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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談 salon

오늘도 당신의 세계는 안전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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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슈M
작품등록일 :
2015.03.19 21:28
최근연재일 :
2015.04.14 21:49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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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글자수 :
69,382

작성
15.04.14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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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붕괴의 시작 (5)

DUMMY

10.





“내가 싸워야 한다고요? 잠깐만, 아저씨. 그런 말은 안했잖아요.”


한껏 일그러졌던 표정은 원래의 평정을 되찾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싸우라니. 도대체 누구와? 자신은 단 며칠 만에 살아 온 인생 전부를 통 틀어도 다신 없을 온갖 이상한 일에 휘말리고 있었으며, 단언컨대 대한민국 고교생으로서 겪어야 할 일은 아니었다.


미적분을 풀어야 하는 것도, 안동별곡 해석을 외우는 일과도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차라리 처용가의 원문을 외우겠어. 우주는 다시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에게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해 보면 너무 당연한 거잖아. 그런데 눈앞의 우아함으로 중무장한, 이 음울한 사십대 아저씨는 무슨 배짱으로 앞길 창창한 소녀의 인생에 먹구름을 통째로 들이 붓는가? 싸우라고요? 그건 계약서에 없던 내용인데? 우주는 차라리 계약서라도 있었으면 싶었다. 요즘 법, 잘 만들어져 있잖아. 노동청에 확 신고해 버릴라.


“그래서 지금 말하고 있잖나.”

“이 아저씨 좀 보시게. 사람 쳐 놓고도 ‘곧 자네를 칠 예정이었네’ 하고 그냥 넘어갈 거예요? 그렇게 중요한 내용을 왜 지금 말해요?”


이 심각한 와중에도 무영은 우주가 얼굴을 한껏 찌푸리고는 되도 않는 낮은 목소리를 내며 따라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기 만을 빌었다.


“말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뿐이다. 너도 알텐데? 그래서 지금 설명하려고 하는 거고. 한국의 여자들은 다 너같이 성미가 급한가?”

“아저씨. 그거 되게 인종 차별, 성차별 적인 발언인 건 알고 있어요?”

“아, 실례했군.”

“웬일로 바로 인정?”

“대다수의 한국 여자들에게.”


으악! 우주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속으로는 이미 백 번, 천 번도 더 지른 뒤였다.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하지만 그녀 역시 이제 잘 알고 있었다. 무영은 인간이 아니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악마의 아이’ 는 네가 싸워야 할 상대다.”

“흐흥, 그래요? 그거 참 흥미로운 소식이네요. 전투용 갑옷은 주죠?”

“아니.”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포션은 주나?”

“싸우는 건 기사들이다. 너는 목숨 보전만 하면 돼.”


이미 비뚤어질대로 비뚤어져 이리 흥, 저리 핏 하는 우주에게 무영은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도대체가 안심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다행히 보호구를 쓰고 링 위로 올라가야하는 참사는 없을 거란 말에 안심을 하는 동시에 ‘목숨’ 이란 단어엔 아무리 우주라도 움찔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한다고? 하루 아침에 사람을 전혀 모를 곳으로 끌고 온 것으로도 모자라?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개 고등학생에 불과한 자신이, 이 이상 뭘 또 해야 된단 말인가.


“신이 너의 영혼을 빚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악마 역시 자신의 아이를 만들었다. 천사의 아이가 신의 대리인이라면, 악마의 아이는 악마의 인도자지. 종말의 날, 악마의 아이 또한 세계를 심판한다. 정확히는 죄인과 죄인이 아닌 자를. 그리고 죄인들을 모두 지옥으로 데리고 내려가는 거지.”


“그럼 좋은 거 아녜요? 나쁜 놈들 지옥으로 끌고 간다며.”


“악마가 죄인들을 데리고 간다는 것은 종말의 날, 원래대로라면 세계와 함께 소멸해야 할 그들을 집으로 인도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 종말 후, 세계는 리셋(re-set)되고, 악마는 다시 죄인들을 세계에 풀어놓지.”


욕심, 번뇌, 이기심, 집착, 욕망, 탐욕….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것들. 세계는 생각 이상으로 순정(純情)해서, 죄로 인해 탁해진 곳에선 숨을 쉴 수 없었다. 천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종말의 날은 일종의 정화의 의식이며, 세계가 과연 인간들을 데리고 조금 더, 버틸 수 있는 지. 다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지를 확인하는 심판의 장.


종말이 결정되면 악마의 아이는 죄인들을 데리고 지옥 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다시 세계가 열릴 날을 기다린다. 그리하여 인간은 영원히 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 한다…….




“악마가 천상의 일에 관여할 수 없듯, 신 또한 지옥의 구덩이까진 내려갈 수 없어. 그것이 그들의 규율이다. 그들은 천지 창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존재해왔고, 대립해 왔으며, 동시에 친구이기도 하니까.”

“소설로 쓰면 좋을 소재네요. 신과 악마가 친구라니.”

“내 말 중 어떤 것도 가볍게 들어선 안 돼.”

“저 지금 진지한데요? 궁서체로 받아 적고 있는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주에게는 여전히 뜬구름 잡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꽤 재밌는 판타지 소설 한 편을 대신 읽어주는 기분이었다. 너무 강압적이라는 점이 문제였으나 일단 듣기 시작하면 썩 지루하진 않았다. 친구들한테 말해주면 깜짝 놀라겠지? 물론 듣는다 해서 믿어줄 사람이 있을 지는 의문이지만.


“……악마의 아이가 너를 공격할 것이다. 네가 죽으면, 세계는 신의 노여움을 사 그대로 종말을 맞이하게 될 테니까. 사실 악마는 종말의 날만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불행인지 다행이지 세계는 언제나 신의 편이었고, 인간은 늘 악마보단 신을 믿었으니까. 악마는 언제나 ‘다음 기회’ 를 노리고 있다. 늘 새로운 세상을 꿈꾸지. 자신의 힘을 세계에 떨치게 될 날만을.”


가만히 듣고 있던 우주의 입이 벌어졌다. 정말 이 아저씨가 뭐라고 하는 지 1도 모르겠다. 아니, 모르고 싶었다.


“내가 죽으면 이 세계가 끝난다고요?”

“그래.”

“그럼 자살해도 될까요?”

“김 우주.”


농담이라기엔 정도가 지나쳤다. 하지만 아주 농담인 것도 아니었다. 우주는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무영과 팽팽한 시선을 마주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무리 특별한 아이라고 해도 자신과 정면으로 눈빛을 마주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무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 숨 쉬는 것만으로도 피곤하다는 고3이에요. 알아요?”

“……….”

“죽으면 수능은 안 보겠네. 아저씨, 아저씨가 보기엔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다 뻥 같고 그냥 하는 말 같죠.”


그깟 시험이 뭐 대수라고. 그죠? 사실 수능 시험으로 인생을 좌지우지 할 생각은 평소에도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공부를 그만큼 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200일 즈음 남은 수능 시험을 걱정하는 게, 이 세계의 평안과 미래를 걱정하는 일 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우주는 현실을 살아가던 평범한 소녀에 불과했다. 그런데 갑자기 게임 속으로 들어가서 싸우고, 미션을 클리어하고, 스테이지를 누비고 다니라니. 우주 역시 만만찮게 머리가 지끈거렸다.


“네 어깨에 중대한 책임이 걸려있다.”

“누구 맘대로요?”

“너 뿐만 아니라 네 가족, 친구. 다 사라져 버린다는 의미야.”

“…….”


이 아저씨는 꼭 생각 안 하고 싶은 것만 골라 건드리더라? 우주는 거기까지 생각 못 할 정도로 멍청한 계집애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고 나도 없어지겠지.”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으로 향했다. 노크도 없이 들어 온 태인이었다. 무영의 눈살이 찌푸려졌음은 두 말 할 것 없었다. 태인은 노크의 필요성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곤 했다. 확실히 노크의 부재는 젠틀맨의 기본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행위였다.


“태인. 내가 분명히 노크를 하라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태인은 치마인지 바지인지 알 수 없는 옷을 치렁치렁 늘어뜨리며 사뿐사뿐 걸어왔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중성적인 외모 덕에 빨간 타탄 무늬의 랩 스커트가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는 사실이 배알이 꼴릴 지경이었다. 태인은 두 개가 나란히 박힌 피어스를 만지작 거리며 무영과 우주, 그 중간 즈음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앉았다. 안 그래도 이곳에 오고 난 뒤부터 내내 태인의 행방이 궁금했던 우주에게는 그의 등장은 가뭄에 단 비처럼 반갑기 그지 없었다.


“영감, 영감은 요즘 여자애들을 몰라도 너무 몰라.”

“……….”

“우리 무영 어르신께선 레이디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시나?”


흐흥. 태인은 콧소리와 함께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곤 다시 우주를 바라봤다. 우주는 그만 심장이 일시 정지 상태로 돌입하는 것을 몸소 느끼며 속으로 가슴을 움켜쥐었다. 윽, 너무 예뻐. 오빠…….


“둘 다 왜 이렇게 분위기 살벌해? 우리끼린 오순도순 해야지.”

“지금 막 그러려던 참이다.”

“도대체 어딜 봐서? 영감, 아무리 어려도 여자라고.”


그렇지? 태인은 우주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아무 것도 바른 게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술은 매끄럽게 빛났다. 우주는 태인이 웃는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엄마, 우리 오빠가 드디어 모니터 밖으로 나왔어…….


“설명은 들었지? 그럼 지금 무슨 상황인지도 대충 알 거야. 그렇지?”

“네…….”


아무렴요. 몰라도 아는 거죠. 알고 말고요. 우주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넌 어떻게든 살아야 해. 그리고 그건 말이지, 미안하게도 너의 의지와도 별로 상관없는 문제야.”

“……오빠.”

“미안해. 이런 말을 해서. 하지만 어쩔 수 없어. 특별하다는 건, 그런 거거든. 네가 원해서 특별해 진 것이 아닌 것처럼. 네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너는 살아남아야 해.”


무영은 가만히 태인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젠체를 하던 태인이 도대체 얼마나 우주를 ‘잘 다루는지’ 가 궁금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들을수록 그가 하는 말들이 제법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얼굴로 유혹하겠 거려니 생각했던 무영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그러나 무영의 얼굴에는 짤막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다른 사람이 봤다면 기겁을 했을 미소지만 말이다.


“…지금 내 말, 이해할 수 있겠어?”

“조금…은요.”


솔직히 말할까? 사실 세계의 종말이고 나발이고 눈앞에 태인이 생각 이상으로 가까워 우주의 가슴은 터져 나가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오빠 얼굴, 오빠 목소리, 오빠 미소가 제 심장을 한꺼번에 폭행하고 있단 사실을 혹시 알고 계시나요?


철딱서니 없이 보일 진 몰라도 어찌하랴. 세계의 종말은 아직 100일 가까이 남아있었다. 우주는 당장 자신의 종말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드물게 홍조가 짙어진 얼굴이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무영의 눈에는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널 지켜줄 테니까.”



오, 주여……. 우주는 속으로 신음하며 평생 믿어본 적 없던 신을 찾았다.


“오, 오빠가, 그,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저 한 번, 해 볼게요.”


도대체 뭘? 무영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위로 솟았다. 살아남아 보겠다는 뜻인가? 아니면 전투용 장비를 주면 그것으로 무장한 채 던전으로라도 뛰어들겠다는 뜻인가? 아주 조금이지만 무영은 이 상황이 고까웠다. 자신에겐 손톱을 바짝 세운 채 아득바득 달려들던 저 꼬맹이가 마찬가지로 제 눈에는 꼬맹이나 다름없는, 태인의 앞에선 수줍은 봄 처녀 코스프레를 하며 몸을 비비 꼬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쨌거나 무영에게는, 그리고 이 세계에게도 우주의 이해는 필수적이었다. 내일부터는 천사의 아이로서의 자각과, 그녀의 입장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하기 위해 두 시간씩 수업을 할 계획이다. 무영이 직접 가르칠 것이므로 만만찮은 시간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 미리 구워삶아 두는 편이 훗날을 위해서라도 훨씬 더 이로웠다. 누구에게든 말이다.


“그래, 고마워. 너라면 그렇게 대답해 줄줄 알았어.”


태인은 눈을 빛내며 웃었다. 찰나지만 반짝거리는 빛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상대를 홀리는 ‘능력’ 을 쓰는 것이다. 역시 여우같은 놈이라니까. 번지르르한 말은 죄다 해 놓고 마지막까지 확실히 쐐기를 박는다. 무영은 지그시 그를 바라본 채 였다. 하지만 별로 소용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천사의 아이에게는 그의 능력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태인 뿐만 아니라 다른 누구들의 힘도.



“그리고 이건 너한테만 알려주는 건데….”


무엇보다도 굳이 그런 힘 따위 쓰지 않아도.





“나, 6월 27일에 콘서트 열려.”


우주는 충분히 태인에게 빠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막, 이 평범한 19세 소녀에게는, 곧 죽어도 세계의 종말을 구해내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작가의말

늦었습니다. (머리를 박는다) 다음 편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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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붕괴의 시작 (2) 15.03.31 52 2 15쪽
7 붕괴의 시작 (1) 15.03.30 47 0 15쪽
6 세계 종말 D-99 (5) 15.03.28 57 0 14쪽
5 세계 종말 D-99 (4) 15.03.26 86 0 13쪽
4 세계 종말 D-99 (3) 15.03.23 77 1 14쪽
3 세계 종말 D-99 (2) 15.03.21 59 1 13쪽
2 세계 종말 D-99 (1) +1 15.03.20 84 1 15쪽
1 오늘도 당신의 세계는 안전합니까? _prologue +2 15.03.19 315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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