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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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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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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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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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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야방(10)

DUMMY

※※※



어둑한 석 야장의 집 안.


무릎을 모으고 앉은 선아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꼬았다. 턱선에 닿은 짧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고요한 방 안. 몸의 한기가 풀리자 피곤이 몰려왔는지 꾸벅꾸벅 졸고 있는 석려려의 숨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울렸다.


지척을 울리는 굉음이 울리고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 즉시 시린 벼락을 두른 백연은 아이를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한달음에 사라졌다. 용형보의 속도는 아직 선아의 어설픈 화신풍으론 따라붙기 힘든 것이었다.


“속도 모르고.”


선아가 한숨을 탁 뱉었다. 문득 방 구석에 있는 거울이 시야 한켠에 들어왔다.


슬쩍 쳐다보자 그 안에 자리잡은 소녀의 얼굴이 보인다.


이전처럼 엉망은 아니지만, 여전히 턱 언저리에서 싹둑 잘려있는 머리카락과 짙은 적갈색 눈동자. 고양이처럼 휘어진 눈매. 그래도 곡선을 이루며 떨어지는 턱선 정도는 좀 봐줄만 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아이 정도로 밖에 보이질 않는 것이다.


“......머리를 길러야 하나.”


야장일은 항시 불을 다룬다. 길다란 머리칼을 유지하고 있다가는 끄트머리가 불타고 망가지기 십상이다. 그녀 정도의 단발이어도 자주 상하는데, 등허리까지 비단처럼 굽이치는 머리칼을 길렀다간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불보듯 뻔했다.


그랬기에 그녀는 야장 일을 시작한 이후 길다란 머리칼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딱히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분명 그랬는데.


“뇌룡의 머리칼이 그렇게 아름답다던데.”


중원제일미라고도 불리는 산동악가의 뇌룡. 선아는 그녀를 만나본 적이 없으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또 백연이 그녀를 만난적 있다는 사실도.


-뇌룡 악예린? 좋은 사람이지.

-그으래?

-뛰어난 무인이고.


선아가 캐물었을때 답해주던 백연의 짧은 감상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별다른 이야기가 덧붙여지지는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백연이 뇌룡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기준이 턱없이 높은 소년이 그렇게 대놓고 칭찬하는 인물은 드무니까.


“하지만 나보고도 최고의 야장이라고......”


문득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선아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이윽고 그녀의 생각은 다시 뇌룡의 외모로 돌아갔다.


“빛을 빨아들이는 비단같은 흑발이라고 했지.”


길다란 머리칼이 밤하늘을 녹여 담아낸 것처럼 아름답다고. 뇌룡을 묘사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때마다 꼭 빠지지 않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선아의 머릿속에서는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중원제일미라 불리는지, 그리고 그 머리칼이 얼마나 아름답길래 그런 표현을 하는지.


오히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다른 것이었다.


투명한 선을 타고 흐르는 밤하늘 같은 흑발. 평소에는 침착한 검은색이지만 안법을 일으켜 전투에 임하는 순간에는 자수정 같은 보랏빛으로 물드는 눈. 백도(白桃)를 빚어놓은 것 같은 뺨에 요요하게 뻗어있는 콧날과 백묘(白猫:흰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 중원제일미는 모르겠지만, 선아가 평생 본 사람중에는 가장 미려한 외양의 소년......


“그만, 그만!”


퍼뜩 정신을 차린 선아가 스스로의 볼을 두들겼다.


“요즘 왜 이러지.”


근래 들어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졌다. 아마 백연과 일행이 신강에 갔다 온 뒤부터였던 것 같은데.


살아생전 환골탈태라는 기적을 그녀의 눈으로 목도하게 될 줄은 몰랐었다. 이야기 속에서만 나오는 것인줄 알았는데. 그랬기에 환골탈태를 거치면 키가 커질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자신보다 눈높이가 부쩍 높아진 소년의 모습이 놀라웠더랬다. 한동안 머릿속에 강하게 남을 만큼.


“하아......”


한번 더 한숨을 내쉰 선아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짧은 머리칼을 대충 쓸어 넘긴 그녀가 멍하니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언제 오려나.”


옅은 걱정이 서린 목소리였다.


분명 백연의 실력은 그녀가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신강을 다녀온 소년의 무위는 이전과 비교해도 비약적으로 상승해 있었다. 태청신공과 용형보를 품은 그의 무위는 선아의 짧은 식견으로 보아도 압도적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백연을 압도할 정도의 고수가 쉬이 툭툭 튀어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더해 곁에 칠룡의 일각인 팽악까지 동행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많이 안좋아 보이던데. 괜찮을까......”


석려려의 절맥증을 완화시켜주려 상당한 시간을 쏟아부은 백연이다. 진기를 운용하는 중인지라 직접 손을 대어 체온을 재보지는 못했지만,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질 정도로 후끈한 열기를 내뿜던 백연.


팽악의 신호를 듣고 달려나가는 모습조차 그리 정상적이지 못했다.


선아 자신은 백연이 부탁한대로 석려려를 지키고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괜찮아.”


그때였다.


옅은 바람결이 선아의 귓가를 스쳤다.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연!”

“걱정해줘서 고맙네.”


어느새 문이 열려 있었다. 그 자리에 지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또렷했다. 달이 뜬 하늘을 등지고 선 백연의 몸에 상처가 없다는 것을 재빨리 확인한 선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다친덴 없지? 내상을 입었다거나......”

“멀쩡해.”


희미하게 웃는 소년. 그러나 직후 그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멀쩡하긴 무슨. 어이, 백선아. 그놈 좀 부축해줘라. 상태가 안좋아.”


자연스레 그녀의 도명(道名)을 입에 담는 팽악이었다. 언제부터 그리 친한 사이였다고. 그러나 선아는 당장 그런것을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


황급히 백연에게 달려간 그녀가 손을 뻗는 순간, 소년의 몸이 크게 기우뚱 움직였다. 아슬하게 두 팔로 백연을 받아낸 선아가 소년을 부축했다. 선아에게 반쯤 기댄채로 소년이 옅은 한숨을 뱉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팽악, 당신땜에 오해가......”

“오해는 뭔 오해. 당장 쓰러져 회복해야 할 것처럼 보이는 놈이.”

“좀 쉬어야 하는것 아니야? 눈좀 붙여봐. 내가 의원이라도 데려올게.”


그러나 걱정이 담긴 선아의 말에도 백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선 해결할게 있어.”


흐릿해지려는 정신을 재차 붙든 백연이 몸을 바로 일으켰다. 방 안에 새근새근 잠든 석려려의 모습을 확인한 그가 몸을 돌렸다.


그러자 문 바깥, 팽악의 앞에 선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자고 있군요. 여기에서 이야기 하시죠.”


백연이 말했다.


자연스레 방문 앞의 마루에 주저앉으면서였다.


“려려는 괜찮은겁니까?”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 섞여 있었지만, 이제 한층 침착해진 석 야장의 물음이었다.


“괜찮습니다. 편하게 자고 있지요. 들어가서 확인하고 오셔도 좋습니다.”

“려려에게 약을 먹여야 하는데, 혹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그 약이, 혹시 아이의 병증을 치료하기 위한 약입니까?”


백연이 석 야장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그에 석 야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빨리 먹여야 할 것인데......”

“아니요. 그건 먹이지 마십시오. 아이의 병세는 이미 살폈습니다. 제가 손을 써두었으니 한동안은 괜찮을겁니다.”

“대협께서 말입니까?”


놀란듯 되묻는 석 야장. 백연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그가 수긍한 듯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이는......조금 뒤에 보겠습니다.”


상태를 확인하겠다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백연의 뒤로 조용히 잠든 석려려의 모습이 언뜻 보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새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온 선아가 백연의 옆에 앉았다.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팔짱을 낀 팽악을 뒤에 두고, 앞으로는 곤륜의 소년과 소녀를 마주한 야장이 고민하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윽고 늙은 야장의 입에서 힘겹게 첫 마디 말이 흘러나왔다.


“대략 이년 전부터였습니다. 려려가 알 수 없는 병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


시작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나뿐인 손녀가 가을 무렵부터 묘하게 추위를 타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저 날씨 때문인줄로만 알았다. 본래 싫은 소리를 잘 하지 않던 아이가 춥다는 소리를 입에 담았을때, 석일은 깜짝 놀랐다.


솜옷이 부족한가 해서 옷을 가득 사주었고, 집안의 공기를 여름으로 만들기라도 하려는듯 불을 잔뜩 때주었다.


오랜 기간 철야방의 야장으로써 살아온 그의 돈이라면 충분했다. 아낌없이 추위를 막아줄 것을 구비해주는 것으로 될것이라 여겼다.


“헌데 아니더군요.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면 돈이 썩어나냐고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따뜻한 집과, 한겨울에도 더워서 땀이 날 만큼 두터운 옷과 이불을 사주어도 려려는 춥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서야 깨달았다. 춥다는 말을 려려가 점차 줄여나갔지만 석일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손녀가 그를 생각해서 추위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말을 아끼고 있다는 것이.


평범한 증세가 아니었다. 그제서야 병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석일은 백방으로 유명한 의원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거쳐간 의원이 수십, 수백에 달합니다. 각기 다른 진단을 내리더군요.”


한기가 들었다, 아주 지독한 고뿔에 걸린 것이다부터 해서 피에 문제가 있으니 이러 이러한 약을 처방해야 한다는 사람들까지. 몸이 차다고 느낄만한 병증이란 병증은 전부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 어떤 의원도 명쾌하게 려려의 증세를 진단해주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좋은 약이란 약은 이것저것 다 지어다 먹였음에도 병세는 점점 심해져만 갔다. 어느새부턴가 려려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갔다. 손녀가 아픔을 참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무력감은 엄청났다.


돈을 쏟아붓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려려의 병을 낫게 해줄 수만 있다면.


그러던 어느 날.


“한 노도사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석일 자신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아보이는 노도사는 길다란 수염을 기르고 부드러운 웃음을 매단 사람이었다. 하얗게 멀어있는 두 눈이 인상적이던 사람. 본래는 뛰어난 야장을 찾다가 석일을 찾아왔다는 노인은, 그를 처음 보자마자 대뜸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야장의 몸에 한기가 묻었소이다. 주변에 환자가 있소?


“그 말을 듣자마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분께 아이를 보여드렸지요.”

“......맹인 노도사라.”


백연이 중얼거렸다. 그가 힐끗 팽악을 보았지만, 그도 전혀 아는것이 없는 눈치였다.


‘그만큼 특징적인 사람이라면 눈에 띌텐데.’


생각나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석 야장이 말하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예. 그분께서 려려를 한번 보시더니 바로 어떤 병세인지 짚어내시더군요.”


음기가 차는 절맥증에 걸렸다고.


허나 병증의 이름을 알았다고 해도 딱히 방법이 없었다. 절맥증을 치료할만큼 뛰어난 의원은 그리 많지 않다. 하물며 그 정도 명성과 실력을 지닌 이들이 그리 한가롭지도 않다.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간다 해도 일년씩은 기다려야 진찰을 받을 수 있는 명의(名醫)들.


그러나 천운으로 그 노도사는 인맥이 넓었다. 막대한 돈이 들테지만, 려려의 병세를 치료해줄 수 있는 의원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처음 약을 지어와 려려에게 먹였을때 석일은 구원을 얻었다.


“증세가 완화된겁니다. 나날이 병세가 심해져 매일같이 숨죽여 앓던 아이가 조금이나마 편해졌습니다.”

“......정말로 나은겁니까?”


석일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이의 상태는 좋아졌으나 바로 이전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절맥증은 그런 병증이라 했다. 오랜기간 약을 먹이며 천천히 상태를 호전시켜야 한다고.


“그래서 주기적으로 계속해 의원을 찾아갔습니다. 약은 만든 즉시 먹여야 약효가 돈다고 해서 미리 받아놓을 수도 없었지요.”

“......제가.”


백연이 입을 열었다. 석 야장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불안감이 서린 표정. 그러나 백연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의원은 아니지만, 절맥증에 대해서 모르지는 않습니다. 사실 무림인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지요. 본디 평범한 약으로 치료되는 병증이 아닙니다. 음양의 조화가 깨져 생기는 병인데, 상극의 기운을 품은 영약등을 먹이고 진기도인을 통해 체내 혈맥의 단절을 복구시키는 것이 가장 상책입니다.”

“그, 그런.”

“려려에게 먹인 약이 무엇인지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석 야장이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었다. 그것을 받아든 팽악이 백연을 향해 주머니를 건넸다.


주머니를 풀어헤치자 나온 것은 단단하게 뭉친 둥근 덩어리였다. 손바닥에 쏙 들어올만한 둥근 형태였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약향만이 풍겼다.


눈으로만 보아서는 무엇이 포함된지 알기 힘들었다. 잠시 그것을 가늠하던 백연이 끄트머리를 툭 잘라내어 그대로 삼켰다. 곁에서 걱정스레 바라보던 선아가 말릴 틈도 없었다.


“야......!”


화악.


체내에 퍼져나가는 기운이 있었다. 한껏 올라갔던 그의 체온이 조금이나마 떨어져 내렸다. 서늘한 기운이 혈도에 파고들려는 것을 느낀 백연이 미간을 좁혔다.


“......이것. 음기를 품은 약재와 독을 섞어 만든 것이군요. 독이라고 부르기엔 정순한데, 약이라 하기엔 거칩니다.”

“허. 그딴걸 약이라고 잘도 받아왔군.”

“구양절맥 같은 양기의 절맥증을 앓고 있다면 임시방편으로 약은 될 수 있겠습니다만. 려려가 앓고 있는것은 구음절맥입니다. 석 야장.”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석 야장을 백연이 쳐다보았다.


“속으셨군요.”


이런 것을 계속해서 먹여왔다면 석려려의 절맥증은 점점 심해질 수 밖에 없다.


‘너무 어린데 병세가 심하다 했더니.’


구음절맥은 본디 단기간에 병세가 빠르게 심화되는 병증이 아니다. 그럼에도 석려려의 상태는 심각했다. 백연 자신이 혈도를 짚어보지도 않고 그 상태를 인지했을 정도니까. 나이에 비해 너무 병세가 위중했다.


그 이유가 여기 있었던 것이다.


“하, 하지만 분명 증세가 완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해지지 않았습니까? 당장 오늘 제가 보았을때는 며칠안에 급사해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

“일시적으로 몸에 들어온 기운을 받아내기 위해 내기가 움직여 상태가 호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절맥증이 심화될 뿐입니다.”


의도적이다. 구음절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런 것을 먹이다니. 절맥증을 심화시켜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몰라도, 악랄한 수법이었다.


석 야장은 충격을 받은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고개를 푹 숙인 노인이 지친 음성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대가는 엄청났습니다. 제 벌이가 작다 말할 수는 없음에도 감당이 안되더군요. 다른 이에게 손을 벌리기도 하고, 집을 팔고 작은곳으로 옮기면서까지 돈을 마련했습니다.”


그만큼 절박했다. 그렇게 하다하다 결국 돈이 다 떨어질 무렵.


노도사가 다시 나타났다.


“돈은 필요 없으니 가벼운 일 하나만 부탁하고자 한다 했습니다. 그러면 약을 주겠다고.”


무당파의 수련용 무구 납품일자.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부탁하는 대로 무기에 손을 조금만 대어주면 된다고 했다.


그것이 잘못된 일인지 알면서도 석일은 그만둘 수 없었다. 마지막 남은 야장의 자존심은 손녀를 위한다는 명목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합리화를 한 면도 있었지요. 아무도 다치는 일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저 무기의 내에 자신들이 건네준 도안대로 균열을 만들면 된다고......”

“아무도 다치는 일이 아니다? 웃기는군.”


팽악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적잖은 분노가 서린 음성이었다.


“칠룡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어놓고 뭐라?”

“예? 하지만......”

“그 무기가 부서졌다. 초식을 펼치던 와중에 산산조각 나 자칫하면 목이 꿰뚫릴뻔 했지.”

“부서졌다 말입니까?”


석 야장이 휘둥그레 눈을 떴다. 그 광경을 보며 백연은 미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팽악.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으르렁대는 팽악의 말을 끊은 백연이 석 야장을 응시했다.


“무기를 일부러 약하게 만든것이 아닙니까?”

“아, 아닙니다! 강도는 최대한 본래대로 만들려......그러고 보니 균열 때문에 강도가 조금 약해졌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맹세코 그런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럼 그 균열의 용도는 뭡니까?”

“그건 저도 모릅니다. 시키는 대로 만든 것인지라......”


백연이 선아를 돌아보았다.


무기를 약하게 만들려는 것이 본래 의도가 아니라 했다. 그저 변명을 주워섬기는 것일수도 있었지만, 백연은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확인해봐야 할 필요가 있는 내용이었다.


백연의 시선을 알아챈듯 선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조사해볼게.”

“부탁해.”


뒤이어 석 야장이 이야기를 천천히 마무리지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약을 받아 려려에게 계속해 먹였다고. 오늘도 약을 받아올 날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그를 추적하는 흑의인들이 있었다고.


말을 마칠때쯤 석 야장은 완전히 쓰러질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멓게 죽어가는 안색으로 바닥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석 야장이 흐릿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협, 려려에겐 죄가 없습니다. 제발......”

“그건......”


백연이 답하려던 그때였다.


끼이익.


굳게 닫혀있던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언제 일어났는지 모를 석려려가 눈을 비비며 걸어나왔다.


“할아버지?”


한층 맑아진 목소리였다. 백연이 처음 보았을때의 그 곧 꺼져버릴 것 같던 음성과는 천양지차였다. 그것을 알아본 것은 석 야장도 마찬가지였다.


“려려야! 괜찮으냐?”

“......응. 오늘은 늦었네. 할아버지.”


자연스레 걸어가 석 야장의 품에 안긴다. 석려려를 안은 석 야장의 표정이 천천히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휘둥그레 눈을 뜬 그가 백연을 쳐다보았다.


“정말로 대협께서?”

“절맥증을 치료해줄 사람을 찾아볼 생각인데, 이미 염두에 둔 사람이 있습니다. 그자를 만날때까진 버틸만 할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석 야장의 주름진 눈매를 타고 물이 흘러내렸다. 잠시 노인을 응시한 백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에겐 죄가 없지요. 하지만 야장님은 아닙니다.”

“......예.”

“물론 제가 독단적으로 처분을 내릴수는 없으니, 그 부분은 내일 아침 철야방에 가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우선은......”


백연이 석 야장과 석려려를 쳐다보았다. 석려려의 등을 연신 쓰다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팽악도 아무말 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는 모습이었다.


“밤이 깊었으니 주무십시오. 오늘은 아이도 편히 잠들 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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