 해준것은 꽤나 짤막하고 과감한 추론이었다. 그 시작은 단 하나의 근거였다. 백연의 육신이 그저 체질로써 타고나는 것이 극히 어려운 몸이라는 것.


-어렵다기보단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샅샅이 뒤졌는데 제가 찾은것은 그 무연이라는 사람 한명 뿐이더군요.


그리고 제갈명은 몰랐을테지만 그는 고금에 이름을 새길 천마(天魔)다.


그와 백연의 체질이 비슷하다? 백연은 그것이 단지 우연이라고 여길 수 없었다. 그리고 제갈명의 추론도 비슷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는 백연의 체질이 그저 얻어진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갈명은 말했다.


어쩌면, 백연의 몸은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진 체질일지도 모른다-라고.


-아시겠지만 벌모세수라는 것이 있지요. 그를 비롯한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면.


천무지체를 인위적으로 구현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제갈명은 그리 말했다. 아이가 어릴적부터 그 혈도와 진기를 만지고 근맥을 형성시킨다. 지극히 위험하고 가능성이 낮은 방식이지만, 여러 목숨을 도외시하고 그런 실험을 해댄다면.


‘제갈명 자신도 인의를 저버리면 할 수 있을것 같다고도 했지.’


그의 오성이 의약쪽으로는 지극히 뛰어난 탓도 있겠지만, 어쨋든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소리다.


백연은 그의 추론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혈교, 모산파, 천살문의 대주가 했던 이야기들, 만금장이 남긴 흔적까지도.


전부 무시할 수 없는 조각들이 합쳐져 하나의 가능성을 형성한다.


‘......백연.’


소년은 여휘를 쥐며 검파에 새겨진 이름을 쓸었다. 그가 이 몸에서 눈을 뜨기 전, 이 몸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어떤 사람이었을까.


지금까지는 뒤로 미뤄놓고 있었던 생각이지만, 이제는 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이리 된 이상.


‘기련산.’


혈교의 근거지를 들쑤셔 보아야겠지.


이번 일에서 소년은 무엇이라도 단서를 찾고자 움직일 생각이었다. 제갈명 본인도 이것저것 더 알아보겠다며 백연의 피를 가져가긴 했지만 역시 그에게만 맡겨둘 수 있는 일은 아니니.


“백연?”

“아, 죄송합니다. 이제 생각이 끝났네요.”

“괜찮아요?”

“예.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연이 흐린 미소를 지어보이자 악예린이 그제서야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니 다행이네요. 백연이 그리 고민하는 얼굴을 보는 것은 또 처음이라.”

“그렇습니까? 평소에도 고민은 많이 합니다만.”

“그래요? 언제나 거침없이 움직이는 줄 알았는걸요.”


작게 웃은 악예린이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흑립 아래로 흑단같은 머리칼이 나풀거렸다.


“당신은 항상 확신에 차 있으니까요.”

“겉으로는 그리 보여야죠.”

“아버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옥수를 벗어나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의 신형이 날랬다. 드높은 곤륜산맥을 따라 펼쳐지는 경공 기파가 유려하게 이어졌다.


그렇게 산맥 위에 도달하기까지가 금방이었다. 어느새 햇살이 길게 굽어지는 늦은 오후. 곤륜산 위를 따라서 오가는 사람들의 수가 많았다.


문파의 경내에 가득 들어찬 사람들.


산문에 발을 들이며 백연은 문득 과거의 순간과 지금의 풍경을 겹쳐보았다.


다 쓰러져 내리던 산문과 건물들. 폐허에 가깝던 곤륜파 경내의 모습.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눈앞의 수많은 사람들과 깔끔하게 정돈된 건물들까지.


‘......많이 왔다.’


잠시동안 머릿속을 괴롭히던 갖가지 생각들을 소년은 한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고민만으로 얻어지는 것은 없었다. 직접 마주하고 상대하면 될 일이겠지. 결국 지금 이곳에 서서 숨을 쉬고 있는것은 백연 그 자신이었으니까.


“언제부터였죠? 오늘 밤부터 며칠간이었나.”

“맞습니다. 장문인께서 미리 계획하고 계셨는지 준비가 엄청 금방이군요.”

“백의라 하셨죠? 혜안이 깊으신 분 같았어요. 곤륜의 미래는 밝아보이네요.”


백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하면 슬슬 준비를 해볼까요? 단순히 비무라면 몰라도 오늘은 합을 좀 맞추는게 나을 것 같네요.”

“이런 부탁을 드려 조금 미안하군요.”

“뭘요. 오히려 재밌는걸요. 그리고 백연의 검을 받아내며 합을 맞춰줄 수 있는 사람이 흔한것도 아니고.”


말하며 부드럽게 웃은 악예린이 손을 뻗었다. 어느 순간 그녀의 손아귀에 쥐어진 장창이 시린 빛을 내었다.


“갈까요.”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연무장으로 향했다.



※※※



이어지는 날이 빨랐다.


악예린과 합을 맞추기 위한 오후의 대련. 막간의 사이에 청율과 함께 다시 비급을 작업하고, 어느 순간 그도 모르게 시작된 축제에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사형들과 한번씩 손을 겨루고.


땅거미가 산맥에 내려앉고, 밤을 밝힌 것은 환한 등불들이었다. 물결처럼 걸린 형형색색의 불빛이 파도처럼 산을 수놓는다.


무당산에서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처럼 거창한 것은 그들의 일이 아니었다. 허나 사마외도의 난립으로 피폐해진 땅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기에는 충분했다.


옥수의 사람들이 물결처럼 들어찬다. 하오문도들과 평범한 민초들, 상인들과 어디선가 피난을 온 다른 도시의 사람들까지도.


산맥을 따라 사람들이 움직인다. 곧이라도 승천할 듯한 용의 조각상은 인기 명물이 되었다. 가백금으로 만들어진 운룡의 머리맡에서 소원을 빌고 가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산문의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은 한번씩 감탄을 뱉었다. 그새 조각과 장식으로 수놓아진 전각들 탓이었다. 화려하기보단 날카롭고 웅장하게. 곤륜의 산세(山勢)처럼.


이어지는 활동에도 이목이 많이 쏠렸다. 곤륜의 검(劍)들은 화려한 검로를 그려내며 무위를 선보였다. 곤륜파에 비무제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온 이들이 많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소문이었다.


민초들을 안심시키는 과정의 일환이었지만, 동시에 백연은 사형들의 검로를 보며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 검끝에 매달린 노력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아는 까닭에.


그리 하루가 흐른다. 밤이 깊어진 시각에 곤륜파의 경내를 물들인 것은 화려한 두 빛살이었다.


이런 산골 벽지에도 천하 뇌룡(雷龍)의 소문은 전해지기 마련이다. 길다란 창을 들고 흑단같은 머리칼을 흩날리는 절세 미모의 여인이 누구인지 못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녀가 펼치는 암천화광창이 밤공기를 시리게 물들였다.


그리고.


그 창격에 맞서는 소년의 검이 있었다.


창격 빛살이 번개처럼 허공을 누비면, 이어 희고 푸른 검격이 별무리마냥 흩어지며 그 앞에서 춤춘다.


암화 백연.


비무제전을 우승한 소년. 이제는 이곳에 온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을 수 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그렇게 두 소년과 소녀의 검창이 밤을 수놓았다. 미리 합이라도 맞춘듯이 절묘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둘의 무위를 보고 멍하니 감탄을 뱉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 밤자락이 산맥에 내려앉았다. 깊어가는 새벽에도 소년은 잠에 들지 않았다. 사형들과 함께 나뭇등걸에 걸터앉아 이야기하는 사이 햇살이 시야 가장자리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유달리 이른 아침이 드리웠다.


백연은 따로 작별인사를 하지 않았다. 가벼운 봇짐을 진 소년과 소녀는 훌쩍 산문을 떠나 걸음을 내딛었다. 축제는 두 사람이 길을 나선 뒤에도 이어진다 들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살피고 죽어간 이들을 기리는 것이었다.


옥수에 내려가 약선객에게 약을 받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장포를 걸친 두 사람의 시선이 산맥을 힐끗 바라보고는 움직였다.


북쪽으로.


맑개 갠 하늘 아래 두 줄기 청명한 바람이 날아올랐다. 우선은 천살문(擅殺門) 본단을 향해서였다.



※※※



칠주야 뒤.


청해(青海) 서녕(西寧)으로부터 북동쪽으로 수십리.


산맥 하나를 넘어서야 나오는 작은 협곡 아래였다. 드넓은 산맥을 넘어서는 것에만도 족히 반나절이 걸렸다. 경공을 아끼고 넘어온 탓도 있었지만, 그 크기가 가히 광활하다 말할 수 있었다.


“이런곳에도 마을이 있네요.”


악예린이 말했다.


“그것도 규모가......”

“상행이 이쪽을 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 이유는-”


백연이 시야를 가늠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꽤나 이질적이었다. 산마루를 넘어서 나오는 협곡. 그 사이에 자리한 것은 마을이었다. 협곡을 따라 길게 이어진 것이 꽤나 커다란 크기였는데, 사람도 적잖게 사는 모양이었다.


곳곳에 말의 흔적과 수레바퀴가 굴러다닌 자국들이 남아있었고, 사람이 오랫동안 거닌 길들은 평평하게 다져져 있었다.


늦은 오후의 공기를 타고 오르는 밥짓는 연기도 집집마다 가득했다.


“정말로 여기가 맞나 보군요.”


악예린이 말했다. 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천라방주의 정보니 정확하리라 생각은 했는데, 확실했군요.”


떠나기 직전, 은림이 그에게 알려준 천살문 본단의 위치는 바로 이곳의 근처. 이 산맥의 한곳을 중심으로 거대한 원을 그리고 그 안 어딘가에 천살문의 본단이 있다고 했다.


그 정확한 위치는 아무리 천라방이라 해도 특정할 수가 없기에 범위를 알려주는 것에서 그쳤지만.


‘이 정도 규모의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것 자체가 증거지.’


산속이다. 사마외도의 무뢰배들이 난립하는 곳에서 이만한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누군가의 비호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


저들이 이 자리에 있는것 만으로도 근처에 천살문의 본단이 있다는 확증이 된다.


“자세한 위치는 찾아봐야 알겠습니다만. 천살문 측에서도 뇌룡은 알아보겠지요.”

“저보다는 차라리 백연을 더?”

“제 명성이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렇잖아도 예린은 중원제일미로까지 알려진......”

“그만, 그만. 그거 진짜로 부끄러운거 아세요?”

“아하하. 예린이 그리 말하는 경우도 있군요.”

“차라리 무공 실력으로 칭찬받는게 낫지......”


손을 내저은 악예린이 정말로 부끄러웠는지 성큼 걸음을 내딛으며 나아갔다. 흑단 같은 머리칼 사이로 살풋 드러난 하얀 귀끝이 옅은 붉은기를 띄고 있는것이 눈에 들어왔다.


의외의 면모였다. 어렸을 적부터 한두번 들은 소리가 아닐텐데. 이런것에 면역이 없을 줄이야.


“같이 움직이죠. 아무리 중립에 가까운 이들이라지만, 적지로 화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면요.”

“미모가 뛰어난 것은 사실 아닙니까.”

“백연.”


픽 웃은 백연이 중얼거렸다.


“그러고보니 예린을 처음 볼때가 생각나는군요.”


안휘 천주산에서의 일이었나. 주루의 창가에서 내다본 악가의 신성. 가솔들 사이에서 고고히 돋보이던 악예린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악예린의 미모가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랬나요?”

“소하와 단휘 사형이랑 같이 있었는데, 얼굴은 보지도 않고 근맥이랑 기도만 보고 있다고 혼났습니다.”

“그건 백연답네요. 그래서 어땠어요?”


휘릭 돌며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악예린. 호기심이 짙게 묻어있는 얼굴이다.


“처음 봤을때의 저는.”

“육신 자체가 하나의 뇌전(雷電)이자 잘 벼려진 창(槍)이라 생각했습니다. 천하에서 몇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극공을 위해 조형되었다고.”

“그 정도였어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공격 절초에 한정해서는 예린이 유성보다 확고하게 위니까요.”

“그건......기쁘네요.”


미소지은 악예린이 손아귀에 쥔 짧은 창을 휘릭 돌렸다. 장창을 등에 진 여인의 시선이 사방을 날카롭게 살폈다.


어느새 마을의 초입이었다. 상행이 자주 오간것이 분명한 길 위로 간간히 사람들이 오가는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따로 출입을 경계하는 이들이 없었는데, 그것을 인지한 순간 백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긴 위험하군.’


보통의 마을이 이리 통행로를 자유로이 열어둔다면 곧 망한다.


여긴 아니었다. 그렇다는 소리가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누가 들어와도 제압할 수 있다는 소리.’


이곳 전체가 쩍 벌어진 맹호(猛虎)의 입 속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악예린도 그걸 의식하는지 손에 쥔 단창을 느슨하게 잡고는 마을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간혹 그들을 힐끗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백연은 신경쓰지 않았다. 강호 무림에서 병장기 몇개 들고다니는 무림인은 흔하다.


“어디로 가야 하려나요.”

“본단이 바로 여기에 있을 가능성은 높진 않습니다. 마을을 직접 관리하고 있다 해도......”


백연의 음성이 낮아졌다. 어느새 기막을 뻗어 주변의 소리를 차단한채였다.


“허나 날도 늦었는데 여기서 산속을 더 돌아다니며 천살문 본단을 찾긴 어렵겠지요. 마을 안에서 얻어낼 것은 얻어내고 가야 합니다.”

“그냥 물어볼까요? 그 표식도 있다 했으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백연. 손짓으로 기파를 흩어버리고는 성큼 걸어 근처의 사람에게 말을 건네었다. 가판에 앉아 조용히 무언가를 손질하고 있던 노인을 향해서였다.


“어르신, 지나가던 객이온데 하나 여쭙고 싶은것이 있습니다. 혹 잠시 말씀 괜찮겠습니까.”

“.....젊은이는 뉘신데 이런 벽지 산골에 왔소? 길 찾기도 어려운 곳을.”


백연은 자연스레 가판에 놓인 나무 조각 하나를 집어들며 말했다.


“와야할 만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이건 얼마입니까?”

“닷푼이오. 와야 했다? 보아하니 원한을 많이 쌓고 다니나 보구려.”

“여기 있습니다. 원한을 많이 쌓는다기보단, 아무래도 여러가지 일에 자주 엮이는 편이지요.”


기묘한 대화였다. 잠자코 듣고 있던 악예린이 어느 순간 단창을 한자루 더 꺼내들어 역수로 쥔 것이 느껴질 정도로.


그 사이 백연은 태연히 동전 다섯개를 꺼내어 노인에게 건네었다. 그에 노인이 코를 훌쩍이고는 중얼거렸다.


“예의가 바른 젊은이구려. 질문만 하는게 아니라 물건도 팔아주고.”

“마음에 들어서 산겁니다.”

“그래, 내 성의껏 답해드리다. 뭘 물으러 왔소?”

“천살문 본단이 어디입니까?”


백연이 생긋 웃으며 물었다. 노인은 백연을 올려다보지도 않고 조각칼을 놀리며 태연히 답했다.


“그건 말해주기 어렵겠소.”

“어째서입니까?”

“의뢰는 본단에서 직접 하는게 아니오. 살문에는 살문의 규칙이 있는데, 그를 따르지 않으면 설령 황상께서 직접 걸음해도 의뢰를 맡길 수 없소이다.”

“그럼 보통은 어디서 합니까?”

“저기 가보시오. 객잔주인이 받아줄거요.”


노인이 조각칼을 뻗어 한쪽을 손짓했다. 그 끝에 놓인 허름한 객잔을 슬쩍 바라본 백연이 볼을 긁적였다.


“객잔에서 의뢰를 하면 된다라......”


말끝을 흐린 소년이 난처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저기에서 천살문 팔대주에게 의뢰를 넣는것도 가능한겁니까?”

“......팔대주는 좀 더 일이 복잡하니 어렵겠소. 일단은 가서 물어보시구려.”

“조언은 감사하군요. 헌데 저희가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어르신께 의뢰를 넣으면 안됩니까?”


사각.


조각칼이 멈추었다. 지금껏 나무토막을 깎아내던 노인의 손이 멈추고 그의 시선이 느릿하게 올라왔다. 길다란 백색 눈썹 아래 주름진 눈매가 백연을 힐끗 응시하고는 깊게 가라앉는다.


“늙은이가 뭐라고. 천살문의 비호 아래 마을에 얹혀사는 조각쟁이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구려.”

“솔직히 말하자면 조각칼 파지법이 너무 살기가 짙습니다. 나무토막을 죽이실 생각도 아니실테고.”

“......언제부터 알았소?”


노인의 눈이 백연과 똑바로 마주쳤다. 어느새 두 사람의 주변에는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주변에 바삐 움직이던 사람들.


이제는 아니었다. 돌연 시간을 멈춰버리기라도 한 듯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선 사람들이다. 지금껏 민초인 양 거리를 활보하던 모든 이들이 일제히 자리에 굳은채로 백연을 천천히 돌아보는 광경.


기괴한 마을의 풍경 속에서 백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부터.”

“......암화 백연.”


중얼거린 노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 순간이었다.


한순간 시야가 번뜩이며 일그러졌다. 벼락처럼 아래에서부터 솟구치듯 튀어오른 노인의 일검(一劍)이 소년의 심장을 그대로 관통할 듯이 쏘아졌고.


쩌어어어엉!


굉음이 일었다.


다음 순간 백연과 노인의 사이에는 회색빛 단창이 흐린 예기를 흘리고 있었다. 찰나지간 쏘아진 단검을 완벽히 막아낸 악예린.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양손에 창을 쥐고 사방을 견제한다. 당황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는 노인을 보며 백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과거에 참월을 만났었다. 당신과 같은 대주의 일각이니 알겠지. 그리고 그에게서 이런 것을 받았는데.”


그리 말하며 품에서 비틀린 비도를 꺼내든다. 그것을 본 노인의 눈이 점차로 커졌다. 그런 노인을 응시하며 백연은 태연히 덧붙였다.


“용도는 잘 알겠지. 당장 천살문의 문주나 부문주를 만나고 싶다. 안내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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